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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에서는 이 미륵불신앙이 희망의 신앙으로 수용되어 폭넓게 전승되었다. 미륵불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든 뒤 56억7000만 년이 지나면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는 부처님이다.
그때의 이 세계는 이상적인 국토로 변하여 땅은 유리와 같이 평평하고 깨끗하며 꽃과 향이 뒤덮여 있다고 한다. 또한 인간의 수명은 8만4000세나 되며, 지혜와 위덕이 갖추어져 있고 안온한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세계에 케투마티(Ketumati, 鷄頭末)라는 성이 있고 이곳에 상카(Sankha)라는 전륜성왕이 정법(正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데, 이 나라에는 수많은 보배들이 길거리에 즐비하지만, 사람들은 이 보배를 손에 들고 “옛사람들은 이것 때문에 서로 싸웠지. 그러나 오늘날은 이것을 탐하거나 아끼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아름다운 세상에 미륵이 수범마와 범마월을 부모로 삼아 태어난다. 그는 출가하여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하고 3회에 걸쳐 사제(四諦)·십이연기(十二緣起) 등의 법문을 설한다.
그리하여 1회에는 96억 인이, 2회에는 94억 인이, 3회에는 96억 인이 각기 아라한과를 얻는다고 한다. 이것이 용화삼회(龍華三會)의 설법이다. 중생을 교화하여 이들이 진리에 눈뜨게 하기를 6만 년, 그 뒤 미륵불은 열반에 든다.
그런데 미륵불의 세계인 용화세계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현실세계에서의 갖가지 노력이 요청된다. 즉,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을 독송하거나, 옷과 음식을 남에게 보시하거나, 지혜와 계행(戒行)을 닦아 공덕을 쌓거나, 부처님에게 향화(香華)를 공양해야 한다.
또 고통받는 중생을 위하여 깊은 자비심을 내거나, 인욕과 계행을 지켜 깨끗하고 자비로운 마음을 기르거나, 절을 세워 설법하거나, 탑과 사리를 공양하며 부처님의 법신(法身)을 생각하거나, 사람들을 화해시켜 주거나 하는 등의 공덕으로 용화회상에 태어날 수 있다고 하였다.
결국, 이 미륵불신앙은 미륵불이 출현하는 국토의 풍요로움과 안락함에 대하여 설함으로써 중생으로 하여금 죄악의 종자와 모든 업장과 번뇌의 장애를 끊고 자비심을 닦아서 미륵불의 국토에 나도록 하자는 데 그 깊은 진의가 있다. 이 미륵불에 대한 신앙은 삼국의 불교 전래와 더불어 우리 나라에서 널리 신봉되었다.
고구려에서는 죽은 어머니가 미륵삼회에 참석할 수 있기를 발원하면서 미륵불상을 조성하였고, 백제에서는 미륵삼존이 출현한 용화산 밑 못을 메우고 미륵사를 창건하였다.
신라에서는 진자(眞慈)라는 승려가 흥륜사(興輪寺)의 미륵불 앞에서 미륵불이 화랑으로 현신하여 세상에 출현할 것을 발원한 결과 미시(未尸)라는 화랑이 나타났다거나, 김유신(金庾信)이 그의 낭도를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불렀던 것 등은 모두 이 미륵불신앙의 긍정적인 일면이다.
반면에 후삼국의 궁예(弓裔)가 정치적인 계산으로 자칭 미륵불 행세를 한 것이나, 고려 우왕 때의 이금(伊金)이 미륵불로 자칭하며 혹세무민한 일, 조선 숙종 때의 승려 여환(呂還)이 자칭 미륵이라 하면서 왕권을 넘보았던 일 등은 모두 미륵신앙에 대한 부정적인 측면들이다.
강댕이미륵불의 현재위치
이 미륵불은 강댕이로 진입하는 지점에 설치된 강당교에서 북쪽으로 약 100m 지점의 전(前) 군장동 안, 현(現) 고풍저수지안에 있었다. 이곳은 지대가 높아 지금도 섬처럼 되었으며 풀이 자라고 있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곳이 저수지로 수몰되게되어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조성연대는 고려말~조선초로 추정되는데 높이는 216cm, 어깨의 폭은65cm, 두께는 25cm이고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으며, 오른팔을 위로 올려 가슴에 붙이고, 왼팔은 구부려 배위에 대어 서산지방의 다른 미륵과 같은 형식이다. 전설에 의하면 서해로 통하는 중국 사신들이 오가는 통로에 세워졌다고 하며 또는 보원사를 수호하는 비보장승 이었다고 한다.
