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큐 제도의 역사의 출발점으로 보는 때는 공식적으로는 12세기경이지만, 실제로는 그 이전에도 다른 나라와의 교류가 있었다고 한다. 북단의 아마미 섬의 경우 당이나 왜의 중계 무역을 했다는 설도 있으며, 한국의 선우영준이라는 교수는 울릉도에 있었던 우산국의 주민들이 이 일대로 이주해 와서 지배했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지만, 12세기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확실하다 할 만한 사료가 나오지 않고 있기 때문에 정설로 잡히는 내용은 없다. 사실 현대에 들어 중립적으로 류큐사를 연구하는 일은 일제강점기 당시에 조선사를 연구하는 일이랑 똑같은 짓이기 때문에…. 2007년엔 고려의 삼별초가 류큐로 건너가 류큐 왕국을 건설했다는 강력한 떡밥이 사학계에 던져졌다. # 홍길동이 세운 율도국이 류큐라는 설도 있는데 그대로 믿지는 말도록.. 분명한 근거 없이 '우리 민족이 고대에 사방으로 퍼져나가 국가를 이루고'하는 역사왜곡이 되기 십상이니.
일단 12세기 이후부터는 사료가 있기 때문에 이후의 역사 기록부터 류큐사로 인정하는 모양. 이 당시에만 해도 제도가 지리적으로 길게 뻗어있어 권력의 통제가 되지 않아 호쿠잔, 주잔, 난잔의 3왕국이 병립했으며, 슌텐(舜天,순천), 에이소(英祖,영조), 삿토(察度,찰도)의 왕통이 이어졌다. 1372년 명나라가 류큐에 사신을 보내 조공과 입조를 요구하자 삿토가 이를 받아들여 조공했다고 한다. 이 삿토의 통치기인 1389년에는 멸망직전의 고려에도 사절을 보냈다. (류큐 왕국이 삼별초에 영향을 받았다는 설도 있다. 해당항목 참조)
1429년 제1 쇼씨(尙氏, 상씨) 왕조가 시작되어 1470년까지 이어졌으며, 3왕국 시대를 끝내고 오키나와를 하나의 류큐왕국으로 통일했다. 명나라, 조선, 일본은 물론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까지 사절을 보내고 상인들이 활동했다.
1470년 궁정 쿠데타가 일어나 제2 쇼씨 왕조가 성립되는 데, 1477년 즉위한 왕조의 3대 왕 쇼신(尙眞, 상진)은 1526년까지 50년이나 재위하며 중앙집권의 확립, 지방 호족의 슈리(首里) 거주 정책, 불교 장려, 고유의 신녀(神女) 조직 확립, 지방 호족의 반란 제압으로 통일 국가 유지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쇼신이 죽은 뒤에도 한동안 류큐는 번영을 누렸는데, 1531년에는 오키나와 연구에 중요한 서적인《오모로사우시》가 편찬되기도 했다(《오모로사우시》는 아마미 섬에 전해지는 ‘오모로(オモロ)’를 채집해 편집한 오키나와 최고(最古)의 가요집으로 전 22권에 노래는 1554수다. 제1권은 1531년, 제2권은 1613년, 나머지는 1623년까지 편찬되었다).
통일 직후에는 동남아시아, 일본의 여러 나라와 교류하기 시작했고, 명에는 사대, 조선에는 교린 외교를 했다.
아시아 북단과 남단의 한가운데에 있는 지리적 이점 덕분에, 16세기까지 아시아 지역의 해양 허브국가로 상업을 진흥시켰다. 이후 유럽의 해양 진출과 맞물려 포르투갈과 스페인, 네덜란드 상인과도 교류할 정도로 번성했다. 당시 중계무역으로 뻗어나가는 류큐국의 자신감을 반영한 유물로는 슈리성 만국진량의 종(1458년)에 적힌 명문(銘文)이 있다. 만국진량의 뜻 자체가 '세계의 여러나라를 잇는 가교'라는 뜻. 이 명문엔 흥미롭게도 삼한(三韓)이 나오기도한다. 명문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다.
'류큐국은 남해의 승지에 위치하여 삼한(三韓=한국)의 빼어남을 모아 놓았고, 대명(大明=중국)과 밀접한 관계에 있으면서 일역(日域=일본)과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류큐는 이 한가운데에 솟아난 봉래도이다. 선박을 통해 만국의 가교가 되고, 이국의 산물과 보배가 온 나라에 가득하다'
그러나 1540년대 포르투갈인들이 동남아에 도착한 뒤 점차 대외 교역이 쇠퇴하기 시작했고, 1570년에 즈음하여 거의 단절되었다.
