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묵깔레-->에페소-->쉬린제-->이즈미르-->이스탄불(5월12일)
에베소(Ephesus
터키 서쪽해안에 위치한 에베소는 소아시아(지금의 터키) 서부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성읍이었다. 신약시대, 에베소에는 카이스터
강으로 통하는 항구가 있었으며, 이 강은 에게해로 흐르고 있었다. 또한 에베소는 주요한 상업의 도로들이 교차하는 곳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항구도시로서 동양과 서양을 잇는 거대한 상업, 종교, 교통, 문화의 중심지이자 '아시아 최대의 도시'라는 영예를 누렸던 곳이었다.
신약시대에 많은 유대인을 포함하여 그 당시에 인구 25만명(현재의 1000만명에 해당)이 살았다고 하니 그 규모가 실로 거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비잔틴 시대에 도시가 대지진과 말라리아로 망했다고 한다. 고대엔 아테네 다음으로 가는 도시였고 그리스도 시대엔 예루살렘
다음으로 가는 도시였다. 아르테미스여신을 숭상하며 수세기를 지배해 왔으나 성 바오로와 요한이 설교하여 성모마리아의 존경으로 대치 되었다.
에베소 사람들은 로마의 여신 다이아나(헬라어로는 아르테미스)에게 바쳐진 이교도의 신전을 자랑하고 있었다(행 19:23-31 참조).
사도바울은 3차에 걸친 전도여행중 2, 3차 때 이곳 에베소에 들러 가장 오랜기간인 3년간 머물며 복음을 전했는데(행 19:10 참조),
특히 에베소 지역에 있는 수많은 우상숭배자들을 향해 우상을 버릴것을 전하기도 하였다. 그곳 교회는 분명히 얼마 동안 번창했었다.
그러나 이후에 그 교회는 계2:1-7의 경고를 받은 교회가 되었다. 자-이제 소아시아 최대 도시이면서 사도바울의 또다른 선교중심지였던 에베소.
에베소 대극장에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외쳤던 사도바울. 기대와 설레임으로 사도바울의 목소리가 서려있는 그 현장으로 찾아가보자.
패션 쇼
파묵깔레에서 에베소 까지는180km(약2시간 30분 소요) 가는길에 길가에있는 매장에서 패션쇼를 관람하였다, 유럽의 멋진 모델들의 쇼에 이어
우리일행 몇사람이 가죽옷을 입고 워킹의 기회도 가져본뒤 매장에서 다양한 가죽옷에 빠져 싼값에 그의 모든 일행이 유럽의 가죽옷을 구매하였다.
에베소 안내판
에베소 시내 한식당에서 한식으로 점심을 먹고 유적지 안으로 들어가니 삼성에서 한글로 세운 에베소 안내판이 우리를 반긴다.
이곳에서 세종대왕의 얼을 느끼니 무지 반가우면서. 한국사람들이 이곳도 많이 찾는것 같다
오 데 온
오데온(Odeion)은 2세기에 세워진 음악당으로 극장과 같은 형태의 소극장이라고도한다.
에베소의 정치 조직은 두 그룹이 있었는데, 하나는 보울레(Boule)라고 불리는 원로원(상원에 해당하며 300명으로 구성)으로
바로 이 소극장에서 회의를 개최하며. 또 하나의 그룹은 데모스(Demos) 라고 불리는 민회는 모든 에베소인으로 구성되어
이들은 대원형극장에서 집회를 가졌다. 이 소극장은 콘서트 등 문화적 행사를 위해 사용되었는데 총 1,400명을 수용하였다.
가장 낮은 부분인 오케스트라의 중앙에 빗물을 받는 홈통이 없는 것으로 보아 원래 지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귀족 전용이었다.
맨 꼭대기의 대리석 좌석은 현재 없어졌지만, 아래 쪽의 좌석들은 잘 보존되어 있다. 계단 옆 부분에 새겨진
그리핀(머리와 날개는 독수리이고 몸은 사자인 괴물)의 발 모양은 오데온의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오데온 옆에는 기원전 3세기 아우구스투스
통치때 세워진 시청 건물인 프리타네이온(Prytaneion)이 있다..
