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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교회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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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교 † 정보 스크랩 귀츨라프 선교사
21마라나타 추천 0 조회 263 17.07.06 13:1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조선 땅을 밟은 첫 선교사, 귀츨라프

말레이시아는 한국기독교와 무슨 관계가 또 있을까? 1832년 9월, 한국 천주교의 초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받은 브뤼기에르(Bruguiere) 신부가 "페낭"(Penang)에서 한국으로 출발하였을 때, 이미 같은 해(1832년) 2월, 귀츨라프(Karl Friedrick August Gutzlaff)선교사는 광동에서 한국으로 출발하였고, 7월 17일 한국 서해안에 도착하여 조선 땅을 밟아 한국 개신교의 첫 선교사가 되었다.

귀츨라프 선교사는 런던선교회 소속으로 앰허스트(Amherst)호란 동인도회사 소속 상선을 타고 “통역관”(通譯官), “선의”(船醫), “선목”(船牧) 신분으로 1832년 7월 17일 한국 서해안에 도착한 것이다. 그는 조선 국왕 순조폐하께 통상교섭 요청서한과 성경 등을 선물로 드리고, 조정으로부터 회답을 기다리며 고대도, 대청도, 간월도 등 홍성, 해미(당진) 앞 바다 뿐 아니라 강화도와 황해도 몽금포까지 다니면서 한국인을 만났고, 주기도문을 번역하고 전도문서와 성경을 나눠 주며 기뻐하였다.

귀츨라프의 1832년 7월 26일자 “항해기”를 보면, 국왕께 성경을 전달하고, 이 보다 “더 귀한 예물이 있을까?” 기뻐하며, 행복에 잠겼고, 그 행복이 영원하기를 기도하였다.

“이제는 이 고립된 나라의 통치자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은총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소망하였다. 죄 많은 인간을 위해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보다 국왕에게 더 귀한 예물이 있을까? 국왕에게 그러한 구원의 교리를 전해줄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이 매우 기뻤으며, 한 동안 나는 행복에 잠겼고 그 행복이 영원하길 소망하였다.”

또한 8월 11일자 “항해기”에는 그의 소망과 서둘러야할 일로 “십자가의 진리를 전파하는 일“이라 기록하였다. 즉,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큰 섭리로 그들을 방문할 때가 있을 것이다. 이것을 소망하면서 우리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영광스러운 십자가의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이어서 국왕과, 관리, 주민들에게 성경을 전달한 것을 기록하며, “조선을 위하여 좋은 날들이 밝아오기를 희망할 뿐이다.”고 기원하고 있다.

귀츨라프는 감자도 심어주며 재배법을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한국의 산천을 보고 땅은 비옥한데 개발하지 않고 있음을 안타까워하였다. 그는 조선이 곧 개방될 것이라 믿었으며, 한국 관리들과 주민들의 순박함과 친절함에 좋은 인상을 받았다. 비록 한 달간 머물다 제주도를 경유하여 8월 17일 떠나면서도 “이 같은 섬을 선교기지로 할 수 없을까?” 생각했고, 일본-조선-중국을 향한 선교기지로 “제주도에 선교본부” 설립을 소망하여, 선교사로써의 통찰력과 복음전도의 사명에 불타는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항해기,1832년8월17일)

귀츨라프는 누구인가?-“갠지스 넘어 선교회”(Utra-Ganges Mission)를 본받아

귀츨라프는 1803년 6월 6일 프러시아의 포메라니아에서 출생하였고, 국적은 독일인이나 폴란드계 유태인으로 경건한 신앙적 분위기에서 성장하였다. 귀츨라프는 모라비안 교도의 신앙과 복음주의 운동에 영향을 받아 경건과 헌신, 겸손과 근면, 전도와 봉사의 생활을 추구하였다. 귀츨라프는 개신교 중국 최초 선교사인 모리슨(Morrison)의 중국선교에 관한보고 및 간증 집회에 감동을 받아 중국 선교사로 지원케 되었다.

귀츨라프는 1826년 루터교 목사로 안수 받고, 7월 20일 네델란드 선교회 선교사로 파송 받아 동남아시아로 향했다. 그는 1827년 1월 6일 바타비아(자카르타)에 도착하여 슈마트라 섬 등지를 다니며 순회전도 활동하였으나 전쟁과 정치적 혼란 등으로, 런던 선교회로 옮겨 동양선교와 중국선교에 임하였다.

