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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론
먼저 이 책을 읽고 내용을 요약&정리 하기에 앞서 최근 까지도 삼위하나님의 신비를 알지 못하여 궁금하였고, 아직도 그 신비를 다 알지 못하여, 앞으로도 인간의 한계가 존재하는 한 알아가게 될 거룩하시어 경배 받기에 합당한 영원의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굳이 내가 하나님을 그리고 삼위하나님을 이해 하려고 함은 경건한 호기심이라 할 것이요, 진정한 바른 신앙의 자세일 것이다. 왜 이렇게 어려운 교리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으로 하나님을 전달하시는 지는 여러 교부들의 성경에 대한 이해와 논지의 말로 이해한다고 하나 삼위로 일하심의 유익을 풍성히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요, 나아가 구속사적으로 또, 그 이전에 많은 큰 뜻 가운데 있을 것이나 우리가 세워지고 택함 받은 것은 구속사적인 역사와 믿음의 사실에 기인함으로 채 그 이전의 더 큰 의미는 차치하고라도 구속의 섭리라도 풍성히 누리게 하심에 삼위의 위격으로 임하심을 알게 된다.
또, 더불어 늘 내 눈높이에 높아야 고층 빌딩이요 낮아야 지하철이 통하는 지하인 인지의 한계가 있는 지금의 차원의 나에게 차원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이시오, 높은 하늘 권위에서 내리시고 낮아 지시되 음부까지 낮아 지신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하며 인지할 수 있을까? 생각도 한다. 다만, 영원과 무궁히 계신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과 이 도움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심이 내가 유익이요,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절대적인 필요이므로 가장 인간이 알 수 있는 방식으로 전달 하심을 받아 들이고자 합니다.
그리하여도 수십 세기 동안 논란과 논쟁을 치러온 이 논리를 쉽게도 더하여 직관적으론 타락으로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없는 우리에게 한계가 있음도 인정한다.
이 책은 관조적 삶과 실천적 삶의 양 구도를 기독교적으로 원용하고 통합하는 방식으로 삼위일체론을 전개한다.
아!그리고 책이 얇을 수록 요약할 것도 없고, 요약하기도 힘들다는 것도 새삼 느꼈다!!!
그럼 이 책의 요약을 시작해 보도록 하겠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관조하는 것이 삶이 믿음이며 동시에 기독교회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원초적인 삶인데, 세상에서 물질적 대상을 잘 다루고 공동체에서 미덕을 추구하여 인정을 받음으로 기독교회의 독특성을 드러낸다.
관조는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이고, 외적 대상이나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면하고 그분의 이름을 불러 찬양하고 즐기는 것이요, 예전적 예배에서 하나님을 뵙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하고 믿는 것이다.
하나님을 관조하는 예배로 이루어진 교회 공동체는 동시에 실천의 장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대면하고 다른 예배자와 교제한다. 일차적인 '실천적 삶의 현장'으로의 교회이다.교회 공동체에서 형제자매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관조의 삶을 훈련 받아, 진정한 삼위 하나님을 드러내고 대리하는 곳은 세상이어야 한다.
성도는 관조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세상가운데서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배라는 관조가 없는 실천은 맹목이며, 삶의 실천이 없는 관조는 공허하다.
삼위일체론은 설교와 고백, 선교와 교육, 예배와 기도 등 교회의 본래적 사역에서 자연스럽게 확립된 이론적 반성으로 탄생한 성경에 문자적으로 나오진 않으나 계시를 바로 체험하고 이해하고 해석하는 교의의 전형이고 공교회적 유산이다.
삼위일체론의 뿌리는 나사렛 예수라는 역사적인 인물로 보며, 교회가 믿는 하나님의 형상을 예수로 하여 대내적 예배를 통하여 고백하고, 대외적으로 삶의 현장에 구체적으로 성육하여 나타나 이론과 실천의 일치를 겨냥하게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 신앙의 기초: 성경
삼위일체 하나님 신앙의 원천은 성경이고 나사렛 예수의 역사가 삼위일체론의 뿌리이므로 구약이 아니라 신약부터 살피기를 권한다.
신약
삼위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세례신경이었던 사도신경과 니케아신경처럼 잘 정리해 놓은 문구가 성경에는 없다는 것이다. 다만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하여 믿는 바를 산발적으로 말하고 있다.
구약을 믿으며 메시아를 기다리는 유대교에서 기독교가 나왔다. 기독교의 분리는 예수 때문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인 제자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고백했고 전파했다. 이것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고, 여러 서신서에선 이 믿음과 고백이 보다 자세하게 정리 되어 있기도 하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다(마 16:16). 이것은 사도신경의 두 번째 부분에 해당된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임을 믿으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음(요일 5:1~6)'.
이 고백은 예수 자신에게서 나왔는데,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을 자신의 친아버지로 하고서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셨다(요 5:18).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고, 그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게 하신다(요 3:16).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면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 그런데 성령으로서가 아니면 예수를 주님이라 할 수 없다(고전 12:3). 성령은 성자를 세상에 임하게 하고 예수를 다시 살리신 능력의 영이시면서도, 부활한 예수께서 보내시는 영이시기도 하다. 누구라도 그가 보내신 성령을 받아야 예수를 주라 시인하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한 성령 안에서 아버님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2:18). 사도신경이 삼위일체 하나님께 대해 고백하는 내용도 이런 방식으로 성경에서 발췌하여 정리한 것이다. 이런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삼위일체론에 기초가 된다.
구약
신약은 구약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가르친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 부활하고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눅 24:44)고 했다.즉, 자신이 고난을 받고, 제 3일에 부활하고, 자기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모든 족속에게 전파되리라는 것이다(눅 24:45~47).
예수께서는 가버나움 회당에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사 61:1). 라고 말씀하셨고, 예수께서는 야훼의 보냄을 받았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고, 이미 구약이 예언된 사실이라는 것을 이 사역이 고난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십자를 지시는 것으로 절정이 되겠지만, 친히 연약을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시는 것도 고난의 일면이 되는 것이다(사 53:4).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야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사 53:1). 배척을 당한 것도 고난의 운명이다. 예수께서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시면서 "내 뗙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시 41:9). 사람들은 이유 없이 예수를 미워했다(시 35:19). 군병들이 옷을 나누는 것도 구약의 성취이다(시 22:18). 십자가상의 목마르다고 하신 것도 마찬가지이다(시 69:21).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는 "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시 22:1). 옆구리를 찌르고 뼈를 꺾지 않은 것도 그러하다(출 12:46,민 9:12, 시 34: 20). 이것은 찌른 자를 본다는 의미이다(슥 12:10).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에서 예수의 부활을 이야기하면서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소서."(시 16:8 이하)를 인용한다. 또한 예수의 주님 되심을, 원수를 그의 발등상이 되게 한다는 시편 110편 1절의 성취로 본다.
이렇게 구약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성경과 삼위일체 하나님
성경을 구원역사의 관점에서 읽으면,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구약은 그리스도의 (前)역사이며, 그리스도는 구약의 모든 계시의 목표점이고 성취이다. 따라서 계시의 시작조차 완성된 계시의 관점에서만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신약은 성취 사실에서 시작하며, 그런 다음에 필요한 내용을 구약에서 찾는다.구약은 신약에 새로운 지식을 제공하지 않는다. 성취의 빛 아래서 신약 저자들은 구약의 진술에서 예언을 찾아낸다.
구약은 창세기 3장 15절부터 오실 메시아를 대망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원시복음'또는 '어머니 복음'으로 지칭되었다. 야훼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씨에 대한 약속(창 12:1~3), 다윗에게 주신 왕위에 대한 약속(삼하 7:11~16, 23:1~7). 여러 시편들(2편, 16편, 110편 등)과 여러 예언서의 약속들(사 7:14, 9:6, 11:1~10, 52: 13~53:12 등)은 모두 오실 메시아와 그의 사역을 예언하고 있다.
신약이 구약의 성취인 것은 그리스도가 성경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능동적으로 성취하셨는데, 제자들을 교훈에서도 그릇된 구약관을 깨어 버리셨다. 이것이 곧 구약의 구원역사적 기독론적 해석이다.
예수께서는 구약의 하나님을 "내 아버지여"(마26~39등)라고 불렀다. 이전에는 누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않았다. 동시에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씀하셨다.
성령의 사역은"성령으로 잉태되다."에 들어 있다. 구약의 성령은 개인(삿 6:34), 언약백성의 지도자, 직분자 위에 임할 뿐만 아니라 우주적으로 사역하시지만 이 모든 사역이 인간 구원사적으로 보면 메시아의 사역이다. 이것이 부활한 예수께서 "하늘과 땅과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고 하신 말씀의 뜻이다. 교회는 세례와 성찬으로 이루어진 예배에서 체험하고 세상에서 구현한다.
삼위일체론의 내적 현장: 예배
삼위일체론이 형성된 주 후 300년대까지 고대 교회의 예배는 처음부터 주님의 날, 곧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디다케』(100년경), 『사도규정』(150년경)과 히폴리투스의 『사도전승』(215년경)과 다른 교부들의 기록에서 예배의 순서를 살필 수 있다.
예배와 삼위일체 하나님
예배는 예배자와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에서의 수교와 수여의 대화이고 교제이다. 하나님께서 예배와 성례로 주시고 기도와 찬양으로 받으신다. 예배는 예배자와 삼위하나님 사이의 신비의 연합이다.
『사도규정』에 나오는 예배의 순서를 살펴보자.
한 독서자가 구약(역사서+시가 또는 선지서), 다른 독서자가 다윗의 찬송, 사도행전, 서신서와 복음서를 읽는다. 성경 낭독시에 장로, 집사와 회중이 조용히 일어난다. 장로가 차례로 권면하고 마지막으로 감독이 권면한다. 집사는 정숙을 유지시킨다. 이 권면의 말씀이 끝나면 문지기는 남자반, 여집사는 여자반의 입구에 선다. 일어서서 주님이 승천하신 동쪽을 바라본다. 그곳은 에덴동산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후에 집사 몇이 빵과 포도주를 성찬상에 놓는다. 집사 몇은 회중을 정숙 시킨다. 감독 오른편의 집사는 서로 다투지 말고, 위선을 행하지 말라고 외친다. 집사는 온 교회와 온 세상과 위정자와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기도한다. 감독은 백성에게 평화를 빌면서 야웨께서 아론에게 명한 데로 복을 선언한다(민6:24~26).