16세기 말에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위기가 찾아온다. 1591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군대를 보내 조선 침략군을 위한 군량미 제공을 강요하기도 했다. 결국 임진왜란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력을 재정비하는 과정에, 당시 규슈 남단(지금의 가고시마현에 있었던)의 사쓰마 번이 1609년 류큐를 침공, 속방으로 삼음으로써 류큐는 일개 종속국가로 전락한다. 그러나 당시 에도 막부와 사쓰마 번은 교묘한 정책을 펴서 여전히 명나라(후대에는 청나라)가 류큐를 책봉하여 조공무역을 하도록 하고, 실질적으로는 에도 막부의 도쿠가와 쇼군과 사쓰마 번의 시마즈 가문의 통제를 받도록 했다. 즉 2중(혹은 3중) 통치 체제가 수립된 것이다.
그 이유는 임진왜란 이후로 명 조정이 일본이 명에 조공하는 것을 금지하여 일본의 무역이 곤란해졌기 때문이었다. 당시 중국 주변의 나라들은 필요한 사치품의 대부분을 중국과의 조공을 통해서 조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특히 조선과 달리 힘에 의한 지배를 하고 있던 일본은 권력자가 지배층을 단속하기 위한 사치품이 절실했다. 다시 돌아와서,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에도 막부와 사쓰마 번은 류큐를 침략해 정복하면서도 중국에는 이 사실이 새어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류큐의 이름으로 중국에 대한 조공을 통해 사치품이 들어오면 일본은 이것들을 가로챈 것이다. 그럼에도 조선이나 중국 역시 어느정도는 눈치채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인조실록을 참조해보면 이미 조선에서도 류큐가 일본에 신복(臣伏)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고, 조선왕조실록에서 사신을 보낸 기록을 찾아보면 명/청 등의 중국 왕조가 사쓰마번 침공 이후 두 나라를 대우하는 것을 보면 꽤나 차이가 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쓰마번 침공 이후 류큐에서는 사쓰마번에 조공을 바치게 되는데, 15C이후 중개무역이 쇠퇴한데다 류큐 자체에서는 그 조공의 양을 감당해내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류큐 정부는 본토이외의 구메지마, 야에야마 제도 일대에 사람 수에 따라 세금을 매기는 인두세를 납부하게 한다. 이 인두세가 매우 가혹했기 때문에 사람 수를 조절하기 위해 섬 자체적으로 사람을 모이게 한 다음 늦게 오는 사람들을 죽인다던지, 낙태를 유도한다던지 하는 매우 안습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류가에서도 이런 끔찍한 상황을 이야기하는 노래들이 많으며, 훗날 일제의 류큐처분 당시 인두세가 폐지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병합을 바라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메이지 정부는 오키나와 일대에 인두세를 그대로 유지하였으며, 1900년대에 이르러서야 이 끔찍한 인두세는 폐지되게 된다.
그래도 류큐 제도 내에서의 통치는 허용되어 왔지만, 메이지 유신이 이뤄져 폐번치현 등으로 중앙집권제를 확립하기 시작한 일본 신정부는 1872년 류큐를 번으로 강등시키고 왕을 번주로 만듦으로서 류큐가 일본의 속령임을 대내외에 확실히 선언했다. 동시에 류큐의 명목상 종주국인 청나라를 떠보기 위해 1874년 대만 출병을 하였으며, 청나라가 류큐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여 합병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을 끝냈다.
마침내 1879년, 일본 정부는 500여 명의 군경을 파견해 류큐 정부를 없애고 국왕을 도쿄에 압송하였다. 이를 '류큐 처분' 이라 부른다. 류큐 최후의 왕 쇼타이는 후작에 봉해졌다. 이로써 1429년 오키나와 섬 통일 이래 450년에 이르는 류큐 왕국은 완전히 멸망하였고, 오키나와 현이 설치되었다.
일본의 류큐 병합은 청나라가 조선의 내정간섭에 보다 적극적인 정책을 펴게 된 동기를 제공하였다는 의견도 있다. 1876년에 일본 대표단이 청나라 총리각국사무아문(외교부)을 방문하여 강화도조약의 '조선은 자주국'(제1조) 조항을 보여주자, 총리각국사무아문 측은 조선은 본래부터 그런 나라였다면서 그 표현이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을 보인 바 있다. 하지만 일본이 전통적으로 중국에 의지했던 류큐가 한 방에 일본에 넘어가자 베트남이나 조선 등에 더 신경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류큐 처분은 정북향에 있는 어떤 나라에서 31년 후에 "한일합방"이라는 이름으로 똑같이 진행된다.
류큐의 강제병합은 주변국의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동유운동(일본 유학을 통한 실력 양성 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곧잘 언급되는 베트남의 독립운동가 판 보이 쩌우는 '유구혈루신서(琉球血淚新書)'를 써서 류큐의 망국사를 언급하며 독립이 왜 중요한가를 자국민들에게 깨우치기 위한 사례로 언급하기도 했고, 조선에서도 류큐가 강제병합되어 일본의 한 현으로 격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품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