아 고 라
아고라는 시장을 뜻하는데, 오데온 극장 건너편에 있는 아고라(Upper Agora)는 사방이 가로 세로 110 m로서 기원전 3세기 경에
설치된 에베소 도시 생활의 중심지였다. 아고라는 두 줄의 화랑으로 둘러싸여있고 그 뒤에 상점들이 줄서 있어서 청동, 구리제품,
등잔을 비롯한 많은 도자기 제품, 포도주, 꿀, 고기, 비단, 보석 등이 거래되었다고 하는데, 그 때 당시의 모든 여성들은 이곳에 꼭 한번
오고자 했다고 한다. 다른 시장터가 모두 그러하듯이 이 시장의 한 가운데에 신전이 위치해 있었는데 이 신전은 처음에는 이집트의
이시스 신전(Isis Temple)이 있었고, 그시대 하수관으로 사용한 토관이 보인다.
ΙΧΘΥΣ(잌투스.ιχθυs.물고기) 익투스
도로 가 대리석에 세겨진 잌투스 "물고기는 1세기 로마의 카타콤(Catacombs)의 프레스코 벽화에서 발견된 후 고대
그리스도인의 상징이 되어. 그리스도인의 심볼로서의 이 물고기에 대한 언급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 150-)의 저술인
파이도고구스(Paedogogus;교사, III,xi)에 등장한다고" 권사범이 설명하고 있다.
물고기가 그리스도인을 상징하는 심볼이 된 것은 성서의 사건들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림으로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낚은 일(요 6:1-13),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들과 함께 고기를 구워먹은 일(요 21:1-13),
돈이 없어 예수님의 일행이 곤궁에 빠졌을 때 시몬 베드로가 물고기의 입에서 금화를 찾아낸 이야기(마 17:24-27)등이 그것이지요.
도 로
대리석 도로
대리석이 깔린 도로 중앙의 홈은 중앙분리대 처럼 등을 세우기위한 홈이며 넘어지지 않게 줄로 잡아주던 고리가 사방에 보인다.
에베소 병원터(아스클레피온 신)
제 단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봉헌된 신성한 지역인 이곳에는 영원히 꺼지면 안되는 성화가 타고 있었으며,
이 불은 크레테스라고 불리는 성직자들에 의해 꺼지지 않게 잘 관리가 되었다고 한다
가이드.
승리의 여신상
니케(=나이키, 승리의 여신) 조각은 원래 헤라클레스의 문의 아치 장식이었다는데, 지금은 도로가에서 이렇게 옛 모습을 보여주고있다.
스포츠용품회사 나이키의 상표를 여기에서 찾았다는데, 가슴부분은 손길이 많이 닿았는지 좀 뭉개지기도하고 반질반질 하다.
헤라클레스의 문
헤라클레스 게이트는 대리석 받침대에 새겨진 부조물을 따서 지었다고 하는데, 쿠레테스(크레테스) 도로가 시작되는 부분에 위치한
이 기념문은 2층의 구조로. 여기에 있는 두개의 기둥에는 Nemea, 사자 가죽을 뒤집어쓴 Heracles의 모습이 부조 되어 있어서 이 문을
헤라클레스의 문이라 불리며. 그리스 신화에서 헤라클레스는 네미아 골짜기에 사는 사자를 죽였다고 하는데 이 사자를 죽이는 일은
이 세상에서 12가지 어려운 일 중에 하나였다고 한다. 이 문은 귀족과 평민의 경계선이 되었다.
목이 없는 상
트라얀 황제 신전(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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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레테스 도로 북쪽 끝에 위치한 12m 높이의 이 우물은 102~114년에 트라이안 황제에게 바쳐졌다는데,
우물 중앙 받침대 위에는 트라이안 황제의 동상이 있었고 그 발목으로부터 물이 흘러 나오게 되어 있었는데
현재는 받침대와 오른발 한쪽만 남아있고. 이 곳에서 여러 황실가족의 동상이 발굴되어 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고 한다.
모자이크 도로
부유한 상인들이 살던 곳, 일반인은 대리석 도로를 이용하고 그보다 약간 높게 고관들이 다니던길 이라고, 길 바닥이 모자이크는
돌에서 수십가지의 색소를 만들어 색색의 대리석 모자이크로 바닥을 장식하여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다.
