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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마태 6,9-13)
-주님의 기도에 담긴 의미-
주님의 기도에 담긴 의미
루이 에블리, 사람에게 비는 하느님 199~234p
참고:제목은 임의로 수정했고, 내용도 약간 수정된 부분이 있습니다.
원본을 보시고자 하는 분들은 위의 책 '사람에게 비는 하느님'을 참조하세요.
주님의 기도에 담긴 의미>
기도는 정해진 문구를 그저 암송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단 정신적으로 죽고 자신의 위치, 충동, 사고방식 등에 대한 관심을 없애고, 거기서부터 출발하여 하느님의 뜻에 따라 구원 계획에 참여하며 참을성 있는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 것으로 삼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실 때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마태 26,39)라는 한마디 바램을 말씀하시는데만 꼬박 ‘하룻밤?(아마도 장기간)’을 소비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단숨에 외워 버린다. 이것은 정신적으로 죽고 성령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일을 하지 않고, 주님의 기도를 ‘외웠음’을 뜻한다.
‘우리 아버지 그대로 하늘에 계셔 주십시오. 제발 우리 일에 너무 간섭하지 마시고 못 본체 하십시오. 우리가 우리의 행동을 제어하는 한 안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당신의 제어하신다면, 어디로 우리를 데리고 가실지 우리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우리 이름, 또는 적어도 우리 가족, 내가 속한 단체 이름이 빛나고 사람들에게 알려져 존경받을 수 있도록 해 주소서. 나의 나라가 임하여 나의 권력이 확장되고, 나의 소유물이 많아지게 하소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만사가 내 뜻대로 되게 하소서.
내가 달리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나는 빵을 내 돈으로 살 수 있고, 또 창고나 냉장고에 이미 보관되고 또 있으니 걱정 없습니다. 그렇지만 주님, 당신이 내 빵에 약간의 쨈을 발라 맛을 돋아 주신다면 놀랄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다 할지라도 거절하진 않겠습니다. 또 당연한 일이지만 중요한 일을 할 때 나는 나만을 믿습니다. 그 누구도 중요한 일이 생겼을 때 무책임하게 말만 하고 있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행위의 대가로 당신의 용서를 받을 수 있게 되기를 바라오며, 또한 당신의 용서를 받을 수 있도록 타인의 잘못을 용서합니다. 제발 너무 많은 시련이나 재앙을 주지 마시고,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하소서. 부탁입니다!’
우리는 몇 초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재빨리 이런 내용을 외워 버리는 것이다. 주님의 기도를 그 내용에 알맞게 그리스도의 영이 끌어주는 대로 전심전력을 기울여 바치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린다. 오늘 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실 ‘주님의 기도’를 바로 배우자 그것은 가장 급한 일이다.
‘주님의 기도’는 말은 그대로이지만, 이해는 옛날과 현재가 매우 다르므로 현대를 사는 우리는 진정한 주님의 기도 이해를 잘 알지 못한다.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와 동시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자기들 시대 사람들에게서 배운 것을 조화시키는데 많이 힘들어 했던 것과 같은 이치다. 그리스도가 오늘날 계셨다면 어떻게 당신의 복음을 선포하셨을지 발견하는 것이 오늘날 복음 전파에서 필수적인 조건이다.
주님의 기도에 이런 문제가 있는데도 그대로 내버려둔 채 우리는 뻔하게 주님의 기도는 가장 완전하고 신성하고 중요한 기도라는 말을 한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고정되어 내려 오는 주님의 기도 표현은 우리를 주님의 기도에서 멀어지게 하고, 하느님 이해에 대해서도 잘못 이해하게 한다. 그 결과는 기쁨없이 충만한 이해없이 기도를 바치고 잘못된 신앙으로 이끌게 한다. 그러므로 마디마디 제대로 고쳐가며 바쳐야 한다. 우리는 기도한 그대로 믿는다.
