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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삼(金宗三)
묵화 (墨畵)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김종삼(1921~1984) 시인의 시는 짧다. 짧고 군살이 없다. 그의 시는 여백을 충분히 사용해 언어
가 잔상을 갖도록 배려했다. 그리고 아주 담담하다. 언어를 우겨넣거나 막무가내로 끌고 다닌 흔
적이 없다. 사물과 세계를 대면하되 사물과 세계의 목소리를 나직하게 들려준다.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물안개가 막 걷히는 새벽 못을 보고 있는 듯하다.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작은 여울에 누군
가가 정성스레 놓아 둔 몇 개의 징검돌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묵화(墨畵)’의 목소리도 자분자분하다.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막 돌아와 쌀 씻은 쌀뜨물을 먹고
있는 소를 보여준다. 그의 시선은 소의 목덜미에 가 있다. 하루 종일 써레나 쟁기를 끌었을, 멍에가 얹
혀 있었을 그 목덜미를 보여준다. 목덜미에는 굳은 살이 박였을 것이다. 그리곤 소의 목덜미와 할머니
의 손을 교차시킨다. 할머니도 노동을 마치고 돌아 와 소와 함께 날이 저무는 저녁을 맞고 있다. 할머
니는 겹주름처럼 고랑이 나 있는 밭에 쪼그려 앉아 풀을 뽑고 돌을 캐내고 종일 호미질을 했을 것이
다. 시인의 시선은 소와 할머니의 부은 발잔등으로 옮아간다. 부은 발잔등을 보여줄 뿐이지만, 우리는
소와 할머니의 하루가 얼마나 고단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시인이 눈여겨본 대목은 소와 할머니의 관계일 것이다. 소는 할머니를, 할머니는 소를 마주하고 있
다. 이 둘 사이에 조용하고 평화롭고 안쓰러운 대화와 유대가 오가고 있다. 낮의 소란과 밤의 정적
이 합수(合水)하는 성스러운 시간에 마치 삶이란 본래 비곤하고 외롭고 쓸쓸한 것이라는 듯 소와 할
머니는 잠시 멈춰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하여 이 둘의‘서로 돌봄’은 훈훈하면서도 슬프다. (우
리는 얼마나 이‘쓸쓸한 돌봄’을 자주 잊고 사는 가) 이 시를 다 읽고 나면 우리는 얼굴 가득 흐뭇하
게 피어나던 웃음이 천천히 묽어지는 감정의 변화를 겪게 된다. 본래 삶이란 웃음과 슬픔으로 꿰맨
두 겹의 옷감이라는 듯.
김종삼 시인은 등산모를 곧잘 썼고 파이프 담배를 자주 물었고 술을 좋아했고 고전음악을 즐겨 들
었다. 그에게 삶은‘방대한 / 공해 속을 걷는’일처럼 여겨졌다. 그는 하늘나라 다가올 때마다 /맑은
물가 다가올 때마다 /라산스카 /나 지은 죄 많아 /죽어서도 /영혼이 /없으리’라며 인간의 원죄를, 불
구의 영혼을 아프게 노래했다. 그러면서도 그는‘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는’사람들과 세
상을 좋아하고 동경했다. 그의 시는 말이 적었지만 정직했다. 언어의 낭비가 많고 외화(外華)에 골몰
하는 시대를 살수록 언어를 지극히 아껴 쓴, 먹그림같이 실박하게 살다 간 김종삼 시인이 그립다.
<출처: 천도교동부산교구 / 문태준시인>
북치는 소년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이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서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시집 {십이음계}, 1969>
김종삼은 고도의 비약에 의한 어구의 연결과 시어가 울리는 음향의 효과를 살린 초현실주의 기법을 원용하여 동안(童眼)에 비친 이미지로써 순수 지향의 의식을 펼쳐 보인 시인이다. 초기에는 시행의 단절, 난삽한 한자어의 배치, 의미의 비약 등을 활용하여 기법의 실험성을 드러내다가, 후기에는 점차 평이한 진술을 바탕으로 인간의 체험을 드러내고 행간의 여운을 통하여 감추어진 의미를 암시하는 경향을 보여 주었다.
이 시는 그의 초기 대표작으로 그러한 특성을 지니고 있어 쉽게 이해되지 않는 면이 있다. ' 처럼'으로 묶인 세 개의 연에서 그 비교 대상이 생략됨으로써 완전한 문장을 갖추지 못한, 그야말로 '쓰다가 그만 둔 시'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단편적으로 끊어진 그 시상들을 '북치는 소년'이라는 제목을 중심으로 엮어 보면, 시인이 의도하고 있는 통일된 시상을 찾아낼 수 있다. 다시 말해, 각 연의 ' 처럼' 뒤에 '북치는 소년'을 덧붙이면, 전체의 맥락이 완전하게 살아나 독자의 가슴 속에서 여운으로 완결됨을 알 수 있다.
