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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산문화(紅山文化)와 여신상의 종교성
기원전 3500년께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홍산문화는 분업화가 이뤄진 국가형태를 띠고 있다. 통상 청동기대에나 출현 가능한 흔적이다. 무엇보다 가면과 옥장식 등에 곰 형상이 투영된 유물이 대거 발견됐다는 주장이 잇따라 이곳이 단군신화 속 곰 토템을 지닌 웅족(웅녀)과 고조선(청동기 시대) 이전 한민족 원류 중 하나인 배달국(신석기 시대)이 자리했던 곳이란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청동기 문명을 갖고 이주한 환인족(부계사회)과 웅족(모계사회)의 결합을 통해 단군조선이 건국됐다는 설이다. 문제는 여태껏 이를 확증할 사료가 없다는 점. 하지만 재야 학자들은 이를 대신한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정황증거를 어느 정도 갖출 수 있다는 입장이다.
붉은산 인근의 후기 신석기문화
요하문명지도
이와 같은 주장에 불을 댕긴 대표적 학자는 우실하 항공대 교수. 문화·사상사를 통해 한민족 원류를 밝히는데 힘써온 그는 홍산문화를 직접적으로 단군조선 원류로 거론하긴 아직 이르지만 우리 민족 정체성의 근거가 그곳에서 나온 것은 사실이라며 조심스럽게 화두를 던졌다. 익명을 요구한 국내 홍산문화 전문가도 결국 중국은 이곳을 한민족 원류로 인정할 것이라고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렇다면 대체 홍산문화란 무엇인가. 홍산(紅山)은 중국 내몽골자치구 적봉시의 동북방에 인접한 산의 이름. 몽골인은 우란하따(烏蘭哈達)라고 부르는데 이 역시 붉은 산을 의미한다. 실제로 철 성분이 많은 바위산으로 나무가 자라지 않는다. 그런데 이 붉은 산 인근에서 중국학계를 놀라게 한 거대한 제단(壇)과 신전(廟), 적석총(塚) 등 삼위일체의 거대 후기 신석기문화가 발견됐다. 상식을 깨고 국가체제를 완벽하게 갖춘 흔적이다. 홍산문화란 명칭은 적봉시 홍산에서 비롯됐지만 이후 발견된 대규모 유적은 넓게 퍼져 있다. 요녕성, 내몽골, 하북성 경계 연산(燕山) 남북과 만리장성 일대를 포괄한다.
우 교수에 따르면 그 시작은 1906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의 저명한 인류학자 겸 고고학자인 도리이 류조우(鳥居龍藏)가 적봉 일대 지표조사를 하던 중 우연찮게 많은 신석기 유적과 돌로 쌓은 (적석묘) 등을 발견한 것. 이것이 후대 세계를 놀라게 한 홍산문화 적석총 유적이다. 동북지방과 만주,한반도 일대에서만 발견되는 무덤 형태였다. 하지만 당대에는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후 20세기 초 중국에 온 프랑스 예수회 신부 에밀 리상(Emile Licent1876~1952)도 22곳의 신석기 유적을 발견했지만 류조와 마찬가지로 간단한 글만 남겼다. 그러나 1920년대 미국 하버드대에서 유학중이던 고고학도 양사영(梁思永·철학자 양계초의 아들)은 이 글을 놓치지 않았다.
결국 1930년 귀국한 양사영은 그해 겨울, 왜소한 체구로 동북지방 한파를 뚫고 적봉으로 향했다. 중국 중앙연구원 고고분과 담당자로서 내몽골 임서 일대와 흑룡강 등 동북지방에서 잇따른 신석기 유적 발견을 바탕으로 본격적 발굴작업을 계획한 것. 하지만 정세불안과 건강 악화로 발굴이 지연되다 1934년 열하고고보고(熱河考古報告)로 학계에 첫 보고를 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보고서엔 동북 4성(요녕·길림·흑룡·열하성) 발굴 작업을 완성하지 못했지만 절대 잊어선 안 된다고 썼다. 오늘날 동북공정의 첫 삽을 양사영이 뜬 셈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발굴은 일본인 손에 의해 이뤄졌다. 일본 고고학의 아버지인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가 주인공. 대규모 발굴단을 이끌고 발굴을 진행했는데 만주족과 몽골족이 내몽골 동부에서 발원, 중국과 역사적으로 독립했음을 밝히는 게 목적이었다. 일본편입이 목표였다.