제물을 주목한 뒤 회중은 서서 묵상기도를 한다. 성찬 기도는 송영이다. 마지막으로 " 모든 영광,경배와 감사와 존귀와 위엄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있을지어다."로 마친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자기를 주심
예배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예배자를 초청하고 말씀과 성례로 대접하시며 교제하신다.
말씀
초기의 설교는 전도자들이 행한 '선교적 설교'였다. 그러나 이것이 혼란의 요인이 되기도 했는데, 그릇된 사상을 가진 설교자들이 나타나 교회와 회중을 혼란을 가중시켰다. 사도들과 그의 동역자들이 죽은 후 주 후 150년까지 설교가 침체하는 시기라 한다.
이 후 현실적, 실천적 사안으로 인하여 '목회적 설교'가 교육되고 강화되어야 했는데, 믿음의 고백이 가족들과 사회로부터 배척당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초기 고대 교회의 설교는 실천적이었고, 교리설교는 드물었다. 신약 성경이 널리 보급되지 못했고, 교통과 통신이 발달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구약 성경에 의존적이었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전하는 설교는 흔치 않았다. 제일 오래된 설교인 『제2 고린도서』(고린도후서와 다름)는 성부께만 송영을 돌려드린다.
고대교회는 성찬이 중심이었다. 성경낭독만 있었고, 예전적 설교는 아직 정립되지 않았다. 다만, 성찬에 앞서 낭독하는 구약과 신약 성경의 본문은 주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 낭독이 예전적 설교의 효시라고 본다면 설교는 삼위일체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대 교회에서 감독은 역시 성찬의 집례자였다.성찬에 대한 이해가 감독의 직무를 설교자보다는 성찬 집례자로 자리매김했다.
세례
고대교회의 세례는 지금의 기도형식의 사도신경의 암송을 질문과 대답형식으로 사용했다. 세례식에서 집례자가 "당신은 성부 하나님을 믿습니까?'라고 질문하면, 세례를 받는 이는 "나는 믿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이어 차례로 성자와 성령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질문하고 대답을 한다.
세례를 받기 위한 준비 기간은 3년이었다. 학습자중 포주, 신상 조각가, 화가,극장 배우, 연출자, 교사, 검투사, 투사, 우상 제사장, 신전 경비원, 군인과 관리, 창녀와 호색가, 마법사나 점쟁이, 해몽가와 협잡꾼, 화폐 위조범, 부적 제조자 등은 직업을 포기해야 했다.
사순절의 셋째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세례 예비자는 '신앙의 규칙'을 전수받는다. 예비자는 전수받은 규칙을 일주일 후에 같은 장소에서 암송하는데 이것은 전수에 상응하는 반환이다. 이 신앙의 규칙의 내용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다.
세례는 부활절 전날 저녁에 성도들이 참석한 가운데 교회당 세례조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세례수는 샘물이나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이어야 한다. 학습자는 교회당 서쪽에서 들어와 마지막 축사를 받는다. 그러고 서쪽을 향하여 서서 마귀와 모든 인연을 네 번 부인한다. "사단아, 나는 너와 너에 대한 모든 예배와 너의 허세와 너의 모든 행위들을 끊겠노라"그러면 집례자는 "모든 영이 그대에게서 떠날지어다."라고 선언한다. 학습자는 그 다음에 동쪽으로 몸을 돌려 모든 회중이 보고 들을 수 있는 곳에 올라서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한다. 그 다음에 옷을 다 벗고 축사한 기름을 바르고 집사와 함께 계단을 걸어 내려와 세례조의 물에 들어앉아 침례를 받는다.집례자는 세 번 삼위하나님을 믿는지를 물으며 물에 넣어 침례를 한다. 세례자는 새로 태어났다는 표시로 흰옷을 받아 입는다. 이제 학습자는 교인이다.
그리고 집례자는 손을 얹어 기도하고 다시 기름을 바리고 이마에다 십자가를 긋는다. 마지막으로 평안의 입맞춤을 베풀고 회중석으로 인도한다.
세례는 신비적 연합이다. 즉,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지는 것이다. 수세자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모신 성전(고전 3:16)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중심에 있는 세례는 무엇을 의도하는가? 세례는 완전한 교인됨을 인정하고 선언하는 의식이다. 학습자는 세례 전에 설교만 들을 수 있었고 성찬에 참여할 수 없었다. 세례자는 성찬에 참여하는 완전한 예배자가 되었음을 선언 받게 되는 것이다.
성찬
성찬도 단순한 의식처럼 보이지만 주심과 돌려드림이 교차한다. 주심은 선언이나 말씀의 형태를, 돌려드림은 고백이나 기도의 형태를 취한다.
성찬은 예수님이 직접 제정하셨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나눈 최후의 만찬은 다시 오실 예수를 기다리면서 나누는 첫 만찬, 곧 성찬이다.
『디다케』엔 성찬을 감사제로 드리며 잔에 대해 "우리 아버지, 주신 종 다윗의 포도나무를 감사하옵나이다." 다음엔 쪼개어진 떡에 대하여 감사를 드려"우리 아버지 예수님을 통해 알게 하신 생명과 지식을 감사하옵고, 이 쪼개진 빵이 산 위에 흝어지고 다시 모여 하나가 되게 하시옵소서. 영광과 권세가 예수께 세세에 있을지어다."라고 감사한다. 다만 여기엔 성령의 언급이 없다.
『사도전승』의 기도문은 성령을 언급한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 대해 성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가 나온다. 두 번째로 예수의 사역과 성찬 제정의 말씀이 나온다. 구속사를 계속 언급하고 성찬 제정의 말씀을 인용한다. 셋째로 성찬의 기초로 예수의 죽음뿐만 아니라 부활까지 기억한다. 넷째로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을 청한다. 성령께서 떡과 포도주가 은혜의 방편이 되게 하시며, 성찬 참여자를 하나 되게 하시고 믿음을 굳세게 하실 것을 간구한다. 마지막으로 예수를 통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동시에 송영을 드린다.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게 하옵소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과 함께 주님께 영광과 영예가 거룩한 교회 안에서 지금과 세세에 있으소서,아멘."
예배의 주요 부분인 성찬 기도도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지향한다. 성찬에 참여하는 교인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제한다. 이 교제를 기초로 교인 서로가 교제한다. 성찬은 과거의 사건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다시 오실 그분을 기다리는 것, 곧 종말론적 신앙 고백이기도 하다.
성찬기도는 예수를 통하여 성부 하나님께 감사 드리며, 성령께서 성찬에 임하셔서 은혜를 내려 주시고 믿음을 굳세게 해 주실 것을 간구한다. 그리스도의 사역에 기초를 둔 성찬은 삼위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현장이다.
임직
직분자를 세우는 임직식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다.
『사도규정』에 우선 회중이 감독을 선출한다. 감독을 선출한 다음 지정된 주일에 지역교회의 회중과 장로들은 동석한 다른 교회의 감독들과 함께 회집한다. 회중이 선출하고, 인접 지역 감독들의 참여로 전체 교회의 인정을 받는다는 의도이다. 장로들과 감독들이 곁에 서서 기도하는 동안, 세 명의 감독들은 후보자에게 손을 들어 직분자로 세운다. 집사가 복음서를 펴서 후보자의 머리에 받히고, 모든 이들이 침묵을 지키면서 성령 임하심을 기도한다.
이때 감독 한 사람이 안수하면서 임직 기도를 드린다. 이 때 기도가 삼위 하나님을 향하는데,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을 드리며, 성부께서 성자에게 성자께서 사도들에게 주신 성령을 직분을 받는 감독에게도 내려 주시기를 간구한다. 직분을 잘 수행하여 목양을 잘 하도록 빌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와 성자에게 성령과 더불어 송영을 올리면서 임직 기도는 끝난다.
교회가 자기를 삼위일체 하나님께 드림
기도와 고백은 교회 회중의 주심에 대한 응답의 성격을 지닌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이 주심이 예배자가 드리는 것보다 많고 강력함으로 예배자는 주로 받아 예배당 밖에서 세상에서 자신을 드려야 함을 보여 준다.
기도와 송영
기도는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를 기초로 하여 성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사도전승』에 잘 나타나는데, 경배, 감사, 회개, 보호 간구, 은혜를 청하는 내용이 포함된다. 기도의 이 요소들은 크게 감사와 간구로 대별할 수 있다.
기도는 감사를 돌려 드리는 방편인데, 성부께서 이루어 주신 광범한 은사, 예수를 통하여 성령 하나님을 보내심으로 보여 주신 모든 은사를 감사 드린다.이것을 베푸시는 근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심에 있다. 감사는 성찬에서도 나타난다.
기도는 또한 간구이며 간구의 기초도 감사의 근거인 은사이다. 우린 구원역사적으로 베푸신 은사에 기초하여 장래에 대한 보호를 간구하고, 교회가 교회답게 살 수 있도록 도움을 구한다.
송영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신 구원역사를 성령 안에서 거론하고 영광을 돌리고, 응답은 성령 안에서 성자 예수를 통하여 성부 하나님께 돌린다.
초기엔 성부께만 드렸지만, 점차 성자와 성령께도 동시에 드리는 송영이 점차 대세를 이룬다. 일체성의 어려움이 있지만, 아리우스파의 주장을 논박하면서 삼위일체 하나님께 향한다.
사도신경과 니케아신경
세례시의 질문하는 내용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을 정리한 것인데, 사도신경의 원시 형태(로마신경)이다. 성찬에서도 사도신경과 유사한 내용으로 기도한다. 세례와 성찬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나열한다.