이 시는 서양에서 우리 나라의 어느 가난한 아이에게 아름다운 카드가 온다는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다. 김종삼 시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대체로 혼자이고 가난하며 비극적 존재로 나타난다. 이 시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2연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가난한 아이로 비애를 간직하고 있다.
그러므로 6·25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황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전쟁 고아로도 볼 수 있겠다. 성탄절이 가까운 어느 날, 그 아이는 서양 소년이 북을 치고 있는 그림의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를 받는다.
그러나 카드 속에 담겨 있는 '북치는 소년'·'양떼'·'진눈깨비' 등의 이국적 풍광(風光)들은 그에게 막연한 아름다움의 무의미한 존재일 뿐이다. 아이는 그 환상적인 풍경에 도취되기도 하지만, 그는 곧 그것이 다만 화려한 장식에 불과한, '내용 없는 아름다움'임을 깨닫는다.
이렇듯 이 시는 눈에 비친 사상(事象)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 시가 아니라, 그 사상 뒤에 배음(背音)으로 깔려 있는 이미지에 의해서 조형된 시이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는 어떤 사상이나 의미 내용을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다만 각 시어들이 구축해 놓은 아름다움 그 자체만을 느낄 수 있으면 충분할 것이다.
물 통
희미한
풍금 소리가
툭 툭 끊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무엇을 하였느냐는 물음에 대해
다름아닌 인간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 길어다 준 일밖에 없다고
머나먼 광야의 한복판 얕은
하늘 밑으로
영롱한 날빛으로
하여금 땅 위에선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물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 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아닌 시인이라고.
<시집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1982>
평화롭게
하루를 살아도
온 세상이 평화롭게
이틀을 살더라도
사흘을 살더라도 평화롭게
그런 날들이
그날들이
영원토록 평화롭게......
시인학교
공고
오늘 강사진
음악 부문
모리스 라벨
미술부문
폴 세잔느
시 부문
에즈라 파운드
모두
결강
金冠植, 쌍놈의 새끼들이라고 소리지름. 지참한 막걸리를 먹음.
교실 내에 쌓인 두꺼운 먼지가 다정스러움.
金素月
金洙暎 휴학계
全鳳來
金宗三 한 귀퉁이에 서서 조심스럽게 소주를 나눔.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제5번을 기다리고 있음
校舍
아름다운 레바논 골짜기에 있음
ㅡ시집『시인학교』, 신현실사(1977)
이승이 아니라 저승의 풍경이다. 등장인물은 모두 작고한 이들이다.
상징주의 취향의 작곡가 라벨. 색채보다 구성을 중요시 했던 프랑스 후기인상파 화가 세잔느.
미국의 이미지음운동의 선두시인 에즈라 파운드는 말할것도 없고
국내시인들도 평범한 생을 보낸 시인이 아닌 것도 주목된다.
그의 철학과 취향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김소월은 20대에 요절하였으며
김관식은 독설과 술로 일생을 살다가 술로 죽었으며
김수영은 술을 마시고 귀가하다가 교통사고로 비명횡사했고
전봉래는 피난지 부산의 한 다방 구석에 앉아 세코닐을 먹고 자살했다.
이들이 없거나 있는 그 한귀퉁이에서 브란덴부르크의 협주곡 제5번을 기다리며
자신이 조심스럽게 소주를 나누고 있다는 표현에는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 숙연함이 잇다.
이쯤에서는 오히려 이승과 저승의 기묘한 조화와 배합이 느껴지는 터이다.
<자료: 이승주>
스와니강(江)이랑 요단강(江)이랑
그해엔 눈이 많이 나리었다. 나이 어린
소년은 초가집에서 살고 있었다.
스와니강(江)이랑 요단강(江)이랑 어디메 있다는
이야길 들은 적이 있었다.
눈이 많이 나려 쌓이었다.
바람이 일면 심심하여지면 먼 고장만을
생각하게 되었던 눈더미 눈더미 앞으로
한사람이 그림처럼 앞질러갔다.
부활절
성벽에 일광이 들고 있었다
육중한 소리를 내는 그림자가 지났다
그리스도는 나의 산계급이었다고
죄없는 무리들의 주검 옆에 조용하다고
내 호주머니 속엔 밤 몇 톨이 들어
있는 줄 알면서
그 오랜 동안 전해 내려온 전설의
돌층계를 올라와서
낯모를 아이들이 모여 있는 안쪽으로
들어섰다 무거운 거울 속에 든 꽃잎새처럼
이름이 적혀지는 아이들에게
밤 한 톨씩을 나누어주었다
원정(園丁)
평과( 果)나무 소독이 있어
모기새끼가 드물다는 몇 날 후인
어늘 날이 되었다.
