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가치를 따르자
2023.07.16.(성령강림절후제7주일)
선한목자교회 김 명 현 목사
1/ 하나님, 나를 지켜 주십시오. 내가 주님께로 피합니다. 2/ 나더러 주님에 대해 말하라면 '하나님은 나의 주님, 주님을 떠나서는 내게 행복이 없다' 하겠습니다. 3/ 땅에 사는 성도들에 관해 말하라면 '성도들은 존귀한 사람들이요, 나의 기쁨이다' 하겠습니다. 4/ 다른 신들을 섬기는 자들은 더욱더 고통을 당할 것이다. 나는 그들처럼 피로 빚은 제삿술을 그 신들에게 바치지 않겠으며, 나의 입에 그 신들의 이름도 올리지 않겠다. 5/ 아, 주님, 주님이야말로 내가 받을 유산의 몫입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필요한 모든 복을 내려주십니다. 나의 미래는 주님이 책임지십니다. 6/ 줄로 재어서 나에게 주신 그 땅은 기름진 곳입니다. 참으로 나는, 빛나는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7/ 주님께서 날마다 좋은 생각을 주시며, 밤마다 나의 마음에 교훈을 주시니, 내가 주님을 찬양합니다. 8/ 주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는 분,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9/ 주님, 참 감사합니다. 이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차고, 이 몸도 아무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까닭은, 10/ 주님께서 나를 보호하셔서 죽음의 세력이 나의 생명을 삼키지 못하게 하실 것이며 주님의 거룩한 자를 죽음의 세계에 버리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11/ 주님께서 몸소 생명의 길을 나에게 보여 주시니,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삶에 기쁨이 넘칩니다. 주님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니, 이 큰 즐거움이 영원토록 이어질 것입니다. (시편 16:1-11)
들어가는 말
최근 실업급여에 관한 설왕설래가 있었습니다. 십업급여가 너무 높아 일할 의욕을 떨어뜨리며, 재정도 악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제도를 손질하자는 쪽에서는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젊은 여성들이 달콤한 시럽급여(?)를 받아 해외여행도 하고 샤넬 선글라스도 산다는 것입니다. 다른 쪽에서는 자기 돈으로 명품을 사든 해외여행을 가든 무슨 상관이냐고 말합니다. 저도 제 딸이 알바를 그만 두고 제주도도 갔다 오고 일본도 갔다 오는 것을 보면서 우리사회가 정말 부유하긴 하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젊은 시절에는 월급 받은 돈으로 어떻게 해서든 가족을 부양했다는 이야기들뿐이었는데 밀이죠.
과거에 부는 성공의 척도였으며 부러움과 시기심의 대상이었습니다. 부를 이룬다는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공부를 잘했거나 열심히 일했거나. 부를 이룬 사람들은 공부를 잘했거나 열심히 일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가운데 돈은 모든 가치의 척도가 되었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열심히 노력한 사람이며 성공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인식을 가진 기성세대들이 볼 때, 실업급여로 해외여행을 가는 청년들이나 고가 명품을 사는 젊은 여성들은 한심한 사람들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사회는 달라졌습니다. 공부나 열심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돈을 번 사람들도 많아졌습니다.
사회를 유지해온 가치관
1타 강사들은 재벌 못지않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습니다. 유튜버들은 새로운 시장에서 전혀 다른 모습과 방식으로 돈을 벌고 있습니다. 일부 연예인들 역시 학식, 노력, 인성과 상관없이 자신들의 특별한 재능으로 과거와 비교하면 상상할 수도 없는 부를 누리고 있습니다. 기성세대는 노력의 결과인 돈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했는데, 새롭게 등장하는 부자들 앞에 초라해질 뿐입니다. 기성세대가 여전히 부가 인간의 사회적 가치를 규정하는 유일한 척도라고 여긴다면 신세대는 그런 기성세대를 마음껏 비웃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새로운 사회적 가치 척도가 필요합니다.
실업급여, 기초수급, 기타 다양한 지원금 등으로 기초적인 삶의 안정이 가능한 사회라면, 더 이상 돈이 모든 가치의 척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여전히 돈이 유일한 가치의 척도가 된다면 돈을 벌기 위한 수단과 방법, 그리고 그 씀씀이가 다른 구세대와 신세대는 끊임없이 갈등할 것입니다. 서두에 말한 실업급여에 대해 구직준비라는 구세대의 생각과 선택의 자유라는 신세대의 생각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날 부유해진 한국사회에서는 양심과 선한 행동들이 사회의 척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가치들은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보편적 가치들이기 때문입니다.
양심을 따르며 선을 행하는 사람이 인정받는 사회는 분명 바람직한 사회일 것입니다. 돈을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 다투고 손해 보지 않으려고 남을 속여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렇게 하지 않아도 굶지 않는데 말입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이 인정받게 된다면, 욕심은 자연스레 뒤로 밀려날 것입니다. 부자가 된 것은 더 이상 자랑거리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부를 선한 일에 사용한다면 그것은 자랑스러워할 만한 것입니다. 돈이 아닌 선에 가치를 두는 것이 더 큰 만족과 기쁨을 나아가 사회적 통합을 만들어 낼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부를 사회적 가치 척도로 두었던 데서 이제는 벗어나야 합니다.
