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孔德」이라는 동리명의 유래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실지는 한자의 「공덕」의 의미보다는 우리말의 「큰더기」에서 유래된 것은 아닌가고 보여진다. 즉 우리말로 좀 높은 구원(丘原)지대를 「더기」또는「덕」「언덕」으로 호칭하는데 공덕리 일대는 대개 만리현(萬里峴), 아현(阿峴), 대현(大峴) 등 고개마루에서 서남쪽으로 펼쳐 내려간 언덕진 지대이기 때문에 이 지역을 옛날에 우리말로「큰더기」,「큰덕이」, 「큰덕」으로 전칭(轉稱)되던 것이, 당시 음이 비슷한 한자의 「공덕(孔德)」으로 옮겨지게 된 것은 아닌가고 보여진다. 1913년 공덕리는 고양군(高陽郡) 용강면(龍江面)에 속하였다가 1936년 경성부의 관할구역을 확장하면서 고양군의 용강면으로 되어 있던 지금 마포구의 대부분이 다시 경성부 구역으로 되었으며 1943년 구제도를 신설하면서 1944년 마포구를 신설하여 공덕동은 마포구 관내에 들게 된다.
지금의 한흥시장(漢興市場)에서 길건넌 맞은편 염리동(鹽里洞)쪽으로 들어가는 길에 푯돌 즉 표석(標石)이 서서 푯돌배기로 불리워지고 앞 큰길을 푯돌배기 삼거리로 불리워졌는데 여기에 섰던 표석은 조선 말기 고종(高宗)의 친부인 흥선대원군이 거처하던 아소정(我笑亭)으로 들어가는 길목을 표시한 것이었다.
용강동(龍江洞)
「용강」의 동명은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용강면(龍江面)의 면명(面名)에서 유래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동중에 지형이 용의 머리에 해당된다고 하여 '용의 머리'로 불리어지던 곳이 있고, 그 '용의 머리'로 불리어지던 곳이 있는 이곳 마을이 앞으로 큰 강에 임하여 있는 위치관계로 「용강」의 동명을 이루는 데에 한 요인이 되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1913년에는 성외(城外)지역의 대부분을 경성부에서 떼어 고양군에 붙였으며 뒤 이어서는 다시 종전의 용산면(龍山面)과 연희면(延禧面)의 일부 및 서강면(西江面)을 합하여, 용산의 「龍」字와 서강의 「江」자를 붙여 고양군의 용강면으로 하니, 이것이 「용강」이라는 지역명의 출발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이곳의 동리명은 동막상리(東幕上里)로 쓰여졌는데 그것은 용산선 즉 용산에서 당인리(唐人里)로 나가는 철도의 간이역인 동막역(東幕驛) 부근의 지명을 옛날부터 「독막」,「동막」으로 불러온 데서 연유된 것이다. 그런데 이「동막(東幕)」의 지명은 한자로 볼 때에 동쪽 막사가 있던 곳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기 쉽다. 그러나 실은 방위의 동(東)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독 즉 옹(甕) 기타의 옹기류를 구어내는 움막들이 있기 때문에 옹막(甕幕) 또는 옹리(甕里)를 우리말로 「독막」또는「독마을」로 불리워지던 것이 우리발음의 독이동으로 변전됨과 함께 「동막」으로 되고, 그것이 다시 한자 「동막(東幕)」으로 쓰여졌던 것이다.
1936년 서울의 구역 확장에 따라 동막상리가 용강정(龍江町), 동막하리가 대흥정(大興町)으로 바뀌어지게 되었다. 1944년 서대문구의 일부와 용산구의 일부를 합하여 마포구를 설치함에 따라 마포구 용강정으로 되었으며, 해방후 일제식 동명의 개정과 함께 용강동(龍江洞)으로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토정동(土亭洞)
헌종(憲宗)朝의 저술(著述)인 「경조부지(京兆府誌)」,고종(高宗)朝의「육전조례(六典條例)」등 옛날 문헌에도 서부(西部) 용산방(龍山坊)의 토정리계(土亭里契)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부근은 옛날부터 「토정마을」즉 토정동, 토정리 등으로 부르고 기사(記寫)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또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 권 2에 의하면 토정리계는 공덕리계(孔德里契)와 함께 수도 서울의 방위를 맡은 각 군영(軍營)중 훈국(訓局) 좌영(左營)에 속하기도 하였다.