사도신경은 3부로 이루어져 있다. 성부 하나님과 창조, 성자 하나님과 구원, 성령 하나님과 교회 또는 성화사역을 정리하여 요약한다. 이미 150년경 로마에서 형성되었지만, 지금과 같은 형태는 주 후 5~6세기 경에 완성되었다.
서방교회가 고백하는 사도신경관 달리 동방교회는 니케아신경을 고백했다. 신경은 교육을 포함한 세례의식의 품에서 생겨나고 성장했다. 고대교회의 고백들은 세례에서 연유하고 더 정확히 말해서 학습 교육을 뿌리로 삼는다. 세례로 자기 자신을 주시는 삼위하나님에 대하여 공부했다. 이 로마신경은 계보상 4세기 초의 니케아 공의회 때 공표가 된 니케아신경보다도 후에 5~6세기에 다듬어진 사도신경의 모태로 모든 서방교회 고백들의 조상이다.
학습교육
이 세상의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기 위한 준비인 학습 제도는 교회 회원이 되기 위한 가입의식과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바로 세례의 주재자가 삼위 하나님이시기에 학습자는 이 하나님을 알고 고백해야 했다. 게다가 공인되기 이전에는 박해를 감당해야 했으므로 분명한 믿음이 없인 학습자조차 될 수 없었다.
『디다케』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행하는 세례를 말하기 전에"두 길", 곧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에 대해서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다. 생명의 길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황금률을 따라 살 것을 권한다. 하지만 이 두 길의 언급에는 아쉽게 삼위 하나님에 언급은 없다.
신자들에게 학습 교육인 교리 교육 참석은 권고 사항이었고, 학습자들에겐 의무 사항이었을 것이다.
학습자는 자유와 경건, 의와 영생을 얻게 하신다는 것을 배운다. 학습은 내용이 성경에서 나왔으며, 구원 사를 정리하여 공부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경건을 배울 자는 태어나지 않으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그의 독생자에 대한 이해와 성령에 대한 확고한 인식을 세례 전에 교육받아야 한다"(사도규정). 학습자가 배우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이해와 인식에 대한 광범위한 보충 교육이라 하겠다.
키릴루스(313~387)의 『교리교육서』는 3부 24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 1편은 세례청원자를, 열여덟 편은 사순절 세례청원자들을, 마지막 다섯 편은 갓 세례를 받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씌어졌다. 공인 후 교회에 사람들이 몰리므로 해서 첫 편에 경고가 담겨 있다. 즉, 가족을 의식하지 말고, 예복을 준비(마 22: 11~14)할 것과 함께 세례는 정화의 목욕이며 그리스도의 성정을 세우는 일임이 언급된다. 열 여덟 편중에 1~3편은 죄, 회개, 사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세례를, 4~5편에선 기독교의 신관 인간관의 기본원리와 신경을 항목대로 설명하기 위하여 믿음이 무엇인지, 6편은 한 분 하나님, 7~9편은 성부, 창조자를, 10~15편에선 성육에서 재림까지 성자를, 16~17편은 성령을, 18편은 교회를 다룬다. 마지막 다섯 편은 갓 세례를 받은 자를 위한 문답인데, 비밀규율의 주제, 곧 세례 공적 신앙고백과 성찬에 관하여 가르친다. 사순절 세례청원자들이 중점적으로 복습하는 내용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삼위일체론의 형성과 발전: 교회사
삼위일체론에 대해 몇 가지 오해가 있는데, 니케아공의회(325),콘스탄티노플공의회(381)에서 인간들이 주재하고 토론하여 삼위일체론을 만들었다는 것, 당시 그리스 철학에 익숙했던 아리우스파의 단성론에 대한 반박으로 대두 되었다는 것과 기독교가 당대의 지적이고 철학적인 요구를 따라 당대의 교양을 이용하여 복음의 내용이 변질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오해의 소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닐지라도 초대부터 교회는 삼위하나님을 믿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성부의 사랑을 성령의 교제 중에 고백했다. 교회는 삼위 하나님을 고안한 것도 이단과의 투쟁에서 이 고백에 이른 것도 아니다. 처음부터 교회는 예수님의 명령인 마태복음 28장 19~20절의 말씀을 잘 준행했다.
세례와 세례교육을 위해 형성된 사도신경은 성경의 삼위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을 가장 잘 요약했고, 세례를 통하여 교회를 설립하고 삼위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데 지대한 기여를 했다. 세례로 교회를 설립하고 예배와 기도에서 그리스도가 차지하는 위치가 삼위일체론 형성에 주요한 역할을 했다. 삼위일체론은 삼위 하나님을 사수하기 위한 울타리이다. 교회의 삼위일체론은 방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한 결과의 산물이다.
니케아회의 이전
초대교회 교인들이 예수를 주로 고백할 때, 구약의 하나님의 단일성과 예수와의 관계가 논의의 중심에 있었고 단일성을 유지하려고 예수를 성부에게 종속시키는 종속설이 당시의 일반적 경향이었다. 니케아 이전엔 이것이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었지만, 문제로 지적 되었을 때 이것을 겸허하게 받아 들인 것과 아닌 것이 이단과의 갈림길이 되었다.
유대 개종자들 중엔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양자로 입양되었다는 입장을 표방하였고, 이와는 반대로 구약의 하나님은 열등한 하나님이시요, 예수 안에서 자신을 계시했던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요 선신(善神)이라는 주장을 폈다(마르키온). 초기 변증론가들 중엔 역사적 예수그리스도 안에 신성한 영이요 선재하던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인성과 결합했다는 성령 기도론을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교회가 확장되어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방교회가 정착되었고, 그리스 철학이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면서 특히 요한복음에 나오는 말씀(Logos)을 그리스 사상의 로고스론으로 해석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리하여 이젠 단일한 하나님만이 아니라 로고스론을 이용하여 하나님 안에 다원성을 말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 되었다. 이런 다원성은 단원성을 강조하는 단원론인(양태론)의 반격을 촉발했다.
성자의 신성을 성부의 신성에서 파생되었다고 보았거나(이것은 2세기 경에 로고스론으로 대변되는 주장), 성부의 외현(이것은 200년경부터 유행했는데 이것을 양태론으로 본다.)즉, 인간 예수의 세례나 부활 시에 신적 능력이 역사하여 그를 성자로 입양시켰다는 입장인데 이는 예수를 반신반인으로 만들었다. 대표적 주장자인 사벨리우스의 "성자-성부'라는 표현을 사용했다(양태론적 단원론).
소아시아 출신으로 현재의 프랑스 리옹에서 활동하고 그리스어를 사용한 이레네우스(140~202)도 일체성을 고수하면서 양태론적 경향을 보였다. 성부의 위격에서 출발하여 성부의 위격이 동시에 말씀과 지혜(곧 성자와 성령)를 가지고 있다는 식이다. 1~2세기에는 이런 식의 이해가 널리 퍼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방교회의 라틴어를 사용한 테르툴리아누스(160~220년경)도 성부하나님의 일체성에서 출발한다. 성부는 말씀과 성령을 가지고 계시다가 창조를 위하여 발출했다. 이처럼 신성의 일체성과 세 위격에 대해서도 '한 본질'안에 동거하니, 신성은 삼위이시다. 세 위격은 동질이지만, 동일하지는 않다. 이렇게 영지주의와 단원론은 잘 대처 했지만, 성자와 성령을 성부에 종속시키는 흔적은 그에게도 남아 있다.
동방의 오리게네스(185~254)도 하나님의 일체성을 강조했지만, 동시에 위격의 구별성을 더 강조했다. 엄격하게 그에겐 성부만이 하나님이다. 로고스와 성령의 신성은 파생적이다. 그는 '위격(hypostasis)'이라는 용어를 도입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구별된다고 표현했다. 그리고 '본질동등(homoousios)'으로는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연합되어 있는 일체성을 표현했다.삼위일체론의 정립을 위한 용어를 제창했지만 로고스를 성부의 피조물로 본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과는 달리 성자께 기도가 불가능하게 된다. 신플라톤 사상을 원용하여 신론을 전개한 대가이다.
니케아회의
아리우스(256~336)와 그의 스승 루키아누스(?~312)도 오리게네스의 영향을 받았으나, 잘못 된 측면만 강조하는 우를 범했다.하나님의 독특성과 초월성만 관심을 두었다. 성부만이 유일한 하나님이시고 신성이 일체성과 성자의 종속성을 철저하게 고수했다.
그러나, 성부의 본질은 초월적이고 불변하므로 타자에게 수여 될 수가 없다. 이외의 모든 타자들은 피조물이요, 무에서 창조되었다. 성자가 성부에게서 출생했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물리적 범주를 적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도저히 불가능하다.
아리우스에 의하면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말씀과 지혜를 가지고 계신데 이들은 결코 독립적인 위격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이 된 말씀은 하나님의 피조물인데, 다만 완전한 피조물일 뿐이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의 동등성이 있을 수 없을 뿐이니라, 아주 간교한 이단에 불과하다. 성자에게 신성이 이야기될 수 있다면 비유적 의미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전가된 것일 뿐이다.
다른 편으로 아리우스는 위격이라는 말을 쓰고, 성자와 성령의 독특성도 가르쳤다. 이런 절대적인 단원론은 그리스도를 '반신'으로 만들었고, 성령도 참 하나님일 수 없었다.결국, 그리스도는 성부를 실제적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 완전하게 계시할 수 없다는 망언을 했다. 만약 하나님을 알려면 성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상정하는 다신론을 도입할 수 밖에 없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런 교회의 논쟁에 제국이 통일이 위협받게 되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정치적인 고려를 포함하여 최초의 공의회를 여름 궁정인 니케아(터키의 이즈니크)에 소집했고, 고백의 본문에 '본질동등성(homoousios)'을 삽입하도록 했다. 이는 테르툴리아누스가 쓴 성부와 성자는 '한 본질(unasubstantia)'라는 라틴어의 그리스어 역어이기도 했다.
