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松溪 박희용의 麗陽南禪軒 독서일기 2024년 8월 21일 화요일]
김경일 지음 『이재유 연구』 제4부
이재유의 경성재건그룹 시기 : 제2기 (4)
이 당시 노동운동의 최고 목표는 민족해방과 조국독립이었다. 노동운동의 순수한 의미와 목적은 차선이었다. 그럼 해방 후 노동운동의 최고 목표는 무엇이었는가. 공산주의 정권의 수립을 통한 사회주의 조국 건설이었다. 그럼 2024년 현재 한국의 노동운동의 최고 목표는 무엇인가? 해방과 조국독립은 피동적이었지만 선배들이 이루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조국 건설은 북한 지역에서만 성공했다. 그럼 남한의 노동자들은 어떠한 최고 목표를 갖고 노동운동을 전개해야 할 것인가. 노동운동의 결과로 기업이 망한다면, 그것은 교각살우이다. 기업이 존재해야 노동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일단은 기업의 생존과 발전에 보탬이 되도록 노동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노동운동의 내면화가 필요하다.
1935년 1월 12일에 이관술과 함께 박영출의 하왕십리 아지트를 빠져나온 이재유는 경성에 인접한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에 작은 초가집 한 채를 지어 약 1만 평의 황무지를 빌려 개간하여 농사를 지으며 1936년 12월 25일 현 도봉구 창동역 부근에서 최종적으로 검거될 때까지 2년 정도 잠복 생활을 하였다.
이 시기에는 아래로부터 위로의 살아있는 활기찬 조직을 만든다는 이재유의 트로이카 조직방침이 쇠퇴하고 실질적인 대중적 기반이 없이 소수 지도부에 의해 위로부터 조직이 구축되는 방법을 이용하였다. 자신이 rj그렇게 비판하였던 과거 운동의 경험을 연상케 하는 이러한 경향은 후기로 갈수록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변화된 운동방침을 전제로 이종국, 변우식, 서구원, 최호극 등을 접촉하면서 ’중심 오르그‘ 운동자를 획득하여 운동의 원활한 발전을 꾀하려고 하였다. 또한 1936년 10월 이관술, 서구원과 함께 ’경성준비그룹‘을 결성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는 실천운동이 현실적으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한계에 대한 돌파구 내지는 대체 활동으로서 이론문제나 투쟁지침서 등의 많은 팸플랫들이 간행되었다. 또한 정치신문 『적기』를 등사판으로 발행하였다.
『적기』 제1호는 1936년 10월 20일에 20부로 발행되었다. 제2호는 15부로 11월 중에, 제3호는 10부로 12월 24일에 발간되었다. 전체 1, 2, 3호의 원고를 합하여 178매에 달하는 많은 분량이었다.
『적기』는 노동대중을 기초로 한다는 운동방침에 입각하여 대중에게 읽을거리를 제공하며. 대중의 직접적인 이익을 대표하여 이 독자를 중심으로 당 재건을 하는 것과 아울러 분산되어 있었던 서울(나아가서 조선)의 공산주의 운동자들을 통일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적기』는 조직자이고 선동자이고 지도자 역할을 하였다.
