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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성경의 예언대로 생명을 버리신 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을 예비하는 금요일이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두 종류의 사람들을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이 날은 준비일이라.”(요19:31a)라고 시작됩니다. 로마 정부는 십자가에 못 박힌 죄인들이 죽을 때까지 십자가에 매달아 두었습니다. 새들의 밥이 되게 하였습니다. 목격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히 죄를 지을 엄두를 내지 못하도록 경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문제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기며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율법은 “...당신들은 그 주검을 나무에 매달아 둔 상태에서 밤을 지내지 말고 그 날로 묻으십시오. 나무에 달린 사람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은...하나님께서 당신들에게 유업으로 준 땅을 더럽혀서는 안 됩니다.”(신21:23)라고 경고합니다. 율법에 따르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시체는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습니다. 반드시 죽은 당일 끌어내려 장사지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땅을 더럽히는 일이 되었습니다. 거기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날은, 해가 떨어지면 곧 안식일이 시작되는 준비일 이었습니다.
그것도 유대인들이 가장 큰 명절로 여기고 있던 유월절 절기가 시작되는 안식일이었습니다. 당연히 시체를 십자가에 매달아 둔 상태에서 가장 거룩한 절기를 맞을 수는 없었습니다. 유대인들 특히 종교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죄인들이 죽을 때까지 매달아두는 로마의 관습은 골칫거리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에 달린 죄수들을 죽이기로 결정했습니다. 빌라도를 찾아가 죄인들의 다리를 꺾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최대한 빨리 죽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래야 유월절이 시작되기 전에 죽은 시체를 치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요19:31b-33)라고 이어집니다. 당시 십자가에 매달린 죄인들의 발밑에는 일종의 발판이 있었습니다. 양팔과 가슴으로 밀려드는 고통과 압박을 조금이라도 줄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죄인들이 삼일에서 일주일까지도 죽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그러나 죄인의 다리를 꺾어버리면 더 이상 발을 디딜 수 없었습니다. 동시에 몸은 아래쪽으로 쳐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슴이 압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순식간에 질식해서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죄인의 다리를 부러뜨리기 위해서 사용되는 도구는 무지막지한 쇠망치 또는 몽둥이였습니다. 인정사정없이 내리쳤을 때 가해지는 충격은 감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습니다. 죽음을 재촉하고도 남을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그 무지막지한 쇠망치로 몽둥이질을 해서라도 주님을 죽여 달라고 재촉했습니다. 지독하게도 비인도적인 요구였습니다.
주님의 시신으로 인해 자신들이 거주하고 있던 땅이 더러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까지 간절한 마음으로 거룩하게 지켜 내려고 했던 땅은 이미 더렵혀질 대로 더렵혀져 있었습니다. 이기적인 그들이 저지른 온갖 부정과 불의 때문이었습니다. 무고한 백성들이 혹독한 압제와 핍박 속에서 흘린 피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중요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거룩함은 환경적인 요소들로 결정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마음 상태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그들의 율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요구대로 죄인들의 다리를 꺾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군병들은 먼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의 다리를 꺾었습니다. 뼈가 으스러진 그들은 이내 질식해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돌아가신 주님의 다리는 꺾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성경은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요19:34-35)라고 이어집니다. 한 병사는 주님이 정말로 돌아가셨는지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창으로 주님의 옆구리를 찔러 봤습니다. “그 곧 예수 그리스도는...물과 피로써 오셨습니다.”(요일5:6a)라는 사도의 외침대로, 주님의 옆구리에서는 물과 피가 함께 흘러나왔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었습니다. 의학박사인 그William Stroud는 이 현상을 “심장의 파열은 엄청난 정신적 고뇌로 인해 일어난다. 심장이 파열되면 즉시 사망이 찾아온다...심낭에는 심장을 돌던 피가 터져 들어간다. 이러한 파열 현상이 일어나면, 혈액이 분리되어 물과 피로 나누어진다. 이 경우에 심낭이 팽창하여 혈청이 물과 피로 분리된 채로 가득 차 있게 된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죽음을 앞둔 예수께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영적,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셨습니다. 당신으로부터 등을 돌리신 아버지 하나님과의 단절은 그야말로 고통의 절정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주님의 심장이 터졌습니다. 심장에서 흘러나온 피는 물과 피로 분리되었습니다. 심낭에 고였습니다. 물과 피는 심장까지 관통한 병사의 창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사도가 이런 현상까지 자세히 기록한 이유는 ① 먼저, 자신이 물과 피가 흐르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② 자신의 글을 읽는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고 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③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관련된 예언들이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증거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요19:36-37)라고 외칩니다. 성경은 “한 집에서 먹되...고기를 조금도 집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지며”(출12:46)라고 말씀합니다. 또 “아침까지...조금도 남겨 두지 말며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아서 유월절 모든 율례대로 지킬 것이니라.”(민9:12)라고 말씀합니다.