용현리 석불입상[龍賢里石佛立像]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있는 고려 후기~조선 전기 석불 입상.
개설
용현리 석불입상(龍賢里石佛立像)은 백제의 미소라고 불리는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瑞山龍賢里磨崖如來三尊像)과 서산 보원사지(瑞山普願寺址)로 통하는 길목의 용현계곡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는 ‘강댕이 미륵불’이라고 불리고 있는데, 원래 강댕이마을에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개명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용현리 석불입상이 강댕이 미륵불이라고 언제 개명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형태
1매의 화강암 석재를 이용해서 조각하였는데, 높이 216㎝, 어깨 폭 65㎝, 두께 25㎝의 크기이다. 이마 쪽이 넓고 턱 쪽이 좁은 역사다리꼴의 얼굴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머리에는 보관(寶冠)을 쓰고 있다. 상호의 이목구비는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는데, 눈의 경우 거의 감은 것처럼 조각해 놓아 전체적으로 온화한 미소는 찾아보기 힘들다. 목에는 삼도(三道)를 표현한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형태는 남아 있지 않다.
법의(法衣) 양식은 오른쪽 어깨가 드러나 있는 우견편단(右肩偏袒)의 형상이며, 오른팔은 위로 올려 가슴에 붙이고 왼팔은 구부려 배 부위에 오도록 조각하였다. 의습(衣褶)도 표현되어 있으나 마모가 심하여 잘 나타나지 않으며, 상반신의 일부는 깨어져 덧붙여 세웠다. 발은 본체에서 떨어져 돌들 사이에 있는 상태로 복원이 필요하다.
특징
비교적 다른 곳의 석불 입상보다는 정교한 수법으로 조각되었으며, 석불의 형태로 보아 고려 후기에서 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서산시 운산면 지역은 서해를 통하여 출입하는 중국 사신과 옛 선조들이 드나들었던 길목으로, 용현리 석불입상은 운산을 통행하는 행인의 안전과 무사고를 빌기 위하여 세운 불상으로 파악된다.
참고문헌
진홍섭, 『석불』(대원사, 1989)
『서산시지』(서산시지편찬위원회, 1998)
『충남지역의 문화유적』13-서산시편(백제문화개발연구원, 2001)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백암사지[百庵寺址]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있는 고려 전기의 절터.
변천
백암사지(百庵寺址)에서 확인되는 석등의 하대석(下臺石)과 옥개석(屋蓋石), 석탑 부재의 제작 기법으로 보아 보원사(普願寺)가 융성하였던 고려 전기에 건립된 사찰로 추정된다. 폐사된 시점은 알 수 없지만 보원사의 사세가 기울던 조선 후기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구전에 따르면 인근의 보원사와 관련하여 100개의 사찰이 만들어진 후 보원사의 사세가 기울었다고 하는데, 이때 100번째 사찰이 백암사였다고 한다.
위치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있는 서산 보원사지(瑞山普願寺址)[사적 제316호]에서 4㎞ 정도 가면 가야산의 지맥인 옥양봉이 있다. 백암사지는 옥양봉으로 올라가는 서쪽 사면의 중턱에 자리한다.
현황
백암사지는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11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약 3,966.94㎡[약 1,200평]의 대지에 2단으로 만들어진 축대가 있으며, 사찰에 사용되었던 초석과 기와가 확인된다.
의의와 평가
백암사지는 서산 보원사지와 연관 있는 전설을 간직한 절터로, 보원사의 변천을 연구하는 데 보조 자료로 활용될 가능성이 크다.
참고문헌
『문화유적분포지도』-서산시(충청남도·충남발전연구원, 1998)
『서산시지』(서산시지편찬위원회, 1998)
『충남지역의 문화유적』13-서산시편(백제문화개발연구원, 2001)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내포문화 숲길[內浦文化-]
충청남도 서산시에 조성 중인 생태 문화 체험 숲길.
개설
2009년 1월 19일 산림청은 기존 등산로와 옛길을 찾아내 전국에 산재한 자연 휴양림과 산촌 생태 마을을 수평적으로 연결하고 주요 노선에 등산 안내인 및 숲해설가 등을 배치하여 지역 고유의 산림 생태, 문화, 역사 자원을 감상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전국 12곳에 산림 문화 체험 숲길 1,500㎞를 조성할 계획을 발표하였다.