『적기』는 현재 원본이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제1호는 일제 경찰의 번역을 통해서 대체적인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적기』 제 1 호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 기관지부 발행
1936년 10월 20일 정가 금 1부 5전
1. 창간선언
(1) 내외정세의 특징
파쇼전선과 반파쇼전선과의 전세계적 투쟁의 위기에 직면한 일본제국주의는 퍄쇼적 군사적 독재를 실시하고 중국의 약탈전과 세계 재분할 및 소국(蘇國) 공격준비에 단말마적 발광을 하고 있다. 그것은 자국뿐만 아니라 식민지인 조선에서는 더 한층의 야만적 착취와 압박으로써 전쟁 준비에 광분하고 있다. 제국주의적 경영을 통해서는 물론이고 세금의 2할 인상, 인플레이션의 강행(물가 폭등), 12시간 내지 18, 9시간의 노동, 2, 30전의 임금, 소작료의 25% 이상의 인상. 매호 평균 170~180원의 농민 부채 등으로 착취하고, 군대, 헌병, 경찰을 비롯하여 재향군인단, 국수회, 청년단, 애국부인회, 처녀회, 교풍회, 진흥회, 防水隊, 소방대, 國防義會 기타 모든 반동단체에 의한 제국주의적 자위대를 조직하여 항상 조선 전토를 계엄령과 마찬가지의 경계와 압박으로 지배하고, 작년 1년 동안만 해도 2000여 명을 검거하고 최근 3년간 우리들 혁명분자 만여 명을 검거 고문 투옥 학살하고 최근에는 중국공산당 만주부원 18명에 대한 사형까지를 공공연히 집행하였다. 이밖에 노동자 농민의 모든 집회 결사 언론을 금압 봉쇄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사소한 경제적 개선을 위한 실행까지도 관헌의 총검에 유린하고 말았다. 나아가서는 조선인의 언어, 풍속, 관습, 교육, 역사까지도 위조 약탈 동화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반혁명적 방파제인 민(족)개(량주의) 집단이 전쟁 준비에 대한 주구적 활동을 노골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것은 정간된 동아 중앙의 대동민우회운동을 보더라도 해를 보는 것보다 명료하다.
그러나 일본제국주의의 반동적 대중정책(大衆政策)과 야만적 백색테러와 병행하여(에 대항하여) 대중의 혁명열은 이것보다도 비상한 속도로 양양하였다. 노동대중의 전투적 파업은 작년 1년만을 보더라도 150여 건, 1만 8000여 명이 동원되었는데, 이것은 교묘한 정치적 투쟁과 결부되었으며, 소규모 경영에서 대규모 경영으로(철원 종방, 진남포日鑛, 흥남 朝窒, 부산 목포 삼화제사, 대전 군시, 경성 대창고무, 조선인쇄, 충남제사, 대륙고무, 의주광산, 大元금광, 川內시멘트, 부산 법량, 조선택시, 경성가구 등) 이행한다는 특성을 보여주었다. 작년 1년 사이 농민대중의 소작쟁의는 무려 2만 7000여 건으로 백여 만을 돌파하고 있다. 그것은 소작령의 근본적 개정, 세금인하, 부채감면, 수세료 반대 등 정치적 성질을 띤 것(박간농장, 불이농장)이 특이하다. 반전 및 백색테러(에 대한) 투쟁은 모든 현실투쟁과 결부되어 진전될 뿐만 아니라 경찰의 유치장과 감옥에서까지 전개되고 있다. 전조선 내의 모든 대중투쟁은 적색노조 및 농조, 당 및 공청재건과 직간접적으로 관련하여 전개되고 있다. 民政 社民 파벌 섹트에 대한 대중적 항쟁은 지금 모든 투쟁의 가운데에서 혁연하게 전개되고 있다.
(2) 우리 『적기』의 임무
우리들은 우리들의 힘에 적응한 사업을 강행하는 바에만 실질적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까닭에 우리들의 과도적 기관지 『적기』는 당면 혁명계급의 중심 강령과 현순간의 중요 간절한 제임무와 우리들 행동 슬로건과 대중의 중요한 부분적 요구를 기준으로 하여 정치신문의 성격, 즉 1. 일본제국주의의 모든 비밀에 대하여 정치적 폭로 항의 투쟁을 일으킬 것, 2, 民政 社民 파벌 섹트주의의 모든 행동에 대하여 비판 청산 극복 박멸할 것, 3. 대중의 모든 불평불만 반발 항의투쟁을 격발 추출 지도 집중할 것 등등을 중심으로 이론문제, 전술문제, 대중의 계몽을 위한 문제, 공장 내 제문제, 기타 문제를 취급하는 것을 임무로 한다.