우리 아버지>
그리스도교 신자는 아버지 더군다나 전지전능하신 아버지를 모시고 있어서 평생 미성년으로 살도록 부지불식간에 강요당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아버지’, ‘그분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에게는 불가결한 존재이신 아버지’를 믿고 있으므로 어리고 무지한 채 수동적으로 있을 수 있다’ 만일 인간이 스스로 위대해지면 하느님은 그를 하위로 격화시킨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 겸손하면 하느님은 그의 지위를 높여 주신다. 즉 어떤 수입을 얻으려면 바보인 척해야 한다는 것과 같다. 미성년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는 우선 그의 아버지를 부정하고 죽여야 할 것인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심리학은 미성년기 있는 사람은 그의 부친에 대한 병적인 애착에서 생기는 단점과 충돌이 심하다고 한다. 그럼 어떤 조건을 충족시켜야 자녀로서 아버지에 대한 애정과 존경심을 계속 가지면서 어른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첫째, 사람은 그의 아버지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의 아버지와 마주하는 어른이 된다. 둘째, 사람은 아버지가 모든 것을 이미 다 자기에게 주었음을 알았을 때 어른이 된다. 진정한 아버지는 자녀에게 자유를 부여한다.타인에게 의존한다는 것은 항상 초조함과 불안의 태도를 갖게 한다. 사람은 자유로울 때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하느님은 우리를 자유로운 자가 되게 해 주셨다. 하느님이 우리 아버지라고 믿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진정 어른답고 진정 자녀로서의 충실한 기도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는 감사다. 아버지의 것은 모두 내 것임을 알고 그에 대한 기쁨과 긍지와 확신을 갖는 것이다. 자신이 받은 특권, 아버지의 부성을 마음에 새기고, 자신에 대한 확신과 하느님께 대한 확신을 갖는 것 이러한 일들이 매우 중요하다. 둘째는 헌신이다. 사람은 모든 것을 받았을 때 자신의 것을 타인에게 줄 차례가 온다 .아버지는 부성이라는 선물을 준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신성이라는 선물을 주신다.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수 있도록 선물을 부여하신 것이다. 따라서 ‘주님의 기도’는 사람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을 다시 한번 기억하는 것과 그계획을 인간이 어떻게 스스로를 헌신함으로써 실천해 가느냐 하는 것, 이 두 가지 성격이 있다.
하늘에 계신 분>
오늘날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다고 하면 하느님과 우리의 자격을 박달해 버리는 것이 된다. 프랑스 시인 자크 프레베르는 이렇게 조소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압지, 거기에 그대로 머물러 계십시오.” 우주 비행사 유리 가가린도 이런 말을 했다.“나는 하늘에서 하느님을 보지 못했다” 어떤 어린이의 아빠가 죽었을 때 그 어린이에게 “아빠는 하늘에 계셔”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어린이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아주 이상하다는 듯이 “비행기 타고 타고요?”하고 반문했다.
히브리인들은 2,500년전 사람들과 셈족 성경 기록자들은 사람과 가까이 계시는 하느님을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표현이 ‘하늘에 계시다“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생각에 인류전체를 섭리하고 관리하려면 하느님은 높은 곳에 계셔야만 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시공간을 포함하면서도 초월하는 시대이다. 따라서 ’하늘에 계신‘ 이라는 그 번역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우리 아버지‘라고 해야할지 모른다.(성경도 함께 있음을 너무 많이 제시 강조함) 하느님이 살고 계시는 유일한 장소는 과거의 하늘, 달, 별천지도 오늘날 교회 건물도 아닌 아닌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을 증언하는 일은 중요하다. 이어지는 주님의 기도 내용은 요청이 아닌 바램이다. 그런데 바램을 이루어주는 것은 누구인가? 당신은 신앙은 한숨을 쉬며 기다리는 신앙인가? 아니면 자기가 하나님의 계획을 완수시킬 책임을진다는 헌신의 신앙인가 잘못된 것은 누구인가 상대방이 기대 어긋나는 것은 누구인가 하느님인가 당신인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당신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도록 하느님께 바랄 셈인가? 