그 친구는 여고 동창생으로 그때 만해도 읍내에서 잘 사는 집의 딸이었다. 어느 땐가는 엄마가 김지미하고 친구여서 그애네 집에 놀러 오다가 읍내 본정통에서 사람들이 차에 탄 김지미를 보고 몰려드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그냥 돌아 갔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소문난 부잣집이었다. 그렇게 부잣집 딸이 어쩌다 이웃 남고생과 눈이 맞아서 퇴학당하고 일찍 아이들을 낳고 살고 있는 어떻게 보면 좀 기구한 삶을 살고 있는 그런 친구이다. 그 남고생은 시장 입구에서 사과장수하는 아줌마의 아들이었으니 그 신산한 삶을 알만하지 않는가!
그래도 그 친구는 그 남자하고 4남매를 낳으며 잘 살아 왔다. 우리만 해도 좀 고전인지라 지금 아이들처럼 쉽게 이혼을 하지 못 하지만 그녀는 참 진득하게도 잘 살아 왔다. 한참 때는 읍내에서 친구들을 만나도 아는 척을 하지 않더니 사십이 넘은 어느 날인가부터 동창회에 참석하기 시작하며
“ 야! 잘 나나 못 나나 밥 세끼 먹는 건 다 똑 같더라!” 했고 우리도 그녀를 쌍손을 들어 환영했다.
동창 중에 첫 혼사라 내 마음도 설레었다. 특히 요즘은 다니는 것도 서로 부조라 혼삿집이나 초상집엔 다녀야 한다. 우리 집 혼삿 날 예식장에 사람이 별로 없이 썰렁하면 그것도 인심 잃은 것이 되어서 보기 좋지 않을 것이다.
아침부터 옷장을 뒤져보며 부산을 떨었다. 이제 초봄이라 봄옷이 익숙하지 않아서 이것저것 꺼내어 본다. 그래도 작년에 산 하늘색 쓰리피스가 가장 나은 것 같다. 겨우내 오버코트와 같이 들었던 핸드백이 너무 커서 마음에 안 들지만 다른 것이 없으니 할 수 없이 들고 나왔다. 봉급을 타면 봄옷에 맞는 새 핸드백을 사야겠다.
읍내에서 아이들과 만나서 k면으로 갔다. 신랑의 고향이 k면이라 거기에서 하는 것 같았다. 시장 한 쪽에 있는 예식장은 하필이면 장날이라 차 댈 곳도 없고 얼마나 복잡한지 간신히 들어가서 친구들과 예식장에 올라가니 신부엄마는 벌써 입장을 했고 노랗고 긴 머리를 뒤로 말끔히 묶은 신랑이 입장하고 있었다. 신랑이 미용사여서 그렇게 특이한 머리를 한 것 같았지만 온통 시골 사람들인 하객들 사이에서 “ 저 사람이 남자여, 여자여!” 하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골에서 노랑 개꼬랑지 머리 신랑이라니! 얼마나 큰 놀라움이겠는가!
아직 식이 끝나지 않았지만 우리는 연회장으로 내려왔다. k면의 사람들이 모두 온 것처럼 식당은 k면 사람들로 넘쳐났다. 그 중에 읍내 사람인 우리들의 옷차림이 귀부인 같이 돋보여서 좋았다. 신부 엄마 친구들이 빛나면 신부 엄마도 빛나는 거니깐......
잔치 음식은 너무 맛이 있었다. 우리 고장의 잔치 음식이 잘 차리기로 소문이 나 있지만 친구가 뷔페 음식을 하고 솜씨도 있으니 최고로 맛을 내었으리라! 원래 미인인 친구는 한복으로 성장을 하고 있으니 더욱 아름다웠다. 그 애가 여고 시절엔 정말 예뻤었다. 이목구비가 뚜렸하고 정말 황신혜 같았다. 그러나 살이 찌는 것이 그애 집의 내력인 듯 친정 식구들이 다 뚱뚱하니 그애가 옛날 황신혜 같이 날씬하고 예뻤다는 것을 우리 아니고는 누가 믿으랴! 좀 건달기가 있어 보이는 그의 남편도 그날은 믿음직한 신부 아버지로 보였다.
예식장을 나와서 시장으로 갔더니 두릅, 고추나물등, 산나물들이 많이 나와 있다. 나는 특히 봄의 산나물을 좋아해서 봄이면 나물을 많이 사는 편인데 올해는 시장에 갈 새가 별로 없어서 산나물을 많이 못 샀는데 참 잘 됐다. 시골 아줌마들은 “내가 직접 산에서 딴거유” 하면서 인심 좋게 많이 집어 준다.
모처럼 일요일에 만나서 시간도 있어서 근처 시골에서 카페하는 동창네 가서 차를 마시기로 하엿다. 그 애는 서울에서 살다가 IMF 후 시골로 와서 멋진 통나무 집을 짓고 카페를 하는 친구였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은 서로 이름을 확인하고 “ 그래, 맞아, 너 고1때 4반이었지?‘ 확인하느라 분주했다.