(3) 당면 혁명계급의 중심 강령
1. 군사적 경찰적 파쇼적 일본제국주의의 조선 통치권력의 근본적 전복
2. 조선의 절대 독립
3. 노동자 농민의 쏘비에뜨 정부 수립
4. 조선 내의 일본제국주의의 회사 관공청 이왕직 사원 교회 기타 모든 기생 지주의 토지소유 소탕
5. 조선 내의 일본제국주의 및 금융재벌의 산업기구 특히 자본주의적 대경영은행(모든 은행을 단일한 전국은행으로 합동) 트러스트 콘체른 외 생산의 노동 쏘비에뜨 정부에 의한 관리의 실시
6. 하루 7시간 노동제의 실시
이에 조선에서의 당면 혁명의 성질은 사회주의 혁명의 강력한 전화경향을 가진 민족혁명 즉 부르조아 민주주의적 혁명에 의하여 규정된다. 이것이 즉 자본성 민주주의 혁명이다. 조선의 민족혁명은 반제국주의적인 동시에 반봉건적 혁명이다. 일본제국주의와 봉건귀족 및 토착 부르조아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투쟁은 1. 민족해방운동과 긴밀한 관계를 가질 것, 2. 농민대중과 강력한 동맹을 결성할 것, 3. 이 운동을 강력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 정치적 독자적 주체가 운동의 헤게모니를 잡아야 한다.
따라서 조선 프롤레타리아의 근본 방침은 농업혁명 문제와 민족혁명 문제와의 총체적 결합, 민족혁명운동의 소시민층에 대한 공산주의 운동의 절대적 독립성의 보장, 민족혁명운동에 대한 계급성의 부여에 있다고 규정할 수 있다.
(4) 행동 슬로건
1. 제국주의 전쟁 절대반대.
2. 제국주의 약탈전쟁을 조선 민족혁명전쟁으로 전화시키자.
3. 군사적 경찰적 파쇼적 일본제국주의 통치권을 타도하자.
4. 조선의 절대 독립
5. 노동자 농민의 쏘비에뜨 정부 수립
6. 농민을 위하여 일본제국주의의 회사, 관공청, 이왕직, 교회, 사원 기타 모든 기생적 지주 소유토지의 무상몰수
7. 농민쏘비에뜨에 의한 농경지 부족 농민에 대한 토지분배
8. 지주 금융조합 은행 고리대금업자에 대한 농민의 일체 債金의 소 탕
9. 농민에 대한 농경자본의 무이식대부
10. 수리사업의 확장 및 국가에 의한 관리
11. 일체의 신세 폐지와 누진적 소득세의 확립
12. 반파쇼 반제 인민전선의 확립
13. 적색노조와 적색농조의 조직 및 그 행동의 자유
14. 하루 7시간 노동제의 실시와 노동자 상태의 철저한 개선
15. 일본제국주의의 충복 민족개량주의 사회민주주의자의 철저한 박멸
16. 일본제국주의 통치하에 있는 모든 식민지의 해방
17. 스페인의 인민전선을 지지하자
18. 소동맹 중국전선을 사수하자.
이와같이 큰 당면 혁명의 중심 강령과 행동 슬로건은 다른 어떠한 계급 혹은 부분에서도 혁명적으로 도저히 실행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계급적 우월성으로 규정되는 생산 프롤레타리아의 맑스 레닌 스딸린주의적 실천에 의하여만 가능하다. 환언하면 맑스 레닌주의로 무장된 생산 프롤레타리아릐 볼셰비끼적 약속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우리들은 어떻게 하여야 대중의 급진성을 가장 신속하게 촉진시킬 수 있는가라고 하는 점을 고려한 결과, 다음과 같은 부분적 요구를 작성하고 그것의 혁명적 수행을 必期한다.