같은방향으로 약간 낮게 일반인이 통행하는 도로에는 대리석이 깔려있는데 경사진 부분엔 미끄럼을 방지한 홈이 파여있다.
하드리안(Hadrian) 신전
하드리안(Hadrian) 신전은 크레테스 도로상에서 가장 눈길을 끈다.
목욕탕 옆의 하드리안 신전은 위대한 건축물의 본보기이다. 138년경에 지어져 하드리안 황제에게 바쳐졌으며,
고린도 양식의 신전은 정면에 독특한 부조물과 장식이 되어 있다. 건물의 현관입구에 4개의 기둥이 남아 있는데 중앙의 2개 기둥은
아치를 이루고 있다. 현관을 들어서 안쪽 정면의 박공 머리 위에는 메두사를 닮은 여성의 모습이 나뭇잎과 함께 부조되어 있고
그 아래 왼쪽부터 아테나신, 셀레나신, 아폴로신, 에베소의 창시자 안드로클로스, 헤랄데스,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아버지,
데오도시우스 황제, 에베소의 아르테미스신, 데오도시우스의 아내와 아들이 차례로 부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치문에는 행운의 여신 니케의 조각상이 있고 그 뒤 반원형에는 메두사의 조각상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드리안 신전의 부조물
공중화장실
2천년 전에도 수세식 공중화장실이 있었다는게 신기하고 색다르게 느껴진다. 화장실 앞에는 분수대도 있고 안쪽의 홈으로 물이
흘러 손을 씻을 수도 있으며, 게다가 무대가 있어서 악사들이 음악을 연주했다니 고대 화장실 문화를 볼 수 있는 특이한 장소였다.
모두 수세식이기는 하지만 물이 처음 흘러들어오는 곳과 나가는 곳은 요금차이가 있었다는데. 냄새와 쾌적한 정도에 차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참, 남자용만 있었다고 하는데 싸이즈가 조금씩 차이가 난다.
가이드에 설명을 들으며 각자의 싸이즈에 맞추어 포즈를 취해본다
두란노서원
두란노 서원으로 알려진 셀수스 도서관은 에페소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물로 쥴리우스 셀수스가 소 아시아주의 총독으로
114년에 70세의 나이로 죽게 되자 그의 딸 쥴리우스 아퀼라가 그의 아버지 셀수스를 기리기 위해 이 도서관을 건축하여
125년에 완성 하였다고한다. 도서관의 정면 입구는 2층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있는데 지혜, 행운, 지식 그리고 선행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4명의 여성들의 석상이 있으며. 도서관 내부는 습기를 방지하기 위하여 이중 벽으로 되어 있어서
당시에 소장되어 있던 수 천 권의 두루마리책을 보호하게 했다고 하는데. 262년 코트족 침략 때 모두 소실되었다고한다.
에페소의 상징물처럼 되어 있는 케르스스 도서관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건물앞에서 일행모두가 기념촬영을...
맨 우측에 서신분은 딸이 칠순기념으로 이번 여행을 보내주셨다는 할아버지, 그다음은 부산에서 오신 부부, 그다음 한 남자는
싱글로 오신분과 여자세분 친구들, 또 한명의 여자 싱글 그리고 우리 부부가 있다.
인류 최초의 광고포스터
두란노 서원을 지나 원형경기장가는길 중간에 이렇게 바닥돌에 새겨진 그림을 만나는데... 사창가를 알리는 인류 최초의
광고포스터라고 우스개소리를 들었다. (발의크기, 방향, 돈의량, 사랑....상상은 각자가...)
낙하산
하늘에서는 우리의 여행을 환영하는지? 낙하산 페레이드가 계속되었는데 오히려 권사범의 강의에 방행가 되었다.
원형경기장
피온산 기슭의 비탈을 이용해 건설된 이 극장은 리시마쿠스 시대에 지어졌으며, 현존하는 경기장중에서 가장 큰 규모로 오늘날의
모습은 트라얀(Trajan) 황제 시대의 모습으로. 따라서 로마-그리스 타입으로 무척 아름다운 극장의 표본이라고 한다.