니케아신경은 예수는 피조되지 않았고 출생되었고,성부와 동등하다고 했다. 아리우스와 그의 두 친구만이 이 고백에 서명을 거부했고, 성자가 피조됐다는 아리우스의 주장을 거부했다.
니케아신조는 그리스도를 반신반인으로 만든 아리우스의 이단을 막는 데는 성공했다. 사실 아리우스의 체계는 위계적인 철학적 신론이었다.
니케아신조의 '본질동등성'의 뜻은 무엇인가? 단원론에 대항하여 성부와 성자의 수적 '구별'을 전제한 '동등성'을 뜻한다. 니케아회의 이전과 이 후 상당 기간 동안 성부와 성자의 구별을 고려하지 않았고 본성의 일체성과 위격의 구별성의 관계 또한 고려되지 않았고 양태론의 오해를 받았다.
니케아의 영웅 아타나시우스(295~373)는 '본질동등성'이 성자의 완전한 신성뿐 아니라 동시에 신성의 일체성까지도 표현한다고 해석했다.신성의 일체성을 강조하다 보니 위격들 간의 구별이 모호해지게 되었다. 따라서 아리우스파가 비난했듯이 양태론에 빠진 것은 아니지만 '위격'이란 용어가 그에게는 없었다.
사실 아타나시우스의 관심은 구원론이었다. 예수 안에 반신반인의 본질만 있다면 그는 구원자가 될 수가 없다. 성자께서 하나님이셔야 우리를 '신품화(divinisation)'하실 수 있다고 확신했다. 삼위일체론은 바로 이런 구원론적인 배경에서 나왔다.
니케아이후
아타나시우가 남겨 놓은 문제는 3대 카파도키아(현 터키 중부산악지대)신학자들에 의해 정리되고 성령의 신성고백으로 진전했다. 당시 니케아회의의 결정을 수용한 자들 중에 성령의 신성을 확신 못하고 심지어 마케도니우스(342~360)같은 성령부인 파까지 있었다. 그들에게 성령은 하나님이 우리와 세상 가운데서 일하려고 창조한 도구요 능력일 뿐이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성령도 하나님임을 분명히 말했다. 다만 위격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못했다. 3대 카파도키아 신학자들은 오리케네스 전통을 따라 신성의 일체성이 아니라 구별되는 세 위격들에서 출발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공통적인 '본질'과 '고유성'(비공유적 속성)을 각각 사용했다. 안카라의 감독 대바실리우스(329~379)는 고유성으로서 성부의 부성,성자의 자성, 성령의 성력 또는 성화를 말했다. 그의 동생인 니사의 그레고리우스(330~395)는 태어나지 않음, 태어나심을 각각 성부와 성자의 고유성으로 보았고, 성령의 발출은 '성자를 통하여'라고 제안했으며, 성부는 성자나 성령과 무관하게 사역하시지 않기 때문에, 신성은 하나라고 했다. 이들은 성부의 단원에 기초하여 성자의 출생과 성령의 발출을 구별했다. 그리고 성령은 성자를 통하여 성부에게서 발출한다는 입장을 정리했다.
두 사람의 친구인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329~390)는 성부께서 태어나지 않음, 성자께서 태어남,성령께는 발출이라는 고유성을 부여했다. 그는 삼위 안에서 일체가 경배를 받으며, 일체 안에서 삼위가 경배를 받는다고 했다. 신성과 단원성을 성부에게만 국한시키는 것을 반대했다.
이들은 구원역사에 나타난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기초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고유한 관계를 설명했다.
3개 카파도키아 교부들은 계시에서 전개되는 행위의 일체성에서 본질의 일체성을 찾았다. 이런 식으로 신성의 일체성과 위격의 구별성을 확보했다.
제 2차 공의회인 콘스탄티노플공의회(381)는 성령의 '본질동등성'을 문자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성령께서는 성부로부터 나와서 성부,성자와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신다는 식으로 성령의 신성을 고백했다.
교회는 '본질동등성'이라는 용어를 확보함으로써 아리우스 이단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확보했다. 비록 성경외적인 용어이기는 하지만 '본질동등성'을 도입하여 성경의 가르침을 사수했고, 그리스철학에 빠지는 것을 방어했다.
아우구스티누스(354~430)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일체성과 위격의 구별성을 성명하는 데에 초점을 맞췄다. 삼위란 삼신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이 삼위로 계시지만 일체성은 소멸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속성들은 본질에 부가적이지 않고, 본질과 속성들간에는 아무런 거리가 없으며 본질은 곧 속성들이라고 말한다. 절대적 속성과 절대적 존재는 한 분에게만 해당된다. 세 위격이 아니라 한 하나님께 한 본성, 한 신성과 영광이 돌려지며, 뜻과 사역도 마찬가지이다. 오직 성부께만, 또는 오직 성자나 오직 성령께만 돌려지는 사역이란 없다. 세상을 향해 하나님과 삼위는 한 원리를 제시한다. 성육신에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공히 능동적 기여를 하셨다고 설명한다. 삼위의 외적 사역들은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에 삼위는 항상 함께 사역하신다.
'위격(hypostasis)'도 새롭게 해석을 하는데 이 그리스어는 당시엔 '본질(substantia)'로 번역되고 있었다. 그러면 세 위격이 아니라 세 본질이 되고 만다. 이 그리스어의 원래 뜻인 '가면'을 '위격(persona)'라고 번역하는 것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는 위격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침묵을 지키지 않으려고 사용하지만, 의도하는 바를 바로 표현하지는 못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차라리 '관계(relatio)'라고 해석하자고 제안했다. 이 점에서 그는 내용적으로 아타나시우스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의 입장을 따르는 서방 신학의 전통을 확립한다.
삼'위'란 그 자체로는 무엇이 아니라 상호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분들이다. 모든 속성들은 '일체'에 귀속되지만, 관계로서의 위격은 하나님의 내적 생명이나 피조계와 연관되어 의미를 지닌다. 그는 성부, 성자, 성령 간에 본체론적, 질적, 양적 구분을 적용하지 않고, 영원한 관계성을 도입했다. 이 관계성은 본질에 우연성이 아니다. 부가적 우연은 신성의 가변성을 상정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영원토록 성부, 성자, 성령이셨고, 또 그러 하실 것이다. 이렇게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신론은 극복했다.
아타나시우스신조는 '보편적 신앙'을 고백한다. 즉, 삼위의 한 하나님과 일체성 가운데 삼위 하나님을 경배하며, 위격들을 혼동하지 않고 본체를 분리하지 않는 고백을 언명한다. 성부의 위격과 성자의 위격과 성령의 위격이 각각 다르나 성부, 성자, 성령의 신성은 하나다. 영광도 위엄도 동일하며 영원하다. 삼위는 공히 피조되지 않았고, 불가해 하며, 공히 영원한데, 한 영원한 하나님이시다. 각각 주님이시나, 세 주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한 주님이 계시고, 성부는 출생되지 않았고, 성자는 피조되지 않고 출생되었고, 성령은 피조되지도 출생되지도 않았으나 발출하신다. 삼위 간에는 전과 후가 없으며, 크고 작음도 없다 함께 영원하시기 때문이다.
다마스커스의 요한(670~750)은 요한복음 10장 38절, 14장 9절, 17장 21절을 근거로 하여 삼위일체론에 공재(共在,페리코레시스)개념을 도입했다. 위격들의 대면적 공재와 상호 침투를 표현한다. '삼위 하나님은 상호 간에 서로 뒤섞이지 않는 침투를 공유한다. 성자는 성부와 성령 안에 계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 안에 계시며, 성부는 성자와 성령 안에 계시나, 뒤섞임이나 용해나 혼합은 발생하지 않는다."이 공재는 본질의 일체성에 기초한다. 위격들은 동등한 본질이며, 상존하며, 상호 관계하며, 상호 개방적이고 상호 자기수여적이다.
중세
중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을 따른 안정감에 맘껏 사변하였는데 먼저 영의 기능인 인식과 의지를 따르는 안셀무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와 둘째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사랑의 고리라는 입장을 리샤르 등이 따른다. 어느 노선을 따르던 구원역사적 삼위일체론은 크게 재약을 받게 된다.
안셀무스(1033~1109)는 '스콜라 신학의 대부'라 불리는데, 아우구스티누스의 관계론 보단 심리적 삼위일체론을 추구한다. 하나님의 본질의 일체성에서 시작하여 삼위 하나님이 창조하신 형상인 영혼과 창조에서 그 흔적을 추적한다. 물론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원죄로 인하여 본성적 인식이 근원적 신비를 이해하기 힘들게 약화되었다고 말하지만, 이 경고는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
최고 영의 인식행위는 원초적이고, 피조된 영의 인식행위는 전자를 반영하는 형상이다. 최고 영에게는 자기를 의식하는 정신, 자기 인식과 자기 사랑이 있다. 이것은 구원역사와는 무관한 심리적 삼위일체론이 가능해지는데 다만 어떤 위격이라도 성육신 할 수 있다는 반론에 봉착하므로, 성육신론과 구원론을 정초하면서 이 위험을 어느 정도 교정한다.
파리의 성빅토르 수도원의 리샤르(?~1173)는 수도사답게 구원, 영복, 희락과 신 내적 사랑의 즐김을 말한다. 이것은 신학적 덕목인 믿음, 소망,사랑으로 나타난다. 그는 선험적인 사고방식을 떠나 경험적인 하나님의 존재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다. 심리적인 '의식,인식과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말씀을 삼위론적으로 살핀다. 사랑은 신성의 완성이다. 참 사랑은 사랑 받을 자를 가지며, 사랑은 선물이다. 사랑의 성부 하나님은 사랑 받는 성자와 함께 선물인 성령 안에서 서로 사랑한다.