이 토정동의 명칭은 명종(明宗), 선조(宣祖)朝의 문인이요 기사(奇士)이던 토정(土亭) 이지함(李之 )의 거주지였던 데서 유래된 것이라 하며 해방 후에도 마포 유슈지가에 토정선생 옛 집터로 전해지는 빈터가 남아 있고 또 멀지 않은 곳에 「윗토정」으로 불리어지는 마을도 있다. 그렇다면「토정」의 동명, 지명은 일찍이 400년 전 토정이 세상을 떠나기 전후한 시기부터 일반인들에 의하여 불리워지던 마을이름, 땅 이름임을 알 수 있는 일이다.
1911년 서울을 5부(五部) 8面으로 고칠때에는 성외(城外)의 용산면 토정동으로 되었다가, 1914년 경성부의 구역축소와 함께 고양군 용산면(龍山面)으로 되었다. 1936년 경성부의 구역확장과 함께 편입되어 일제식 명칭의 토정정(土亭町)으로 행세하게 되었으며, 1944년 마포구 토정정으로 되었다. 1946년 동명 개정과 함께 일제 명칭의 정을 동으로 환원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 인접동인 용강동에는 「웃토정」으로 불리어지는 마을, 마포동에는 「아랫토정」으로 불리어지는 마을이름이 남아 전한다.
대흥동(大興洞)
이동은 인접한 용강동(龍江洞)과 함께 독구어 파는 것을 업으로 삼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독막 또는 독마을(甕里)로 불리워지던 지방이었다. 종전의 서강방(西江坊) 옹리계(甕里契)에 속하던 이 부근 마을이 일제시대에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龍江面)에 들어가게 되면서 옹막(甕幕), 옹리(甕里)의 지명이 음의 변전과 우리말의 의미를 모르는 일본인들의 조작에 의하여 옹리상계(甕里上契) 관내를 중심으로 한 마을은 동막상리(東幕上里 ; 현재 용강동), 옹리하계(甕里下契) 관내를 중심으로 한 마을은 동막하리로 변칭되었다.
1936년에 경성부의 지역을 확대하면서 고양군, 시흥군, 김포군의 서울인접 지역을 편입할 때에 동막하리가 다시 경성부의 대흥정(大興町)으로 되니 이것이 「대흥」이라는 동리명의 시초가 된다.
대체로 노고산(老姑山) 남쪽에 위치하여 지형이 구릉과 계곡을 곁들이기도 하였는데 지금까지 전하여 오는 지명 중에 노고산 마을, 답중동, 논우물거리, 박석고개, 벙어리고개, 불당재(마을), 붉은 언덕(차돌배기), 옻나무꽃, 큰우물거리 등의 마을, 고개, 거리, 산, 골짜기 명칭이 보이는 것도 그러한 지리적 조건의 일면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염리동(鹽里洞)
염리동은 조선시대 한양 천도 후 1396년 한성부의 행정구역을 5부(部) 52방(坊)으로 정했을 때에는 한성부에 속하지 않았다. 영조(英祖) 27년에 반포된 수성책자 「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에 보면 서부(西部)에 신화방(神化坊)을 폐지하고 용산방(龍山坊)과 서강방(西江坊)이 신설되어 9個坊이 되었다. 염리동이 속한 용산방이 어느 때에 한성부에 편입되었는가는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조선시대 도시사회연구」를 참고하면 효종(孝宗) 9년(1658)에서 현종(顯宗) 9년(1668)까지 약 10년간 어느 해에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염리동은 1911년 경성부의 행정구역을 개정하여 도성내를 5부 36방으로 도성외를 8면(面)으로 하였을 때 용산면에 속하게 되었다. 1914년 염리동은 고양군 용강면(龍江面) 용리(龍里)가 되었다.
1936년 조선총독부는 경성부의 관할구역을 확장, 변경할 때 다시 경성부에 편입하게 되었는데 이 때에 염리정(鹽里町)이라고 칭하였다. 1944년 마포구가 신설되어 마포구 염리정이 되었다. 1946년 서울시헌장 시행에 따라 일제식 동명을 일소하게 되자 염리동으로 현재에 이르렀다.