고대 극장이 모두 그러하듯이 3부분으로 되어있다. 약 18m 높이의 무대 정면 건물은 3층으로 되어있고
각종 부조와 조각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다고 한다. 약 40 m 지름의 중앙 무대는 정교한 음향학적 구조로 되어 있어,
배우가 작은 소리로 대화를 해도 관중석 끝자리의 사람도 모두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한다.
관중석은 외곽까지 150m의 크기이며, 각 단은 22줄의 좌석이 배치되어 있어 약 25,000명을 수용할 수 있으므로 에페소 인구는
약 250,000만명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이곳은 기독교 역사에서도 의미 있는 곳으로 사도바울이 3차전도 여행 중 이곳에 들러
선교를 하다가 에페스의 은 세공장이들로터 수난을 받은 곳이기도 하다.
로마시대 원형극장들은 대부분이 산 중턱에 바다가 보이게 건축되어 바람으로 인한 통풍과 음향의 효과를 보면서
또한 바다를 통한 적의 침입을 볼 수 있게 설계되었다고 하는데 이곳 에페소의 대극장도 앞으로 곧게 뻗은 항구거리가 있다.
당시에는 이 길을 곧장 가면 에게해 항구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현재는 지형 변화로 바다가 멀어졌다고 한다.
이정표
항구거리를 조금가다보면 우측에 석관묘와 그 시대에 거리를 알려주는 이정표가 대리석에 표기되어 있으며 이곳에서
바닷쪽으로 조금더 가면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의 집이있는데, 밧모 섬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사도요한은 유배기간이 끝난 후
이곳 에베소로 와서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를 돌보면서 여생을 보냈으며 사도바울이 떠난 후에는 에베소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
계속적으로 선교활동을 이어나갔다고한다. 이렇게 에베소에는 로마시대의 유적뿐만 아니라 기독교 유적도 많이 남아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마리아 교회와 성요한 교회 그리고 마리아가 머물렀던 마리아의 집 등이있다.
소아시아 최대도시 에베소. 그곳에 남아있는 기독교 유적중에 이제는 요한의 교회를 찾아가보자.
뽕나무 가로수
터키의 각 지역마다 도로변 풍경이 많이 다른 점도 기억에 남는다. 안탈랴 시내에서는 종려나무 가로수를 보았는데,
요한의 교회로 가는 길엔 커다란 뽕나무 가로수가 눈에 띄었다.
아르테미스신전 기둥
셀축성 에 올라서니 우리가 버스로 지나온 뒤로 아르테미스 신전의 터 위에 기둥 하나가 보인다.
그리스인은 아르테미스(사냥의 여신), 로마인은 '디아나'로 불렀으며 이오니아인들이 '아데미'라 불렀다.
처음 킬벨레로 불리울 때는 목신 상이었으며 서부 아나톨리아에서 이오니아 문명과 함께 아데미로 이름이 바뀌었고 땅과
다산을 상징하였다. 아데미 신전은 고대 칠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서 헬레네 세계에서 가장 큰 건축이었으며 최초로 완전히
대리석으로 된 건물이었다. 이 신전은 일곱 번이나 파괴되었으나 항상 같은 위치에 재건되었다고 하며, 처음에는 해변에 지어졌으나
후에 항구가 매립되어 지금은 바다에서 5km 떨어져 있는 저곳에 기둥 하나만 남아있다.
사도요한 무덤교회
셀축(Selcuk)지역에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셀죽 성이 보이며 바로 조금만 들어가면 교회가 나온다. 아야소룩 언덕에는
성 소피아를 세운바 있는 유스티니아누스(527∼565년 재위) 황제가 건축한 요한 교회(The Church of St. John)가 있다.
4세기에는 그곳에 요한의 무덤이 있었고 작은 교회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37-42년 사이에 그리스도교 전도에 주력하던 예수의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하게 되자 사도 요한은 성모 마리아를 돌볼
임무를 부여 받고 성모마리아와 함께 에페스에 와서 말년을 보내면서. 64년 사도 바울이 로마의 성밖에서 순교하자 요한은
그를 대신해 에페스 교인들의 지도자가 되었으나 도미티안 황제 때에 로마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지중해 연안의
파트모스(성서에 밧모섬)섬으로 유배되어 이곳에서 대리석을 채취하는 중노동을 하면서 "계시록"을 쓰게 되고.
