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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계는 오대산에서 발원한 남한강과 태백준령의 지맥인 부흥산에 이르러 솔밭과 강변이 아우러져 태고 때부터 큰 마을이 형성되어 뱃길로는 서울(京都)에, 뭍으로는 강원, 충청, 경상, 경기에 이르는 큰 길목이며 내륙 항구로 물화와 사람의 내왕이 끊이지 않아 큰 저자를 이루니 팔도에 살기 좋은 고장의 하나라 오목계라 불렸고 경도와 해외의 신문화를 유입하던 곳으로 중원문화의 발상지였다.
조선 후기 5대 하항중의 하나였던 목계는 전성기 때 가구 수가 800호 이상 되었던 큰 도회지로서, 100여 척의 상선이 집결하던 곳이다. 1948년 하항의 기능이 소멸되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마포 다음 가는 한강의 주요 항구였다. 번성했던 목계장터는 1920년 후반 서울에서 충주 간 충북선 열차 개통으로 남한강의 수송기능이 완전히 끊어지면서 규모가 크게 작아졌다. 1973년에 목계교가 놓이면서 목계나루의 나룻배도 사라져 목계장터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오직 목계교회·목계반점·목계슈퍼 등 상호만이 남아 그 옛날의 목계나루를 떠올리게 할 뿐이다.
목계나루는 서울과 충주 사이에 충북선 철도가 놓인 1930년대 이전까지 남한강 수운의 중심이었다. 문경의 조령을 넘어 충주의 가흥창에 임시로 적치해 두었다가 한양의 마포나루에 내리는데 필요한 임시 창고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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