염리동이라는 동명이 붙게된 유래는 예부터 소금장수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불리어지게 되었다 하기도 한다. 현재는 없어졌지만 대흥동의 「동막역(東幕驛)」부근에 소금창고가 있었으며 마포나루(삼개)에서 소금배가 그 곳까지 들어왔다고 한다.
쌍룡산은 원래 숲이 우거지고 괴이하게 생긴 바위들이 많아서 27번지 일대에는 「쌍룡대」,「공기바위」,「개바위」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그 중 「쌍룡대」는 두 개의 용머리모양의 바위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인데 이 일대는 1969년경 택지조성을 하는 바람에 주택들이 들어섰고 「개바위(犬岩)」는 쌍룡산 남쪽 끝에 공덕동가 경계가 되는 27번지 96호 부근에 있었다.
염리동사무소가 있는 83번지 3호 부근에는 동네이름을 「보름물-께」라고 불리우던 곳이었다. 그 까닭인즉 현재는 없어졌지만 동사무소옆에 있었던 우물이 보름동안은 물맛이 짜다가, 다시 보름동안은 물맛이 달기 때문에 이 우물이름을 보름물이라고 칭하였던 것이다.
「공덕이 고개」는 서울여자중고등학교 뒷담을 끼고 올라가다가 공덕동 감나무골로 넘어가는 고개를 가리키며, 「동구다리」는 염리동 남쪽끝 동구에 있는 다리를 일컬은 이름이다.
노고산동(老姑山洞)
영조(英祖) 27년(1751) 9월에 한성부 주민들을 유사시에 도성 수호에 출동케하는 절차를 마련한 「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을 보면 노고산동의 명칭은 보이지 않으나, 아현계(阿峴契)만 나타난다.
한일합병후 노고산동(老姑山洞)은 1911년 경성부 5부(部) 36방(坊)에서 제외되어 8면(面)에 속하였다가 1914년 노고산동은 다시 경기도에 편입시켜 고양군 연희면(延禧面) 노고산리(老姑山里)라 부르게 되었다. 1936년 조선총독부는 경성부의 관할구역을 확장, 변경할 때 다시 경성부에 편입되어 노고산정(老姑山町)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943년 서대문구 관할로 되었다가 1964년 마포구에 편입되었다.
노고산동의 동명은 「老姑山」이름에서 붙인 것으로「老姑山」은 원래「老古山」으로 호칭되었었다. 노고산에서 예전부터 약수터가 유명하였는데, 특히 눈병, 피부병, 속병에 효과가 있었다 한다. 노고산에서 신수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름으로 「분(紛)고개」가 있는데 이곳 흙이 가루처럼 고운 까닭에 추수때 벼를 찧으려면 이 곳 흙을 섞어 넣어 쉽게 찧었다고 한다. 「문지울 고개」는 대흥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름으로 비가 오면 땅이 몹시 질었다고 한다.
신촌 로터리 부근은 일제때 까지만 해도 「잔돌배기(細石里)」라고 하기도 하고 또는 「주막거리」라고 부르기도 하였는데 그 까닭은 서소문쪽에서 아현고개를 넘어오면 자잘한 돌이 많이 있다고 해서 붙인 이름으로, 일제가 김포공항까지의 군용도로를 만들기 위해 겨우 지겟길 정도에 불과한 길을 확장해서 개통했다고 한다.
신수동(新水洞)
신수동이 한성부에 처음 편입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영조(英祖) 27년에 수성책자(守城冊子) 「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에 서부(西部) 서강방(西江坊)(城外) 신수철리계(新水鐵里契) 라고 나타났으며, 「수선전도(首善全圖)」에는 수철리(水鐵里)라고 기록하였다.
한일합병후 한성부가 경기도 경성부(京城府)로 격하되어 1911년 도성외 8면(面)에 속하여 서강면(西江面) 신수철리(新水鐵里)로 되었다가, 1914년 고양군 용강면(龍江面) 신수철리(新水鐵里)가 되었다.
1936년 다시 신수철리는 경성부에 편입되었다. 신수철리는 일제식 동명을 부여하여 신수정(新水町)이라고 개칭되었으며, 서대문구에 속하게 되었다가 1944년 마포구를 신설하면서 신수정은 마포구에 속하여 현재까지 이르렀다.
