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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은 운동의 수(數)” 라는 명제를 남겼다. 그런데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아직까지 불확실하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이를 두고 ① 시간은 측정할 수 있다 (measurable) 는 뜻이다고 풀이한다. 또 다른 이론은 ② 시간은 연속이다 (continuous) 라고 해석한다. ③ 시간은 일종의 질서이다 라고 해석을 한다. 그러나 필자(안재오)의 의견은 이렇다 : 여기서 수(數)란 말은 전(before)과 후(after)를 말한다. 즉 2개를 말한다 고 해석을 한다. 운동은 전과 후가 있다는 말과 같다. 따라서
전과 후 없이는 운동은 수가 아니다. 운동과 변화는 반드시 전과 후, 앞과 뒤가 있다. 이는 달리 말해서 과거와 미래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관점하에 논의를 시작한다.
철학의 항해 106 :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론 : 지금과 시간
(1) 시간론의 대가(大家): 아리스토텔레스
서양철학에 있어서 시간 개념은 철학의 중요한 주제이다. 이는 20세기에 와서 하이데거라는 철학자가 그의 철학에서 시간을 인간 존재의 중요한 양상으로 파악함으로써 더욱 각광을 받고 있다.
그런데 시간의 개념은 아주 다양하다. 우선 시각(time)이란 관점이 있고 그 다음은 시간(hour)라는 관점이 있다. 이는 초등학교 수학에 나오는 아주 기본적인 시간의 의미이다. 시각이란 시간적인 위치를 말한다. 예를 들어서 3월 15일 혹은 오후 2시 30 분 등을 말한다. 시간이란 표현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시간의 길이”를 말한다, 예를 들어 3일 혹은 1년 등의 표현을 말한다.
그런데 B.C. 5세기 최로로 시간을 정의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는 이 두 가지가 잘 구분이 안 되어 때때로 그의 사상이 어렵기도 하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 존재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시간성 혹은 역사성을 제대로 규명한 사람이다. 그 이후 2500년 동안 시간론은 그렇게 큰 발전은 없다고 본다.
물론 시간론에서 고대의 신학자, 철학자인 어거스틴의 시간론도 중요하다. 그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에 나타난 시간 이론을 살펴보면 어거스틴의 문제의식이 이미 나타나 있다. 즉 “시간과 영혼의 문제”이다.
어거스틴은 우리가 시간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시간은 외부에서 관찰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의식 속에 존재한다: “내가 시간을 측정하는 것은 바로 내 마음 안에 있다”. 우리의 의식은 일어난 일, 일어나고 있는 일, 일어날 일을 구분할 수 있기 때문에 강력한 도구라고 가르친다.
이런 어거스틴에 앞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의 문제를 항상 의식과 연관을 시키고 있다. 그런 면에서 그는 벌써 20 세기 철학을 앞지르고 있다. 보통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의 정의는 이른바 “운동의 수(數)” 이다. 그러나 이것이 완전히 물리학의 스토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아리스토텔에스의 시간 이야기는 벌써 주관주의적인 관점이 전제되고 있다. 뒤에서 다시 다루겠으나 지금 (Now) 이란 개념을 설정할 때 그는 의식과 영혼의 개입을 염두에 두고 있다. 단 여기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영어식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아리스” 라고 약자로 부르기로 한다.
시간의 이론이 이렇게 중요한 것은 인간의 시간성 때문이다. 인간의 생존과 행동은 시간을 의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인간은 항상 과거, 현재, 미래를 의식하면서 살아간다. 우리는 항상 변화와 발전을 목표로 한다. 오늘 보다는 내일을 바라보고 살아간다.
시간 개념이 심오한 것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개념이 객관적이며 동시에 주관적이라는 것이다. 시간을 연대기적으로 보면 당연히 100% 객관적이다. 즉 1945년에는 해방이 되었다. 1950년에는 6.25전쟁이 일어났다 는 등의 사실을 말한다. 그러나 이런 객관적인 것만으로 시간이 나의 삶에 미치는 중요한 의미를 하나도 파악할 수가 없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과거, 현재, 미래 등의 흐름이고 또 이전 before 과 이후 after 이라는 시간의 구분이다. 여기에는 지금 now가 들어간다. 이런 면에서 시간은 철저히 주관적이다. 아리스의 운동 motion 혹은 이동 locomotion 과 변화 change는 사실 위의 주관적, 객관적인 시간의 의미를 모두 포함시키는 개념이다.
그간 많은 학자들이 이를 모르고 운동의 수를 객관적, 물리적인 개념으로만 오해를 해 온 것이다. 이런 면에서 아리스의 시간 개념은 변증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견해 아래 아리스의 시간 이론을 몇 가지 살펴 보겠다.