건립 경위
충청남도 예산군, 당진군, 서산시, 홍성군의 4개 시·군은 2009년 10월 14일에 2010년부터 2012년까지 3년간 60억 원을 투입하여 내포문화 숲길을 조성할 계획을 발표하고 2009년 10월 16일 예산군 덕산면 가야관광호텔에서 내포문화 숲길 조성 협약식을 가졌으며, 4개 자치 단체와 중부지방산림청 등 행정 기관, 수덕사 등 종교 단체, 역사문화 단체, 학계, 시민 단체 등이 참여한 내포문화 숲길 협력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합의하였다.
내포문화 숲길 조성 사업은 2010년 5월 23일 대통령 직속 지역발전위원회와 행정안전부가 공동 주최한 전국 시·군 기초 생활권 발전 계획의 연계 협력 사업 종합 평가에서 자치 단체 연계 협력 부문 우수 사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2010년 10월 21일에는 부여국유림관리소에서 내포문화 숲길 구간 가운데 국유림 내의 시범 구간 6.5㎞를 조성하여 일반에 공개하였다. 공개된 구간은 서산 보원사지와 서산 보원사지에 소속된 100개의 암자지 가운데 백암사지를 연결하는 노선이다. 2011년 3월 29일에는 서산시 동문동 소재 새마을 회관에서 내포문화 숲길 서산시추진위원회가 2011년 착공할 14㎞ 노선을 지정하기 위한 간담회를 가졌다.
구성
현재 숲길의 테마는 ‘원효 깨달음의 길’, ‘백제 부흥군 길’, ‘내포 역사 인물 길[동학길]’, ‘천주교 순례길’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길이는 330㎞에 달한다. ‘원효 깨달음의 길’은 수덕사~원효암지~가야사지~서산 보원사지~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당진나루를 연결하는 길이며, ‘백제 부흥군 길’은 광천~오서산[복신굴]~산성리[주류성 비정 지역]~광시~임존성[예산 대흥산성]~예산성~당진 백석포를 연결하는 길이다. ‘내포 역사 인물길[동학길]’은 북접 동학 농민군의 전투지와 성지를 연결하는 길로 당진 승전곡~면천성~예산 관작리~대흥관아~홍주성~덕산읍성~서산 해미읍성을 연결하며, ‘천주교 순례길’은 당진 솔뫼성지~여사울~양촌~배나드리~홍주성~덕산~서산 한티고개~서산 해미읍성을 연결한다.
현황
현재 충청남도 예산군, 당진군, 서산시, 홍성군의 4개 시·군이 각각 행정 구역 내의 숲길의 노선을 정하여 조성한 충청남도 최초, 최대의 장거리 도보트레일로 약 320km의 길로 연결되어 있다.
참고문헌
「산림청 “숲길따라 전국 구석구석 누비세요”」(『연합뉴스』2009. 1. 19)
「내포권에 ‘자연·문화 소통로’ 예산·당진·서산·홍성 등 주요 명산 테마별 연결」(『대전일보』2009. 10. 15)
「‘내포 지역’ 200㎞ 잇는 테마 숲길 조성」(『연합뉴스』2009. 10. 16)
「충남 내포지역에 ‘문화숲길’」(『한겨레신문』2009. 10. 18)
「내포문화 숲길 조성 사업 자치 단체 연계 협력 우수 사업 선정」(『대전일보』2010. 5. 24)
「내포문화 숲길 조성 사업 탄력」(『대전일보』2011. 3. 31)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절터
충청남도 서산 지역에 있었던 사찰이 없어지고, 그 터만 남은 곳.
