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조께서 말한 돈교법문(頓敎法門)은 깨달음의 요체인 무상(無相) 무주(無住) 무념(無念)이다. 이는 금강경의 키워드이기도 하다. 이 법문을 허접하게 여기지 말고 모여 궁구하고 널리 펴라고 부촉(付囑)하신다. 이 부촉은 돈교법문에 의지해 동견동행(同見同行)하며 菩提(깨달음)를 구함에 있어 물러서지 말 것을 당부하신다. 무상송(無相頌)으로 멸죄송(滅罪頌)을 읊으니 본래 罪라는 것이 실체가 없는 無相인 것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참회라고 말한다. 예로써 마치 무상을 깨치지 못하고 복을 빌며 도를 닦는다고 헛짓 하는 것이나 보시를 끝 없이 많이 해도 삼독이 여전히 남는 것과 같다. 아무리 눈물 콧물 흘리며 참회의 백팔배를 하고 삼천배를 해도 죄즉비죄 시명죄(罪卽非罪 是名罪)요,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인 것을 깨닫지 못하면 여전히 그 罪에 갖혀 있게 된다는 것이다. 죄는 죄가아니고 다만 이름이 죄일 뿐으로 自性이 없어 조건 따라 마음에서 일어나는 허망한 생각일 뿐이라는 죄의 본질을 깨달으면 그 것이 진정한 참회라는 것이다.
죄(罪)를 불교에서는 無相한 業(카르마)으로 보고 기독교는 화살이 목표에서 빗나간 것을 말한다. 죄를 규정하는 것은 시대적으로 지역적으로 상대적 의미이다. 예로써 식인종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사람을 먹거리로 알기 때문에 그 사회에서는 '살인'이라는 죄가 아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도 내가 속한 사회의 약속으로서의 죄라는 의미의 한계 속에서 쓴다.
기독교에서는 보통 죄는 죄 지은 사람에게 든지 하나님께 든지 죄를 용서 받아야 죄가 없어 진다고 보며 용서 한 사람이 그 죄를 완전히 잊어야 완전히 용서 된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베드로가 죄의 용서를 몇번 까지 해주어야 되느냐고 일곱번 까지 해주면 되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18:22)'고 말씀하신다. 이 말은 용서의 횟수가 아니라 죄를 범해 용서 받을 사람이나 용서할 사람 모두 죄를 범한 사실 조차 잊어 버릴 때 까지 즉 마음속에서 깨끗이 지워질 때 까지를 말한다. 이와 달리 법에의한 죄에 대한 징치가 기원전 1750년 경의 바빌론에서 정한 하무라비 법전의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 조문에 따라 고대 근동 모두의 모태가 되어 모세의 율법(출21) 에서도 이렇게 정하고 있다. 그러나 처벌로 죄값을 치룬다고 그 죄가 마음에서 조차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을 대주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셔 죄의 대가로 무얼 치르는 것이 아닌 전혀 다른 방법을 제시 한다. 죄의 문제를 다룰 때 가장 어려운 문제가 영화 "밀양"에 극명하게 나타난다. 한번 꼭 보기 바란다. 아들을 유괴하여 죽인 범인이 감옥살이를 하는데 그 범인을 용서하기 위해 면회 간 전도연이 왜 그렇게 오열하는지... 죄를 다루는 방법이 기독교와 불교가 다르지만 실정법에 따른 죄과 보다 마음을 중시한다는 점과 사랑과 자비로 완전히 해결한다는 지향점은 같다. 문제는 내 마음에 남는 죄책감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의 문제다. 기독교는 나의 죄를 예수께서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으로 죄 값을 다 치뤄 하나님께서 다 용서 했으니 은혜로 받아드려 그렇게 믿고 죄책감을 가지지 말라고 한다. 불교는 죄책감으로 괴로워 하는 사람에게 '그 죄책감을 찾아서 가져오라 그러면 그 죄책감을 없게 해 주겠다'고 말한다. 불교는 죄를 다룰 때 두가지 방법으로 다룬다. 첫째 방법이 돈오의 마음 공부로 다루는 것이고 둘째는 공동체 생활의 규범을 담은 律藏으로 다루는 것이다. 왜 마음 공부로 해결하면 됐지 율장이 필요한가? 그것은 교단을 이뤄 무리지어 수행할 때 아직 범부중생이기 때문에 수행의 장애요소로 어느 때든 탐진치 삼독으로 범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는 苦의 원인을 바르게 보고 원인을 제거할 길을 찾아 닦아 苦를 滅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죄 역시 苦의 하나로 보고 단박 깨치는 법으로
좋아하는
탐욕(貪慾, lobha ,rāga)도
싫어하는
진에(瞋恚, dosa)도 벗고
어리버리한
우치(愚癡, moha)도 밝혀 본래 청정한 진여를 드러내면 저절로 멸죄(滅罪)가 된다. 죄로 부터 완전한 해방은 그 불을 끄는 것인데 그 불을 끄기 위해서는 탐진치 세개의 장작을 더 넣지 않는 것이다. 죄인과 용서할 사람으로 나누면 절대 죄의 문제는 해결 되지 않는다. 내가 나를 용서하는 문제는 더욱 그렇다. 죄로 부터 완전한 해방은 眞諦인 自他不二의 眞如를 드러냄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에먼 예수님께 내 죄를 씌워 십자가에 못박지 말고 돈오(頓悟)하여 自他不異의 空性의 지혜로 무연대자(無緣大慈)와 동체대비(同體大悲) 그리고 머문바 없는 마음을 내어 온전한 죄멸(罪滅)을 이루길 소원한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첫댓글 "죄 역시 苦의 하나로 보고 단박 깨치는 법으로
좋아하는
탐욕(貪慾, lobha ,rāga)도
싫어하는
진에(瞋恚, dosa)도 벗고
어리버리한
우치(愚癡, moha)도 밝혀 본래 청정한 진여를 드러내면 저절로 멸죄(滅罪)가 된다. 죄로 부터 완전한 해방은 그 불을 끄는 것인데 그 불을 끄기 위해서는 탐진치 세개의 장작을 더 넣지 않는 것이다. 죄인과 용서할 사람으로 나누면 절대 죄의 문제는 해결 되지 않는다. 내가 나를 용서하는 문제는 더욱 그렇다. 죄로 부터 완전한 해방은 眞諦인 自他不二의 眞如를 드러냄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멸죄, 죄를 멸하는 방법은 자타불이의 진여를 들어냄으로 가능하다는 말 씀 속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올라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