며칠 만에 한 번만이라도 어진
말솜씨였던 그인데
오늘은 몇 번째나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된다는 길을 기어이 가리켜주고야 마는 것이다.
아직 이쪽에는 열리지 않은 과수밭
사이인
수무나무 가시 울타리
길줄기를 벗어나
그이가 말한 대로 얼만가를 더 갔다.
구름 덩어리 얕은 언저리
식물이 풍기어오는
유리 온실이 있는
언덕 쪽을 향하여 갔다.
안쪽과 주위(周圍)라면 아무런
기척이 없고 무변(無邊)하였다.
안쪽 흙바닥에는
떡갈나무 잎사귀들의 언저리와 뿌롱드 빛깔의 과실들이
평탄하게 가득 차 있었다.
몇 개째를 집어보아도 놓였던 자리가
썩어 있지 않으면 벌레가 먹고 있었다.
그렇지 않은 것도 집기만 하면 썩어갔다.
거기를 지킨다는 사람이 들어와
내가 하려던 말을 빼앗듯이 말했다.
당신 아닌 사람이 집으면 그럴 리가 없다고―
그리운 안니·로·리
나는 그동안 배꼽에
솔방울도 돋아
보았고
머리 위로는 몹쓸 버섯도 돋아
보았습니다 그러다가는
'맥웰'이라는
老醫의 음성이
자꾸만
넓은 푸름을 지나
머언 언덕가에 떠오르곤 하였습니다
오늘은
이만치 하면 좋으리마치
리봉을 단 아이들이 놀고 있음을 봅니다
그리고는
얕은
파아란
페인트 울타리가 보입니다
그런데
한 아이는
처마밑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않고
짜증을 내고 있는데
그 아이는
얼마 못 가서 죽을 아이라고
푸름을 지나 언덕가에
떠오르던
음성이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리운
안니·로·리라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서부(西部)의 여인
한 여인이 병들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남자도 병들어가고 있었다
일 년 후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그 일 년은 너무 기일었다
그녀는 다시 술집에 전락되었다가 죽었다
한 여인의 죽음의 문은
서부 한복판
돌막 몇 개 뚜렷한
어느 평야로 열리고
주인 없는
마(馬)는 엉금엉금 가고 있었다
그 남잔 샤이안족이
그녀는 목사가 묻어주었다.
내가 죽던 날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주먹만하다 집채만하다
쌓이었다가 녹는다
교황청 문 닫히는 소리가 육중
하였다 냉엄하였다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다비드상 아랫도리를 만져보다가
관리인에게 붙잡혀 얻어터지고 있었다
소금바다
나도 낡고 신발도 낡았다
누가 버리고 간 오두막 한 채
지붕도 바람에 낡았다
물 한 방울 없다
아지 못할 봉우리 하나가
햇볕에 반사될 뿐
조류(鳥類)도 없다
아무것도 아무도 물기도 없는
소금 바다
주검의 갈림길도 없다.
궂은 날
입원하고 있었습니다
육신의 고통 견디어낼 수가 없었습니다
어제도 죽은 이가 있고
오늘은 딴 병실로 옮아간 네 살짜리가
위태롭다 합니다
곧 연인과 死刑 간곡하였고
살아 있다는 하나님과
간혹
이야기를 나누고 걸어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의 한 손을
잡아주지 않았습니다.
풍경
싱그러운 거목들 언덕은 언제나 천천히 가고 있었다
나는 누구나 한번 가는 길을
어슬렁어슬렁 가고 있었다
세상에 나오지 않은
악기를 가진 아이와
손 쥐고 가고 있었다
너무 조용하다.
예수는 어떻게 살아갔으며
어떻게 죽었을까
죽을 때엔 뭐라고 하였을까
흘러가는 요단의 물결과
하늘나라가 그의 고향이었을까 철따라
옮아다니는 고운 소릴 내릴 줄 아는
새들이었을까
저물어가는 잔잔한 물결이었을까
민간인(民間人)
1947년 봄
심야(深夜)
황해도 해주(海州)의 바다
이남(以南)과 이북(以北)의 경계선 용당포(浦)
사공은 조심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孀兒)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水深)을 모른다.
<{현대시학}, 1971.10>
이 시는 6·25의 비극적 체험을 바탕으로 창작되었으면서도 전쟁의 색채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제목으로 쓰인 '민간인'이라는 단어는 관리나 군인이 아닌 '보통 사람'이란 뜻으로, 남북 분단의 비극이 평범한 일반인에게도 끼치고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채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시인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배경을 제시하고, 그 곳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을 이렇다 할 생각과 느낌을 덧붙이지 않은 채 다만 보여만 줄 뿐이다.