신수정의 동명유래는 확실치는 않으나 신수동의 원래 이름은 수철리(水鐵里)에서 기원했는데 「수철」이란 이름은 신수동 110번지와 109번지 일대를「무쇠막」또는「무수막」이라 불렀기 때문에 수철이란 이름이 생겼다는 것이다. 「무쇠막」은 예부터 정부에 무쇠솥 농기구를 만들어 바치던 공장이 많이 있었으므로 생긴 마을이름이다. 또 솥을 만드는 바탕을 설치해서 무쇠를 녹여 부었기 때문에「바탕거리」라고 이곳을 부르기도 하였다.
50번지 일대를 「메주 무수막」이라고 불렀는데 이 곳은 옛날부터 정부에서 쓰는 메주를 쑤는 곳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 그 옆 동네에는 아가위나무가 많았다고 하여 「아가 나뭇골」또는 「아기 나무골」이라고도 부르는 동네가 있었다.
「독막내」는 용강동과 경계가 되는 개천이름으로 예전에는 이곳에서 독을 굽던 곳이기 때문에 붙인 것이다. 잔돌백이는 일명 세석리(細石里)로서 현재 노고산동, 동교동, 창전동과 서로 맞닿아 있는 신촌 굴다리 창내(滄川)부근 일대가 된다. 이 곳은 예부터 자잘한 돌이 많이 깔려 있었는데 마치 쇠똥모양 둥글고 조각이 떨어지기 때문에 와우산 소의 쇠똥으로 비유되었던 것이다.
구수동(舊水洞)
구수동은 신수동과 함계 한성부에 속하게 된 것이 효종(孝宗) 9년(1658)에서 현종(顯宗) 9년(1668)사이의 10년간에 이루어졌다고 「조선시대 도시사회연구」에 추측하고 있는 만큼 그 전에는 성저(城底) 10리내로 되어 있었다.
「수선전도」에는 수철리(水鐵里)로 기재되어 있음에 비추어 신수동과 결합되어 호칭된 것이라 추측되면 영조(英祖)때에 반포된「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에 처음으로 서부(西部) 서강방(西江坊)(城外) 구수철리계(舊水鐵里契)라고 나타난다.
1910년 한성부가 경성부로 되어 경기도에 속하게 되었고 그 이듬해 경성부 행정구역 개편으로 구수동은 5부(部) 36방(坊)에서 제외되어 고양군 서강면의 구수철리로 되었다가 다시 1914년 고양군 용강면(龍江面) 구수철리(舊水鐵里)로 호칭되었다.
1936년 조선총독부가 경성부의 관할구역을 확장, 변경할 때 다시 경성부에 편입되면서 구수정(舊水町)이라고 했다가 1944년 마포구 신설로 마포구 구수정이 되었다.
1946년 일제식 동명을 일소함으로써 구수동(舊水洞)이 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신수동과 경계되는 곳에 「붉은 언덕(紅峴)마을」이라고 하는 동네가 있었다. 이름의 유래는 이 근처의 흙이 몹시 붉었다 하여 불리워진 것이며「새우물거리마을」은 새로 우물을 팠다하여 붙인 이름이다. 「서강고개」는 신수동으로 넘어가는 나지막한 고개를 부르는 이름이다.
현석동(玄石洞)
현석동의 명칭이 조선시대 한성부에 나타나게 된 것은 「수선전도」에 현석리(玄石里)라고 기록되어 있던 것과 영조(英祖)때에 반포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에 서부(西部) 서강방(西江坊)(城外) 흑석리계(黑石里契)로 되었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龍江面)에 편입됨으로서 경성부에서 제외되었다가 1936년 경성부의 관할구역 확장변경으로 경성부에 다시 속하였고 현석정(玄石町)이라고 개칭되었다. 1944년 마포구 신설로 이에 편입되었다가 1946년 마포구 현석동(玄石洞)으로 고쳐 현재에 이르렀다.
현석동의 명칭이 있게 된 유래는 조선시대 숙종(肅宗)때 박세채(朴世采)가 이 곳「소동주」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박세채의 호는 현석(玄石)으로 현석동이 되었다는 것인데 원래 옛 이름은 농암(籠巖)이라고 불렀다 한다.