쾰른 도이츠 수도원의 루페르트(1070~1129)는 구원역사를 삼위일체론적으로 설명한다. 성부의 사역은 창조다, 성자의 사역은 구원이다. 이 일에는 성부와 성령이 함께 참여했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사역은 성부와 성자의 선물로서, 영적 피조물이 하나님을 닮아 완성에 이르게 한다. 그는 성육신에 기초한 기독론을 구원역사의 중심으로 본다. 즉, 성자가 성부로부터 영원 출생한 것은 창조와 성육신을 겨냥한다. 그러면 타락과도 무관하게 성육신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삼위 하나님의 완전한 최고 형상이며, 성자의 관점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의 주장은 동방신학을 따른다.
롬바르두스(1095~1160년경)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심리적 삼위일체론에 따르고 추상적 신개념에 빠진다. 성령 안에서 삼위가 우리 속에 오시며,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다. 그럼에도 그 또한 본체론 적이고 정체적인 삼위일체론을 전개한다.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비판하기도 하고 따르기도 한다. 그는 하나님의 본질이나 존재를 직접 알 수 없다는 입장에서 아우구스티누스와 안셀무스 등의 입장을 비판한다. 그는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원형인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입장을 거부한다. 인식은 경험 계에서 나오기 때문에 인간은 본성적 신 인식을 신 체험에서 출발시켜서 그 원인 자를 찾아 나선다. 최초의 원인자인 하나님은 완전한 존재 자체이다. 그래서 신 인식과 신 언설은 유비에 근거할 수 밖에 없다. 유비론은 신과 세상의 관계를 원인성과 완전성의 관점에서 표현한다. 세계의 피조성에서 나오는 인식은 하나님이 제 1 원인자임과 그분의 본질의 일체성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성육신이나 삼위일체론은 본성적 이성으로는 알 수 없다. 다만 창조는 자연적인 필연이 아니라 자유와 사랑의 산물이다. 즉, 창조는 삼위 하나님의 사역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시가 있어야 성육한 성자와 성령의 선물로 완성되는 구원을 올바르게 사유할 수 있다.
토마스는 삼위일체론을 다루기에 앞서 하나님의 계심과 본질, 하나님의 생명과 지식과 의지를 다루었다. 삼위일체론 자체에서는 인간의 인식과 의지에 유비한다. 인간의 이해가 내적 언어로 표현되듯, 신 내적인 첫 운동은 말씀 사건이다. 두 번째 의지적인 운동은 신 내적 사랑의 운동, 곧 성령이다. 여기에 관계론을 도입해 부성, 자성과 성령의 호흡을 이야기한다. 곧 신 내적 운동에 기초한 내재적 관계로서 각 위를 실질적으로 구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동방교회나 리샤르가 채택한 원인론적 관계가 아니라 이에 앞서거나 또는 원인 및 결과와 무관한 단순한 관계만을 말하는 한계가 있다.
종교개혁과 그 이후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론을 이해하는 방편으로 말씀과 이성적 사유를 동시에 사용했다. 그렇지만 삼위일체론 자체에 대한 이성적 사유에서 성경의 교훈을 벗어났고, 중세의 신학자들은 그를 따라 사변적 삼위일체론을 전개했다.
종교개혁은 삼위일체론을 이해하고 변호하는 데서도 다시 성경으로 돌아갔다. 그리스도의 역사적 계시를 출발점으로 삼아 하나님을 말하고 경외하는 것이다.
루터는 정착된 용어들을 가능하면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다. '삼위일체론'도 용어로서 만족하지 않았고, '관계'는 신성이 우연성을 지니고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어 위험하다고 봤다. '본질동등성'도 원래 성경 바깥에서 온 용어로서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어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단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용할 수 밖에 없다고 하였다.
칼뱅(1509~1564)도 같은 입장이다. 그는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한 하나님이시고, 성자가 성부가 아니며, 성령도 성자가 아니라 비공유적 속성으로 구별된다는 사실만을 공유한다면, 모든 용어들이 사라져도 좋다고 말한다. 그는 삼위께서 참 하나님이시며, 삼위를 떠나선 결코 알려질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삼위로 아는 것이다. 하나님이란 이름은 성부, 성자, 성령께 공히 적용되며, 위격이란 비공유적 속성이며 상호 연관 중에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별을 말한다. 위격은 상관적인 이름이고 본질은 절대적인 이름이다.
하나님 내에서 위격 구분은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계시됨으로 필요하게 된다. 요한복음 14장 10절을 인용하여 성부는 성자 안에, 성자는 전적으로 성부 안에 계신다며 다마수쿠스의 요한 식의 공재를 이야기 한다. 각 위는 본질의 상이성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비공유적 속성을 통한 상호 관계성으로 구별되며 동시에 그 관계성을 통하여 일체성을 이루신다.
칼뱅은 에베소서 4장 5절과 마태복음 28장 19절에 나타난 세례의 단일성을 근거로 하며, 삼위께서 함께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그리스도는 스스로 하나님이시다. 이 측면에서 자기 원인자이시다. 그러나 성부와의 관계에서 성자이다. 이 측면에서 성부가 성자의 원인자이다. 성부가 '신성의 원천'이란 것은 본질이 아니라 순서의 측면에서만 가능하다. 위격들 간에 어떤 질서가 있고, 성부는 시작이요 원인자이시니까, 하나님이란 이름이 특히 성부에게 해당될 경우가 많다.
칼뱅은 거명하지는 않지만 아우구스티누스가 심리적 현상에서 삼위 하나님을 구별하려는 시도를 비판한다.
개혁자들은 삼위일체론을 실천적 지식으로 제시한다. 중세교회의 믿음과 무관한 성령을 성례론에 묶어 두고 성사 행위 자체에 성령이 담겨 있다고 보았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를 반대하고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론을 제창하고, 성령론을 바로 정립한다. 즉, 성령은 성부의 말씀을 깨닫게 한다. 이처럼 개혁자들은 교의인 삼위일체론의 현장이 설교라는 점을 확립시켰다.
그들은 삼위일체론이 아닌 삼위일체 하나님을 전해야 하기 때문에 구원역사적 교의가 예전, 특히 설교에서 다시 자리를 잡게 된다.
종교개혁 이후에 삼위일체론은 개혁파 전통에서 하나님의 작정을 강조하다 보니 성자와 성령의 구원사적 사역이 조명을 덜 받음으로 조명을 덜 받게 되었다.
현대의 삼위일체론의 부흥
비로소 20세기에 들어 삼위일체론이 신학의 관심 주체로 등장 하였는데, 칼 바르트와 갈 라너는 개신교와 가톨릭교회 안에서 삼위일체론의 부흥을 주도했는데, 1961년 동방교회가 세계교회협의회(WCC)에 가담하면서 서방교회는 삼위일체론과 필리오케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면서,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이 관심의 가운데 서게 되었다.
칼 바르트(1886~ 1968)는 '삼위의 흔적'을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계시로부터 하나님의 계시 주체성을 말한다. 즉, 인간이나 피조물에 삼위의 흔적이 있다는 전통을 거부한다. 그렇지만 바르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역사적 계시가 아니라 계시의 형식 개념에서부터 삼위일체론을 전개하는 아쉬움이 있다. 즉,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라는 명제에서 계시자, 계시, 그리고 계시됨. 곧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을 도출한다. 계시를 삼위일체론의 뿌리라고 하지만 역사적 계시보다는 계시의 분석에서 나온다.
칼 라너는 "경륜적 삼위일체론은 내재적 삼위일체론이며, 내재적 삼위일체론은 경륜적이다."는 유명한 명제를 제시한다. 이 명제는 내재적 삼위일체론과 구원역사를 연결 시킴으로 사변성을 극복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그는 삼위일체로 계시하신 하나님 배경에 모종의 은폐된 하나님이 있다는 오해를 불식시켰다. 그는 위격이란 말대신 '구별되는 세 존재방식'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성부께 기도하지, 존재방식에게 기도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존재방식이란 표현은 적합하지 않다.
위르겐 몰트만(1926~)은 골고다 사건을 하나님 밖이 아니라 안에서 이루어진 사건이라고 말하면서 구원 사건이 하나님의 본질과 무관한 외적이거나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하게 부각시킨다. 십자가 사건은 우리에게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안의 내적 긴장과 관계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라고 한다. 그의 삼위일체론은 십자가 신학의 논리의 귀결이다.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의 자유를 역사에 종속시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는 바르트나 라너가 양태론의 위험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본다. 그래서 위격을 개별적 실체로 보면서 위격이 선행하며 그래야 위격 간의 관계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위격과 관계의 결합을 '공재'로 표현한다. 이러므로 그는 삼신론의 비난을 받는다.
그는 삼위께서 공재하신 십자가를 통해 정치적 사회적 평등을 도모해야 한다고 본다. 이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교제에 상응하는 교제이기 때문이다. 이른바'사회적 삼위일체론'으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사회적, 세계적 의미를 의미한다.
미국의 여성 가톨릭 신학자 라큐나(1952~1997)은 정체적인 삼위일체론의 비실천성을 비판한다. 고대교회의 구원역사적 경륜에서 벗어난 신 내적인 삼위일체론에 대한 거론 자체를 거부하며, 세상관 관계를 맺고 그 관계 속에서 인간을 위하시는 하나님 외에는 달리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강변한다.
그녀는 공재 개념을 이용할 수도 있지만, 본래 신 내적 관계를 다룬 용어이기 때문에 경륜을 무시할 위험이 있다고 본다. 그는 철저하게 구원 계획과 그 집행에 기초한 하나님의 위격과 관계성을 말하며, 이런 하나님의 존재론이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년에게 주안점은 하나님과 피조물의 공유하는 삶이다. 하나님의 삶을 체험하고 그것을 반성함으로 우리 삶의 형태를 도출할 수 있다.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주장을 따라 성부의 단원은 이미 성자와 성령과 공유한 관계적 단원이라고 말한다. '공유적 단원'이란 사랑과 교제의 단원이다.