그것은 시인이 그 비극적 상황을 비정하리만큼 객관적으로 그려 내면서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느낄 것인가를 독자의 몫으로 남겨 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작 방법은 독자의 상상력을 통하여 더 깊은 생각과 느낌을 갖도록 유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전쟁은 시인에게 기억하기조차 끔찍했던 공포의 사건으로, '용당포'라는 지명과 '1947년 봄'이라는 시간을 통해 더욱 구체화됨으로써 장장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여전히 그를 괴롭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무서운 사건은 다름아닌, 전쟁이 발발하기 전, 북한 주민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남북 왕래가 금지된 38선을 넘어 월남을 감행하는 극한 상황에서, 우는 젖먹이 아이까지 바다 속에 던져 넣던 비극적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누구나 그 수심을 모른다'라는 구절의 '수심'은 바로 분단이 가져다 준 비극의 깊이요, 그의 가슴에 각인된 고통과 슬픔의 깊이라 하겠다.
앙포르멜
나의 무지(無知)는 어제 속에 잠든 망해(亡骸) 세자아르 프랑크가
살던 사원 주변에 머물렀다.
나의 무지는 스테판 말라르메가 살던 목가(木家)에 머무렀다.
그가 태우던 곰방댈 훔쳐 내었다
훔쳐낸 곰방댈 물고서
나의 하잘 것이 없는 무지는
반 고흐가 다니던 가을의 근교 길바닥에 머물렀다.
그의 발바닥만한 낙엽이 흩어졌다.
어는 곳은 쌓이었다.
나의 하잘 것이 없는 무지는
장 폴 사르트르가 경영하는 연탄공장의 직공이 되었다.
파면되었다.
비 옷을 빌어 입고
온 종일終日 비는 내리고
가까이 사랑스러운 멜로디,
트럼펫이 울린다
이십팔二十八년 전
선죽교善竹橋가 있는
비 내리던
개성開城,
호수돈 고녀생高女生에게
첫사랑이 번지어졌을 때
버림 받았을 때
비옷을 빌어 입고 다닐 때
기숙사寄宿舍에 있을 때
기와 담장 덩굴이 우거져
온 종일終日 비는 내리고
사랑스러운 멜로디 트럼펫이
울릴 때
<김종삼 전집/장석주 편/청하>
라산스카
바로크 시대 음악 들을 때마다
팔레스트리나 들을 때마다
그 시대 풍경 다가올 때마다
하늘나라 다가올 때마다
맑은 물가 다가올 때마다
라산스카
나 지은 죄 많아
죽어서도
영혼이
없으리
장편(掌篇). 2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천변 10전 균일상 밥집 문턱엔
거지소녀가 거지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10전짜리 두 개를 보였다
행복
오늘은 용돈이 든든하다
낡은 신발이나마 닦아 신자
헌 옷이나마 다려 입자 털어 입자
산책을 하자
북한산성행 버스를 타 보자
안양행도 타보자
나는 행복하다
혼자가 더 행복하다
이 세상이 고맙다 예쁘다
긴 능선 너머
중첩된 저 산더미 산더미 너머
끝없이 펼쳐지는
멘델스존의 로렐라이 아베마리아의
아름다운 선율처럼.
그는 지독한 에고이스트였다고 한다. 월급을 타도 먼저 자신이 쓸 돈을 따로 챙긴 다음 나머지만을 가족에게 주었다. 심지어 퇴직금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의 학교 졸업식에도 전날 마신 술 때문에 참석해 본 적이 없었다. 결벽증이 심한 그는 외출했다 돌아오면 싫은 인간과 악수했다며 손을 계속 씻었고 다른 사람이 왔다 가면 그가 만진 문 손잡이를 수건으로 닦기도 했다.
그의 유일한 취미는 음주와 음악이었다. 일단 술을 시작하면 곡기를 끊고 한 달 이상 계속해서 독주를 마셔대는 바람에 그는 결국 간과 신경이 망가졌으며 나중엔 폐까지 나빠졌다. 가족이 술을 못 마시게 하자 지붕을 타고 넘어 도망가는가 하면 가게에 쓰고 다니던 베레모를 던지고 술을 가져가다 도둑으로 몰리기도 했다. 자주 조선일보사 앞 아리스 다방에 나타나곤 했지만 거기 드나드는 문인들과도 어울리지 못해 항상 혼자였다.
시인 김종삼. 비슷한 연배의 모더니즘 계열의 시인들인 김수영이나 김춘수와 비교해서도 그의 일생은 불우했고 작품 세계 또한 단출하다. 그렇다면 그는 불행했던가.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이자 생전에 나온 마지막 시집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민음사)에 실린 시 ‘행복’에서 화자는 매우 소박한 행복론을 피력하고 있다. 일상의 작은 위안이 주는 행복. 그 행복은 “중첩된 저 산더미”가 상징하는 삶의 무거움을 음악의 “아름다운 선율”처럼 가볍게 타고 넘어 멀리멀리 퍼져 나가게 만든다. 시인이 곤궁한 삶에서 길어 올린 이 작은 희망의 메시지는 그 바탕에 깔린 진정성만큼이나 감동적이다.