개설
절터는 과거의 융성했던 사찰의 모습은 사라지고 초석이나 유물만 남아 있는 곳이다. 서산 지역 절터의 대부분은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해당되는 유적으로, 건물의 터였던 곳에는 불상을 비롯하여 축대, 초석, 기와, 자기 등의 유물이 확인된다. 확인된 절터들은 문헌 기록상에 전하지 않던 곳이다. 대부분이 작은 암자나 소규모 절터인데, 이들은 지역의 역사를 밝힐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이러한 절터에는 사찰과 지명에 관련된 설화가 깃들어 있다. 따라서 스토리텔링을 통하여 좋은 향토 자료를 개발하고 활용한다면 지역 주민들에게는 애향심을 고취할 수 있다. 현재 이들 절터들은 개발로 인해 상당수의 유적들이 훼손되어 있는 상태로 보존이 시급한 상황이며, 더 이상 훼손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현황
서산 지역에는 서산 보원사지 등을 비롯하여 40여 곳이 넘는 절터가 있다. 강당리 절터, 고남리 절터, 남정리 절터, 기지리 절터, 백암 절터, 웅소성리 절터, 진장리 절터, 산동리 절터, 갈산리 절터, 왕정리 절터, 칠전리 절터, 신송리 절터, 신장리 절터, 여미리 절터, 연화리 절터, 오사리 불당골 절터, 오사리 사장골 절터, 온석동 절터, 운산리 도장골 절터, 운산리 청량골 절터, 월계리 절터, 장요리 절터, 장현리 절터, 무장리 절터, 정자동 절터, 호리 절터 등 관내 전 지역에서 확인될 만큼 분포 범위가 광범위하다. 대사동, 절상골, 불당골, 절골 등과 같이 절터로 인하여 지역의 지명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곳이 있다. 이들 절터들은 대부분 문헌상에 기록되지 않은 소규모의 절터들이 대부분이며, 축대나 초석 등이 남아 있어 절터로 파악되고 있다.
절터로 대표되는 것은 1987년 7월 18일 사적 제316호로 지정된 서산 보원사지이다. 보원사지 오층석탑 출토 사리장치, 보원사지 출토 고려시대 철조여래좌상, 보원사지 출토 금동여래입상, 보원사지 출토 통일신라 철제여래좌상 등은 과거 보원사의 화려했던 시기를 말해 주는 유물이다. 보원사지는 문헌상에 통일 신라의 기록에 나오기 시작하며, 이 시기 화엄 십찰로 큰 사찰이었다. 고려 시대에는 국사를 파견하여 그 명맥을 이어왔으며, 조선 시대 후기에는 그 이름이 강당사로 바뀌면서 조금씩 사찰이 작아지게 되었다. 조선 시대 말기에 폐사된 보원사지는 최근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이후 1968년에는 보원사지 내에서 6세기 중반으로 추정되는 백제 시대 금동여래입상이 발견되어 보원사의 기원이 백제 시대로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언급되기도 하였다. 2005년에는 종합 정비 기본 계획을 수립하여 2006년~2017년까지 발굴 조사 정비가 계획되어 현재 제6차 발굴 조사를 진행 중에 있다.
의의
서산 지역에서 특히 주목되는 곳이 가야산 지역이다. 학술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구체적으로 파악되지는 않지만, 이들 절터들을 조사한다면 내포 지역 불교의 성지로서 가야산 지역은 매우 중요시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특히 보원사지는 백제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의 유물이 확인되고 있어 향후 발굴 조사를 통해 유물과 관련된 유적이 확인될 가능성이 높은 절터이며, 문헌과의 비교 검토를 통해 절터의 변천을 파악할 수 있는 유적이다.
또한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을 비롯하여 다수의 절터가 있어 가야산 지역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보원사가 통일 신라의 화엄 십찰일 뿐만 아니라 백 개의 암자를 거느린 대 사찰이지만 가야산 지역에 이와 관련된 절터가 확인될 가능성이 있어 향후 조사의 필요성이 요구된다. 내포 지역 불교문화의 중심지로서 가야산 지역은 부각될 것이다.
또한 충청남도 유형 문화재로 지정된 서산 동문동 당간지주, 서산 동문동 오층석탑은 과거 대사동으로 불렸던 곳으로 고려 시대 석탑과 당간 지주가 남아 있어 고려 시대의 지역 역사를 밝힐 수 있는 자료가 될 것이다.
이처럼 서산 지역의 절터들은 문화재 발굴 조사와 같은 학술 조사를 통해 그 당시 지역 역사를 밝힐 수 있는 자료가 남아 있어 절터는 유적으로서의 중요성이 부각될 것이다.
참고문헌
『서산·태안 문화유적』(서산문화원, 1991)
『문화유적분포지도』-서산시(충청남도·충남발전연구원, 1998)
『서산시지』(서산시지편찬위원회, 1998)
『충남지역의 문화유적』13-서산시(백제문화개발연구원, 2001)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2023-10-30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