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earl wedding anniversary 1981년 10월 9일! 그로부터 30년. 서양 사람들은 이날을 ‘진주혼식(A pearl wedding anniversary)이라 하여 거창하게 즐기는 모양이나 반보에게는 아직 그럴 열정이 남아있지 않아 짧은 여행으로 대신하고자 생각하여 왔다.
언젠가 소정이 무심코 울릉도엘 가고 싶다고 해서 실은 지난 봄부터 나름 궁리에 궁리를 하였다 결론은 열차로 동대구까지, 또 시외버스로 포항 그리고 울릉행 여객선 울릉도 2박3일 후 귀로에는 아영의 빽으로 청주공항까지 헬기로... 그러나 그 거창한 계획은 순간 없었던 게 되어버리고 새로이 모색한 게 변산 여행이다.
사실 변산은 우리 내외에겐 묘한 인연이 있는 곳이다. 소정에겐 첫번째 힘든 종주등산길이었고(대학 1학년 춘계 수양회 - 당시 반보는 회비 마련이 어려워 포기 했던 가슴아픈(?) 여행이다) 30년도 더 전에 직소폭포 가려다 길을 잃고 헤매이던 (그게 아마 1980년 7월 17일로 기억한다-이렇게 반보는 쓸데없는 것만 기억을 잘한다) 바로 그 곳이며 그 전에 채석강의 황금민박도 있으며, 아주 최근에는 재작년 1달간의 동안거를 월명암에서 거들었던 추억도 있다.
결정은 아주 쉬웠고 결행도 어렵지 않았다. 다행히 소정의 뜸사랑 공부와 시험도 1주일 전에 마무리되어 홀가분한 여행이 되었다.
아영과 용직인 이모에게 맞겨두고 떠난 내변산 여행- 1986년?
(서대전 역에서 반보)
서대전역(08시 01분 - 그러나 12분 연착)
김제역 19시 30분 도착, 택시로 시외버스터미널 로 이동, 09시 40분 내소사 행 승차 그런데 터미널의 매표소 아줌마는 이 차가 내소사까지 가는 줄도 모르고 있어 부랴부랴 표를 다시 끊는 해프닝도...
(저 멀리 개암사 주산인 울금바위도 보이고)
(곰소 염전도 보인다)
(타고 온 직행버스)
내소사에는 10시 50분 도착
좀 이른 점심을 먹기로 하고 근처의 전주식당에서 흔히 사하촌에 있는 산채비빔밥으로(일인분 8,000원)...
식사 후 문득 건너편 식당에 이나무가 보인다. 흔치 않은 나무인지라 한 컷.
일주문 앞엔 천년 느티나무가 있는데 이는 할머니 당산이며 내소사 경내엔 7백살의 할아버지 당산이 있어 정월 보름이면 제를 지낸다고 한다.
거기까지이면 얼마나 좋을까? 여기가 무슨 로마나 된다고, 느티나무가 무슨 트레비 분수이기나 한다고 동전을 던져 넣는 모습은 차마 보기에 좋지가 않구나. 하긴 부처님전에서 기도하는 것과 예수님 앞에서 기도하는 것과의 차이는 물론 없을 터... 더우기 사찰 경내에 당산을 끌어않는 모습도 좋게 보아서 민간신앙의 수용이지 엄밀한 의미에서는 좀은 특이한 모습이다.
(경내의 할아비 당산)
능가산 내소사(여기서 능가산의 능가는 가릉빈가(訶陵頻伽)의 능가이며 일주문의 편액은 일중 김충현 선생님 작품이다.
여기서부터는 그 유명짜한 내소사 전나무길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도 뽑힌...
이 동판 옆에는 나무의 수령을 보이기 위해서 일부러 자른 것 같은 등걸이 있다. 한번 찬찬히 나이테를 세어보자.