천부경의 비밀 간직한 유적들
처음 청동기 문명 발굴에 초점을 맞춘 발굴은 시간이 지날수록 역사시대 이전(신석기 시대)으로 옮아갔다. 신석기 주거지 31곳과 옥구슬 380여 기, 골기(骨器) 33점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광복 이후 1955년 홍산문화라 이름 붙일 당시까지도 별다른 이목을 끌지 못했다. 그러던 것이 1982년 능원현과 건평현(建平顯) 경계 우하량(牛河梁)에서 유물이 대거 발굴되며 세계 언론은 미지의 왕국이 등장했다고 요란을 떨었다. 일본 신문 ‘아사히’ ‘마이니치’도 5000년 전 신비의 왕국이 베일을 벗었다고 대서특필했다. 발굴은 인근에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홍산문화의 특징은 새로운 신석기문화라는 것. 황하 유역 앙소문화 등과 서로 영향을 미치며 경쟁관계에 있었을 개연성이 높다. 덕분에 세련된 채도문화와 거석문화, 세석기문화와 빗살무늬토기 등이 뒤섞여 있다. 무엇보다 요하지역은 만리장성 이북으로 전통적으로 이민족 역사의 장이었다. 우실하 교수는 퉁구스계열 토착세력의 흔적으로 이를 웅족의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며 중국 측은 이를 전설의 인물 황제와 손자인 고양씨 전욱 계통 문명으로 설정해 억지로 중화문명에 편입시키려 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사실 누가 이 문명의 주인이라 단정하기보다 동북아 공동문명권의 모태문화로서 공동 연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유럽이 에게해 문명을 그리스만의 것으로 규정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고구려 축성방식의 원형도 발견
단군조선 건국의 밑바탕을 이룰 가능성이 농후한 홍산문화. 우 교수에 따르면 이곳에는 민족 최고 경전인 ‘천부경’의 비밀도 숨어 있다. 1, 3, 9, 81을 내포한 유물이 수없이 발굴된다는 얘기다. 천제단과 무덤, 사당구조가 3층인 점, 용 모양 곡옥이 9개 한 세트를 이룬다는 점도 그렇다. 천제단구조도 그렇다. 이곳에서 발견된 천제단은 자금성의 천단과 구조가 동일한데 천단은 한족이 아닌 청나라 때 만주족이 건설한 것이다. 천단은 북방 샤머니즘 고유 사유체계인 ‘3수 분화의 세계관’을 형상화한 것으로 첫 번째 원이 9개의 대리석, 마지막 원이 81개 대리석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곳 원형제단도 비슷한 구조다. 이는 음양 2분법적 중국 고유 사유체계와 다르다.
무엇보다 적석총 무덤양식은 바로 고구려의 그것이다. 현재 일반인에게 유일하게 공개되는 우하량 제2지점에선 지금도 직경 20~30m에 이르는 거대한 제단과 적석총들이 계속 발견되고 있다. 이 때문인지 중국측도 홍산문화에 대한 관심의 끈을 늦추지 않고 있다. 1973년 장강 하류에서 앙소문화(황하문명)보다 이른 시기의 하모도문화가 발견되면서 중화문명의 시발점을 하모도문화로 설정했지만 우하량유적(홍산문화) 발견 직후 이를 엮어 중국 3대 문화로 보고 있다. 특히 홍산문화를 ‘요하문명’이라 칭하며 중화문명의 새 시발점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요녕성 박물관 앞에 ‘3황5제 시대는 다민족 통일 국가를 형성하는 바탕을 이뤘다’고 적고 홍산문화를 고양씨 전욱 계통 문명으로 못 박았다. 이는 동북공정의 하부공정인 웅녀공정, 고구려공정보다 진일보한 움직임이다.
주목할 점은 홍산문화 바로 위층 하가점 하층문화. 황제족(한족)의 황하문명보다 앞선 홍산문화층 위에 중국 최초 국가인 하나라보다 앞선 청동기 유물이 발견된다. 고조선의 자취를 좇는 학자들은 이를 고조선 출범과 연계시킨다. 청동기를 개발한 3000여 명 환웅세력이 웅족과 결합해 강력한 국가체제를 다진 것으로 추정하는 것. 고조선 건국연대인 기원전 2333년은 이 지역 청동기의 추정연대인 기원전 2400년 무렵과 거의 일치한다. 일단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곳이 고조선 초기 강역이었다는 점에선 대체로 수긍하는 분위기다.
