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백제가 지금의 서울 근처를 수도로 정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후 양주(楊州)로 불리던 이곳이 훗날 조선의 도읍이 될 수 있도록 기초를 다진 인물은 고려 15대 임금 숙종(肅宗·1054~1105)이다. 물론 한양천도의 주역은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다.
숙종에 앞서 문종은 평양(서경), 경주(동경)와 더불어 양주를 남경(南京)으로 승격시켜 고려의 지방행정제도를 2경(京)제에서 3경제로 전환했다. 개경이 특별시라면 3경은 직할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명칭만 올렸을 뿐 남경에 실질적인 조처가 이뤄지지는 않았다. 실질적 조처란 서경이나 동경처럼 유수(留守·직할시장)를 두던가 궁궐 혹은 관공서를 설치하는 것을 말한다.
문종의 셋째 아들인 고려 숙종은 어린 조카 헌종(獻宗)을 내쫓고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여론이 좋았을 리 없다. 게다가 천재지변과 가뭄으로 흉년이 계속되고 반란도 끊이질 않자 숙종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즉위 3년이 지난 1098년에야 숙종은 송나라에 자신이 왕위에 오른 사실을 전할 만큼 상황은 좋지 않았다. 송나라에 보낸 외교문서 표문(表文)의 일부다.
"내가 왕위에 오른 벽두부터 지금까지 수년 동안 사고가 많아서 진작 사신을 보내어 내가 즉위한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 비록 말하지 않아도 이런 사정을 자세히 알았을 것으로 생각하나 중첩되는 국내 분란으로 하여 마침내 머뭇거렸다는 책망을 (송나라로부터) 받게 되었다."
즉위 사실 통고가 늦어진 데 대한 변명이지만 숙종이 언급한 '수년 동안 사고가 많았다'나 '중첩되는 국내 분란'은 사실이었다. 숙종은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 무렵 풍수지리에 밝은 술사(術士) 김위제가 통일신라 말기 도선(道詵·827~898)의 '비기(秘記)'를 입수했다며 숙종에게 접근해왔다.
위서(僞書)일 가능성이 크지만 김위제는 도선이 남긴 글에 '고려가 건국된 지 160년 뒤에 개경의 지기(地氣)가 쇠한다. 그때 서경과 남경에 도읍을 설치해라. 그러면 고려의 국운이 다시 회복될 것이다'는 내용이 있다며 숙종을 설득했다.
고려가 개국한 것이 936년 무렵이니 숙종 재위(1095~1105)는 정확히 건국 후 160년에 해당했다. 고려는 풍수지리가 유행하던 나라였다. 학문이 뛰어났고 강건한 성품의 숙종이었지만 위기감 탓에 김위제의 말에 솔깃했다. 조카의 왕위를 찬탈했기 때문에 자기 후손들로 왕위가 잘 계승되기를 바라는 염원도 컸을 것이다.
숙종4년(1099년) 9월 숙종은 왕비, 맏아들(훗날의 예종) 및 주요 대신들을 거느리고 남경 일대를 돌아본다. 당시 숙종의 남경순행은 한달 정도 걸렸다. 삼각산을 비롯해, 승가굴·도읍터·신혈사 등 사찰을 중심으로 구석구석을 눈으로 보고 확인했다.
그러나 숙종은 곧바로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이미 고려는 개경 외에 평양을 또 하나의 도읍으로 삼고 있었는데 다시 남경을 건설한다고 했을 경우 신하들의 반대와 백성들의 원성에 직면할 것이 분명했다. 숙종은 번민을 거듭했다. 마침내 숙종6년(1101년) 9월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鑑)'을 설치한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남경 건설 특별위원회'를 발족시킨 것이다.
숙종은 문하시랑 평장사 최사추(崔思諏· 1034~1115)를 책임자로 한 지주사(知奏事·조선의 도승지) 윤관(尹瓘· ?~1111)과 풍수에 밝은 퇴직관리 문상(文象) 등을 남경 건설 예정지에 파견했다.
한달 후 돌아온 최사추 등은 "노원(盧原), 용산(龍山) 등은 도읍을 정하기에 합당하지 않고 오직 삼각산 북악 남쪽의 산수 형세가 옛 문헌의 기록에 부합하오니 그곳에 도읍을 건설하소서"라고 보고했다. 조선 때 한양 도성이 자리 잡은 바로 그곳을 지목한 것이었다.
얼마 후 남경 건설이 시작됐다. 숙종 9년(1104년) 5월 '고려사'는 "남경의 궁궐이 완성되었다"고 적고 있다. 2년8개월 만에 궁궐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두 달 후인 7월 숙종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남경을 찾는다. 신궁의 모습이 자세하게 묘사돼 있진 않지만 남경의 신궁에 도착한 숙종이 "궁녀들을 데리고 누각과 원림을 유람하였다"는 대목이 나오는 것을 볼 때 궁궐뿐만 아니라 주변 부속시설까지 갖춰져 상당한 규모였을 것으로 보인다. 두달여 남경에 머물다 개경으로 돌아온 숙종은 그러나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남경의 추가 개발이 아들 예종(睿宗)의 몫으로 넘겨진 것이다.
역설적으로 고려왕실은 이후 예종이 이자겸의 딸을 왕후로 맞은 것을 계기로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무신난을 거쳐 몽골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한양은 국왕의 휴양지 내지 사냥터로 전락했고 한강변은 권세가들의 특급 별장지로 사랑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