<자료: 희망의 간이역장 / 남진우/시인·문학평론가>
아우슈비츠 라게르
밤하늘 호숫가엔 한 가족이
앉아 있었다
평화스럽게 보이었다
가족 하나하나가 뒤로 자빠지고 있었다
크고 작은 인형 같은 시체들이다
횟가루가 묻어 있었다
언니가 동생 이름을 부르고 있다
모기 소리만하게
아우슈비츠 라게르
어부
바닷가에 매어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거린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
회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머얼리 노를 저어 나가서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이 되어서
중얼거리려고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
5학년 1반
5학년 1반입니다.
저는 교외에서 살기 때문에 저의 학교도 교외에 있습니다.
오늘은 운동회가 열리는 날이므로 오랜만에 즐거운 날입니다.
북치는 날입니다.
우리 학굔
높은 포플러 나무줄기로 반쯤 가리어져 있습니다.
아까부터 남의 밭에서 품팔이하는 제 어머니가 가물가물하게 바라다보입
니다.
운동 경기가 한창입니다.
구경 온 제 또래의 장님이 하늘을 향해 웃음지었습니다.
점심때가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가져온 보자기 속엔 신문지에 싼 도시락과 삶은 고구마 몇 개와
사과 몇 개가 들어 있었습니다.
먹을 것을 옮겨 놓는 어머니의 손은 남들과 같이 즐거워 약간 떨리고 있었
습니다.
어머니가 품팔이하던 밭이랑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고구마 이삭 몇 개를
주워 들었습니다.
어머니의 모습은 잠시나마 하느님보다도 숭고하게 이 땅 위에 떠오르고 있
었습니다.
어제 구경 왔던 제 또래의 장님은 따뜻한 이웃처럼 여겨졌습니다
G·마이나
- 전봉래(全鳳來)형(兄)에게
물
닿은 곳
신양(神恙)의
구름밑
그늘이 앉고
묘연(杳然)한
옛
G·마이나
<십이음계, 삼애사, 1969>
술래잡기
심청일 웃겨 보자고 시작한 것이
술래잡기였다.
꿈 속에서도 언제나 외로웠던 심청인
오랜만에 제 또래의 애들과
뜀박질을 하였다.
붙잡혔다.
술래가 되었다.
얼마 후 심청은
눈가리개 헝겊을 맨 채
한동안 서 있었다.
술래잡기 하던 애들은 안 됐다는 듯
심청을 위로해 주고 있었다.
시인 김종삼 후배시인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오십년대 시인 가운데서 빼놓을 수 없는 시인의 하나인 김종삼 시인은 기행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여간해 없는 일로 소학교에 다니는 딸의 소풍에 동행한 일이 있다. 점심을 먹고 났는데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딸은 한참 찾던 끝에 언덕 위에서 큰 돌을 가슴에 엊어놓고 잠이 든 아버지를 발견했다. "아버지 왜 그래" 하고 물었다. "응, 하늘로 날아갈 것 같아서 그래." 이것이 김종삼 시인의 대답이었다. 그는 그 자신 언론기관에서 밥을 먹고 있으면서도 매스컴이라면 질색을 했다. 곡 인터부 기사를 쓸 필요가 있던 한 신문의 문학담당 기자가 그것을 알고 시를 지망하는 문학청년을 사칭하여 그를 만났다. 일단 만나면 어떻게 디려니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카메라를 들이대자 그는 어마 뜨거라 다방문을 박차고 도망가고 말았다. 그가 잘 나가는 다방은 조선일보 뒤에 있던 아리스라는 다방이었는데 일이 없이도 자주 혼자 나가 앚아 있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싫은 사람이 나타나면 말없이 일어나 밖으로 나와 버렸다. 다방에 들어가다가도 싫은 사람이 있으면 뒤돌아서 나왔다. 아리스의 단골 가운데는 그의 형인 김종문 시인(예비역 준장)도 있었는데 마주치면 "에이, 똥장군" 내뱉고 돌아선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가 만나는 사람은 전봉건, 김광림, 김영태등으로 극히 한정외어 있었다. 술을 몹시 좋아했고 술도 잘 샀지만 그것도 사람을 몹시 가렸으며 혼자 마시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정훈국 방송과와 동아방송에서 배경음악 담당으로 이십년 이상 일한만큼 수입이 괜찮은 편이었으면서도 한번도 사글세를 면한 일이 없다. 그에게는 자신의 집을 갖는다는지 목돈을 모아 전세를 얻는다는 따위 개념이 없었던 것 같다. 도대체 그는 돈의 필요성이나 자신의 가난을 의식해본 일도 없었다. 돈이라는 건 주머니에 있으면 쓰고 없으면 아 쓰면 그만이었다. 봉급을 타 주머니가 두둑하면 술도 고급으로 마시고 옷도 고급으로 해 입었다. 