1. 민족적 계급적 정치적 투쟁의 자유
2. 파업 농민의 행동에 대한 경찰 군대의 탄압 반대, 파업 농민투쟁의 자유, 노조 농조 기타 모든 근로자 조직에 대한 무제한의 자유, 부르조아 지주에 대한 노동자 농민 투쟁에 조정제도를 적용하는 것과 관헌 재판소 경찰 등이 간섭하는 것 반대
3. 모든 사형제도의 철폐, 특히 정치범에 대한 사형 절대 반대, 경찰 횡포에 의한 모든 희생자와 정치범의 즉시 석방, 치안유지법, 출판법, 제령 제7호, 폭력행위취제법 철폐
4. 근로자의 출판 집회 언론 등의 무제한의 자유, 정치적 대중집회와 데모의 완전 자유, 모든 경영 내에서 경영위원회를 창립할 자유, 경여위원회의 승인, 프롤레타리아 자위단의 창성
5. 소작료 지불의 거절, 지주 부르조아에 의한 농민수탈 반대, 지주 고리대금업자 은행 트러스트 금융조합에 대한 농민의 모든 차금의 전멸, 집세 지불 겁, 수리조합비 지불 거부
6. 노동자 농민을 탄압하는 모든 법령의 철폐, 형평사에 대한 진정한 동정, 부인의 완전한 평등권, 모든 민족적 차별의 철폐
7. 반노예적 농노조건 반대, 기숙사적 속박 반대, 노동자 및 청년에 대한 노예제도의 낡은 형태인 연기계약제의 반대, 부인 청년의 이중 착취 반대, 동일노도에 대한 동일임금, 부인 및 아동의 공공연한 隱黙의 매매제에 대한 형벌
8. 부르조아적 산업합리화 반대, 성인에 대한 하루 7시간 노동제, 16세 미만의 소년에 대한 4시간 노동제, 18세 미만의 청년에 대한 6시간 노동제, 유년노동 금지, 1주 40시간제(현노동시간 중소공장 46시간), 1주 1회의 임금 전액 지불의 휴일과 1년 1회의 임금 지불의 2주간 휴가
9. 임금의 전반적 인상, 아내가 있는 노동자의 최저생활비 기준에 의한 최저임금 확립, 임금에서 공제 先取의 금지, 임금 지불의 지체에 대한 형벌
10. 부르조아 부담의 실업 질병 재해 노약 사망의 국가보험의 즉각 실시
이상,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
(5) 사형을 받은 중국공산당원 18명을 추도한다
(6) 파벌적 섹트주의 그룹을 대중투쟁에서 분쇄하자
(7) 러시아혁명 기념일은 가까이 왔다. 구체적 투쟁을 준비하자
(8) 사이비 조선민족혁명당을 대중적으로 폭로 비판하자
(9) 『적기』 반포자 독자의 주의는 다음과 같다
(10) 편집여언 : 적의 추구(追求)와 출판기구의 불비에 의해 체제가 불완전하여 지면상의 관계에서 대중 투쟁기사를 게재할 수 없었던 것과 이론에 편중하여 문구가 난삽하였던 일은 편집부에서 깊이 유감으로 하는 바다. 창간선언에서도 언급한 것과 같이 오르그 동지 제군을 상대로 하여 출판한 점을 보아 용서하여주기 바란다.
오르그 동지 제군, 현재 오르그에 대하여 월간(매월 20일) 적기가 혁명적 대중의 지지와 요구에 따라 대중을 상대로 하는 주간 일간으로 혁신할 것을 기한다.
적기 편집원 (이상)
『적기』 에 나타난 이재유과 이관술의 사상의 목표는 맑스 레닌 스딸린주의적 실천을 통한 노동자 농민의 쏘비에뜨 정부 수립이다. 이재유 특유의 자생적 공산주의 사상도 있지만 대개는 코민테른에서 내려오는 방침 그대로이다. 여기에 순수한 노동운동은 없다. 노동운동 모두가 조선공산당 재건과 운동을 통한 정치투쟁으로 귀결된다. 소련에서나 조선에서나 정통 공산주의에 이의를 거는 일체의 이론과 반론은 수정주의와 회색주의로 비판받으며 철저하게 배척되었다. 공산주의 사상과 공산주의적 기질 자체가 절대순수성으로 무장된 집념의 소산이었고, 그 무서운 집념 앞에서 모든 비판자들은 적으로 단죄되어 과감히 척결되었다.
다른 공산주의자들도 그러했지만 이재유도 공산주의적 순결성만을 지고지선의 가치로 여겼다. 그들에게 노동해방과 쏘비에트 정부 수립은 인생 최고의 가치요 목표였다. 그들에게 노동자 농민만이 인간이었다. 부르조아지든 쁘디든 소시민이든 그 외의 인간들은 노동자 농민이 생산하는 식품과 재화를 소비하기만 하는 기생충과 같은 존재였다.