하느님이 아직도 그렇게 하느님은 당신 이름이 거룩히 빛나도록 하셨다하고 있지 않으셨다고 생각하는가? 하느님은 당신 이름이 거룩히 빛나도록 하셨다. 당신이 본질을 계시하셨다. 그 본질이 바로 사랑이다. 아무도 하느님의 본질을 하느님이 하신 것처럼 완전하게 인간에게 인식시킬 수 없다. 그리고 하느님은 당신의 이름을 그 이상 거룩히 빛나게 하시지는 않을 것이다. 아버지는 저 십가가상에서 나체로 계신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가 아드님에게 그처럼 사람들을 사랑하실 것을 가르치셨던 것일까? 아버지시다! 그리고 아드님만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요한 14,10)라고 말할 정도로 충실하게 하버지가 말씀하시는 것을 경청하셨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무엇일까? 요한복음은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9-40)
이 아버지의 뜻은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사이를 차지하는 모든 공간 모든 시간 모든 사람들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의 가르침과 뜻을 완벽하게 제시해주셨다. 오류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바른 가르침을 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악령들린 사람과 병자를 고쳐주셨으며 죄인을 회개시키고 천대받던 이들과 이방인들의 본래 지위를 복원시켜주셨다. 사방으로 갈라지고 흩어진 당신 백성을 한 몸으로 결합시키셨다. 그러나 아직도 여전히 세상에 남아있는 빈곤과 기아 차별을 없애가는 일을 맡은 사람은 바로 우리다. 우리의 권리와 책임을 자각하고 서로 용서하며 병자를 치료하고 변모, 빵을 많게 하기, 부활,평화등등에 대해 우리가 가지는 힘과 지혜를 사용할 것인지 아닌지는 오직 우리에게 달려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글자 그대로라면 이 문구는 주님의 기도에서 가장 위험한 내용이다. 그리스도 시대에는 글자 그대로 기도해도 위험하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이나 자연에 관한 것은 모두 하느님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자연을 경외하고 기대며 의존의 대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현대는 변했다. 하느님과 자연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 우선 자연은 경외의 대상이 아닌 지배의 대상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연에 의존하는 존재라든가 하느님께 구걸하는 존재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불쾌하게 여긴다.
현대 무신론은 인간의 존엄성과 인류가 지닌 창조적 사명을 재발견하였다. 그러나 이 개념은 그리스도교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왜 그들은 무無신앙인이 되었는가? 언제나 사람들에게 애걸하게 해놓고 기뻐하시는 하느님, 또한 그 자녀들에 빵을 주면서 그들의 행복과 이익까지 당신 기분에 따라 멋대로 하시는 하느님, 그리고 자녀들에게 죄를 짊어지게 어느 의미에서 모든 것은 하느님에게서 유래한다. 하고 구걸하는 입장에 머물러 있도록 하는 하느님, 그런 하느님을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어떤 의미로 모든 것은 하느님에게서 유래한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진정한 선물은 인간 스스로 창조자가 되도록 허락하신 독립성이다. 현대인은 이 점에 대해 예리하게 통찰하고 있다. 오늘 날 그리스도인 어머니가 임신한 딸에게 “하느님이 또 아이를 주셨구나”라고 말하면 딸은 “ 엄마는 아직도 내가 그런 걸 믿는 줄 아세요?”라고 대답할 것이다. 제 2원인이 제1원인에서 독립하여 자기 기능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통찰하고 옹호하고 나서는 것을 옳은 일이다. 무신론으로 유도하는 사언행을 경계할 일이다. 이런 것을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의 책임과 권리를 박탈한다. 19세기 노동자들이 신앙을 잃은 계기는 그리스도교의 반 사회적인 태도가 아니라 창세기의 입장에서 본 세계의 기원에 대한 설명이 과학의 새로운 해석과 모순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빵을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라면 그것을 주지 않는 분도 하느님이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틀림없이 무신론으로 이르게 한다.