(2) 시간과 지금 time & now
시간의 문제를 규명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지금과 시간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필자는 아리스의 시간 이론이 주관적이라고 말한 것이다. 왜냐하면 알다시피 지금 이란 단어는 내가 산출하기 때문이다. 즉 나의 의식과 나의 영혼 없이는 지금 이란 개념이 설정이 안 된다. 시간 현상의 핵심적인 요소가 바라 지금 now 이다. 그 후의 철학자들은 이를 놓치고 있다. 아리스는 하루 이틀 혹은 1년, 2년 하는 시간의 길이와 더불어 시간론을 출발시키지 않는다.
중요한 문장은 지금이 시간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시간은 지금들로 구성되지 않는다” (218a)는 것이다. 이는 다른 맥락에서 볼 때에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흐름 도표에서 현재가 시간의 부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은 과거와 미래를 나누는 경계선이다. 이런 정도의 사상은 누구나 아는 것이기는 하지만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아리스의 시간이 이처럼 현재라는 의식과 더불어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개념의 알맹이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알맹이가 있는 말이란 문자가 지시하는 대상이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예를 들어 둥근 사각형이란 문자 표현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둥근 사각형에 대응하는 도형이란 있을 수가 없다.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에서는 이를 시니피앙(기표)와 시니피에(기의)라고 한다. 기표(記表, 프랑스어: signifiant 시니피앙)와 기의(記意, 프랑스어: signifié 시니피에)은 페르디낭 드 소쉬르에 의해 정의된 언어학 용어이다.
아리스는 시간에 관해서도 그런 문맥에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시간이란 말을 수없이 쓰기는 하나 과연 여기에 상응하는 기의(記意가 있느냐는 것이다. 우선 위에서 본 것처럼 아리스는 지금의 기표와 기의를 통해서 시간을 규정한 바 있다. 시간이란 말의 기의가 없다면 인간들의 대화와 행동은 무의미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우선 보이지 않는 개념이기 때문에 그 의미를 규정하기는 극히 어렵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 문제 탐구의 어려움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였다. “도대체 시간이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받지 않았을 때, 나는 막연히 대답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해 설명하려니 비로소, 답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간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은 뭔가 알 것 같은데 설명할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시간의 속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 사람들은 누구나 “지금” now 라는 말을 쓴다. 그리고 과거에서 본 지금 prior now 도 있다. 또 셀 수 없는 지금, 무한한 지금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지금은 이처럼 상대적인 측면이 있다.
시각이라는 측면에서 지금은 특정이 된다. 즉 지금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주어진 상황에서 모두 다르겠지만 그것은 전(前)과 후(後), before & after를 잘라서 나누어 준다는 의미에서 경계선이다. (218a) 이는 마치 칼로 무를 두 동강 내는 것과 같은 이미지를 가진다. 이런 이야기는 우리의 실존적인 삶과도 짙은 연관성을 가진다. 즉 과거와 미래를 자르는 칼이 지금이라는 것이다. 과거의 삶과 미래의 연결을 갈라주는 것이 지금이다. 물론 실존적인 생활에 있어서 지금은 의지와 결단을 함축한다.
(3) 시간과 운동
지금이란 개념으로부터 시간의 본질을 밝힌 아리스는 운동과 변화 등을 통해서 시간의 객관적인 의미를 추구한다. 시간은 인간의 역사성의 증거이다. 즉 인간은 항상 전(前)과 후(後)라는 관점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 행동 역시 운동의 일부이다. 운동의 근본적인 특성이 시간성이다. 운동과 변화는 근본적으로 시간의 함수이다. 운동은 시간을 따라 진행이 된다. 바깥의 사물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내부 즉 마음도 움직인다. 시간이 흘러갔다 라고 느끼는 것도 마음의 변화와 운동을 전제한다. 다시 말하면 마음의 변화가 있을 때 우리는 시간이 흘러갔다 라고 느끼는 것이다. 이 점에서 아리스는 시간을 단순히 시간의 길이로 본 것이 아니라 영혼의 관점에서도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그의 시간론은 어거스틴의 내재적 시간론이나 하이데거의 실존적 시간론을 이미 앞서 가고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 시간론의 출발점은 지금과 시간의 정립이다. 시간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가 지금이다. 삶에 있어서 중요한 시간과 장소가 바로 “지금, 여기서” 이다. 과거나 미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지금이다. 아리스 역시 이와 같이 생각한다. 지금에서 시작하여 과거와 미래 그리고 전(before)과 후(after)를 도출하는 것이다. 그는 전(前)과 후(後)를 지금의 변형이라고 본다. 그래서 그는 전과 후를 두 개의 지금이라고도 표현한다. 그 이유는 전(前)도 한 때는 지금이었고 후(後)는 미래의 지금이다.