이재유 등 1939년대의 공산주의자들이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많은 문제점을 가진다. 그러나 그 당시로는 공산주의자들의 사상과 주장 외에 뚜렷하게 조선인들의 인식과 감정에 호소하는 사상이나 주장이 없었다. 국내 인사들은 적극적이거나 소극적인 친일 행위를 하며 일상을 보냈고, 국외 인사들은 산개하여 독립운동과 투쟁을 벌이고 있었으나 뚜렷한 사상과 목표가 미흡했다. 이런 상태에서 이재유 등 공산주의자들에게 포용력을 갖고 민족 통합전선이나 연대전선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재유는 유순희, 전창수, 서구원, 최호극으로 이어진 검거와 고문 끝에 최호극으로부터 1936년 12월 25일 오전 11시에 창동 부근의 산중에서 이재유와 만나기로 한 정보를 캐내어 잠복한 일경들에게 체포되었다. 악랄한 고문을 거쳐 1938년 7월 12일 징역 6년의 판결을 받았다. 형기만료 후에도 끝내 석방되지 못하고 해방을 10달 정도 앞둔 1944년 10월 26일에 40세의 나이로 옥사하고 말았다.
이재유가 그렇게 죽고 말았다. 그러나 이름 석 자는 남았다. 다른 업적도 많지만 특히 『적기』 를 남김으로써 역사에 큰 사료를 남겼다. 형기를 마쳤는데도 석방하지 않고 계속 구금하는 예방구금제도를 보면 일제가 문화국가 시늉을 하며 얼마나 교활하게 야만 폭력적인 짓을 자행하는가를 볼 수 있다. 하기야 자기들의 국가안보와 국익을 위해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 한 국가 안에 순수한 의미의 지성인은 존재할 수 없다. 모든 지식인은 국가주의에 복무할 수밖에 없고, 극소수의 지성인이라고 해도 도저히 정신의 순수성을 지켜갈 수가 없다. 나치독일에도 지성인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고, 나치독일이 요구하면 부역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세계 어느 국가이든 폭력 정권의 치하에 사는 지성인들이 공통으로 겪는 딜레머이다. 그래서 인간은 지각이 있는 슬픈 동물이다.
이재유가 구속된 이후의 1937~1945년은 민족 앞에 닥친 극도의 위기이지만, 일제의 패망이 가시권에 들면서 해방의 태양이 바다 밑에서부터 조금씩 솟아오르던 때였다. 악에 받친 일제의 가혹한 탄압하에서 가까스로 검거를 면한 공산주의자들은 잠복이라는 현명한 방법을 사용하며 해방을 기다렸다. 그러나 해방될 때까지 일제의 감옥은 사상범으로 분류된 공산주의자들로 만원이었다. 그러나 민족주의자들은 침묵하거니 소극적 친일로 일제에 협조하면서 연명했다.
이미 해내외의 많은 지식인들이 일제 패망과 조선의 해방과 독립을 예상했는데도 왜 치밀 견고한 건국 준비를 하지 못했는가. 임정과 여운형계에서 1년 전에 준비했지만 미군정의 거부와 탄압으로 임정과 건준이 불발되고 말았다. 미국이 임정이나 건준을 허락만 했어도 분단과 전쟁을 막을 수 있었다. 미국은 에치슨라인을 긋고 미군을 철수시켰다. 그래놓고는 북한군이 남침하자 사흘 만에 참전했다. 남한이 에치슨라인 밖이라면서 일부러 북한의 남침을 유도했다. 한반도 전쟁을 일으키도록 유도하고 방관한 미국의 목표가 무엇인가. 한국전쟁이 끝난 75년 후인 2024년에도 여전히 미국의 군사력은 한반도 남부를 장악하고 있다. 걸핏하면 핵항모들이 한반도 주변을 어슬렁댄다. 미국이 1898년 필리핀을 식민지로 만든 이후 124년이다. 지금도 여전히 아시아를 막강한 군사력으로 지배하고 있다. 세계 모든 국가의 빈자와 부자들이 미국 이민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있다. 이민자의 구가 미국은 ’이민의 가치‘가 최고선이다. 글로벌시대와 신자유주의 무역이라는 교활한 뱀의 혀와 같은 명분을 내세우며 이민의 국가인 미국이 세계를 늑탈하고 있다. 영고성쇠는 고금의 이치인 법, 아시아에서 미국이 퇴조할 때는 언제쯤일까.
