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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7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어린이청소년주일 설교
제목 :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본문 : 마가복음 4장 23절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새번역>
부활 후 ‘All New’,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보여주셨던 사랑의 시선, ‘눈여겨봄’으로 시선의 변화를 가져가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삶의 기준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기준으로 다시 새롭게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코람데오(Coram Deo)’라는 단어를 가슴에 새기고 '하나님 앞에' 있음을 인정하고 행동하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코람데오의 삶은 어떤 삶을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여러 가지 삶이 있겠지만 오늘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먼저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듣기’입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경청’입니다. 그냥 단순히 귀가 있기에 들려지는 소리를 인식하는 정도의 듣기가 아니라, 들을 귀가 있기에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듣는 듣기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청’이라는 한자의 뜻이 오늘 나누고자 하는 핵심을 모두 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경청’은 기울어질 경(傾)과 들을 청(聽) 두 한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먼저 기울어질 경을 사용한 이유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 상대방을 향해 몸을 기울이는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상대방의 대화가 궁금하면 궁금할수록 상대방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몸을 기울이게 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사랑하는 이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거의 그 사람에게 빠질 듯 그 사람에게 몸이 향하게 됩니다. 반대로 듣기 싫은 이야기나, 상대방의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을 때 우리의 태도는 최대한 의자 등받이에 등을 대고 양팔로 깍지를 낀다거나 다른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이미 행동에서부터 듣고 싶지 않다는 것과 듣기를 원한다는 것이 티가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경청은 듣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그 사람에게 몸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특별히 왜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아니고 기울인다는 한자를 썼을까를 생각해보면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부모가 어린 자녀의 이야기를 들을 때의 행동을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저는 저희 막내딸의 말을 들으려면 몸을 기울여야 합니다. 가까이 다가서는 것보다 조금 더 몸을 아래로 기울여야 아이와 눈높이도 맞고 더 잘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경청은 마치 아이의 말에도 몸을 기울이고 귀를 기울여 주는 어른처럼 들어야 한다는 뜻으로 기울어질 경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단어가 바로 들을 청입니다. 청(聽)이라는 한자는 풀어보면 귀(이 耳), 눈(목 目), 하나(일 一), 마음(심 心), 왕(왕 王을) 의미하는 다섯 가지 의미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경청하기 위해서는 먼저 귀를 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며 눈을 통하여도 대화를 해야 합니다. 또한 그 한 사람에게 온전히 집중해야 진지한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지만 마음을 듣는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내 이야기를 무조건 들어주고 있다는 마치 본인이 주인이나 왕이 되어 말하는 것처럼 느끼게 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귀로 듣고, 눈으로 보며, 왕의 말을 듣는 듯 듣는 하나의 마음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청이란 ‘눈을 통해 임금을 바라보고 마음을 하나로 집중한 채 귀를 기울이는 일이다.’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신기하게 한자뿐만 아니라 영어로도 듣기를 말하는 단어가 두 가지가 있고 다르게 쓰여집니다. 바로 ‘Hearing’과 ‘Listening’입니다. 귀에 관하여서는 아인슈타인이라고 불리는 프랑스의 의학자 알프레 토마티는 이 두 단어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히어링은 귀에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무심히 흘려보내는 수동적 듣기이고, 리스닝은 의식을 집중해 정보를 모은 뒤 이를 분석해 뇌로 보내는 능동적 듣기이다.”
오늘 마가복음 4장 23절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 중 ‘듣다’도 바로 ‘Hearing’이 아니라, ‘Listening’인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그냥 한 쪽 귀로 듣고 흘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듣고 행동으로 옮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타인의 말을 듣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코람데오의 삶을 살기 위한 가장 중요한 삶의 방식 중 하나가 바로 우리는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청해야 하고, ‘Listening’ 해야 합니다. 들을 귀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말을 들어야 할까요?