최근 홍산일대를 답사하고 돌아온 유임현 국학학술원 사무총장은 일부 중국학자들은 이곳 유적 중 일부를 대동강 일대에서도 봤다고 증언했다며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밝히진 않았지만 그들도 이곳이 기존 한족 문명권이 아니라는 데 동의한다고 말했다. 또 이곳은 중국 송대 이후에야 중국 양식의 무덤이 발견되는 고구려 비사성 자리였다며 과연 중국의 역사 문화권인지 의심스럽다고 의문을 제기했다. 예로부터 중국 사서들이 외국인으로 분류했던 동이족의 원형이 이곳에 묻혀 있다는 게 유 사무총장의 해석이다. 그는 중국측 교수가 모호한 유적이 발굴되면 이전에는 그냥 덮어버렸다고 전해 이와 같은 의혹을 부채질했다.
중국 하나라보다 앞선 청동기 유물
무엇보다 관심을 끄는 대목은 최근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음하 상류 ‘삼좌점 유적’. 하가점 하층문화로 추정되는 이곳의 발굴은 극비리에 이어져 올해 말 마무리될 예정이다. 유 사무총장이 국내에선 처음으로 보고 돌아와 전한 이곳 실상은 가위 충격적이다. 하늘과 땅을 상징하는 적석묘는 50~70㎝ 원을 중심으로 사방 20여m까지 확장될 만큼 거대해 제단과 구분되지 않는다. 완벽한 형태의 우물과 60여 채의 집터, 외성과 내성으로 구분된 성곽은 고구려의 그것과 다름없다. 부족회의 장소로 추정된 모임장소와 석회를 이용한 담벽 등도 정교하기 이를 데 없다. 곡식창고와 문설주까지 완벽하게 보존돼 있는데 특히 내성 북쪽 성벽의 ‘치’가 눈길을 끈다. 성벽이 쑥 튀어나왔다 들어간 치는 적을 수비하는데 유리한 양식으로 고구려 특유의 것이라 한다. 축성방식도 초기 고구려 축성방식보다 살짝 뒤져 있다. 곳곳엔 해독되지 않은 상형문자들이 널려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진일보한 시각에 대한 기존 국내 사학계의 반응은 다소 조심스럽다. 노태돈 서울대 교수는 객관적 사실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자칫 민족적 이해가 엇갈려 극단주의로 흐를 수 있다. 개연성과 토대를 충분히 확립해야 한다면서 정신사적 흐름 연구와 바른 역사인식은 필요하다고 말했다.
기존 연구로는 동북공정 못이겨
반면 대표적 재야 사학자로 분류되는 윤내현 단국대 교수는 철저한 고증이 필요하다는 점에는 동의한다면서도 우리 역사학계 내부에서도 이견이 빈발하는데 어떻게 단군과 고조선에 관한 역사를 중국학자에게 이해시키겠느냐고 질타했다.
그는 이어 기존 사학계 연구로는 동북공정을 극복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윤 교수는 하가점 하층문화에 대해선 독자적 문화인 것은 분명하지만 만주와 요서·요동을 합한 공통의 문화라며 북경 근처 갈석산까지 고조선 영토였음을 감안하면 연관성을 추측할 수 있지만 한반도 내에서 발견되는 구석기 문화 등도 간과하면 안 된다며 중립적 견해를 견지했다.
모두 취합해도 A4용지 한장을 넘기기 힘들다는 단군과 고조선에 관한 기록들. 유일한 단서가 될 수 있는 유적들은 어떤 해결점을 제시할까. 한민족 기원과 고조선과 단군에 대한 비밀을 풀어주는 것은 물론 민족 정체성 확립과 남북한 통합, 나아가 중국의 동북공정을 저지하는 가장 좋은 대처방안이 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동북공정 속에 그려진 고조선
중국이 고구려는 물론 발해, 나아가 고조선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군신화가 중국신화의 영향을 받은 중국문화의 반영이라 주장하는 중국 사학계의 주장은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기자 동래설 등을 근거로 고구려 이전 단계에서부터 중국사에 우리 민족사가 포함된다는 것을 강조해 중화적 우위성을 강조하고 고조선-고구려로 이어지는 민족 정체성을 말살하려는 것이다.
조법종 우석대 교수에 따르면 중국은 태양 숭배 신화인 ‘탕곡신화’와 ‘명이’라는 표현이 조선(朝鮮) 명칭의 기원이라 주장한다. ‘산해경’에 나타난 탕곡이 조선의 명칭이며 ‘주역’에 나오는 명이가 은나라 시대 조선 명칭이란 것이다. 또 3황5제 신화 속 황제의 후손인 전욱 고양의 신화가 동이족 문화이고 곧 고구려 문화라 주장한다.