박세채는 숙종때 문신(文臣)으로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 남계(南溪), 시호는 문순(文純), 본관은 반남(潘南), 고려의 직제학 상충(尙衷)의 후손이다.
현석동이란 명칭의 유래로는 이 근처의 돌이 검다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하는 이도 있다. 그래서 「감은돌 동네」라고 불렀는데 감은돌은 검은돌의 고어 발음인 것으로 이곳 주민들은 아직도 검은돌 위에 있는 마을이라하여「웃감은돌 마을」, 검은돌 등성이 뒤에 새로 생긴 마을이기 때문에「안감은돌 마을」이라고 부르고 있다.
조선시대와 일제때까지만 해도 현석동 일대는 성황을 이루던 곳이어서 상업으로 치부한 사람들이 별장과 정자동을 짓고 기와집을 짓고 살았었던 부촌이었다.
「사북창터」는 한강제방 앞에 있었는데 옛날에 정부의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가 있었던 곳이며, 또 국상이 나면 큰 깃발들을 꺼내 사용하여다가 보관하기도 했던 창고로 쓰였다한다.
창전동(倉前洞)
창전동은 서강방에 속하기 때문에 조선 영조 27년(1751)에 반포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에 처음 서부(西部) 서강방(西江坊)(城外) 창전리계(倉前里契)로 기록되고 있다.
한성부에 속하게 된 시기는 「조선시대 도시사회연구」에 따르면 영조(英祖) 이전 약 100년 쯤에 편입된 것이다. 한일합병후 일제가 한성부를 경성부로 고치고 경기도에 예속시키면서 1911년 창전동은 고양군 서강면 창전리(倉前里)라 칭하였다. 1936년 서울에 편입되면서 창전정(倉前町)이라고 부르다가 1944년 서대문구에서 마포구로 속하게 되었고 1946년 창전동(倉前洞)이라 하였다.
창전동이란 동명은 조선시대 와우산(臥牛山) 동쪽 기슭에 공미(貢米)를 쌓아둔 광흥창(廣興倉)앞에 동네가 있었다하여 유래된 것이다.
그 당시에는 선박들이 상수동(上水洞)의 점겅청(點檢廳), 신정동(新井洞)의 공세(貢稅)터를 거쳐 봉원천을 거슬러 올라와 공미를 이곳에 풀어 입고시키고 또 백관(百官)의 녹봉을 지급했던 것이다. 광흥창터를 일명 태창(太倉)터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광흥창에는 여러 관리들에게 주는 봉녹미를 저장하여 두었다. 따라서 이곳 광흥창을 중심으로 많은 관리들의 가솔이 모여 살게 되어 「서강 서반 (西江西班)」이란 말도 생기고 취락지로 발달되었다고 본다.
와우산이란 명칭이 붙게된 까닭은 한경지략(漢京識略)에
在西江 形如臥牛 今之廣興倉 在其傍 이라고 나타난 것처럼 서강 내쪽에서 산을 바라보면 북동쪽에서 서남쪽으로 길게 자리잡고 있어서 마치 소가 누워 있는 모습과 흡사하기도 한 때문일 것이다.
「西湖八景」(一名 麻浦八景)의 작자는 알 수 없지만 널리 알려져 있다.
용산제월(龍山霽月) 용산강 비 개인 하늘에 뜬 달 모습
마포귀범(麻浦歸帆) 마포강 나루로 돌아드는 돛단배 모습
방학어화(放鶴魚火) 방학강가에 밤에 보이는 고깃불 모습
율도명사(栗島明沙) 밤섬주변의 길고 깨끗한 모래사장 모습
농암모연(籠岩暮烟) 농바위 부근 마을의 저녁짓는 연기오르는 모습
우산목적(牛山牧笛) 와우산에서 부는 목동의 피리 소리
양진낙조(楊津落照) 양화나루쪽으로 보이는 석양노을 모습
관악청람(冠岳淸嵐) 관악산 허리를 감도는 맑은 산안개 모습
서호(西湖)라 함은 「마포로부터 서강에 이르기까지 통칭하여 부른다」라고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권2에 기록되어 있다.