미국은 서양 백인종의 이중인격성이 집약된 국가이다. 자기들끼리는 고급문화를 누리는 교양인이지만, 외부의 약소국민에게는 양키 근성을 직접 쏘는 근성을 가진 무리이다. 그들의 심성은 기독요에 바탕을 둔다. 기독교인은 같은 교인들끼리는 입안에 든 사탕도 꺼내 줄만큼 친절하지만. 이교도에게는 냉혹하고 잔인하다. 십자군전쟁 때도 그랬다. 기독교 일극사상을 가진 그들은 다극과 타종교를 기질적으로 용납하지 않는다. 반드시 점령하여 기독교로 개종시키거나, 말을 안 들으면 박멸해버린다. 유일신 사상은 근본적으로 반인문주의이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자기들이 지구상에서 유일한 국가이다. 그래서 도전해오는 러시아와 중국을 용납하지 않는다.
미국인들이 변화하려면 유일신, 즉 기독교적 사고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려면 기독교부터 붕괴, 해체되어야 한다. 기독교를 붕괴, 해체할 수 있는 방법은 외부의 자극이 아니라 내부의 자극이어야 한다. 외부적 접근이 아니라 내재적 접근이어야 한다. 그 내재적 접근법으로 가장 유효한 것은 우주물리학과 분자생물학으로 집약되는 과학적 인식체계이다. 계산에 빠른 미국인들은 과학적 인식에서도 빠르다.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가치를 선호하는 미국인들이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기독교의 논리체게가 합리적이었고, 생활을 즐기는데 실용적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추종했다.
그러나 현대물리학과 분자생물학이 제시하는 합리성과 실용성은 기독교적 가치를 초월한다. 기독교적 가치를 모두 포함하면서도 사고의 범위와 깊이가 훨씬 넓고 깊다. 지구는 넓고 깊다. 우주는 더 넓고 더 깊다. 하나님과 예수는 지구에 있지만 우주에는 하나님과 예수를 초월하는 지혜롭고 영특한 존재가 수두룩하다. 지구는 一元이고 一極이지만 우주는 多元이고 多極이다. 미국이 현대에 들어서서 세계 최고의 패권국이 된 것은 미국인들이 영리하기 때문이다. 멀잖아 영리한 미국인들은 인간과 인생의 참다운 가치가 多元과 多極에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松溪 박희용의 麗陽南禪軒 독서일기 2024년 8월 23일 금요일]
김경일 지음 『이재유 연구』 제 9 부
이재유와 일제하 변혁운동 (5)
저자 김경일은 1. 민족문제와 계급문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20년대 후반 이후 식민지 민족운동의 한계에 따라 민족주의는 민족개량주의로, 나아가서 때로는 친일 매판과 동일한 것으로 공공연하게 인정되는 일정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상적인 민족주의자로 출발하였던 이관술은 ’민족주의자들의 냉담, 비겁한 것과 일제와의 타협‘ 등을 보고 오직 공산주의만이 계급의 이익뿐만 아니라 민족해방에서 유일한 지침이요 정당한 노선이란 결론을 얻어 공산주의자가 되어버렸다고 술회하였다. 이 시기 공산주의자들의 대다수는 식민지하의 민족적 차별에서 출발하였으며 따라서 그 기저에는 기본적으로 민족주의 사상이 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재유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재유는 독자적인 공산주의자로 인정되기를 바랐다. 맑스 레닌주의 운동의 이론과 방식에 입각하여 그는 운동을 시작하였으며, 사상적 혼란과 불명료함 조차도 없이 구체적 실천을 통하여 더욱 완전한 볼셰비끼로 성장하였다. 그는 이 시기 대중적 기반이 미약하였던 상태에서 조성된 관념적이고 급진적인 공산주의 운동의 문화적 영향권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는 비합법 위주의 운동방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민족 부르조아지는 ’포섭‘이나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 일관되게 ’타도의 대상‘이었으며, 파벌의 지양과 운동선의 통일문제 역시 지속적인 추구에도 불구하고 끝내 해결되지 못한 과제였다.