이런 중화우월주의는 ‘기자 동래설’에서 극에 달한다. 은말 주초 은나라 신하였던 기자가 동쪽으로 피난해 조선의 왕이 됐다는 기자조선설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고 중원민족이 동북민족의 원류가 된 계기로 설명한다.
이는 1차 동북공정 중 장벽파의 ‘기자여기자조선연구’에서 본격화됐다. 기자조선은 은나라 후예가 조선반도에 세운 지방정권으로 실재했던 철학가·정치가인 기자에 의해 중국 동북사가 시작됐다고 본다. 또 기자조선은 주·진의 속국으로, 이후 위만조선은 한의 속국으로 분류한다. 민족적 기원으로는 숙신·예맥·동호계로 동북지방을 3분하고 모두 중국 역사 범주에 존속된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중국 측 주장은 우리 민족과 관련된 구체적 역사를 보편성과 연결 지어 부정하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게 국내 학계의 반론. 무엇보다 단군신화를 중국신화에 나타난 ‘신성한 존재의 출현이 초인간적 상황 속에 전개된다’는 일반론을 바탕으로 중국신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추측하고 있다. 단군신화 속 곰 숭배 사상이 한국 신석기문화 속 고아시아족의 특징임을 망각한 것이다.
또한 중국사료인 ‘상서대전’ 등에 기록된 기자동래설은 다른 사서에선 일절 언급되지 않았고 조선시대 일부 유학자들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신뢰성이 떨어진다. 고조선의 청동문화는 중국과 계통이 다른 비파형동검과 돌널무덤 및 고인돌을 중심으로 한다는 점에서도 논리상 맞지 않다. 최근 일부 국내 학자들은 오히려 위만조선이나 한군현 등을 고조선 서쪽 변방에 자리한 고조선의 속국이라 보고 있다.
한편 중국 측 동북공정에 대해선 학계·정치권의 자성 목소리가 높다. 김정배 전 고구려연구재단 이사장은 자신의 논문에서 관심이 많은데도 고조선에 관한 연구가 부진한 것은 새로운 문제의식과 해석을 과감히 표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자아 비판한 바 있다. 김무성 한나라당 의원도 동북공정의 문제는 단순히 역사왜곡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리 정부의 정치·외교력 부재를 드러낸 것이라며 근본적 대책을 마련해 조직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홍산문화 여신상은 고대종교 유적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공경하고 두려워한다. 이와 같은 경외사상은 곧 고대인의 종교였다. 고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 행사 중 하나가 제사다. 고대인의 제사 행위로는 조상에 대한 제사, 신에 대한 제사, 하늘에 대한 제사가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으뜸인 것은 인간과 가장 밀접한 혈연관계를 맺고 있는 조상에 대한 제사다. 이것은 또한 인간이 갖는 예(禮) 중에서 가장 기본으로 조상숭배사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의 주검을 묻는 무덤을 종교의 장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예의 전초이기도 하다.
인간이 모시는 제사의 대상으로 여러 가지 신이 있겠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신은 인간의 탄생과 안녕과 풍요를 주재하는 신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모신이다. 지모신이란 대모지신(大地母神)이라고 하여 대지를 주재하는 여신을 일컫는다. 지모신 숭상은 물론 농경사회의 대표적인 신앙이다.
여신은 고대사회 대지와 풍년 상징
여신은 고대 사회에서 생육을 상징할 뿐 아니라 대지를 상징하고 풍년을 상징하기도 한다. 지모신이야말로 가장 큰 생명력을 가진 신이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땅을 어머니로 생각했고, 아버지를 하늘에 비유했다. 당시 사람들은 지모신을 제사지냄으로써 만물이 소생하고 오곡이 풍성하기를 빌었다.