당시 1807년 중국 첫 선교사로 파송 받은 로버트 모리슨과 윌리암 밀른(William Milne)은 1817년, 말라카(Melaka)에 런던선교회 지부로 동남아시아 선교를 담당하는 “갠지스 넘어 선교회”(Ultra-Ganges Mission)를 설립하였다. “중국어 성경번역“을 최종목표로 하고, 동남아시아 현지 순회전도를 추진하였다. 이어서 1818년에는 “영화학당”(The Anglo-Chinese College)을 설립하여 아시아인 전도인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삼았다. (*”Ultra-Ganges“는 인도와 중국 사이를 가리키는 말로 ”동남아시아“를 가리킨다.)

로버트 모리슨과 윌리암 밀른은 긴밀하고 충실한 동반자(Partner)로 중국어 성경번역과 중국어 사전, 전도문서, 소책자 등 인쇄출판 사업에 몰두하였고, 최초 중국어 완역 성경인 ”신천성경“(神天聖經)을 1823년에 출판하였다.

귀츨라프와 첫 여성선교사 뉴웰, 말라카에서 결혼



귀츨라프는 말라카와 씨암(태국)을 오가며 선교활동 하는 중 영화학당에서 가르치고 있던 뉴웰(Miss Maria Newell) 양과 1829년 12월에 결혼하였다. 뉴웰 양은 런던선교회의 첫 여성선교사로 이미 귀츨라프와 런던에서 중국어 공부할 때 만났고, 동양선교의 뜻을 함께한 여성이었다. 뉴웰 선교사는 1827년부터 말라카의 영화학당(英華學堂)에서 근무하며 중국어와 말레이어를 익혔고, 5개의 여학교를 세운 활동적인 여(女) 선교사였다. 결혼 후 귀츨라프와 함께 말라카에서 샴(Siam,태국) 방콕으로 이주하여 첫 태국 선교사가 되었으며, 태국어 성경, 라오스어 성경 번역과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 등 인도챠이나 순회선교활동으로 격무에 시달렸다.

뉴웰 선교사는 신혼기간도 없이 고달픔도 잊은 채 선교에 몰두하였으나 1831년 2월 16일 쌍둥이 딸을 출산하는 과정에서 딸 아이 하나는 낳고, 몇 시간 후 출산하다가 둘째와 함께 생명을 잃고 말았다. 귀츨라프는 4개월도 못되어 간호사에게 맡긴 살아남은 딸도 결국 죽었다는 소식을 순회전도여행 중에 들었다. 유능한 동역자요 사랑하는 아내와 아기 딸들을 잃은 귀츨라프는 한동안 비탄에 젖었으나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새로운 결심하였다.

“샴(태국)에서 사역은 끝났다. 이 가장 무서운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손길이 이제 중국으로 향해 뻗으셨기에 나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이 그곳에 나타날 것으로 믿는다. 나의 무가치한 삶이 크게 쓰임받기를 원하오며 주여 제가 여기 있사오니 당신의 뜻을 이루소서.”

귀츨라프는 더욱 선교의 열정을 쏟아 말라카에서 출판된 최초 중국어 완역 성경인 ”신천성경“(神天聖經)과 전도문서 등을 가지고, 1832년 조선 땅을 밟은 것이다. ”신천성경“(神天聖經)은 로스(J. Ross)에 의해 번역된 한글성경의 대본이 되었다. 또한 밀른의 ”두 친구들“(Two Friends)이란 전도 소책자도 한국에서 마펫(S.A. Moffett) 선교사가 ”쟝원양우상론“(張袁兩友相論)으로 번역 출판(경셩 졍동 예수교회당간,1893.)하여, 초기선교사들과 한국인 사역자들의 필독서요 성도들도 읽고 전도문서로 배포되는 소책자였다.

나는 “떠돌이 선교사(Wandering Missionary)”로 순회선교활동



나는 1988년부터 “선교지 조사”와 “순회선교”를 통해 “말레이시아”가 한국 기독교와 무관치 않음을 알았고, 저들의 헌신과 열정을 가슴에 담고 더욱 사명에 불탔으며, 선교지를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떠돌이 선교사“(Wandering Missionary,방랑선교사)로 ”쿠알라룸푸르 동남아선교센타“를 설립하고, 원주민과 교포를 향한 ”순회선교”를 추진하였다. 예수님도 “떠돌이”로 두루 다니시며 전도하셨다.(마5:23-25). 제자들도 “떠돌이”로 부르시고, 분부하셨으며(마10:1-42), 사도 바울도, 초대교회 전도자들도 “떠돌이”였다. 나는 “말레이시아 한인교회“를 중심으로 개척해 나갔고, 개척 설립된 “한인교회”들과 “선교처”들을 동역하는 부목사들과 협력 선교사들에게 담임자로 파송하고, 선교지도 분할하여 주었다. 그들은 2012년 현재까지도 선교지역 곳곳에서 헌신하여 더욱 심화시키고 확장시켜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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