栗島洞(밤섬)은 법정동명이었고 행정구역상으로는 서강서부동회(西江西部洞會)에 속해 있었으나 1968년 2월 10애 밤섬이 폭파됨으로써 2월 12일 창전동에 속하게 되었다.
율도동은 영조(英祖)때 기록에 의하면 서부(서부) 서강방(西江坊)(城外) 율도계(栗島契)로 불리워 지다가 갑오경장(1894)때 서서(西署) 서강방(西江坊) 율도계(栗島契) 율도(栗島)로 호칭되었다. 한일합병후 1911년 서강면에 속하다가 1914년 여의도와 같이 경기도 고양군 여율 리(汝栗里)가 되었으며 다시 1936년 경성부(京城府) 확장에 따라 여의도정(汝矣島町)이라고 명명되어 편입되었다.
서울특별시가 밤섬을 없앤 이유로는 매년 한강수위가 높아지면 밤섬 주민들은 수재민이 되지 않을 수 없고 이들의 구출과 수용대책은 연례행사처럼 반복되었다. 또 밤섬이 존재함으로써 한강 수로가 변해 여의도 윤중제를 위험하게 해 없앨 수 밖에 없었다.
상수동(上水洞)
상수동(上水洞)은 성종(成宗)때 완성된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도 나타나지 않고, 영조(英祖) 27년(1751)에 반포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에 상수동의 옛날 동명이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서부(西部) 서강방(西江坊)(城外) 수일리계(水溢里契)
수일리계란 동명은 「겸재도성대지도(謙齋都城大地圖)」에 기재되어 있는데 그 후 상수일리계(上水溢里契)와 하수일리계(下水溢里契)로 분리되어 고종(高宗) 4년에 편찬된 「육전조례(六典條例)」에는 서강방(西江坊) 상수일리계(上水溢里契)로 되어 있다. 1911년 경성부(京城府) 도성외에 서강면 상수일리(上水溢里)가 되었다가 다시 1914년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용강면(龍江面)에 속하여 상수일리 라고 부르게 되었다. 1936년 경성부의 광할구역 확장, 변경으로 경성부에 편입되어 상수일정(上水溢町)이 되었다. 1944년 마포구 신설로 마포구(麻浦區) 상수일정(上水溢町)으로 되었다.1946년 마포구 상수동(上水洞)으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상수동이란 명칭은 강가의마을중에서 위쪽마을에 있다해서 붙인 이름이라고 하며, 또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텃말」에서 유래하였다고도 한다. 고려때 이곳을 「신기촌(新騎村)」이라고 부른데서 「새 말터」혹은「새 텃말」이 연유하였다고 한다.
서강(西江)과 관계깊은 이야기로는 1866년에 대원군이 9명의 프랑스신부와 8,000여명의 천주교인을 학살한 「병인박해(丙寅迫害)」사건을 들 수 있다. 이 사건을 알게 된 프랑스제독은 전함 2척을 끌고 한강을 거슬러 양화진(楊花津)을 통과 서강 하중리(賀中里) 앞에 와서 닻을 내린뒤 정찰만 하고 돌아갔다. 그로부터 20일 후 로오즈 제독은 7척의 전함을 끌고 강화에 침입한 사건이 일어났으니 이를 「병인양요(丙寅洋擾)」라고 하였다.
「사지감재」는상수동에서하수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름인데 예전에 사자가 지나가서 사람들이 모여다닌 으슥한 고개라고 해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다리목 마을」은 돌다리가 있었던 관계로 불리었는데, 돌 하나가 8명이 들어 올려야 할 큰돌로 만들어 졌지만 복개공사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황덕사라는 절은 와우산 기슭 서강초등학교 뒤에 있었으나 현재는 찾을 수 없고 여기서 산제(山祭)와 기우제(祈雨祭)를 지냈으나 일제때 금지 시켰다고 한다. 또 「밭째 마당」터는 옛날 창고의 곡식을 두량(斗量)하던 곳이고 「외우물」은상수동 930번지 20호에 있으며 일명 「쌍우물」이라고 부른다.