그러나 경륜적 삼위일체론은 이에 선행하는 하나님의 존재에 뿌리박지 않고 말하면, 결국 하나님을 역사의 한 기능으로 전략시키고 우리 구원의 기반을 잃을 수 밖에 없게 한다. 신의 내적 관계인 '공재'를 거부하면 같은 맥락에서'공유적 단원' 역시 거부해야 마땅하다.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1928~)는 신의 존재나 본질을 이야기 하기 전에 삼위일체론을 말한다. 그도 삼위일체론을 계시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바르트와 달리 형식적인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예수의 천국 설교라는 실제적인 계시 내용을 앞세운다. 바로 이 사역에서 예수는 하나님이 이 땅에 완전히 임하는 자리가 되며,자신을 성자로 증거한다. 그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으로써 자신과 하나님의 하나됨을 증거한다. 역사 속의 사건은 곧 영원의 사건이다.
성부는 왕권을 성자에게 맡기심으로 자신을 성자와 구별한다. 나아가 성령은 성자를 그리고 성자 안에서 성부를 영화롭게 한다. 반면에 성자와 성부는 세상 끝날에 있을 그리스도인의 부활과 죽은 자들의 부활을 겨냥하고서 스스로를 살리는 성령에게 의탁한다. 그때에는 왕권이 전적으로 성부께 돌려 드려질 것이다. 성부의 단원을 종말론적으로 구성했다.
그는 구원역사에서 삼위를 먼저 말하지만, 삼위론의 신비는 일체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무엇보다도 신국 완성을 위하여 삼위의 공평하고 평등한 협력을 말한다. 이로써 원인론의 한계를 벗어났다. 게다가 속성론을 삼위일체론적으로 다루는 강점을 지녔다.
교회역사가 주는 교훈과 의미
삼위일체론의 현장은 예배이다 . 교회가 결정한 교의인 삼위일체론을 받아들이고 존중한다. 니케아회의와 콘스탄티노플회의가 결정한 삼위일체론에 기초한 신학자들의 입장을 평가해야 한다.
교회 역사가 주는 교훈과 의미는 어떠한가?
첫째로, 구원론의 관점에서 삼위일체론에 접근해야 한다.아타나시우스는 구원론으로 아리우스의 철학적 단원론을 극복했다. 예수 안에 신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직접 오셔서 구원을 이루셨다는 확신이다.
둘째, 삼위일체론에서 구원역사를 강조하고 , 심리적 삼위일체론이나 창조로부터 삼위일체론을 세우려는 시도를 배제해야 한다.
셋째, 이 구원역사를 강조하고, 구원을 위하여 협력하는 경륜적 삼위일체론을, 그리고 이 경륜적삼위일체론에서 내재적 삼위일체론을 말할 수 있다.
넷째, 현대 삼위일체론의 부흥에서 잘 나타나듯, 삼위일체론은 관계성과 교제를 강조한다. 바로 삼위의 관계속에서 한 분 하나님을 고백한다. '위'는 말하고 교제하고 사귀는 존재자로서, 교제 중에 일체 하나님이시다.
마지막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교제와 교회의 일체성과 봉사와 섬김의 원형이시다. 예배자는 교회와 세계에서 이 하나님을 닮은 실천적 삶을 살아야 한다.
삼위일체론의 외적 현장: 교회와 세상
삼위일체론의 외적 현장인 교회
인간은 본시 자기중심적이다. 현대인을 정의하고 속박하는 개인주의는 풀지 않으면 안 되는 인류의 운명과도 같다.
삼위일체론의 외적 현장인 교회는 공동체이다. 교회는 예배로 이루어지며, 예배는 일차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과 누리는 교제를 이룩한다. 하나님은 내적으로는 성부, 성자, 성령이 교제하시며, 외적으로는 예배자와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이 교제로 예배자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귀며 참여한다. 예배자는 이 원초적 교제에 기초하여 형제자매로 결합하고 서로서로 교제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협력과 영광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 이 사랑은 성자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났다. 성부하나님은 땅의 일을 위하여 성자를 보내기로, 성자는 이 제안에 응하기로,성령은 그의 오심을 예비하기로 협의하셨다.
성자는 성부의 택한 종이요, 마음에 기뻐하는 사랑하는 자요, 성부는 그에게 성령을 주셨다(마12:18). 사랑하는 자와 사랑 받는 자는 깊은 교제의 신비를 즐긴다. 성자는 성령으로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바쳤고(히 9:14),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했다(롬 1:4). 이와 같이 십자가 사역과 부활도 삼위 하나님의 공동 사역이다.
삼위 하나님의 공동 사역은 우리를 위한 사역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셨다(엡 2:10). 이제 성자가 사랑 받는 아들들에게 성령을 주셨다(요 15: 26). 이것은 깊은 교제, 곧 신 지식을 말하며, 사랑의 성령으로 가능해진다(롬 15:30). 그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엡 2:22).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과 더불어 인간의 구원에 대하여 협의하고 실현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협의는 우리와 교회 안에서도 실현 되어야 하며, 종국적으로 천지에서 실현될 것이다.
사랑 받은 자들은 성부가 성자를 창세전부터 사랑하심으로 주신 영광도 알게 된다(요17:22). 성자가 추구하신 것은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성부의 영광이었다(요 8:50). 성자는 말씀뿐 아니라 고난과 십자가를 통해서도 전파하심으로 성부를 영화롭게 했다. 그러면서도 성자는 성부가 자신을 영화롭게 해 주실 것을 기도하셨다(요 17:5). 받아야 할 고난을 받으시고 자기 영광(눅 24:26)에 들어 가신 성자는 이제 몸조차도 '영광의 몸'이시다(빌 3:21). 성자가 영광 받으신 뒤에 올 성령은 오셔서 성자를 영화롭게 하신다(16: 14). 하나님의 영은 영광의 영이다(벧전 4:14).
성령은 지금 성도들이 아드님과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하시고, 앞으로도 참여하게 하실 것이다. 성도들의 영화란 성령을 통하여 성부와 성자의 교제에 동참함이며, 곧 하나님 영광의 빛으로 변화됨에 있다.
성령은 이렇게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심으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신다. 제자들이 열매를 맺게 하심으로 성부는 영광을 받고(요 15:8), 그들은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하여 영광에 이르게 된다(고후 3:18). 성령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심으로 그리스도안에서 성부를 더욱 영화롭게 하신다.
이와 같은 구원과 배포는 하나님의 본질에 속했다. 우리가 체험을 통하여 구원을 확신하지만, 우리의 구원 자체는 이미 삼위 하나님이 자신들의 협의에 기초하여 이루신 사역이다.
성경이 말하는 교제와 참여는 삼위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통하여 그의 본질에 참여함에 있다(벧후 1:4).
성도의 교제
사도신경은 제 3부에서 성령의 사역을 고백하면서 먼저 교회를, 다음으로 성도의 교제를 고백한다. 그런데 사도신경을 12항목으로 나누는 전통에서는 '교회와 성도의 교제'를 제 9항목으로 함께 묶는다. 아홉 번째 항목은 '교회론'에 해당된다.
오늘 날 신, 구교를 막론하고 교회를 공동체로 이해하려고 한다. 가톡릭교회 제 2 바티칸공의회(1962~1965)가 교회를 특별히 공동체로 말하진 않았으나, 그 이후 30년간 공동체로서 교회 이해는 교회를 다른 방식으로 규명하려는 모든 시도를 제압하고 있다. 개신교와 동방교회에서도 많은 이들이 교회를 공동체로 해석하고 정착시키고 있다.
교제.공동체 교회론에 난점은 '코이노니아'를 '교제'로 받아 들이면 일반적인 축제, 잔치의 분위기를 연상시키나 이 외에 '참여'의 뜻이 약해지는 경향이 있다. 이 참여는 기쁜 것의 반대의 것도 포함하는 것이다. 고난에 참여(고후 1:7), 재정이나 물질을 보조에 참여(롬15:26), 복음에 참여(빌1:5),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고전 10:16).
코이노니아는 수직적이고 수평적인 양 측면을 다 지닌다. 교제와 사귐의 당사자들은 어떤 제 3의 대상에 함께 참여한다. 성경의 교제는 참여를 통한 교제이다. 성도들은 복음과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와 더불어 교제하고 서로 함께 교제한다.
이 교제라는 말은 애초에 기독교적 교제와 교회를 이루는 인격적 관계를 뜻했을 뿐, 구체적인 기관을 지칭하진 않았다. 그러나 교제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공동체,곧 교회라는 의미가 점차로 첨가되었다. 그래서 사도신경이 고백하는 성도의 교제는 교회를 표현하는 또 다른 말이다.
사도신경에 나오는 성도의 교제는 교회론 적으로 '거룩한 것들에 참여' 곧 성례 참여였다. '거룩'에 해당하는 말은 문법적으로 남성 복수 소유격 또는 중성 복수 소유격에 동시 가능한데, 남성으로 볼 경우 성도의 교제, 중성으론 성찬 참여를 의미한다고 본다.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고전 10:16).
교제는 성부와 성자의 교제, 성도와 삼위 하나님과 교제,결혼 관계, 교회의 예배 시 성찬 참여를 의미했다. 그런데 5세기부터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성례전의 참여라는 의미는 사라지고, 교회를 지칭하는 의미에서 '성도의 교제'가 지배적이기 시작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작품인 교회 공동체
교제는 내적 관계를 말하고 공동체는 그 교제와 관계가 이루어지는 정소 혹은 사회학적인 기관을 말한다. 교회라는 공동체는 교제를 기초로 하여 외적 모습을 나타낸다.
바른 교제가 없어도 공동체는 존재할 수 있지만 이것을 염려하고 피해야 한다. 인간의 고난과 결핍에 참여하기 위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서로 협의하고 함께 사역하고 함께 완성하여 가는 아름다운 역사는 바로 천국잔치를 연출하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영원토록 빛날 것이다. 이 영광에 신자들은 방관자가 아니라 참여자로 동참하기 위하여 이웃의 고난과 결핍에도 참여해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열한 제자에게 말씀을 전파하며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셨다(마 28:16~20). 그러면서 세상 끝날까지 그들과 항상 함께하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성령 강림을 약속하셨다.