와이셔츠도 명동에 나가 맞추어야 직성이 풀리고 넥타이도 백화점엘 찾아가 사 맸다. 구두고 시계도 고급이 아니면 걸치지 않았다. 만년필이며 라이터 사치도 대단해서 담배값이 떨어진 날에도 주머니에는 프랑스제 최고급 라이터가 들어 있었다. 씀씀이가 헤펐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가까이 지내는 몇 안되는 후배한테 술도 잘 사고 용돈도 잘 주었다. 그 후배 가운데는 천상병 시인도 있어 그는 천 시인의 중요한 고객의 하나로 수첩에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꼭 밖에서뿐이었다. 아내에게는 처음부터 인색해서 한번도 월급봉투를 만기는 일이 없었다. 생활비도 모른 체였다. 두 딸들에게도 마찬가지여서 육성회비 등 잡부금이며 학용품 값도 으레 어머니 차지였다. 늘 육성회비가 밀리니까 학교에서는 "너의 아버지가 동아방송에 다닌다는 것이 사실이냐"며 이상하게 생각했다. 술도 엄청난 폭주였다. 한번 입에 대면 사흘이고 나흘이고 일도 식사도 팽개치고 마셔댔다. 근무중에도 마셔 종종 말썽이 되었는데, 그래도 별난 사람으로 쳐주어 쫓겨나는 곤욕만은 면했다. 하지만 술로해서 쫓겨날 뻔한 일이 있었으니 유신 직후 군이 신문사를 점령하고 있을 때다. 점심에 반주를 하고 들어오는데 사무실 입구에 중무장을 한 헌병이 서 있었다. 그는 주먹으로 온 힘을 다하여 헌벙의 머리를 깠다. 이것이 다른 사람이었다면 당연히 반공법이나 기타 군 모독죄끔으로 처벌을 받았을 것이지만, 역시 반체제니 반유신이니 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그였으므로 우물우물 넘어가고 말았다. 동아방송에서 정년퇴임한 후 그는 그 좋아하던 사치도 못하고 곤궁하게 살면서 더 심하게 폭음을 했다. 한번 나가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일주일씩 보름씩 집에 들어오지도 않고 마셔댔다 한다. 일년이 멀다 하고 이사를 다녔지만 집을 얻고 이사비용을 만들고 이사를 하는 일은 모두 아내의 몫이었다. 그는 새로 이사가는 곳이 어디인지 방이 몇 칸인지에 조차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사하는 날은 아예 집을 나가 며칠 술에 젖어 있다가 느지막이 찾아오는 일이 더 많았다. 그렇게 십여년을 더 살다가 그는 간경화로 세상을 떴다. 그가 얼마나 빈한하게 살다 갔는가는 후에 전집을 내기 위해서 박중식 시인이 찾아가니 유품이라고 부인이 내주는 것이 조그만 보따리 하나뿐이더라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자신이 직접 쓴 시집 한 권 집에 가지고 있지 않더란다. 그가 마지막 살던 동네는 정릉, 청수장 가는 큰길에서 머지 않은 곳에 그가 마지막 누워 앓던 허름한 집이 재개발로 뜯길 날을 기다리며 서 있다. 스카이웨이 공사로 기계소리와 먼지가 잘 날이 없고 뜨내기 장사꾼들의 싸구려 부르는 소리가 시끄러운 곳이다. 김종삼 시인은 이곳을 "우리 나라 영화의 선구자/라운규가 활동사진을 만들던 곳/아리랑고개/지금은 내가 사는 동네"라고 노래했지만, 죽어서는 호강이 대단하다. 송추울태리 길음 성당묘지의 산록에 있는 그의 묘지에서는 북한산의 도도한 연봉이 한눈에 들어오고 구파발에서 의정부로 뚫린 시원한 길이 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것이다. 아마추어의 눈으로 보아도 클림없는 명당이다. 무덤에는 안산김씨종삼베드로지묘 라는 비명이 써 있고 그 옆에 '북치는 소년'이 새겨진 시비가 서서 함께 북한산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그의 아내와 딸들은 그리움만으로 그를 기억하지는 않는다. 지겹도록 고생만 시킨 남편이요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정귀례 여사는 시인이 타계한 이래 상계동의 아파트촌에 살고 있지만 잠자고 쉴 곳 있으면 되는 것이지 자기집, 남의 집이 무슨 상관이냐는 시인의 말을 들어 해약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아찔하다고 말한다. 또 딸들은 학비 한푼 도움 안 주면서도 대학에 간다니까 그까짓 데는 무엇하러 가느냐며 시큰둥해하던 아버지의 이미지가 머리에서 떠나지 안는단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도 그를 원망하지 않는다. 시비에 또는 묘비에 새겨진 자신들의 이름을 보면서 역시 남편은 또는 아버지는 시인답게, 예술가답게 세상을 살다 간 사람임을 다시금 깨닫는다는 것이다. <자료: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 '우리교육'에서 발췌> ▣ 김종삼의 삶과 문학
한 늙고 추레한 노인이 가난한 산동네의 구멍가게에 들어왔다. 무허가 집들이 밀집된 산동네 산 8번지의 한 구멍가게였다.