그러나 이 시기 공산주의 운동을 이와같이 일방적으로 매도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비록 한계는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 운동은 식민지의 노동자 농민들에 대한 헌신이라는 대의를 표방한 유일한 대안이었다. 반제운동과 민족혁명의 이상을 품고 특히 30년대 이후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일제에 의해 체포, 고문, 학살되었던 것도 거꾸로 이 사상이 일제의 식민통치에 얼마나 위협적이었는가를 증명하는 것이다.
이재유가 다른 공산주의자들과 구분되는 점이 있다면, 상당수의 공산주의자들이 현실적인 민족주의의 무능력과 한계에 촉발되어 그것을 민족개량주의로 매도하면서 계급주의에만 매몰되어 민족문제를 등한시하고 있었던 반면에 민족혁명적 관점을 일관되게 유지해왔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는 혁명적이었던 만큼이나 민족적이었다.」
그러나 이재유의 생각과 사상을 집약한 『적기』에서 보면 맑스 레닌주의에 철두철미한 공산주의자의 모습만을 보일 뿐이지 부르조아지와 민족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매우 격렬하게 비판하며 반대하고 있다. 그의 글 어디에도 민족주의적 기준과 기치를 찾을 수 있는 부분이 없다. 기본적으로 그 당시의 민족주의자들은 개량주의와 사회민주주의 등을 우회의 방편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어느 누가 본심으로 일제에 타협하고 협조를 하려고 했겠는가. 그러므로 모든 민족주의자들까지 폭넓게 포섭할 수 있는 대동전선, 연대전선의 형성이 필요했다. 공산주의 사상만을 철저하게 강조한 탓에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공산주의자에게 적이 되고 말았다. 당시로서는 비록 일본인이라 할지라도 적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조선인들을 적으로 만들어서는 공산주의 운동뿐만 아니라 민족해방 운동에 많은 차질과 장애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어서 저자는 2. 국내주의와 국제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재유는 평소에 늘 자신은 결코 해외에 나가지 않을 것이며 죽어도 조선에서 죽으며 최후까지 국내에서 활동하리라고 말했다. 이재유가 비판하며 거부하였던 것은 국제노선에 대한 무비판적이고 맹목적인 추종, 교조적이고 경직된 이론에 대한 고수, 주체적으로 운동방침을 세우지 못하고 외부의 권위에 의존하려는 안이한 현실인식, 대중적 기반 없이 소수의 운동자들로 조직을 결성하여 일거에 혁명을 달성하려는 관념적이고 급진적인 태도 등이었다. 그러나 그는 ‘국제공산당의 정당한 지도와 계통적 연락을 정립하는 것’을 자신의 그룹이 당면한 주요한 조직적 임무들 중의 하나로 상정하였다. 그러나 코민테른을 비롯한 국제 혁명운동조직은 식민지 조선의 운동에 대한 체계적이고 일관된 방침을 효과적으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재유가 최종적으로 검거되어 옥사함에 따라 국내주의와 주체적 전통은 부정되었으며, 이에 따라 국제주의 노선이 운동의 헤게모니를 장악하였고 이러한 상태는 해방 이후 남로당 시기까지 지속되었다.」
상해에서 중국공산당 관계자들의 지도를 받던 박헌영이 1933년 7월 5일에 일본영사관 경찰에게 체포되어 한성으로 압송되어 1934년부터 수감생활을 하다가 1939년 9월 40세에 대전형무소를 출옥했다. 이재유는 3년 전인 1936년 12월에 체포되어 수감생활 중이었다. 출옥 석 달 후인 12월 12일에 이재유의 동지로 경성콤그룹의 지도자인 이관술과 처음 대면하고, 인천 아지트에서 이관술, 이순금과 운동을 협의했다. 1940년 1월부터 청주 비밀 아지트에 기거하며 지하운동에 몰두했다. 2월부터 1여년간 서울 비밀 아지트에서 기거하면서 지하운동에 종사하기 시작하고, 3월에 경성콤그룹기관지 『공산주의자』 제호를 『꼼무니스트』로 바꾸었다. 1941년부터 경성콤그룹 제1차 검거사건을 피해 대구로 피신하고, 1942년에는 제2차 검거망을 피해 광주로 피신했다. 1944년부터 광주 벽돌공장 노동자로 일하며 은신하다가 해방이 되자 1945년 8월 17일 서울에 도착했다. 8월 18일 저녁 경성콤그룹 간부회의를 개최하고 서울 주재 소련영사관과 접촉했다. 20일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9월 11일 조선공산당을 재건했다.