사람들에게 골고루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빵을 내려 주시려면 하느님에게는 단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우리 인간의 손을 통해서 빵을 내려 주시는 방법이다. 단기적으로는 우리가 더 많은 빵을 만들고 그것을 나누어 주는 방법, 장기적으로는 우리가 그들의 생산물을 타당한 가격으로 사들이거나 낮은 금리로 장기 대출을 해 주어. 그들이 자급자족하도록 돕고 그들을 가르쳐 분별있는 인구 정책을 펴도록 돕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왜 당신들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하느님은 인간의 손을 통해서만 인간의 바람을 들어주신다는 사실을 가르치지 않는가? 왜 어린이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표현 그들이 들으면 오히려 나중에 무신론자가 될 그런 표현을 하고 그들에게 그렇게 하기를 강요하는가? 아이들은 당신보다 더 잘 더 빨리 생각한다. 자기가 일을 해서 빵을 벌어들인다면, 마치 산타클로스가 누구인지를 알아챈 어린이처럼 그들은 당신의 기도를 비웃을 것이다. 더욱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일도 있다 그들이 당신이 말하는 것을 믿을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하느님에게 빵을 많게 해 달라고 기쁜 믿음으로 기도할 위험, 또 그들이 자신은 하느님에게 인간으로 여겨지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할 정도로 자기 자신을 기만하고 진정한 인간의 모습에서 멀리 떨어져 나갈 위험이 있다. 신심이 깊기 때문에 다량의 약을 복용한 듯 정상적인 모습을 상실한 사람을, 당신은 만난 적이 없었는가? 그리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에게 빵을 내려 주소서!” 하는 기도처럼 잔혹하고 웃기는 소원을들은 적이 없었을까? 이러한 기도는 무수한 보통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성당에서 수도원에서 일상으로 되풀이되는 기도로 우리의 노고를 나누는 방법이다. 즉 나와 우리는 내 식탁에 편안히 앉아 기도문만 암송하고 하느님이 직접 또는 하느님 다른 사람들을 움직여 돌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래서는 안된다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스스로 당신의 빵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 빵을 주시기 위해 그분이 얼마나 큰 희생을 치렀는지 나는 알고 있습니다. 빵은 생명을 유지시켜 줍니다. 저에게 빵을 주시는 분은 저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당신은 빵을 저에게 나누어 주시면서 당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얼마나 저를 사랑하시는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 15장 13절)그러니 “사랑에 눈 뜨고, 당신이 사신 것처럼 살고, 당신이 나누어 주신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서로 나누어 주게 하소서. 저는 당신의 빵, 곧 당신의 생명을 먹고 살아갑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의 죄를 용서하시고>
이 부분은 잘 살펴봐야 한다. 언뜻 보면 “하느님,우리가 용서할 테니 하느님도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의미인 듯하다. 이는 인간이 하느님에게 먼저 모범을 보이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 반대다. 만일 지식 있는 그리스도인이 이 문구를 ‘그것은 정도의 문제지, 이유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가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는 정도까지만 용서받을 것이라는 의미’라고 옳게 이해할 수 있다면, 그들은 기도를 배우기 시작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해 주면 좋을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이 우리의 죄를 완전히 용서해 주셨으므로, 우리는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고, 서로 화해하기 위해 얼마만큼 마음을 써야, 또, 화해의 기쁨이 얼아마 큰지를 배웠습니다”라는 의미이다. 즉 이 문구는 정당하지만 이렇게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이 문구는 매정한 종의 비유 최후처럼 생각되고 있다. 즉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마태 18, 34) 라는 식으로 말이다. 당신은 하느님이 분노하고 복수하는 분이라 생각하는가? 만일 아직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은 신화적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하느님은 아무도 벌하시지 않는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오직 인간 스스로가 자신을 벌한다. 그것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것,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을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심판은 결코 판결)집행이 아니라, 단순한 효용)효과를 확인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하느님은 잘못을 범한 자에게 용서와 사랑을 거절함으로써 초래되는 손실을 확인시키신다. 