우리는 한쪽 룸에 자리를 잡고 앉아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래, 그래, 너 그때 공부 잘했어”
“ 지금 고백하지만 너네 집에 갔다 와서 나 이혼 할 뻔 했어, 새 집 지었다고 너네 집들이 갔다 오니 월 셋방에서 연탄 갈아야 하는 내 신세가 하두 불쌍해서 남편한테 바가지 긁고 난리 폈어” 지금은 지도소장의 부인이 되어 안락한 삶을 사는 친구가 말한다.
“ 그래, 그래, 우리도 그때 어려웠을 때인데 쟤네 집에 갔다 와서 나도 싸웠어”
부잣집에 시집가서 처음부터 잘 사는 친구에게 화살이 돌아간다. 이젠 별로 부끄러울 것도 속상할 것도 없는데 그때는 왜 그리 어려웠는지, 그래서 그런지 삼십대에는 한 지역에 살아도 동창회를 하지 못했다. 그러더니 사십이 넘으니까 슬슬 다시 모이게 되었다.
“ 얘, 너도 이제 돈 벌 궁리 그만하고 즐기고 재혼해라”
일찍 혼자된 친구한테 하는 말이다.
“ 네 결혼식때 나도 갔었는데 그 잘난 신랑이 왜 일찍 가서 너를 이렇게 어렵게 만든다니? , 아들래미만 바라봐야 소용없다, 좋은 사람 찾아서 재혼해‘
“ 얘, 우리 딸이 노랑 개꼬랑지 머리한 남자 데리고 와서 결혼 한다고 하면 어떡하니?”
아까 말은 못했지만 신랑머리보고 충격 받은 애가 얘기한다.
“ 그래, 우리 결혼할 때 친구 결혼식장에 가서 저런 키 작은 남자한테는 시집 안 가겠다고 배짱 좋게 얘기하다가 막상 내 결혼날이 가까워 오자 못 생긴 우리 신랑보고 고년들이 얼마나 말이 많을까 걱정되더니 이제 딱 이십년이 지나자 저런 남자한텐 우리 딸 안 보내겠다고 말하게 되다니 세월이 참 빠르다” 하면서 웃어댄다.
꿈 많은 여고때 만났던 친구들이 이젠 중년의 부인이 되어 애들 혼사는 어떻고 재혼을 해야 하느니 하는 얘기를 하다니 지금 여고생들이 그런 날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이나 할까?
“ 나는 전문직으로 똑똑하게 사는 여자가 참 부러워! 다음에 태어난다면 그렇게 내 일을 갖고 살고 싶어”
부잣집 마나님이 하는 얘기이고
‘ 나는 포목상을 하고 싶었어, 예쁜 한복 차려 입고 사람들한테 옷감 파는게 그렇게 좋아 보였어“ 지도소장 부인의 말이고
“ 나는 그냥 살림이나 하며 남편 뒷바라지나 하고 그렇게 살고 싶었는데........‘ 미용실 원장이 말한다'
“ 너는 어떻게 살고 싶었니?” 묻는 말에
“ 글쎄, 내 꿈은 뭐였더라, 전혜린처럼 짤즈부르크 슈바벵 대학 거리를 머플러를 쓰고 걷고 싶고 학자가 되어 외국대학에 논문 발표하고 그렇게 살고 싶었는데, 이렇게 시골에서 남편과 애들이랑 지지고 볶고 살고 있다” 며 각자 여고 적 꿈을 얘기하며 상념에 젖는다.
그래도 이상한 것은 하나도 자기가 살아온 길에 대하여 후회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 생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그런 나이가 된 것인가 보다.
오랜만에 동창들과 만나 수다를 떨은 날이었다. 카페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밭둑에 맑은 아지랭이가 모락모락 올라간다. 마치 젊은 날의 우리의 꿈이 하늘 높이 올라 가듯이........
아! 수필 이지만 참 감칠맛이 났습니다.특히 여인의 삶에 대한 얘기라서 많은 공감이 갔습니다.가슴에 담아둔 삶에대한 얘기를 잔잔한 수다로 풀어 주시니,저도 그 까페에서 한 명의 친구로 제 얘기를 하고 있는 듯 하네요.재미 있었습니다.노랑 쥐꼬리는 참 개성적이긴 하나,제 딸 아이의 신랑감 이라면,반대하고 싶네요.
첫댓글 친구라는 것이 참 부담이 없지만 사실은 자신이 어느 정도의 그릇을 마련하지 못하면 함께 어울리려 하지도 않는 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특히 남편의 지위가 자신의 그것까지 연장된다고 하더군요. 접시가 깨지는 소리가 나고있습니다
아! 수필 이지만 참 감칠맛이 났습니다.특히 여인의 삶에 대한 얘기라서 많은 공감이 갔습니다.가슴에 담아둔 삶에대한 얘기를 잔잔한 수다로 풀어 주시니,저도 그 까페에서 한 명의 친구로 제 얘기를 하고 있는 듯 하네요.재미 있었습니다.노랑 쥐꼬리는 참 개성적이긴 하나,제 딸 아이의 신랑감 이라면,반대하고 싶네요.
저는 신랑한테 꽁지머리 하라고 부추긴답니다. 그 인상에 어울릴 것 같아서... 오랜 친구들과의 만남과 부담없는 수다, 참 부럽습니다. 나는 언제 그런 재미 누리고 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