역사에 가설은 불필요하지만, 만약 이재유가 살아있었다면 경성콤그룹의 지도자는 당연히 이재유였고, 조선공산당의 당수도 이재유였을 것이다. 일제 막바지인 1930년대 말에서 해방될 때까지 비록 지하에서지만 유일하게 살아남아 활동하고 있었던 조직은 경성콤그룹이었다. 그 조직을 만든 사람이 이재유다. 박헌영은 이관술에 의해 경성콤그룹의 지도자로 초빙되었다. 이관술이 직접 지도자 역할을 할 수도 있었지만 아마 그는 지도자보다는 참모 역할에 만족한 것 같다. 박헌영이 경성콤그룹에 들어가서 조직을 장악했기 때문에 해방 이후에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경성콤그룹이 박헌영의 디딤돌이 되었고, 그 디딤돌을 딛고 조공을 재건했다. 그 조공이 북한정권에 편입되면서 독자성을 상실했다. 이관술이가 지인지감이 있었을까?
그렇다면 이재유가 경성콤그룹을 조직할 때의 취지와 목적이 박헌영에게 가감 없이 전해졌는가? 박헌영은 경성콤그룹기관지 『공산주의자』 제호를 『꼼무니스트』로 바꾸면서 이재유 냄새를 씻어내고 경성콤그룹을 박헌영 조직화하였다. 제호를 소련어로 바꾼 데서 보듯이 박헌영은 철저한 국제선이다. 그러니 이재유의 국내선, 즉 조선식 공산주의는 박헌영에 의해 도태되고 말았다.
해방공간에서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이 어떠한 정치를 했는가는 이미 현대사의 상식이다. 결국 박헌영 그는 월북하여 북조선의 부수상이 되었고, 수상 김일성과 함께 소련과 중국에 가서 남침 허락과 군비 지원을 구걸한 끝에 동족상잔의 남침전쟁을 벌이고 말았다. 그러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해 이재유가 목숨을 바쳤을까?
아니다, 이재유는 겉은 공산주의자였지만 속은 뜨거운 민족주의자였다. 그가 살아서 조선공산당을 재건했다면, 미군정에 체포되더라도, 그의 말대로 절대로 서울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동지였던 김삼룡과 이현상도 월북하지 않고 남조선에서 버텼다. 그러나 박헌영 등 국제선들은 모두 월북하였다. 당권을 잡았다면, 남로당으로 전락하지 않고 서울 중심의 조선공산당의 정체성을 유지했을 것이다. 미군정이 탄압을 강화하며 지하공작과 극한투쟁을 유도해도 적절하게 대응하며, 서유럽의 공산당 노선처럼 합법정당의 입장을 유지했을 것이다. 그리고 여하의 명분과 목적으로라도 절대로 동족상잔의 전쟁을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소련과 중국이란 국제선에 매달려 전쟁 허락과 군비를 구걸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안타까운 가설일 뿐.
이재유 그가 목숨을 바치며 만든 경성콤그룹이 박헌영의 손에 넘어가서 조선공산당으로 이어져서 결국 남침전쟁의 주범이 되고 말았으니, 이재유 그가 저승에서 얼마나 통곡하였겠는가. 74년이 지난 지금도 통곡하고 있을 것이다. 김일성과 박헌영이 문밖에서 쭈빗쭈빗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