즉 그가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할 때, 그는 하느님이 어떻게 자기자신을 용서하시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왜곡되거나 의미하게 살아가게 된다. 하느님이 이미 베풀어 주신 용서를 철회하고 자신에게 복수한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다. 하느님은 다만 용서의 본 의미와 사실을 확인시켜야만 했을 뿐이다. 그 사람은 확실히 자기 마음을 열고 이웃을 용서하지 못했으므로, 하느님에 대해서도 마음을 열고 그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마치 그리스도가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해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루카 7,4)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하느님 용서의 의미를 ‘주님의 기도’를 통해 사람들이 배울 수 있을까? 오히려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의 용서를 받기에 합당한 자가 되도록 노력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들이 하느님의 용서를 받기에 합당하지 않더라도, 하느님은 사람들이 용서받고자 하는 이상으로 무제한으로 그들을 용서하고자 간절히 원하신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이 구절은 좋지 않은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된 동기는 단순한 것 같다. 그리스 정교회, 프로테스탄트, 가톨릭의 똑같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번역어를 찾아야 할 필요 때문에 직역한 표현이 사용되었다. 그렇지만 2,000년이나 지난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옛날의 말마디를 똑같이 되풀이 시키면, 그 뜻을 달리 알아듣게 된다. 이와 같은 직역적인 표현은 사실 원문에 불충실한 것이다. 그것은 그 말의 의미보다는 말( 언어)만을 중요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만일 계시가 알림(소식)이라면, 반드시 그것은 어느 시대 사람들에게도 마치 그 말을 듣는 것이 처음인듯한 느낌을 주는 말투로 후세까지 전해져야 한다. 더욱이 그것이 ‘기쁜 소식’이라면, 어찌하여 하느님이 우리를 유혹에 끌어들이는 분이라는 암시가 전해져 내려올 수 있겠는가? 사실 종교에 대하여 학자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 누구든지 계시를 기쁜 소식 새로운 소식보다는 기쁘지 않은 소식, 낡은 소식이라 생각할 것만 같다.
하느님은 그 누구도 유혹하지 않는다. 폭군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제한하시고 사람이 그것을 결정한다. 하느님은 사람을 좌지우지 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은총 안에 살고 있지, 힘에 지배 안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과 복음서를 읽어 보라 ‘If한다면’이라고 조건부로 말할 뿐이지, ‘Do하라~’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구걸하신다.또한 하느님은 우리를 유혹에 빠지게 하지도 않는다.
‘유혹을 받을 때에, “나는 하느님께 유혹을 받고 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받으실 분도 아니시고 또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야고 1,13) 이 구절을 변호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 그말은 나쁜 의미가 아니다. 유혹은 시험 즉 하느님이 보내시는 시험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 구절은 무엇인가 크리스티앙 뒤코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교회나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 침묵의 상태에서 벗어나 주기를 원하며, 우리를 하느님의 그 자비로운 힘으로 보호하지 말고, 그대로 내버려 두는 그런 시간을 단축시켜 달라고 매일 같이 기도한다”(그리스도론). 그는 또 말하기를,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 시련을 겪지 않게 해 달라고 기원한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지 않는 상태에 놓아 달라는 것을 의미한다.” 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당신을 나타내 보이시지 않는 상태이며 하느님이 사랑이 아닌 상태로서, 그것은 하느님이 하느님이 아닌 상태인 것이다. 유혹에 대한 이 구절에서 무엇인가 참된 의미를 찾아내려는 것은 무리인 듯하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기도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아버지 우리가 어떤 힘든 상황을 마주했을 때도 그것 우리와 함께 계셔 주십시오. 우리가 어떤 십자가를 짊어지든 함께 져 주시고. 우리가 어떻게 죽든 함께 계셔 주십시오. 그리고 사랑과 믿음 안에서 고통 중에 죽어가는 것. 그것이 당신이 저희에게 보내 주시는 선물입니다.’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하느님은 “사랑은 항상 옳다”라는 사실과 “사랑은 악을 이기고, 십자가상에서 죽어가면서도 당신을 못 박은 사람들까지 회개시키실 수 있다” 라는 사실을 계시함으로써 우리를 악에서 구해 주셨다 이번에는 당신이 이웃들을 구원할 차례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이 기도해야 할 것이다.