서요하 상류의 내몽골 적봉시 서수천 유적에서 발견된 토르소 형식의 홍산문화 시기의 소조 여인상이 있다. 그리고 요동반도 여대시 곽가촌 유적에서 출토된 소조인면에서 보이는 치켜진 눈과 튀어나온 광대뼈의 표현도 주의해서 볼 만하다. 한반도에서는 함경북도 청진시 농포동 유적과 옹기군 서포항 유적에서 소조 인물상이 발견되어 좋은 대조를 이룬다. 농포동 출토 인물상은 머리 부분이 깨져 없어졌으나 가슴에 팔짱을 낀 것처럼 표현하고 허리를 잘록하게 좁힌 다음 그 아래를 퍼지게 만듦으로써 여신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서포항 유적 청동기시대 문화층에서 출토된 여인상은 얼굴 부분이 깨져 없어졌는데, 유방을 표현한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넓죽한 얼굴의 아래 부위에는 구멍을 파서 입을 표시했고 굵직한 목 선이 귀밑까지 와서 귀의 표현을 가중시키고 있다. 그리고 굵은 목이 어깨로 흐르면서 가슴의 유방을 볼록하게 표현했는데, 그 수법이 매우 희화적이다.발해 연안 북부 대릉하 유역에서는 홍산문화 시기인 기원전 4000~3000년께 이와 같은 지역에서 발견된 돌널무덤과 옥기, 여신묘와 여신상 그리고 석축제단과 임부상도 동방에서 가장 오랜 종교 유적이고 신앙의 유물이며 위대한 예술이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말하길 옥은 돌 중에서도 아름다운 것(石之美者)을 가르킨다고 했는데, ‘시경(詩經)’ 소아(小雅)에 이르기를 타산지석가이위착(他山之石可以爲錯)이라고 하였다. 즉, 옥은 다른 돌로 갈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예부터 옥을 완성하는 과정을 인간의 성장 과정에 비유했고, 그 완성된 옥을 군자(君子)의 다섯 가지 덕목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리고 옥은 장식으로 예술적 가치 이외에 신분과 지위를 상징하기 때문에 정치적인 의의가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매장함으로써 영생을 기원하는 종교적인 의미도 지닌다. 그래서 발해 연안 사람(동이족)들은 무덤(주로 돌무덤)에 시신과 함께 옥을 매장한다.
옥은 고대사회의 신분을 표시
동북 아시아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옥은 중국 요녕성 부신시(阜新市) 사해(沙海) 유적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의 옥결이다. 일종의 귀고리다. 이와 같은 유물은 발해연안을 위시하여 중국의 동남 연안 지구 그리고 연해주와 일본에도 분포되고 있다. 발해연안에서 출토된 옥결이 가장 이른 시기다. 우리나라에서는 강원 고성군 죽왕면 문암리(文岩里) 유적에서 신석기시대의 옥결 한 쌍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경북 청도군 사촌리(沙村里) 유적에서 청동기시대의 옥결 1점이 반파된 상태로 출토된 바 있다. 사해유적에서는 용의 형상이 출현하는데 동아시아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용의 형상이다. 옥으로 만든 용의 형상은 홍산문화 시기에 발해 연안 북부의 대릉하 유역과 서요하 유역에서 출현한다. 동방 최고의 용의 형상이 화하족(華夏族)의 본향인 황하 유역의 중원 지방을 크게 벗어난 지점인 만리장성을 넘어 한민족과 가까운 동이지역에서 형상화했다. 홍산문화의 용 모양 옥장식은 대릉하 유역에서 서남향하여 은나라 수도 은허(殷墟)에서 크게 유행했다. 한편 동남향으로 내려가 만주 지방과 한반도에서도 돌무덤의 용 모양 옥장식이 출토되었다. 이것을 우리는 곡옥(曲玉)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돌무덤에서 곡옥이 출토되는 것은 대릉하 유역의 돌무덤에서 용 모양 옥 장식이 출토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일본에서도 구주 지방과 관서 지방에서 곡옥이 출토되고 있다.
발해 연안 인류(동이족)들은 옥을 가짐으로써 영생불멸한다는 생각과 옥을 예제화함으로써 당시 고대사회의 어떤 신분상의 등급과 권력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었다. 특히 용은 고대 농업사회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갑골은 길흉 판단하는 정복활동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사회는 신탁(神託)으로 통치하던 사회다. 백성은 지혜가 출중하고 용맹한 사람의 출현을 갈망하고 그와 같은 인물을 추대하여 지도자로 뽑는다. 그러나 인간은 원래 부족함이 많아, 인간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다. 그것은 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인간이 꼭 인간을 다스리고자 할 때는 으레 한 인간에게 신령이 하강하여 그로 하여금 신을 대신하도록 했다. 이때 신탁을 위임받은 인간은 온갖 방법을 다하여 신으로 위장하고 도구를 사용해 신을 부르고 계시를 받아 자신이 신인 것처럼 행동해 신을 대신하여 집행한다.