첫 번째로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냅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 새번역>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마땅히!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 말씀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지금 시대에는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음성으로 들려주시지는 않습니다. 가끔 직접 음성을 들으신 분이 있다고 하면 참 신기하면서도 의아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사실 하나님은 기록된 말씀,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읽는 것이지만 듣는 것이고, 보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그 말씀이 운행하고 일하고 계심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태초에 말씀이셨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요한복음 1장 1절, 새번역>
말씀이시기에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기록되었기에 읽을 수도 있게 되었지만 가장 고유의 기능은 바로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이 설교도 너무 중요합니다. 제가 하고 있는 이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사실 그냥 ‘연설’에 불과하고, ‘지식’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주보에도 ‘설교’라는 말보다는 ‘말씀 선포’가 더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생각했기에 그렇게 적어 둔 것입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설교자로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매번 이 자리에 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가는 통로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가장 두렵습니다. 제가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준비시키시고, 하나님이 전달하시도록 그저 ‘스피커’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제 이야기가 나올까봐, 쓸데 없는 소리를 할까봐 노심초사 걱정하며 긴장하며 말씀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일은 참 쉽지가 않습니다. 구약, 신약 전체를 한 가지 명제로 나눈다고 한다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자들과 안 들은 자들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분명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사람의 말을 듣고, 세상의 말을 들었던 이들의 결과를 너무도 분명히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세상의 말을 들었던 이들을 오늘 읽었던 본문처럼 ‘길가밭’, ‘돌짝밭’, ‘가시덤불밭’으로 비유하면서 예수님께서 이야기를 들려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분명 잘 듣는, 경청을 가진 ‘좋은밭’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일까요? 그래야 잘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져서,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었다. 그리하여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가 되었다. <마가복음 4장 8절, 새번역>
그리고 이 말씀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입니다.
좋은 땅에 뿌려지는 것들이란 이런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서,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 <마가복음 4장 20절, 새번역>
말씀을 듣기는 들었지만 금방 빼앗길 만큼 소홀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말씀을 처음에만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도록,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그 밖에 다른 일의 욕심이 들어와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지 않도록 좋은 땅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로 말씀을 경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순간만큼이라도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현재 진행 중인 ‘기찬말 프로젝트’ 중 하루 3번의 말씀을 읽으실 때 그 순간만큼은 조용한 곳을 찾으신 다거나, 하고 있는 행동을 잠시 멈추고 읽는다거나, 직접 소리 내어 읽어본다거나 하는 조금 다른 방식의 듣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조금은 구별하여 듣기에 진심을 담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생기고, 들음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에서 비롯됩니다. <로마서 10장 17절, 새번역>
지금! 여기서부터!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에 도전하셔야 할 때입니다.
두 번째로, 동역자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조금 더 좁혀서 이야기하자면 나보다 어리고, 여리고, 부족하고, 약한 동역자의 말을 더욱 잘 들어야 합니다.
사도행전의 아주 재밌는 일화가 바로 이 말을 잘 뒷받침 해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리니, 로데라는 어린 여종이 맞으러 나왔다. 그 여종은 베드로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너무 기뻐서, 문을 열지도 않고 도로 달려 들어가서, 대문 앞에 베드로가 서 있다고 알렸다. 사람들이 여종에게 "네가 미쳤구나" 하고 말하자, 여종은 참말이라고 우겼다. 그러자 그들은 "베드로의 천사일거야" 하고 말하였다. 그 동안에 베드로가 줄곧 문을 두드리니, 사람들이 문을 열어서 베드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사도행전 12장 13~16절, 새번역>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 그 때는 그곳이 교회였습니다. 그렇게 교회에 모여서 감옥에 갇힌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셔서 베드로를 안전하게 그 집 앞까지 오게 해 주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의 음성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이는 어린 소녀 ‘로데’였습니다. 로데도 같이 기도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로데는 평소에 배운 대로, 기도한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목소리를 듣고 너무 기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도한 것을 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작 함께 기도했던 사람들은 로데의 말을 듣지도 믿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미쳤다’라고 말하는 엄청난 실수를 행합니다. 하지만 로데의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랬기에 베드로가 문을 열고 들어올 때 사람들은 깜짝 놀란 것뿐만 아니라 로데에게 진심으로 미안했을 것입니다.