망원동(望遠洞)
망원동의 동명은 한강변의 명소 망원정(望遠亭)이 있었던 데에서 유래된 것이다. 처음 한성 오부(五部)중 북부(北部) 연희방(延禧坊)에 속하였는데 고종(高宗)조 초기에 편찬된 육전조례(六典條例)에 보면 망원정 1,2,3계(契)가 나오는 것으로써 그 지역도 퍽 넓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처음에는 지역명칭도 정자 이름 그대로 망원정(望遠亭) 또는 망원정동(望遠亭洞)으로 부르던 것이 후에 와서 "정(亭)"字가 생략되어 망원동으로 호칭된 것으로 보여진다.
일제의 강점통치가 시행될 때에는 성외(城外) 8면(面)중 연희면(延禧面)의 망원동으로 되었으며, 1913년 경성부의 주위지역을 경기도 고양군 관할로 옮겨 망원동은 고양군의 연희면 망원리로 편입되었다. 1936년 다시 경성부로 편입되어 일제식 동명의 망원정(望遠町)으로 불리어지고 1944년 마포구의 망원정으로 되었다가 1946년 일제식 명칭 정(町)을 동(洞)으로 개정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망원」의 동명을 가져오게 한 망원정(望遠町)은 양화도(楊花渡)에서 멀지 않은 한강동안(東岸)에 위치하였는데 지난 1925년(乙丑) 홍수의 피해와 연안도로의 공사 등으로 하여 원형을 찾아 볼 수 없다.
망원동은 강변 저평(低平)한 지대인만큼 지금도 모래내, 모래밭들, 물춤밭들, 밥풀둑들, 방울내, 새푸리뜰 등의 마을, 들, 내 이름들이 전해지며 또 불당이 있었다는 불당골, 벽돌을 굽던 마을이라는 벽돌막,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의미의 새말 등 마을 이름도 있다. 그 중 모래내는 신망원동(新望遠洞)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장충동의 철거민들에 의해 새로 이루어진 망원동의 마을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산동(城山洞)
고종(高宗) 31년(1894) 갑오개혁 당시의 동리(洞里) 관계를 보면 북서(北署) 연희방(延禧坊)(城外)에 성산리계(城山里契)가 있고 그 소속으로 중동(中洞), 야지동(野芝洞), 후동(後洞), 무이동(武夷洞), 야동(冶洞) 등의 동명이 보인다. 성산(城山)이라는 명칭은 대개 부근에 산이 성(城) 같이 둘려 있으므로 우리말로 「성메」,「성미」로 부르던 것이 한자로 옮겨진 것이라 한다. 전에는 이 성산 일대의 마을들이 인근의 가좌동(加佐洞), 증산리(甑山里), 신사동(新寺洞) 등 여러 동계와 함께 훈국(訓局) 후영(後營) 소속으로 도성 수호의 일익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일제시대 성외(城外) 8면(面)중 연희면의 성산동으로 되었으며, 1914년 경성부 성외지역의 대부분을 경기도 고양군으로 개편할 때에 고양군의 연희면 성산리(城山里)로 되어 서울 구역에서 떨어져 나갔다. 1936년 고양군의 많은 지역이 다시 경성부로 편입될 때에도 성산동은 부근의 상암동(上岩洞), 중동 등과 함께 고양군에 그대로 남아있게 되었으며 성산리등은 은평면(恩平面)관내로 편입되었다.
일제시대 장기간에 걸쳐 고양군 행정구역내에 남아 있던 성산동(里)은 8.15해방 후에도 3,4년을 지나 1949년에야 서울 서대문구의 성산동으로 편입되었고 1950년 성산리가 성산동으로 바뀐 후 1976년 마포구로 편입되게 되었다.
성산동은 원래 북부(北部) 연희방(延禧坊) 성산리계(城山里契)에 속한 야지동, 무이동, 후동, 야동의 네 마을을 합하여 고양군 연희면의 성산리로 출발하였던 것인데 지금도 그러한 옛날 동명들이 우리말로 불리어지고 있다.
후동은 흔히 뒷들이라 부르는데, 안골(內洞) 뒤에 있는 들 가운데 마을이라 하여 처음에는 후평동(後平洞)이라 쓰다가 후동으로 약칭된 것이라 하며, 야지동(野芝洞)은 우리말 야주목으로 부르는데, 동명의 유래는 그 위치가 통메의 목덜미에 있어 여의주(如意珠)의 목이라는 뜻으로 「여의주목」으로 부르던 것이 변하여 「야주목」이 되고 한자로 옮겨 쓰면서 야지동이 되었다는 것이다.