유월절에 바치게 될 희생 제물의 뼈는 절대로 꺾거나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합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서 나아오시는 주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1:29b)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시인은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시34:20)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유월절 어린양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뼈가 단 하나도 꺾이지 않도록 친히 지키시고 보호해 주실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않고 온전히 보존 된 것은 성경의 예언의 성취였던 것입니다.
성경은 또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 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해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해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슥12:10)라고 말씀합니다. 특히 “찌른”에 해당하는 헬라어εξεκεντησαν는 성경에 두 번만 사용된 특수한 단어입니다. “찔러 꿰뚫다, 파서 뚫다, 관통하다.” 등의 뜻입니다. 창이 옆구리로 들어가 심장을 관통할 정도로 깊이 꿰뚫었다는 의미입니다. 병사의 행위는 의도적이지 않았습니다. 불현 듯 죽었는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옆구리를 찔러본다는 것이 심장까지 관통했습니다. 분리된 상태에서 심낭에 모여 있던 피와 물이 흘러나올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무의식적인 행위를 통해서 성경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믿는 이들을 통해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을 채찍질하고 능욕한 로마 군사들,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대가로 주님의 속옷을 가지려고 제비뽑기를 한 군사들, 갑자기 끔찍한 몽둥이질을 멈춘 군사, 느닷없이 창으로 찌른 군사는 이방인이었습니다. 불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악한 도구로 쓰임 받았습니다.
본문은 계속해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 가니라.”(요19:38),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이 날은 유대인의 준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요19:41-42)라고 이어집니다. 마침내, 예수께서는 성경의 예언대로 운명하셨습니다. 그때, 주님의 시신을 요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주님의 가족들과 일가친척들과 열 한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님의 임종을 끝까지 곁에서 지켜보았던 요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감히 나서지 못했습니다. 그때,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를 찾아갔습니다. 주님의 시체를 가져가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마태는 그를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마27:57)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막15:43)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 누가는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저희의 결의와 행사에 가可타 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러니”(눅23:50-51)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서북쪽에 위치한 아리마대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최고 의결 기관이었던 산헤드린 공의회의 회원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존경까지 받고 있던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을 죽이려는 산헤드린의 결의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공개적으로 주님을 좇지 않았지만,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음으로는 이미 주님의 제자였습니다. 그는 또 비록 지방에 거주했지만 예루살렘 근처에 자기 무덤을 소유할 정도로 부자였습니다.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사53:9b)라는 구약의 예언을 이룰 수 있는 적임자였습니다. 특히 성경은 그의 행동을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마27:58a)라고 묘사합니다. “가서προσελθων”는 그가 듣자마자 황급히 달려갔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또 “당돌히τολμησας”(막15:43)는 “극한 상황에서 위험을 무릅쓰다, 감정적으로 용기를 내다.” 등의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님의 친척도 제자도 아니었습니다. 주님과 직접적인 어떤 관계도 맺지 않았습니다. 빌라도가 반역죄로 돌아가신 주님의 시신을 내주지 않을 가능성도 컸습니다. 시체를 만지면 부정해 진다는 유대인의 규정에 따라 가장 큰 절기인 유월절을 지키지 못할 수도 있었습니다. 산헤드린 회원인 동료들의 적개심을 살 수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일은 자신이 반역죄로 죽은 주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온 세상에 드러내는 위험한 행위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용감하게 행동했습니다.
주님의 장례를 치루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 곧 평생 피땀을 흘려서 일구어놓았던 사회적인 지위와 명예는 물론 생명까지도 기꺼이 포기했습니다.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 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요19:39-40)라는 말씀에 따르면, 유대인의 관원으로서 밤중에 주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 역시 그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죽음과 절망과 공포의 극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주님의 장례를 치루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당신의 뜻을 이루는 선한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당시 환난과 핍박 속에 살고 있던 로마 교회의 이방인 성도들에게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는 용기를 북돋워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우리 역시 반드시 본받아야할 신앙의 자세입니다. “인생은 단 한 번밖에 없는 기회”라는 의미에서 모든 인간은 동등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하나 같이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함께 살펴본 본문에 소개되어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 똑같은 상황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혀 다른 도구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정욕을 추구하던 사람들은 스스로 악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한 사람들은 선한 도구로 쓰임 받았습니다.
그들이 평소 추구하고 있던 삶의 가치들이 그들의 현재를 결정했습니다. 그George Whitefield는 “내 인생은 녹슬어서 없어지기보다 닳고 닳아서 아주 없어지기를 원한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어떤 도구로 쓰임 받고 있습니까? 선한 도구입니까? 악한 도구입니까? 모든 순간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평생 하나님의 선한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책임지고 지키시고 보호해 주시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