지금이라는 시간이 가장 확실하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전과 이후 혹은 과거와 미래라고 하는 시간의 양상이 등장한다.
전과 후를 아리스는 양극단이라고도 부른다. 극단 사이에는 당연히 중간이 있다. 중간은 지금을 가리킨다. 지금은 전과 후를 가르는 기준이다. 예를 들어 1945년 이전과 이후라고 할 때를 상상해 보자. 이 때의 지금은 벌써 예전의 지금이다. 따라서 지금이 반드시 말하는 순간이 아니라 전과 후 혹은 과거와 미래를 분리하는 기준이 되는 시간을 말한다. 위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런 지금을 “과거에서 본 지금” prior now 라고 했다.
아리스 왈(曰) : “우리가 극단을 중간과 다른 것으로 생각할 때 그리고 마음이 '지금'이 두 개가 있다고 소리낼 때, 즉 하나의 지금은 이전이고 다른 하나의 지금은 이후라고 소리낼 때, 우리는 시간이 있다고 말하고 우리가 말하는 것이 바로 시간이다”. (219a)
이처럼 아리스는 지금에서 출발하여 전(前)과 후(後)를 언급하고 이들을 모두 포괄하는 말을 시간이라고 한다. 전(前)과 후(後)는 동시에 시간 뿐이 아니라 운동이라는 현상을 지시한다.
왜냐하면 전후는 반드시 어떤 사건들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사건은 변화와 운동 등의 개념과 연결된다. 철학적으로 운동 역시 변화의 일부이다. 다시 말하면 운동은 어떤 물체의 공간적, 시간적 변화를 의미한다.
사실 전후라는 개념은 시간보다 운동에 더욱 중요하다. 운동은 처음부터 전과 후 그리고 연속 등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런 면에서 전후는 시간과 운동을 연결하는 공통 개념이다.
아리스 왈(曰) : 반면에 우리가 '이전'과 '이후'를 인식할 때 우리는 시간이 있다고 말합니다. 시간은 '전'과 '후'에 대한 이러한 움직임의 수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219b)
위에서 지금이 반드시 말하는 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서 본 지금 prior now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전후 개념 역시 항상 같은 것을 지시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전후는 사실 여러 사건과 결부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1945년 전에는 일제 강점기였다. 그 후는 대한민국의 독립된 시기이다 등의 표현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이런 식의 수 많은 경우가 있다.
이런 차원에서 아리스는 시간은 운동의 수(數)라고 규정한다. 여기서 수란 말은 시간의 길이 개념이 아니라 전과 후처럼 시간이 나누어 지는 것을 말한다. 또 위에서 말한 것처럼 전과 후가 여러 가지 쌍으로 늘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게 아리스의 시간론의 핵심이다. 사실 이는 아주 단순한 사실이지만 시간의 본질을 밝히기 위해서는 이런 기본적인 정의가 필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아리스는 “시간은 전과 후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본 운동의 수(數)” 라고 말했다.
시간은 전과 후라는 개념이기에 앞서 운동과 밀접하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덧붙여 운동의 수는 굳이 말하자면 시간의 길이(hour)가 아니라 시각(time)을 지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운동과 시간은 뗄 수 없지만 서로 다르다는 것은 자명하다. “시간은 운동이 아니고 운동으로부터 독립할 수도 없다”. (219a)
그런데 운동은 운동하는 물체를 전제한다. 즉 운동은 실은 항상 어떤 것이 움직인다는 말과 같다. 어떤 것을 물체(body)라고 하자.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시간은 지금을 전제한다. 아리스는 이런 두 가지 것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더 나아가서 아리스는 운동과 물체 그리고 시간과 지금을 연결을 시킨다.
“그러나 시간이 운동에 상응하듯이 지금은 운동중인 물체에 상응한다”. But the ‘now’ corresponds to the body that is carried along, as time corresponds to the motion (219b)
현대 물리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물체)의 운동은 항상 물체 외부의 힘에 의해서 야기되기 때문에 물체가 가진 속성이 아니다. 이런 현상을 근대 물리학의 아버지 뉴턴은 관성의 법칙이라고 불렀다. 이런 과학적인 법칙이 아리스의 시대에는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운동을 속성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아리스의 자연철학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보는 봐와 같이
지금과 시간이 구별되고 물체와 그 운동이 구별된다. 그런데 물체와 그 운동의 결합은 우연적이다. 즉 물체 A는 운동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다. 위의 문장은 정지해 있는 물체에는 적용이 안 된다. 즉 운동하지 않는 물체에 대해서는 지금이나 시간이 적용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정지한 물체에게도 시간과 지금이 적용이 된다. 즉 10분 전의 돌이나 10분후의 돌은 같은 돌이다. 이런 맥락에서 아리스의 운동-시간 이론은 한계를 지닌다. 아리스 역시 이런 점을 고려하여 항상 움직이는 물체에 한해서 시간-운동의 논리를 적용한다.