갑골(甲骨)이라 함은 동물의 견갑골(肩胛骨)이나 거북이의 복갑(腹甲)의 한 면에 불을 지져 다른 한면에 나타나는 조짐을 보고 길흉(吉凶)을 판단하는 점복활동(占卜活動)을 일컫는다.우리가 흔히 일컫는 갑골을 복골(卜骨)이라고도 하는데 영문으로는 다같이 오라클 본즈(Oracle Bones)라고 한다. 이는 일종의 종교신앙(宗敎信仰)으로, 이와 같은 행위는 고대사회에서 점복을 통하여 신을 불러들이고 신의 뜻에 따라 지배자가 지도체제나 권력 또는 권위를 장악하기 위한 통치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지금까지 가장 오래된 갑골(복골)이 출토된 유적은 발해 연안 북부지구 서요하 상류의 부하구문(富河溝門) 유적이다. C¹⁴측정 연대는 BP 5300±145년이다. 이후 하가점하층문화(BC 2000~1500)에서 갑골이 많이 발견되고 있으며, 서남향하여 은대(殷代, BC 17C~11C)에서 가장 많이 유행했다. 은상(殷商)에서는 전기에 무자갑골이 성하고, 후기에는 유자갑골(有字甲骨)이 성행한다. 이와 같은 갑골문화는 발전과 더불어 갑골문자(갑골문)가 형성되고, 마침내는 한자(漢字)로 완성되었다.이는 곧 종교신앙이며 바로 고대 사회의 정치다. 은상의 정치체제가 제정일치(祭政一致)임을 알 수 있다. 고조선 사회도 이와 같았으며, 신라 제2대 왕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은 그 대표적인 예다.
1980년대 초 경남 김해시 부원동(府院洞) 유적에서 삼한시대의 복골이 출토되었고, 1980년대 후반에는 전남 남해군 군곡리(郡谷里) 패총에서 철기시대 내지 마한시대의 복골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이로 미루어보아 진한이나 마한 사회, 가야, 백제 초기 사회에서도 강력한 지배층이 이끄는 정치가 존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비록 문자를 대동하고 있진 않지만 갑골의 점복 재료나 방법, 점복행위 및 목적은 은나라의 갑골문화와 일치한다. 그리고 일본으로 전파되어 야요이시대에 유행했다.
부호문자는 한자 연구에 중요 자료
문자는 고대 문명의 조건 중 하나다. 문자가 갖는 특성은 말의 기록이다. 고대사회에서는 사람과 사람, 씨족과 씨족 간 언어의 발달과 더불어 복잡해져가는 인간관계와 증대해가는 사회활동에서 말보다 어떤 기록으로서 약속이 필요했다. 고대인들은 이와 같은 충족을 얻기 위해 그림을 그려서 표현하거나 어떤 형태의 부호로 의사를 전달했다.
그림으로 표현한 대표적인 예가 경북 울산 반구대 암각화다. 자연암 벽면에 호랑이·사슴·멧돼지 등 들짐승과 여러 형태의 인물이 새겨져 있는가 하면, 고래·돌고래·물개·거북이 등 바다동물과 배를 탄 어부가 새겨져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은 당시 인간의 행동에 대한 전달방법일 뿐 아니라 사건의 기록이요, 인간의 감정을 의화화한 대서사화다. 그것은 바로 인류의 기록이다.
고대 사회에서 그림보다 비교적 발전된 전달 수단으로 인간이 사물을 기억할 수 있도록 보존 역할을 하는 일종의 원시문자인 부호문자가 있다. 부호문자는 발해 연안 북구 서요하 유역의 석붕산 유적에서 발견됐다. 소하연(小河沿) 문화 시기(BC 3000~ 2000)의 토기에 새긴 12자의 부호가 확인되었으며, 원통현 단지의 기벽에서는 7자의 부호가 확인되었다. 당시 집과 주위 환경을 도식화한 원시적인 문자로 보고 있다. 연문(連文) 형태의 부호들은 마치 당시 인류의 모종의 언어가 함축된 성문(成文)처럼 보이기도 해 한문의 기원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소하연문화의 문자는 상형문자와 지사문자(指事文字, 상형문자에 기호를 덧붙인 글자로 上·下·大 등이 있다)의 두 가지 요소를 동시에 갖춘 부호문자로 한자의 기원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부호문자는 대개 선사시대의 토기에 새긴 것이 많이 발견되는데, 요동반도나 한반도에서도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토기에 부호를 새긴 것이 발견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