상암동(上岩洞)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 권2 부방조(部坊條)를 보면 훈국(訓局) 후영(後營) 소속의 동계(洞契)로 북부(北部) 성외(城外)의 수암리계(水岩里契), 수생리계(水生里契)가 보이고 육전조례(六典條例) 중에는 북부(北部) 연희방(延禧坊)에 수색리계(水色里契), 학암리계(鶴岩里契)가 보이며, 갑오개혁 당시 문서에는 북서(北署) 연희방 구역중 상리계(上里契)의 수상리(水上里), 음월리계(陰月里契)의 휴암(休岩) 등 동계명이 보이는데 이러한 지역은 대개 지금의 상암동 및 수색동의 일부지역이 포함되었던 것으로써 오늘의 상암동은 수상리(水上里)와 휴암(休岩)에서 그 명칭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수상리와 휴암동의 마을 이름은 어디서 유래된 것인가?
수상리(水上里)의 명칭 유래를 찾아보면 은평구 수색동 앞 너른 들판 건너 마을을 「물치」또는「물위치」라 하는데 그것은 장마가 지면 한강물이 올라와서 앞 들이 물에 잠기므로 그렇게 부르게 된것이며 그「물치」「물위치」가 한자의 「수색(水色)」또는「수상(水上)」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휴암동은 동중(洞中)의 한 마을인 「부엉바윗골」의 한자 전기(轉記)인 것이다. 즉 마을 근처에 부엉이 모양의 바위가 있어 마을 이름을 「부엉바위골」로 부르고 그것을 한자로 써서 휴암동( 岩洞)으로 하던 것이 언제부터인가 부엉이의 휴( )자대신 변만인 휴(休)자를 서서 오늘에 와서는 그 본래 명칭의 연원을 잊어버리게 까지 되었다.
상암동(上岩洞)중에는 물이치, 부엉바위 외에도 부엉바위골 모퉁이에 있다하여「모루지」로 부르는 마을, 그「모루지」를 돌아나와 한강가에 있는 귀가진 마을이라 하여「귀리깨」또는「귀리(歸里)」로 불려온 마을, 귀리 구석에 있는「구석말」, 모양이 매와 같이 생겼다고 하여 「매봉산」으로 부른다는 산, 처음 오리가 물에 떠 있는 것 같다 하여「오리섬」으로 부르던 것이 압도(鴨島)로 쓰여졌을 것으로 보이는 지금의 난지도(蘭芝島) 등이 있다.
이러한 북부(北部) 연희방의 상암동은 1911년 경성부 연희면 관내로 되었다가 1914년 다시 고양군의 연희면 상암리(上岩里)로 되어 서울에서 떨어져 나갔으며, 해방 후 1949년 서대문구로 편입되어 1975년 마포구로 개편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샛강」을 격(隔)하여 원래의 상암동과 마주보고 있으며 압도(鴨島) 또는 중초도(中草島)로도 부르던 난지도(蘭芝島)는 주위가 22리(里)로서 옛날에는 갈(가노 蘆;갈대)이 많이 나서 선공감(繕工監 ; 토목영선을 맡아보던 관청)에서 이를 수확하여 국가 경용(經用)에 충당하는 정도였다.
중동(中洞)
중동은 본디 여러 마을 중 가운데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가운뎃마을」또는 「간뎃말」로 부르던 우리말의 마을 이름을 한자로 옮겨 적은 것이다.
1911년 경성부 성외(城外) 8면(面)중 연희면(延禧面)의 한 마을로 되었으며 1913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의 중리(中里)로 되니, 이때부터 해방 후 1949년 서울특별시로 다시 편입될 때까지 중동은 인근의 여러 동리와 함께 서울 인접지역의 한 시골마을로 전락되어있었다.
1949년 서대문구로 편입된 후 1975년 관할구가 서대문구에서 마포구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렀다.
연남동(延南洞)
연남동은 1975년 서울특별시 행정구역의 개정에 따라 새로 생긴 동이다. 당시 서대문구내 연희동(延禧洞)의 일부를 떼어 마포구에 붙이면서 따로이 동명을 연남으로 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