가치의 이동
교회 역시 부가 모든 종교적 가치의 척도였습니다. 큰 교회가 좋은 교회이며, 열심히 노력한 교회였던 것입니다. 큰 교회가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된 지도 오래 되었지만, 건물의 크기와 교인수라는 부가 교회의 가치 척도이기에 그 수단이 어떠하든 간에 규모에 따라 그 가치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교회의 가치를 선의 행함에 둔다면 교회를 보는 눈은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좋은 교회는 크기와는 상관없이 선을 실천하는 교회일 것입니다. 이런 가치의 변화가 있다면 교회는 살아날 것입니다. 우리 사회 역시 가치가 먼저 변한다면 갈등과 사회문제들은 비로소 해결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시편 16편의 저자는 바로 이 가치의 문제에 관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 피신합니다.(1) 원수나 전쟁으로부터 피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 관념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온갖 세상적인 풍요와 부, 즉 오늘날 돈이나 성공 같은 것들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도자는 오직 하나님에게서 행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나더러 주님에 대해 말하라면 ‘하나님은 나의 주님, 주님을 떠나서는 내게 행복이 없다’ 하겠습니다.”(2) 그는 더 이상 세상의 가치 기준과 그것이 충족되었을 때에 오는 기쁨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기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땅에 사는 성도들에 관해 말하라면 ‘성도들은 존귀한 사람들이요, 나의 기쁨이다’ 하겠습니다.”(3) 루터를 비롯한 많은 주석가들이 여기서 말하는 성도를 경건한 자들이나 제사장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도’란 표현이 다른 신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저도 여기에 동의하면서 해석해 보면 이런 뜻입니다. 기도자 역시 전에는 이런 신들을 좋아했습니다. 즉, 자신도 과거에는 땅에 속하는 신들을 존귀하게 여기면서 자신의 기쁨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사회 역시 이 땅의 신, 성공과 돈을 존귀하게 여기면서 기쁨으로 여겨왔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가치
하지만 기도자는 분명하게 말합니다. “다른 신들을 섬기는 자들은 더욱더 고통을 당할 것이다.”(4) 오늘날 우리 사회가 그러한 신들을 섬기고 있기에 결과적으로 그것은 기쁨이 아닌 고통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자는 세상 사람들을 두고 선언합니다. “나는 그들처럼 피로 빚은 제삿술을 그 신들에게 바치지 않겠으며, 나의 입에 그 신들의 이름도 올리지 않겠다.”(4) 세상은 고통을 가져오는 그 땅의 신들을 향해 무모하게 피를 흘려 온 것입니다. 돈에 가치를 둔 성공은 고통입니다. 기도자는 이제 그 이름조차도 올리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분명 이래야 합니다.
사실 주변 사람들은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우리보다 훨씬 더 돈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무슨 돈으로, 그 돈은 어디에서 나서.’ 이런 것들이 땅에 있는 신들을 찾는 사람들의 관심입니다. 우리는 이런 신들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세상 사람들과 달리 기도자에게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주님이었습니다. “아, 주님, 주님이야말로 내가 받을 유산의 몫입니다.”(5) 기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필요한 모든 복을 내려주십니다. 나의 미래는 주님이 책임지십니다.”(5) 하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미래는 돈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기도자는 레위지파였습니다. 이스라엘지파들이 땅을 분배받을 때, 레위지파는 땅을 분배받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기도자는 자신에게 주님의 임재야말로 다른 지파들이 분배받은 땅과 다름없음을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줄로 재어서 나에게 주신 그 땅은 기름진 곳입니다. 참으로 나는, 빛나는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6) 기도자는 자신이 받은 것이 어느 누구의 땅보다 기름지다고 고백합니다. 레위지파가 땅이 없다고 굶어죽지 않듯이, 우리 사회도 옳은 일을 한다고 해서 굶어죽는 사회는 아닙니다. 그것이 더 기름진 것임이 분명합니다. 영원한 가치에 따라 올바른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영감을 받는 사람입니다.
나가는 말
“주님께서 날마다 좋은 생각을 주시며, 밤마다 나의 마음에 교훈을 주시니, 내가 주님을 찬양합니다.”(7) 주님이 주시는 영원한 가치에 헌신할 때 우리는 전혀 흔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는 분’(8)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데도 이런 일을 먼저 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자는 주님께 감사드리면서(9) ‘이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차고, 이 몸도 아무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까닭’을 밝혀 둡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호하셔서 죽음의 세력이 나의 생명을 삼키지 못하게 하실 것이며 주님의 거룩한 자를 죽음의 세계에 버리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10)
그리스도인들이 그 동안 세상에 매달려 있었다면 이제는 기도자처럼 하나님께로 돌아서야 할 것입니다. 기도자는 세상의 신을 따르던 데서 찾았던 기쁨을 이제는 주님에게서 찾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몸소 생명의 길을 나에게 보여 주시니,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삶에 기쁨이 넘칩니다. 주님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니, 이 큰 즐거움이 영원토록 이어질 것입니다.”(11) 우리도 진정한 생명의 길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 사회는 돈에만 가치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과 평화, 봉사와 배려와 같은 양심과 도덕적 가치들이 돈의 가치에 우선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사회를 향해 모범적 등불을 비춰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