(내소사 사적비(왼쪽)와 해안당 대종사 행적비(오른쪽)- 거북머리가 아닌 용머리로 되어있는 것이 특이하다)
( 그 유명한 드라마 ‘대장금’의 촬영지도 나오고)
사천왕문(퍼온 사진)
보종각
(보물 제277호인 고려 동종)
(범종각 옆의 금목서-역시 따뜻한 지방이라서 이렇게 난대성 식물도 볼 수가 있다. 이곳 부안에는 후박나무와 꽝꽝나무 그리고 호랑가시나무 군락지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고 미선나무도 역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후박나무 군락지만 들러볼 계획이다)
봉래루 - 이 밑을 지나야만 대웅전을 참배할 수가 있다.(퍼온 사진) 부석사 안양루를 휘 돌아 대웅전에 이르고 순천 선암사 운주 화암사도 우화루를 앞에 배치하는 비슷한 구조이다 옛날 양반들이 말을 타고 다니는 것을 막고자 이렇게 설계했다는데 믿거나 말거나이다
(덤벙주초의 전형을 보여주는 봉래루-덤벙주초란 주춧돌을 다듬지 않고 막돌을 주춧돌로 삼음)
(그렝이법의 진수-그렝이법이란 주춧돌의 굴곡을 따라 기둥을 다듬어 세우는 것)
봉래루 옆에 관음성지 안내판도 보이고
설선당과 요사채 당우(퍼온 사진)
(설선당의 무쇠 가마솥 - 최근에 본 가마솥 중에서는 단연코 젤 크다)
(가마솥 옆의 국수틀(?)- 정확한 용도는 모르겠다-첨엔 솥뚜껑 들어올리는 기구로 생각했다는.ㅋㅋㅋ)
(화암사 문지방을 연상시키는 아주 정감있는 문지방)
설선당 현판(조선 후기 명필 원교 이광사의 작품이라는데 반보의 눈에는 별로... 그러나 소정의 눈매는 매서워 아주 잘 쓴 글씨라는데, 소정이 그렇다면 그 표현이 맞을 거다 ㅎㅎㅎ-이 사진도 퍼 온 것임)
설선당에 있는 내소사 편액
삼층석탑(퍼온 사진)
(여러가지 전설 및 괘불 그리고 백의관음보살상로 유명한 대웅전-뒤에 보이는 바위산이 관음봉이다)
(현판은 역시 조선 후기 명필인 원교 이광사의 작품으로 선운사에도 그의 필적이 남아 있다- 해남 대흥사에도 추사와 관련한 그의 글씨가 있다고 하는데 확인은 하질 못했다. 큰대(大)자가 마치 사람이 활달하게 걷는 모습으로 보이는데 다들 그렇게 보이는지...)
이 건물은 못을 쓰지 않고 나무토막들을 깎아 끼워 맞춰 세운 것으로 그 공력과 기술에는 탄복할 수밖에 없다.
{내소사의 전설} 스님, 이제 들어 가시지요. 이렇게 나와서 1년을 기다려도 목수 오지 않으니, 언제 대웅전을 짓겠습니까? 내일은 소승이 좀 미숙해도 구해 오겠습니다. 허, 군말이 많구나. 그리고 기다리실 바엔 절에서 기다리시지 하필이면 예까지 나오셔서.... 멍청한 녀석. 내가 기다리는 것은 목수지만 매일 여기 나오는 것은 백호혈(白虎穴)을 지키기 위해서니라. 노승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늙은 호랑이가 포효하며 노승 앞에 나타났다. 호랑이의 안광은 석양의 노을 속에 이글거렸다. 아무 일 없었던 듯 노승이 주장자를 휘저으며 호랑이 앞을 지나려 하자 대호(大虎)는 앞발을 높이 들고 노승을 향해 으르렁댔다. 안된다고 해도 그러는구나. 대웅전을 짓기까지는 안돼. 하며 노승은 주장자를 들어 소나무 허리를 때렸다. ‘팽’하는 소리가 나자 호랑이는 ‘어흥’하는 외마디 울음소리를 남기곤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날 저녁 타버린 대웅전 주춧돌에 앉아 산을 내려다보던 노승은 사미승을 불렀다. 너 일주문 밖에 좀 나가 보아라. 누가 올 터이니 짐을 받아 오도록 해라. 이 밤중에 어떻게 일주문 밖에 나가라고 하십니까? 일주문 밖과 여기가 어떻게 다르기라도 한단 말이냐? 마지못해 대답을 하고 간신히 일주문에 다다른 사미승의 가슴은 철렁했다. 무슨 기다란 동물이 기둥에 기대어 누워 있지 않은가 입속으로 염불을 외우고 다가서니 누웠던 사람이 일어났다. 나그네였다. 어서 오십시오. 스님이 마중을 보내서 왔습니다. 나그네는 말없이 걸망을 둘러메고 걸었다. 손님, 짐을 저에게 주십시오. 스님께서 짐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나그네는 묵묵히 걸망을 건네주었다. 손님, 어디서 오시는 길입니까? 이 짐 속엔 뭣이 들었길래 이리 무겁습니까? 노스님과는 잘 아시나요? 나그네는 대꾸가 없었다.