이처럼 직분이나 설교, 세례와 성찬 등은 성령께서 교회를 세워가는 방편이다. 부활의 주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면서 사도와 목자로 임명하시고 사죄의 사역을 맡기셨다(요 20:22).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으로 설교를 했다(행2:4). 설교는 성령의 직분이다(고후 3:8,살전 1:5). 우리는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한 성령을 마신다(고전12:13). 한 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말할 뿐이 아니라 다른 성도들과도 한 몸이 된다는 말씀이다. 세례는 성도의 교제의 기초가 된다. 한 성령을 마신다는 것은 성찬을 지칭하는데, 성령은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게 하실 뿐 아니라, 성찬상에서 성도의 교제를 체험하게 하신다.
성령께 기도하여 물과 떡과 포도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재하게 하신다. 성령께서는 교제 공동체를 교회로 창조하신다. 일차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이요, 성도와의 교제인데, 은혜의 방편인 성례에의 참여 위에 기초한다.
우리가 받는 성례 안에서 자연적이고 후천적인 차이는 사라지고, 하나의 공동체만이 존속한다. 이방인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지어져 간다(엡 2:22).
이렇게 지어져 가는 데 필요한 것이 은사들이다. 그러나 은사가 하나되게 못하고 교만하게 하고 분열한 고린도교회처럼 된다면 은사는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을 보이면서, 사랑으로 교회를 세우려 할 때에야 은사가 본래의 의미를 발휘한다고 가르친다(고전 12:31).은사를 가진 자는 그렇지 못한 자를 섬겨야 한다(고전 12:22~25). 알맞고 질서 있게 해야 한다(고전 14:40).
교제는 은사 공동체인 교회가 하나되게 한다. 그러므로 상호 교제와 연합을 겨냥하지 않고 개인주의적으로 성령에 참여하고 성령과 교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한 두 은사를 절대화하여 교인의 배타적 표지로 삼을 때, 교회 공동체의 분열의 아픔을 피할 수 없다.이것은 큰 범죄 행위이다.
성령은 제도와 직분과 조직들을 이용하시지만, 이것들은 성도의 교제를 위한 방편이다. 제도의 목적은 성도의 온전한 봉사의 일을 하도록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함에 있다(엡 4:12). 직분이나 제도를 절대화 하면 성직주의의 과오를 범하게 한다. 성례나 직분 자체가 성령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성례를 결코 물화해서는 안 된다.
성례는 한편으론 성도와 삼위 하나님과 교제를, 다른 편으론 성도 상호 간의 교제를 이루어 내기 위하여 주어진 은혜의 방편이다. 설교직도 역시 섬기는 봉사(고후 3:8)이지, 목적 자체는 아니다.
교회 공동체는 은사와 직분으로 다양성 가운데 하나 됨을 보여 주어야 한다. 성도를 온전케 하여 봉사를 하게 해야 한다. 교회 공동체에서 봉사의 훈련을 받아, 세상에 나가 봉사하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교회는 세상을 향한 교제 훈련소이다.
교회가 교회 밖을 향하여 세상을 섬기고 변화 시키기 위한 모범적인 공동체라는 뜻이다.
삼위일체론의 외적 현장인 세계
현대의 개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훈련장이 교회 공동체이다. 예배자는 교회당을 떠나 세상으로 나아가 그 속에서 공동체를 회복해야 한다. 이것은 삼위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실천이며 세상을 향한 봉사이다.
성부가 성자를 통하여 성령을 보내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차적인 사역지는 교회이다. 성부께서는 성자와 성령을 보내시어 교회를 회복하게 하셨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은 교회 안에만 계시지 않는다.교회 밖 세상에도 계신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예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예수도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신다(요 17: 18).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선포하는 교회와 예배자
부활하신 주님은 세례명령을 하시기 전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마 28:18). 십자가의 모든 고난으로 순종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아드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예수께서 이루신 구원은 하나님의 통치를 보여 주신 구원, 희생을 통한 통치이다.
이 권세는 모든 명령의 근거이고 원인이고 계기이다. 제자들은 이 권세를 선포하고 이 권세가 확립될 수 있도록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는 사명을 받았다.
제자들의 일차적 사명은 예배의 방식으로 교회 공동체를 설립하는 것이다. 예배자로 세움을 받고 파송을 받아 교회 밖에서 "하늘과 땅과 모든 권세"를 구체적으로 확립하는 것이다. 교회설립은 그 자체에서 끝나자 않는다. 세상과 창조계가 부활하신 아드님과 권세 아래 있다는 것을 시위해야 하는 예배자의 양성이 교회가 받은 사명이다.
하나님을 자기의 몸에 예배자들이 세상으로 파송되어 세상에서 삼위 하나님을 자신들의 몸에서 드러내고 전파하는 삼위일체론적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창조가 삼위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예배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모신 예배자의 몸이 창조와 세상에서 삼위 하나님이 현존하는 자리이다.
아버지께서 십자가로 아드님 안에서 이루신 화목은 완성되었기 때문에 예배자가 이루어야 할 화목은 화목의 말씀을 받아 예배자로서 성령의 능력으로 아버지가 아드님 안에서 완성하신 화목 사역을 반사하는 일이다. 이것은 성령 안에서 아드님에게는 순종으로 응답하는 산 제사이고, 아버님께는 영광이다.
세상에서 삼위 하나님의 형상인 예배자
예배자는 세상에서 삼위 하나님을 몸에 모시고 그 이름으로 살아간다. 이것이 세례의 의미이다. 세례는 수세자에게 각인하는 의식이며, 각인은 사절의 파견이나 다른 식의 흔적을 넘는 삼위 하나님께서 위격적으로 임재하시며 동행하시는 방식이다. 예배후의 강복 선언은 삼위 하나님의 동행 약속이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이것은 선언과 명령인 동시에 약속의 말씀이다.
종말론적 동행의 약속은 성령을 보내셔서 그분 안에 항상 임재하셔서 세례와 성찬, 그리고 신자의 모든 삶의 근원이 되시겠다는 약속이다.
"가르쳐 분부한 모든 것"을 잘 배워 그대로 행하는 자는 산상수훈의 팔복을 소유한다. 이 선행이 곧 하늘 하나님께 돌리는 영광이다(마 5:3~16). 이 모든 분부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체험하고 실천함으로 세상에서 삼위 하나님을 반사하는 자가 그분의 형상이다.
피조계의 인간은 삼위 하나님을 반사할 수 없다. 모든 인간은 반역하였고, 피조계는 삼위 하나님의 솜씨를 반사하면서 그것을 알지 못한다. 삼위 하나님의 구원 사역으로 그분에게 주파수를 맞춘 예배자가 등장해야 모든 족속과 피조계가 삼위 하나님을 인정하고 찬양 할 수 있게 된다. 삼위 하나님을 모신 예배자만이 그 분의 형상이며, 이 형상이 가는 곳마다 삼위 하나님이 임재하며 영광을 받으신다.
하나님의 이전에 가지신 영광을 들추어내고 인정받게 하는 자가 하나님이 형상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자질의 문제가 아니고 과업이고 사명이며 직무이다. 전통적으론 형상을 지정의의 자질로 보았다. 그리하여 천사도 모든 인간이 다 형상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진정한 형상은 예수밖에 없다(고후 4:4).예수는 아버지를 보여 주셨다. 아들이라도 순종을 배워 복종하셨고,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롬 5:8). 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형상이시다.
이처럼 하나님의 형상은 고난에 참여하는 자이다. 예배자는 오직 아드님의 형상(롬 8:29)을 따라 하나님의 형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예수의 권세는 무장하고 행사하고 악용하는 권세가 아니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올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사람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는"(사 53:2). 예수의 권세는 압제를 가하고 폭력을 가하는 행사하는 권세가 아니라 해방시키시고 섬기는 권세이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요"(요 18:36).
그럼에도 성부의 오른편에 좌정하신 영광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 안에서 세상을 직접 다스리시고 계신다.십자가 전이나 후나 그분의 이 다스림은 겸손한 고난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 육체에 지녔기 때문에(갈6:17), 그분의 고난이 우리의 삶에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그를 믿을 뿐 아니라 그를 위해 고난도 받게 하려 함이다(빌1:29). 또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 하는 자는 박해를 받을 것이다(딤후 3:12).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3).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먹을 때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임하신다(벧전 4:14). 이런 종말론적 소망을 품고 실천적 삶을 산다.
신자는 내적 믿음으로는 누구에게도 종속되어 있지 않는 주인이고, 외적 행위로는 모두에게 종속되며 모든 사람들을 섬기는 종이다.
고난을 동반한 하나님의 형상이 이룩하는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나라는 아니다. 고난과 십자가로 승리했듯이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이긴다. 예배자는 예수님이 십자가로 얻은 포로이고, 이 포로인 예배자들이 그분 안에서 다시 포로를 잡는 것이다. 예배자의 손의 무기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 말고는 없다(엡 6:17). 말씀 때문에 고난을 달게 받는 예배자 가운데 임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지배를 말한다. 그러면 세계는 은혜와 사랑과 섬김이 교제가운데 넘치는 공동체, 곧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이다. 인간 예배자는 할 수 없으니 예수께서는"나라이 임하게 하여 주십시오."(마6:10)라고 기도하라 하셨다.
삼위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보편 세계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과 세계를 다 포함한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다 포함한다. 니케아 신경은 하나님을 "하늘과 땅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만물의 창조주"라고 고백한다. 성자의 성육신은 보이지 않는 만물뿐만 아니라 보이는 만물까지도 다 구원받는다.인간의 내면과 외면도 다 구원받는다. 인간뿐만 아니라 나아가 구원받은 창조 세계 전체가 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이다.
구원의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예수의 이름에 무릎 꿇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게 하신다(빌 2:10~11). 하나님 아버지의 통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그분은 이 통치를 제자들에게 맡기셨다.