그 일대에는 개백정도 살고, 상처한 복덕방 영감도 살고, 막노동꾼, 술집 나가는 아가씨들도 산다. 과자 부스레기, 라면, 소주, 일용 잡화 따위로 겨우 구색을 갖춘 코딱지만한 구멍가게였다. 마침 주인은 자리를 비운 채 였다.
노인은 떨리는 손으로 얼른 소주 두병을 훔쳐 밖으로 나왔다. 노인은 구멍가게에서 훔친 소주 두병을 소중하게 옷안에 숨겨가지고 어디론가 허청허청 가고 있었다.
그이가 저 유명한 시집 [북치는 소년]의 시인 김종삼이라는 걸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중에 소주 두병 값을 갔다 주긴 했지만 이 무렵 김종삼은 구제불능의 소주 중독이었다.
집에서 책을 들고 나가 헌책방에 넘겨주고 받은 돈으로 소주를 마셨고, 돈네 세탁소 주인에게 구걸하듯이 소주값을 빌리기도 했다. 세탁소 주인은 <깔끔하시던 분이 변해도 너무 변하셨어.......>라고 한탄을 하며 혀를 찼다.
한 번은 집을 나간 김종삼이 며칠째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를 봤다는 사람도 없었고, 그의 종적은 묘연했다. 경찰서에 실종신고를 내고도 며칠이 더 지난 뒤에야 식구들은 시립병원에 입원해 있는 그를 찾아내었다.
술에 만취되어 길가에 시체처럼 방치되어 있는 그를 누군가 시립병원에 입원시켰던 것이다. 그는 무연고 행려병자로 십여일간 사경을 헤매다가 가까스로 살아나 가족들에게 연락이 닿았던 것이다.
김종삼은 일어나 걸어다닐만 하자 시립병원의 여기저기로 마실을 다녔다. 시체실 주위를 배회하기도 하고, 중환자실의 침상에서 죽어가는 이들의 얼굴도 들여다보기도 하고, 특별치료 병동 중환자 보호대기실에서 환자 보호자와 말벗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치료를 받은 뒤 시립병원에서 퇴원하고 그 이후로 식구들은 그에게 일체 용돈을 주지 않았다. 한푼이라도 생기면 구멍가게로 달려가서 소주를 사 마셨기 때문이다. 김종삼은 절도라는 극한의 방법도 마다 하지 않고 소주 두병을 확보했다. 그만큼 절박했던 것이다.
알콜 중독이 아니라면 그는 멀쩡했다. 상처한 복덕방 영감이 석달만에 서둘러 후처를 들였다가 심장마비로 죽자 매장에 필요한 사망진단서를 떼다 준 것도 그였다.
아니면 하릴없이 인파 속을 어정어정 걸어가다가 충무로의 한 평 남짓한 자그만 카셋트 점포에서 흘러나오는 핏셔 디스카우가 부른 슈베르트의 보리수에 취해 있곤 했다.
그는 <팝송 나부랭이와 인기 대중가요가 판치는> 세상을 못마땅해 했다. 그런 곳에서 커피 한잔이라도 마시면 <속이 메식거려 기분 나쁘게 먹었다>라고 할 정도였다.
김종삼은 유서깊은 고전음악 매니아였다. 김종삼은 전봉래 전봉건 형제들과 함께 사변 전의 유명한 고전음악감상실들이었던 명동의 돌체 오아시스 라아뿌륌의 단골이었다.
전쟁이 터지고 돌체가 피난지 부산 역전으로 옮겨진 뒤에도 김종삼은 그곳을 드나들었다. 돌체는 피난지로 몰려든 예술가들의 집결지였다. 때로는 잠 잘 곳이 마땅치 않아 돌체의 홀에서 잤고, 아침이면 바하를 틀어놓고 세수를 하기도 했다.
그때 김종삼은 여기저기서 훔친 마태 수난곡의 독창 판과 브람스 교향곡 4번의 SP판도 소지하고 있었다. 그 무렵 그의 품에는 [園丁] [G. 마이나]와 같은 처녀작 원고를 갖고 다녔다.
시인 김윤성이 그의 처녀작 원고를 본 뒤 [문예]지에 추천을 받게 해주겠다고 갖고 갔으나 아무 소식도 없었다. 그의 작품들은 꽃과 이슬을 노래하지 않았고, 지나치게 난해하다는 이유로 [문예]지의 추천위원들로부터 거절당한 것이다.