그는 다음 날부터 대웅전을 지을 나무를 찾아 기둥감과 중방감을 켜고 작은 기둥과 서까래를 끊었다. 다음에는 목침만한 크기로 나무를 자르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목수는 말없이 목침만을 잘랐다.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며 손가락질을 하며 비웃었다. 그러나 노승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어언 다섯 달, 목수는 비로소 톱을 놓고 대패를 들었다. 목침을 대패로 다듬기 시작한 지 3년. 흡사 삼매에 든 듯 목침만을 다듬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보 목수 양반 목침 깎다가 세월 다 가겠소. 사미승의 비웃는 말에도 목수는 잠자코 목침만을 다듬었다. 사미승은 슬그머니 화가 나 목수를 골려 주려고 목침 하나를 감췄다.
사흘이 지나 목침 깎기 3년이 되던 날, 목수는 대패를 버리고 일어나더니 노적만큼 쌓아올린 목침을 하나씩 세기 시작했다. 무수한 목침을 다 세고 난 목수의 눈에선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일할 때와는 달리 그의 얼굴에는 절망이 깃들었다.
연장을 챙긴 목수는 노승을 찾아갔다. 스님, 소인은 아직 법당 지을 인연이 먼 듯 하옵니다. 절에 와서 처음으로 입을 여는 목수를 보고 사미승의 눈은 왕방울만큼 커졌다.
왜 무슨 까닭이 있었느냐? 노승은 조용히 물었다. 목침 하나가 부족합니다. 아직 저의 경계가 미흡한 가 봅니다. 가지 말고 법당을 짓게. 목침이 그대의 경계를 말하는 것은 아닐세.
사미승은 놀랐다. 목침으로 법당을 짓는 것도 신기하지만 그 산더미 같은 목침 속에서 하나가 없어진 것을 알다니...
사미승은 숨겨 놓은 목침을 들고 목수에게 가서 사죄했다. 이 목침은 부정 타서 더 이상 쓸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내소사 대웅전은 완성이 되었고 그래서인지 아직도 대웅전 닫집 한 켠에는 목침이 빠진 자국이 남아 있다.
또 법당 내부를 장식한 단청에도 한 군데 빠진 곳이 있는데, 여기에도 전설이 한자락 물려 있다.
법당 건물이 완성된 후 한 화공이 찾아와 단청을 하겠다고 자청하면서 100일 동안 아무도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부탁했다.
99일째 되는 날, 이번에도 사미승은 궁금증을 못 이기고 몰래 들여다보고 말았다. 법당 안에서는 금빛 새 한마리가 붓을 물고 날아다니며 그림을 그리다가 사미승이 보는 것을 알고는 그냥 날아 가버렸다.
그래서 법당 좌우에 쌍으로 그려졌어야 할 용과 선녀 그림이 오른쪽에는 그려지지 못했다고 하며 그 새는 관음조로 내소사의 뒤산 이름도 관음봉이다.
대웅전 삼존불상 불상 뒤편 벽에는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것 가운데 가장 큰 백의관음보살좌상이 그려져 있다. 잘 안 보이는 곳에 있어서 관심을 덜 받는 듯 군데군데 부스러져 떨어지고 있어 내버려두면 더 많이 손상되지 않을까 염려가 된다.
