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 7월 8일 정동에 새로 지은 감리교회 예배당에서 배재학당 졸업식이 있었다.
조선정부의 대신과 협판 외국의 공사 영사 선교사 학부모 등 800명이 참석하였다.
1부는 문학 시강으로 한문과 영어의 공개 강독이 시행되었다.
영어 강독에서 신흥우가 영어 문장을 읽고 한글로 유창하게 번역하자 청중들이 크게 호응했다.
이승만이 “한국의 독립”(Independenceof Korea)라는 주제로 영어연설을 하였다.
그의 영어연설은 발음도 유창하거니와 조선의 독립을 역설하는 패기로 청중들을 사로잡았다.
이승만의 이 연설은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인이 영어로써 행한 최초의 연설이었다.
이 영어 연설을 계기로 청년 이승만은 조선의 위정자들과
서울에 있는 외국 외교관 선교사들이 주목하는 ‘유망한 인재'로 부상했다.
당시 최고의 실세 민영환도 이날 졸업식에 참석하여 청년 이승만에게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
1898년 1월 양홍묵과 함께 한글판 주간신문이자 협성회의 기관지인 《협성회회보》를 발간하고 주필을 맡았다.
3월 10일 러시아의 이권 침탈을 규탄하기 위해 독립협회(獨立協會)가
종로에서 제1차 만민공동회 집회를 개최하자 이승만은 연사로 참가해 가두연설을 통해 인기를 얻었다.
대한제국 정부 외부대신에게 항의의사를 전달하는 총대(總代)위원으로 선발되었다.
11월 26일 고종 황제는 독립협회를 달래기 위해 헌의 6조의 실시를 약속하고
남궁억 등 50여명을 중추원 의관(議官, 종9품)으로 임명할 때 함께 중추원 의관에 임명되었다.
이승만은 협회의 전단지를 배포하다가 전단지 내용 중
`광무황제는 연령이 높으시니 황태자에게 자리를 내 주셔야 한다.`라고 쓰인 문구가
문제가 되어 요시찰대상이 된다.
1899년 1월 9일 발생한 박영효 일파의 대한제국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는 종신형을 선고 받는다. 1904년 8월 9일 석방될 때까지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는 옥중 생활에서도 성경책을 통해 영어공부를 틈틈이 했으며 한성감옥 생활하면서 동료죄수들은
물론 간수들까지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한글과 영어를 가르치면서 많은 개화 인사들을 길러내기도 하였다.
한성감옥은 청년 이승만에게는 또하나의 학교였던 것이다.
옥중생활에서 그의 민중계몽의식 가치관을 나타내는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1903년에 저술했다.
배재학당 졸업식에서 이승만의 영어연설로 강한 인상을 받았던 민영환이
"이승만이 한성감옥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적극적으로 나서 그의 석방을 주선하였다.
이승만은 1904년 7월 8일 5년만에 한성감옥에서 풀려난 것이다.
그는 11월 4일에는 독립보전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호소하기 위해 민영환의 의뢰로
고종의 밀사 자격으로 일본 고베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 갔다.
1905년 1월 15일 미국 신문 '워싱턴 포스트' 지와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의 한국 침략을 폭로하는 인터뷰를 했다.
2월 20일 이승만은 한국에 선교사로 왔던 적이 있던 미국 상원의원 휴 딘스모어를 찾아가
그의 주선으로 존 헤이 미국 국무장관과 30분간 면담하였다.
그의 미국에서의 독립운동은 그렇게 시작된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은 초대 국무총리에 신임된다.
이승만은 대통령제를 선호하였다. 그는 대통령제를 고집,스스로 대통령이 되고만다.
1920년 3월 22일 상해 의정원은 이승만의 상해방문 촉구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그는 측근 현순으로부터 듣고 상행방문을 결심한다. 그가 상해로 잠행하는 과정은 아주 극적이다.
그해 6월 센프란시스코에서 하와이행 배를 탄다.
1919년 3.1운동과 관련하여 그의 목에는 30만달러의 현상금이 걸렸다.
하와이에 도착한 이승만은 상해행을 쉽게 결행할 수 없었다.
워낙 일본의 감시가 심했기 때문이다.
하와이에서 지낼 때 친하게 진했던 장의사 주인 윌리암 보드윅의 별장에 머물며 기회를 엿봤다.
이승만은 마침내 비서 임병직과 함께 상해행 배편을 마련하였다.
하와이에서 죽은 중국인 유해를 싣고가는 네들란드 배였다.
정식여행이 아니라 유해운구를 가장한 밀항이었다.
두 사람은 선창 속에서 숨어지내다 발각되었다.
이승만은 중국인으로 뱐장을 하고 하루 네 시간씩 망을 봤다.
비서 임병직은 갑판 청소를 해야 했다.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상해에 도착하였다.
1920년 11월 15일 상해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부임하기 위해 상해로 향한다.
1920년 12월28일 이승만은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취임식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