아리스는 정지한 물체를 도외시하고 오직 움직이는 물체만을 가지고 그의 시간 이론을 개발시켜간다. 여기서 그는 그의 철학의 이론인 실체(substance)와 속성(attribute)을 응용한다. 즉 물체는 실체에 해당시키고 운동은 속성에 해당시킨다. 마치 물체가 운동을 속성으로 가지고 있는 듯하다.
시간에 있어서도 지금이 실체이고 전과 후는 속성이라고 한다. 물체도 마찬가지이다. 물체는 실체 혹은 기체(substratum)이고 운동은 속성이라는 것이다. 이를 다시 설명하면 지금이 시간에 따라 흘러가는 어떤 시각이 아니라 시간의 본질 즉 영원한 순간이라는 역설을 말한다. 이는 보통 상식과는 맞지 않다. 운동하는 물체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런 전제 위에서 아리스는 지금과 시간을 들고 온다. 그것이 바로 위의 문장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이 이론을 더욱 확장한다.
이처럼 물체와 지금을 결부시키는 사례를 아리스는 소피스트들의 논변을 이용하여 다시 설명한다. 소피스트들은 “라시움에 있는 코리스쿠스와 시장에 있는 코리스쿠스는 서로 다르다” 라는 논변을 제기한다. 아리스는 이를 맞고 또 틀리다고 해석을 한다. 즉 코리스쿠스라는 인물은 동일한 사람이나 그가 다른 장소에 있기 때문에 다른 존재라고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두 곳의 장소에 있는 사람은 다른 시간에 다른 2곳의 장소에 갔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코리스쿠스의 수(數)가 1 또는 혹은 2라고도 할 수 있다. 보통은 한 사람으로 본다. 그러나 소피스트들의 주장처럼 “라시움에 있는 코리스쿠스와 시장에 있는 코리스쿠스는 서로 다르다” 라고 하면 두 사람이 된다.
이런 측면에서 아리스는 시간은 운동의 수(數)이다 라고 말한 것이다.
코리스쿠스 라는 실체는 동일하다, 그러나 그의 상황은 다르다. 예를 들어 방학 전에는 전에는 학교 있었고 그 후에는 시장에 있었다. 학교에 있는 코리스쿠스와 시장에 있는 코리스쿠스를 같은 사람으로 본다는 것은 우리가 코리스쿠스의 불변적인 실체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저런 장소와 상태의 인간과 구별되는 불변적인 인간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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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철학의 항해 106 :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론 (요약)
서양철학에 있어서 시간 개념은 철학의 중요한 주제이다. 이는 20세기에 와서 하이데거라는 철학자가 그의 철학에서 시간을 인간 존재의 중요한 양상으로 파악함으로써 더욱 각광을 받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 존재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시간성 혹은 역사성을 처음으로 제대로 규명한 철학가이다. 그 이후 2500년 동안 시간론은 그렇게 큰 발전은 없다고 본다.
물론 시간론에서 고대의 신학자, 철학자인 어거스틴의 시간론도 중요하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 “물리학” (Physics)에 나타난 시간 이론을 살펴보면 어거스틴의 문제의식이 이미 나타나 있다. 즉 “시간과 영혼의 문제”이다.
어거스틴은 우리가 시간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시간은 외부에서 관찰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의식 속에 존재한다: “내가 시간을 측정하는 것은 바로 내 마음 안에 있다”. 우리의 의식은 일어난 일, 일어나고 있는 일, 일어날 일을 구분할 수 있기 때문에 강력한 도구라고 가르친다.
이런 어거스틴에 앞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의 문제를 항상 의식과 연관을 시키고 있다. 그런 면에서 그는 벌써 20 세기 철학을 앞지르고 있다. 보통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의 정의는 이른바 “운동의 수(數)” 라고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물리학의 스토리가 아니다. 그는 시간의 개념을 지금에서 시작한다. 지금과 전·후 개념을 통해서 시간을 규정하고 다시 이를 운동과도 결부시킨다. 아리스토텔에스의 시간 이야기는 벌써 주관주의적인 관점이 전제되고 있다. 그는 지금 (Now) 이란 개념을 설정할 때 그는 의식과 영혼의 개입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는 시간이란 주관적인 관념과 운동이란 객관적인 관념을 수(數)라는 제 3의 관념을 통해서 연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면을 2500년이 지나면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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