(유명한 꽃창살 - 그러난 법당안에서 보면 꽃문양은 어디가고 육각창살만 보이는 게 신기했다)
지난 여름 조선왕실의궤 반환 특별전에 찾았던 국립박물관에서 한켠에 따로 전시된 내소사 괘불 전시를 보고나서... 괘불이란 초파일 등 큰 행사시 법당이 좁아 대중들을 다 수용할 수 없을 때 대웅전 앞 마당에 설치할 수 이도록 한 걸개 그림이다. 필수적으로 양옆으로 지주가 설치되어 있다.
불교용품 판매점. 사천왕문을 통과하면 좌측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 풍경 하나를 구입해서 현관에 달아 두었는데 청아한 소리가 늘 귓가에서 울린다.
매점에 걸려있는 부설거사 팔죽시 부설거사는 월명암을 창건하신 분이시다. 월명암은 따로 기술한다.
아담하고 아기자기한 내소사 전경
대웅전 뒤로 보이는 관음봉
등산로 입구의 준비운동 안내판 여기에서 안내도를 따라 준비운동을 하고서..
관음봉 오르는 길에서 본 내소사 전경
되돌아 서서 바라다 보는 줄포만 건너편 산은 선운사의 뒷산인 경수산, 그 왼편은 소요산이다.
관음봉삼거리
재백이 고개 좀더 쉬운길은 내소사 주차장에서 조금 내려와 원암마을에서 올라가면 이 재백이고개에 이르는데 길도 수월하고 시간도 그리 걸리지 않는다. 그런 점을 알면서도 굳이 관음봉고개를 택한 사연은 30여년 전 직소폭포를 찾는답시고 길을 잘못 들어 알바했던 기억이 너무나 새로와서...
어느덧 깊은 가을 속으로 와버린 내변산 봉래계곡
직소폭포 위에서...
그러나 직소폭포엔 물이 없어서... 말라버린 직소폭포
아쉬운대로 이 사진으로 대신한다. 언제쯤이면 이런 장관을 만날 수 있으려는지...
선녀탕에서 선녀 小庭과
나뭇꾼 半步(?)
물은 고여 있으면 ?게 마련인가? 탁하기만 한 물에 갈겨니떼가 제법이다.
아마도 이 부근이 옛날 소정과 들렀던 바로 그 계곡이 아닐까 싶다.
자연보호헌장탑 3거리-이제 월명암은 2km 남았다.
生과 死의 共存
나무 뿌리가 만들어 놓은 환상적인 계단-소정의 눈썰미로 얻은 사진
월명암 도중의 너럭바위에서 이제 월명암은 코앞이다 부설전 안내판 첨엔 ~전이라기에 무슨 법당 건물인줄 알았다는...ㅎ
월명암 사적기
사철나무 고목-이처럼 큰 사철나무는 흔치가 않은데 사정없이 가지치기가 되 영 볼품이 없다
새로 지은 해우소-전에 머물 때 해우소 청소하던 때가 생각난다 마당에 있는 전나무 대웅전 삼존불상 불사중인 묘적선원
부설전
월명암의 마스코트 '만순이'-전에 그 딸과 함께 2마리였으나 이번에 가보니 식구가 늘어 있었다. 만순이 애인이란다
환상적인 일몰-낙조대에 올라 감상했더라면 금상첨화였을 듯
월명암 앞산들을 배경으로한 운해
반보의 전과-하마터면 큰불로 이어질 뻔했다는...
지금은 장작 보일러를 없애고 전기로 난방을 한다네
월명암에서 남여치 가는 길
이젠 개구리가 차지하고 있어 먹지는 못하는 샘물
남여치 일정상 남여치에서 변산면 소재지 경유 성포까지는 도보로 ... 그러나 딱 5대까지만 손을 들어보자 했는데 정말 다섯번째 차가 태워줘 변산까지 ?하게 갈 수 있었다. 태워주신 분에게 행운이 함께 하실진저
변산에서 대강 필요한 간식거리와 물 등을 보충하고서 유곡에게 전화... 혹 에어컨은 없느냐고(?)...