예수께서는 자기 피로 사신 자들을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아 땅에서 왕 노릇하게 하셨고, 또 이들은 세세토록 왕 노릇할 것이다(계 5:10, 22:5, 벧2:9). 모든 자연도 그리스도의 다스림에 참여하는 왕 같은 자녀들을 갈망한다.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 8:21).
하나님의 자녀들과 보편세계가 다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이 보편세계를 지배하실 때에 하나님은 만유의 만유로 영원히 자기 영광 중에 계실 것이다.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 4:6).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 죄의 장벽이 없어, 만물까지도 하나님의 모습을 온전하게 반사할 것이다.
끝으로 기독교에서 차지하는 삼위일체론의 무게와 중요도는 두 번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많은 것이 부족한 내가 사변을 달아 얘기하는 것 보단 정말 작고 짧지만 글의 무게만큼은 어떤 책의 주제보다 무거운 이 책을 요약하는 것이 낫다고 보았다.
다만, 궁금하고 약간의 지금의 교회상에서 문제가 대두되고 있는, 목사와 장로직분의 충돌 문제에 이어서, 책에서는 목사직을 예배의 집례자로 예배자를 모집하고 양성하고 교회를 세우며, 예배자는 수혜자로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 시켜야 한다는 설명에서 목사직을 나머지 성도들과 이원화 하는 것 같아 아쉬움과 약간의 우려감을 감출 수 없었다. 예배시에 예배집례자인 목사인 감독을 포함하여 모든 예배 참여자는 수세자가 되며 오직 한 분 하나님만 수여자가 되는 것인데,집례자인 목사를 통해 하나님의 신령한 것을 받는 것 같은 표현이 한 두 차례에 걸쳐 언급되는 것 같아 보인다. 이것은 어떤 직분이던 성령님이 교회를 위해 세우신 (목사, 장로, 집사) 직분으로써 하나이지 교회내에서 이원화될 존재는 아닐 것이고 나아가서 목사직분도 설교자, 성찬 집례자이자 하나님께 신령한 것을 받는 수혜자로써 초대의 교회의 사도들과 제자들처럼 다른 성도들과 같이 세상으로 전진하여 나아갈 더 큰 책임과 능력을 위임받은 자임을 간과하는 것 같은 표현이라 생각이 된다.
또한 목사직은 결코 직업이 될 수 가 없음도 같은 맥락에서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은데, 교회에 예배자를 모으는 것도 성령님의 일이시며, 어느 직분의 능력과 역할이 아닐 것으로 본다. 하나님의 외적 통치세상인 외부세상으로 앞장서서 말씀의 성령의 검을 들고 모든 성도와 함께 진군해야 할 것으로 보지 파송의 역할자이자 또한 같은 세상으로의 진군자일 것이다.
목사의 직분이 다른 직분과 달리 이원화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라 생각을 하게 된다. 중세의 수도원처럼 목사의 직분은 은둔자가 아닐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오히려 세상에서 이원화에 현상에 접근되는 것일 것이다. 다른 직분인 장로와 집사의 직분과는 달리 세상에서 관심을 가지고 직업으로의 목사직분을 다른 직분과 구분하여 직업으로써 바라보고 있는데, 최근에 세상에서 몇 대형 교회 목사들과 그의 주변의 문제로 인하여 교회의 목회자들에게도 세상의 직업처럼 세금의 잣대를 대고자 하는 것이 그것이다.
결코, 다른 종파와 종교와 달리 내가 아는 교회의 목사의 직분은 말씀을 설파해야 할 의무가 있는 성령님이 세우신 직분이요, 직분은 봉사와 헌신이지 스스로 권위와 명예의 직도 아니요, 더 더욱이 밥벌이의 직업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세상의 권세자 들처럼 중세의 교권주의 처럼 어느 덧 세상이 교회의 목사직을 명예와 권력과 부가 주어지는 직업으로 치부하는 상황을 안타까워 하며 책에서 말 한데로 집례자가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고 나머지 성도가 세상에서 말씀으로 무장하여 세상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나 전하는 자나 일반으로 세상으로 나아가 세상에서 봉사와 헌신으로 변화 시켜야 한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국외로 자비량으로 선교를 가는 모습이 바른 목사직분의 모태가 아닌가도 생각을 해 본다. 개혁교회는 중세의 교권주의와 각 종 인간적인 관습을 넘어서고 오직 주님의 말씀(성경)을 모태로 하는 고대교회,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을 희망했듯이, 지금 한국교회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교권주의와 세속주의는 몇 교단과 몇 대형교회에서만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인 한국교회의 문제라 생각을 하며, 말씀을 전하는 지금의 목사직분의 모태적인 모습인 바울과 베드로와 같이 말씀을 붙잡고 성도들과 같이 세상으로 나아갔던 초대사도와 교부들의 모습을 회복해야 할 것으로 본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목사직을 직업으로 보는 세상의 관점에서 몇 대형교회 목사들은 모든 수익이 포착된다는 우려로 성직자들의 세금문제를 반대하고 오히려 반대로 대다수의 목회자들은 생계에도 못 미치는 수익에 반해 사대보험의 수혜라도 받겠다고 세금문제에 찬성하는 아이러니에서 벗어나서 정말로 왜 직분 중에 말씀 선포의 직분인 목사의 직분을 소명으로 받게 되었는가를 생각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에서 삼위일체로 교제 하듯이, 직분도 교회 내에서 목사, 장로, 집사의 직분이 교재를 해야 한다고 본다. 한국 교회 각 교단의 신학대학과 신학대학원에서 세상의 회사들이 사세를 넓히듯이 많은 신학생들을 배출하는 것 자체까지는 말씀의 선포를 옹호하고 말씀을 땅끝까지 전해야 한다는 면에선 옳고 바른 일이라 본다. 다만 중세 때의 교회처럼 주교로 대주교로 총대주교로 직분이 세상의 직위처럼 교권화하고 사유화하여 명예와 권력의 자리가 되는 일이 작금의 교회에서 일어 나고 있는 것은 슬픈 일이며 역으로 중세의 수도원처럼 오히려 교회의 모든 일이 세상과 떨어져 조금도 선한 영향을 줄 수 없는 일의 바른 세움은 바른 예배의 세움과 교회 내에서의 모든 직분의 바른 세움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보며, 만인 제사장인 신약시대에 궂이 목사직분이 교회의 대언의 자리로 세상과 격리된 명예와 권위의 자리가 되 선 안될 것으로 보며 오직 권위와 명예는 말씀 자체에 있는 것이지 말씀의 수종자에게 있는 것도 성찬자체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지 성찬 집례자에게 있는 것도 아니란 것도 다 마찬 가지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은 말씀을 대언하는 목사를 보고 자신들의 믿음이 성숙되지 못함을 불평하고 교회의 부흥을 목사의 직분과 장로의 직분이나 집사의 직분, 어디 하나의 직분에 책임을 돌려서도 안될 것이며, 모든 직분과 모든 은사 받은 자들인 회중의 부족을 탓해야 할 것이다.
목사직분이 세상의 바라보는 직업이 아닌 것은 장로와 집사의 직분이 세상의 직업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신학(꼭 신학교를 마침을 의미하진 않는다)을 마친 장로와 신학을 마친 집사가 교회에서 활동하는 것이 근본적으론 옳은 교회의 방향이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교권과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과 함께한 성부하나님인 삼위하나님께만 있다.
다만, 모든 직분은 이 교권을 수호하고 세워가는 성령님이 세운 봉사의 자리이다. 한국교회의 근본적인 문제는 이 교권의 사유화에서 비롯 된다고 본다. 세상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문제로 가는 길이 교회에서도 자연스럽게 열려 왔다는 것이고, 이것은 몇 목사님들과 그의 가족들이 만들어 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숙하지 못한 주변의 성도들이 구약의 사사시대에 왕을 달라던 백성들처럼 권위와 권세를 사람에게로 주변 세상 다른 국가처럼 내려 달라고 하여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을 가렸듯이 몇 직분자 들에게 집중을 시켰던 결과로 만들어진 병폐라 보여진다.
교회의 모든 직분과 은사는 교회를 세움에 필요한 봉사와 헌신을 그 근간으로 해야 한다. 봉사와 헌신의 자리에 권위와 세상의 명예가 자리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교회와 세상의 창조 시부터 하나님 나라의 완성까지 모든 사역에서 교제와 공재로 계시듯이 우리도 모두 직분자로 그리고 은사 받은 봉사자로 교회에서 교제를 나누고 함께 공재해야 할 것이라 본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내적 통치 세상인 교회에서 그리고 외적 통치 세상인 외부 세상에서 권위와 명예는 오직 하나님 한 분에게만 돌려 져야 할 것이다.
이외 이 책에서 나타나는 모든 선한 것과 좋은 것의 근간이신 삼위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 사역을 바라 봐야 한다는 점에서 삼위일체론을 구술하고 정리해야 함을 주장한다. 이것은 잠시 사변적인 중세의 심리적 삼위일체론과 달리 교회가 다시 붙잡아야 할 삼위일체론의 근간으로 봐라 보게 한다. 개인적으로도 많은 부분과 시간에서 심리적 삼위일체적 하나님을 고민하고 생각하기도 했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인 나도 그리고 원시 자연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죄로 인해 이 모든 것이 막혀 있다고 한 글을 보았다. 그리고, 오히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을 인식하고 의식하는 바른 인지 작용을 자연스럽게 노력 없이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형상이심을 그리하여 그분으로 아버지 하나님을 대할 수 밖에 없음도 알게 되었다. 감사하다. !!
끝으로, 좀 더 많은 사회적,혹은 교리적인 부분을 논할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너무도 부족한 탓에 다만 혹시라도 이 요약 아닌 요약의 글을(90페이지를 20페이지로 요약한) 읽은 분에겐 감사하고 죄송한 맘입니다.
후에, 글에 대해 혹시 첨언 할 맘과 시간과 생각이 난다면 그렇게 하기로 하고 이 책에 대한 요약과 서평아닌 서평을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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