시인이며 불문학도였던 전봉래가 전후의 상실감을 이기지 못해 부산 남포동의 스타다방에서 바하를 들으면서 자살을 했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김종삼은 1963년 2월에 동아방송 총무국에 촉탁으로 입사했다가 1967년 일반사원이 되어 제작국으로 옮겼다. 그 이후 그는 10여년간을 동아방송에서 음악효과를 맡으면서 1976년 정년으로 동아방송을 나올 때까지 그는 원없이 고전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남들이 다 퇴근한 뒤 자정 너머부터 혼자 음악을 들었다. 남들이 퇴근하는 시간에 그는 방송국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다가 간단하게 저녁을 해결하고 방송국으로 다시 들어갔다.
의아해 하는 방송국 수위에게 손을 번쩍 들어 <시그널 몇 개 만들려고.......> 하면 그만이었다. 그는 텅 빈 레코드실에서 옷속에 감춰 들여갔던 소주를 따고 혼자 모짜르트를 들었다. 어떤 곡은 며칠 몇 달씩을 반복해서 듣기도 했다.
오랫동안 방송국에 근무하면서도 그 흔한 직책하나 맡은 적이 없지만 그 시절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순수하게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김종삼의 부친은 신문기자를 지낸 지식인이었다. 나중에 [평양공론]이이라는 잡지를 내기도 했다. 김종삼은 평양고보를 다니다가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귀족들만 다니는 동경문화학원에서 문학부에 입학하지만, 작곡을 하고 싶어 음악공부를 했다.
그러나, 그가 음악공부를 한다는 사실을 안 그의 부친은 일체의 송금을 끊어버렸다. 김종삼은 부두에서 막노동을 하며 7년간 고학을 했다.
그 시절 도스토예프스키를 비롯하여 광범위하게 독서를 했고, 바이런, 하이네, 발레리 등의 시들을 열심히 탐독했다. 고전음악만을 틀어주던 동경의 르네상스 다방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드나들기도 했다.
내가 김종삼을 처음 만난 것은 1979년 초봄이었다. 그해에 나는 신춘문예를 통과하여 문단에 나온 신출내기 시인이었고, 한 단행본 출판사의 편집사원으로 일할 때였다.
같은 출판사의 편집장이었던 시인 이세룡과 함께 인쇄소를 다녀오다가 무교동에서 점퍼 차림에 벙거지 모자를 눌러쓰고 걸어오는 그와 마주쳤다.
낡은 등산모, 커다랗게 솟아 있는 귀, 그리고 어정어정 걷는 걸음........나는 <나는 누구나 가는 길을 / 어슬렁어슬렁 가고 있었다>라는 그의 시 한 구절을 떠올리며 그가 김종삼 시인이라는 걸 한눈에 알았다.
그는 거두절미하고 시인 이세룡에게 다짜고짜로 세금 2천원을 내놓으라고 했다. 이세룡은 웃으며 호주머니를 뒤져 그에게 2천원을 건네줬다. 그의 소주값이라고 했다. 그 뒤에도 조선일보 옆에 있는 아리스 다방에서도 몇번인가 그를 만났다.
어느날 그가 출판사의 편집실에 예의 점퍼 차림에 벙거지를 쓰고 불쑥 모습을 나타냈다. 생전의 그의 별명은 도깨비였다. 그는 그렇게 도깨비처럼 출판사 편집실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모습을 나타내곤 했다.
그는 품에서 원고 하나를 꺼내더니 내게 베껴쓰라고 했다. 김종삼의 육필 원고는 글자 하나가 주먹만 했다. 글자들은 날카롭게 직선으로 뻗어 있었고, 원고지의 네모칸을 훨씬 벗어나 있었다. 나는 그 원고를 새로운 원고지에 정성스럽게 옮겨적었다.
내가 정서한 원고를 받아 든 김종삼은 자신의 육필원고와 대조를 마치고는 원본을 이세룡에게 내밀었다. 말은 안했지만 며칠 전 2천원의 갈취에 대한 우아한 답례였다.
김종삼은 보헤미안이었고, 無産者였고, 생활인으로서 철저하게 무능력자였다. 그의 인생에는 생활이 없었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시와 음악과 술이었다. 그는 다만 시인이었다.
때로 그는 자조적으로 <나같이 인간도 덜 된 놈이 무슨 시인이냐. 나는 건달이다, 후라이나 까고.>라고 내뱉었다. [製作]이라는 시에서 <그렇다 / 非詩 일지라도 나의 職場은 詩 이다>라고 선언했둣이 그는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시인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자료: 이보세상 / 장석주(시인/문학평론가)
첫댓글 김종삼 님의 문학과 삶을 다 볼 수 있네요. 좋은 자료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