다시 변산에서 변산 마실길을 향하여 고고씽하여 도착한 마실길
고사포 해수욕장의 불쌍한 소나무
마실길 1구간 2코스와 3코스의 갈림길 성천마을
격포까지 이십리길
반가운 대전둘레산잇기 리본도 보이고
얘는 도둑게란다
첨엔 길을 잃어 예까지 왔나 했더니 마실길에서 자주 만난다는...
옛 진지도 지나고
지금은 원불교 수련원으로 쓰이는 하섬도 저 앞에... 보름과 그믐날엔 바닷물이 갈라져 걸어서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조금 땡겨서
여기서 한가지 집고 넘어갈 사항 한가지 이정표가 너무 엉망이었다는 사실.. 첨 출발할 때는 분명 격포까지 7.9km로 되어 있었는데 이게 그렇지가 않더란 말씀, 어떤 곳에서는 8. 8키로로 또 어디서는 8.4키로 등등 그렇지않아도 힘겨운 소정에겐 이정포가 믿음을 주지 못하니 더욱 빨리 지치게 되는 안타까운 현실
또 다시 딱 10대까지만 히치하이킹하자는 반보의 제안에 마지못해 ... 이번엔 7번째에서 구세주가 나타나 바로 수성당 입구까정...
거봐 여기서는 8.8키로지..
적벽강
수성당 앞 공터의 살사리(코스모스) 꽃밭
수성당
이날 운좋게도 실제로 굿을 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수성당의 개양할매와 여덟명의 딸 멀리 보이는 위도 후박나무
안내판이 있는 곳에서는 저 파란 지붕 집의 왼편을 따라 보이는 제방을 따라 들어가면 되나 다시 되돌아 나와야 하기 때문에 차라리 마실길 안내판을 따라 가는 것이 한결 편하다.
해넘이 채화대-1999년 12월 31일 해넘이를 기념하기 위해서라는데 글쎄... 그 밑의 인어상 -왠 국적 불명의 인어상(?)
피끓는 청춘이었을 때 자주 이용하였던 황금민박. 그러나 지금은 횟집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격포 - 고운기 격포라 찾아왔네 십년 만이든가
벌교생인 고운기의 이 ‘격포’ 시를 읽다가 눈시울 붉다. 그 정담다방이 나와 다를 게 무언가. 세월은 가고 이 시만 남다. 일본 도쿄 모 대학에 한 일년 강의하러 간 시인은 소식이 없다. 이러지 말고 우리 소래사나 한번 가세. 가서 그 다방 주변에서 술 한잔 취해 가을 유원지의 건달이 되세. 시 하나 믿고 붙잡고 여기까지 왔지만 그것도 쓸쓸하긴 마찬가지. 이 시가 좋네.
라고 시인은 말했지만 ... 격포에는 '황금민박.이라는 바닷가 점포 겸 민박집이 있었다네. 격포보다는 채석강이라 더 잘 알려진 바닷가 방파제 위.... 깊은 가을 허리쯤에 어김없이 찾곤 했던 그 집을 시인보다 더 게으르게 한 삼십년이든가 하는 후 찾았는데 정담다방은 없어졌을지 몰라도 황금민박은 그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네. 여름보다 한결 더 거칠어진 파도소리를 듣노라면 분출할 수 없었던 젊은 날의 가슴 속 모든 응어리들이 어느 순간 흩어져버리는 그 알싸함에 계절병처럼 찾곤 했던 채석강 바닷가를 오늘 시인은 일깨워 주네. 이번 가을 한허리쯤에서 다시 또 찾아보고 싶은 '황금민박'
※시인이 말한 소래사는 지금의 來蘇寺의 옛이름이고 정담다방인가 하는 배경은 그래서 격포가 아닌 곰소쯤이 아닐까?하고 생각해 보는 半步.
격포에서 바지락죽을 먹고서
서둘러 귀가하여 서대전 역전 순대집에서 막걸리 한잔에... 새깃유홍초(흰꽃)-첨보는
아직 흔적은 남아있는 월명암의 상사화(꽃무릇-석산) 이질풀 여뀌
투구꽃
며느리밥풀꽃 괭이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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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소맷동냥 원문보기 글쓴이: 半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