‘당신은 우리에게 어떻게 사로잡힌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 줘야 할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마리아 막달레나를 육체의 노예로부터, 좌표를 금전의 노예로부터, 마태오를 바람직하지 못한 직업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것과 같습니다. 당신의 그 사랑만이 그들에게 행복과 자유를 가져다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당신과, 당신을 통해서, 당신 안에서 살아가며 우리는이 세상을 악에서 해방시키겠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이러한 내용이 복음서가 전해 주는 가르침의 본질이 아닐까? 그리고 그 본질을 사람들이 매일의 기도, 그들이 최초로 배우는 기도 안에서 발견할 수 있도록, 우리는 그들을 가르쳐 줘야 하지 않을까? 현대인들은 하느님에게 감사하고 이웃에게 봉사할 책임을 자각한 인간으로서, 아들이며, 또 주님의 기도를 바칠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긍지와 기쁨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때야말로 그들은 모두 주님의 기도를 감사의 행위로, 또한 활동에 지침으로써 함께 바칠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가 언제나 제가 말씀드리는 것을 이루어 주심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당신의 것은 모두 제 것입니다. 아버지 당신은 아주 많은 것을 제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선물을 받은 채로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남에게 베풀 수 있는 선물을 저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선물을 제 마음속에 깊이 침투시키기 위한 시간 말고는, 이제 달라고 말씀드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당신에게 온전히 속하게 되었을 때, 저는 제 자신을 완전히 이웃에게 주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계시인 것과 같이 인간의 계시기도 하다. 그리스도가 참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이제까지 삶을 받은 자들 중에서 유일한 참 인간이 되게 하셨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변화되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고, 그리스도의 의해 양육되어, 용기를내어 ‘주님의 기도’를 이런 의미로 바친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우리 아버지, 아버지는 그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친구, 형제자매, 어버이들을 통해서 그것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겠습니다.
아버지는 우리 안에 당신의 거처를 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모든 사람들 안에 사시도록 우리는 개개인이 지니는 존엄성을 보며, 그에 해당하는 존경을 되찾아 주고자 합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정의, 나눔, 사랑 등에 대한 당신의 바람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이 세상에서 당신의 바람을 성취시켜, 이 정의가 세상을 지배하는 곳이 되어, 모든 인간이 이웃을 사랑하는 곳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빵을 우리에게 전부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빵을 이웃과 나누어 먹을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당신은 우리를 완전히 용서하셨고, 그리하여 우리에게 형제들과 화해하는데 필요한 배려 상대방에 대한 존경, 이웃과의 화해 등의 기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당신은 우리가 어떤 시련, 어떤 유혹, 어떤 괴로움에 마주하더라도 우리와 함께 계시오니, 당신이 하신 것처럼 그것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십시오.
그리하여 당신과 더불어 당신 안에서 당신을 통해서 우리는 이 세상을 악에서 구하겠습니다. 아멘
역자譯者의 말(김수창 신부)
나는 평소 기도할 때, 또 미사 중에 나오는 기도문을 낭독할때, 뭔가 잘못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일어판의 이 책을 읽고 깊이 공감하여 독어판을 빌려 번역하게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기도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기도에 대해 우리가 오해하여 범하고 있는 모순을 깨달을 수 있다. 또한 가치관이 뒤바뀌었음을 느낄 것이고, 우리 교회 전통 안에 얼마나 많은 비전통적인 것이 본래의 전통적 전통인처럼 위장되어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는 것이 혁명적이라 생각하겠지만, 이런 정신이 바로 주님의 본 뜻이라고 생각할 때, 누구나 이 책을 읽고 자신의 신앙생활, 기도, 자신이 알고 있던 종교관을 정화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비재菲才를 부끄러움을 무릎쓰고 졸역拙譯을 내 놓는다
첫댓글 기도는 하느님의 말씀)가르침을 알고 살고 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