혹시 교회의 사람들이, 예배자들이, 기도자들이 여기 말씀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아닐지 한 번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대화는 하고 있지만 소통은 전혀 되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닌지 깊게 고민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혹여나 나이가 어린 사람을 교회의 한 일원으로는 생각하지만 동역자로는 생각하지 않고 있는지 진지하게 반성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늘 나라는 이런 어린이들의 것이다." <마태복음 19장 14절, 새번역>
예수님의 이 말씀을 우리도 다시금 들어야 할 때인 것입니다.
나보다 나이가 많거나, 경험이 많거나,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배울 점이 많이 있는 동역자들에게 듣는 것은 너무도 쉽습니다. 그런 동역자들의 말은 너무도 잘 들립니다. 그래서 구분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동역자들의 말도 잘 듣고, 나보다 어리고, 부족하고, 연약한 동역자의 말도 잘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역자’라고 생각한다면 모든 동역자에게 평등의 듣기를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숙한 듣기를 실천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쉬운 듣기를 선택하지 마시고, 어려운 듣기를 선택해야 합니다.
물론 부족할 것입니다. 그래서 들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듣고 부족함을 채워줄 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에 여러분으로 하여금 들어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엉뚱할 것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들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듣고 올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도와 줄 사랑의 마음이 여러분에게 있기에 여러분으로 하여금 먼저 들어주어야 한다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세대를 살리는 방법 중 가장 중요한 방법이 교회 안에서 우리 다음 세대들이 마음껏 말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언제나 시대가 변해도 이런 것에 폐쇄적이었습니다. 다음 세대를 살리자고 하면서 말만 많이 하는 바람에, 정작 다음 세대에 게 직접 방법을 묻지 않았고, 듣지 않았기에 결론적으로 다음 세대가 교회를 많이 떠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음 세대가 이야기할 수 있는 교회! 그리고 그 다음 세대에게 경청해 줄 수 있는 교회! 이런 교회를 만들어가야만 미래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대표 기도를 하고’, ‘어린 아이가 성경 봉독을 하고’, ‘어린 아이가 함께 예배드리고’ 라는 말 자체가 교회에서 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 세대도 교회 안에서는 동역자요, 예배자입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예배 안에서는 우리 모두가 하나이고, 평등한 예배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당연히 다음 세대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자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들어주자는 해주자는 것인대 무엇인가를 해 주기 이전에, 진짜 말 그대로 먼저 귀로 눈으로 마음으로 들어주자는 것입니다. 최소한 다음 세대를 향해 귀를 열고 경청할 수 있다면 세대가 교체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세대가 통합되어 가는 교회로 만들어져 가는 것이 아닐까요? 다음 세대가 교회로 많이 돌아올 수 있도록, 이미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 다음 세대가 자신들의 의견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도록 들어주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우리는 계속해서 부활 이 후 어떻게 완전히 새로운 ‘All New’의 삶을 살 것인가를 함께 나누고 있는 중입니다. 오늘 그 삶 중 구체적인 제안을 하나 나누었습니다. 바로, ‘듣기’입니다. 들을 귀가 ‘있기에’ 들으라 하신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청입니다. 그리고 동역자들에 대한 경청입니다. 무엇보다 다음 세대를 향한 경청입니다. 새롭게 펼쳐지는 한 주간 특별히 ‘말하기’ 보다 ‘듣기’를 실천해 보는 시간으로 보내보는 것은 어떨까요?
여호와께서 번제와 그 밖의 제사드리는 것을 순종하는 것보다 더 좋아하시겠소? 순종하는 것이 제사보다 낫고 여호와의 말씀을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더 나은 것이오. <사무엘상 15장 22절, 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마지막으로 혹시 ‘그러면 내 말은 누가 들어주나?’ 라는 생각이 드시는 분들이 계실지 몰라 한 가지 위로의 말씀도 함께 나누어 드립니다. 이미 하나님이 여러분을 향해 귀를 기울이시고 듣고 계심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이야말로 듣기와 경청의 일인자이십니다!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듣기가 바로 여러분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여러분에게 경청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에게 응답하여 주시고, 나의 기도 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셨다.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않으시고, 한결같은 사랑을 나에게서 거두지 않으신 하나님, 찬양 받으십시오. <시편 66편 19~20절, 새번역>
결단찬양 - 주만 바라볼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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