그 후 도미티안 황제가 피살되자 유배에서 풀려나 에페스로 돌아와 "요한복음"을 썼다.
세 례 소
저곳에 물이 흐르고 사람이 가로질러 물에 잠기는 세례의식을 행했을 세례소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십자가형으로 교회를 건축했다는데 세례소 말고도 특별히 복음서의 제자들을 상징하는 네 개의 기둥과
상석에는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세 개의 기둥을 사용했던 것을 볼 수 있고. 요한의 무덤, 헌금저장소, 성화가 있는 방,
성찬을 준비하는 방 을 볼 수있고. 요한 교회 뒤쪽에는 셀죽성이 있고 그 밑에는 이사베이 회교사원도 있었다.
사도 요한의 무덤
4세기경에 사도 요한의 무덤 위에 처음으로 나무로 된 교회가 지어졌다는데 이후 비잔틴 시대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재건된 교회유적이 있습니다.
올리브나무 숲
시린제(=쉬린제)로 가는 길은 오렌지 나무와 올리브 나무 등으로 우거져 있는데, 고대 도시 에페스에서 꼬불꼬불 산길을 따라
오르는 길은 우리나라 대관령을 넘는 것 같기도 하다. 산 전체엔 산림으로 우거진 숲이라기보다 과수원이라 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포도나무, 복숭아 나무, 올리브나무, 많은 나무들이 산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쉬린제 마을
작고 아담하고 아름다운 쉬린제(달콤한, 귀여운 이라는 뜻)는 옛날 그리스 정교의 마을이었는데,
독립전쟁이 끝난 후인 1920년 대에 그리스 터키 간에 민족 대이동이 있었고, 이 마을에 거주하던 그리스인들의
대부분이 그리스로 이주한 후부터 터키인들이 이 마을을 가꾸었다고 한다.
겉으로는 전형적인 그리스 집들이지만, 집안은 전통적인 터키인들의 생활방식으로 꾸며져 있다고 한다.
이 마을에 어울리는 작은 학교, 그리고 동네 골목마다 갖가지 수공예품과 올리브 기름, 포도주, 갖은 과실주를 판매하는데
이 곳 과실주는 순수 쉬린제 마을에서 생산되는 자연산이라고 한다. 여려종류의 와인들을 조금씩 맛을 보이고 원하는 사람들은
와인이며 올리브유 기념품들을 사가는데 우리는 술하고는 거리가 멀어서 그냥 내려왔다.
쉬린제 마을을 끝으로 에페스의 여행을 마치고 이즈미르공항으로 이동하여 국내선을 이용하여 이스탄블로 이동하였다.
골 든 혼
바다의 입구이자 세계적인 자연 항구 중의 하나다. 유럽의 고대 이스탄불과 근대 이스탄불 사이에 뿔처럼 펼쳐진 아름다운 항구.
석양무렵이 되면 수면이 마치 황금빛으로 변한다 하여 Golden Horn(황금빛 뿔)이라고 불려지게 되었다. 석양 노을이 곱게
물들기 시작하고 있는 마르마라 해변은 지금까지 비행기에서 지쳐있던 이 나그네의 피로를 녹여주기에 충분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가 죽 옷
이스탄불의 호텔에서 저녁을 먹고 발리덴스를 보려가려고 호텔로비에 모였는데 약속이나 한듯 낯에 구입한 가죽옷 들을 입었다
발리덴스
커다란 극장같은 홀에 길다랐게 탁자가 놓여 있고 자리에 앉으니 역시나 빵이 놓여있고 저녁식사로 제공되는 음식이다.
식사가 끝나갈때쯤 공연이 시작되었다. 터키음악을 많은 악기를 사용하지 않은것 같다. 무대 뒤쪽에 2사람의 악사의 음악에
맞추어 남녀 무희들의 춤이 시작되었다.
발리댄스
옛날, 슐탄을 홀린 여인들의 현란한 배꼽춤. 차도르로 단단히 몸을 감싼 여인들속에서, 어떻게 저렇게 선정적인 춤을 출 수 있을까?
발리댄스가 끝난후 관객들을 초청하여 함께 춤을추는 모습, 우리 일행중 여주에서 회갑기념으로 오신분이 용감하게 나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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