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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순수 복음 10% | 중도 노선 성경을 잘 설명하고, 복음적 내용을 잘 설명하지만 결론은 항상 성공주의로 맺는다. 80% | 순수 성공주의 (기복주의) 10% |
*아래 그림이 더 이해하기 쉽다.
A집합은 순수복음을 전파하는 분을 나타내고 10%
B집합은 순수 성공주의를 전파하는 분을 나타내는데, 10%
오늘날 가장 많은 설교자들은, 둘 다 전파한다. 수학적으로 '교집합'이다. 80%
청부사상 역시 '교집합'에 속한다.
(이 부분은, 정말 염치 없는 표현이지만, 발전을 위해서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가만히 보면, 해외유학파는.. 주로 순수복음이다. 왜냐하면 해외에서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청부사상, 성공주의는.. 주로 국내파가 주장한다.
어떤 위화감을 조성하는 뜻은 결코 아니고,
과거 역사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적 기독교는.. 결코 성공주의, 청부사상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뜻.
그런데 최근 미국에서도 TV방송을 통해서, 은사주의 계통에서, 성공주의, 청부사상을 널리 전파하고 있다.)
*순수복음 - 1년 내내 ‘부자 되고 성공하시라’는 설교를 거의 하지 않는다.
그냥 인격적 내용, 성경적 내용을 그대로 전한다.
*순수 성공주의 - 1년 내내 ‘부자 되고 성공하는’ 설교를 전한다.
적극적 사고방식, 자기 계발적 메시지, 내적 치유가 주류를 이룬다.
미국의 노만 빈센트 필 박사가 원조이고, 최근에는 조엘 오스틴 목사가 대표적이다.
*중도노선 - 강해설교든지, 주해설교든지, 제목설교든지,
성경의 본문의 내용, 복음적 내용을 비교적 충실히 전달한다.
그런데 결론은 언제나 동일하다.
그래서 그 결과 <복 받아서 부자되고 성공하라>는 것이다.
이 부분이 가장 큰 퍼센테이지를 차지 하고 있다고 본다.
◑인간의 근본적 문제 - 돈과 성공으로 결코 풀지 못한다.
①죽음의 두려움 -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런데 그 때가 오면, 편안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신자가 있고,
교회를 오래 다녔지만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신자(?)도 있다.
인간의 본질적 문제, 그래서 종교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죽음의 문제!
이 문제의 해결은 - 오직 신앙이요, 믿음이지, 돈과 성공이 아니다.
그런데 평생 돈과 성공을 목표로 신앙 생활한 교인은
죽음의 문제에 맞닥뜨려졌을 때,
결국 자기가 붙잡은 ‘성공주의 복음’이 가짜 복음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②인간관계 갈등의 문제 - 누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 말했듯이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 미움, 분노, 분쟁, 갈등으로부터 피할 수 없다.
참 복음과 참 신앙은 ‘용서, 화해, 사랑’으로 인도한다.
그래서 그에게 참된 행복과 평안을 준다.
그러나 소위 ‘성공주의 복음’은, 돈과 성공을 줄지는 모르나,
인간에게 참된 용서, 참된 화해를 주지 못한다.
그래서 교회를 다니면서도, 평생 이웃과 갈등하며 살아간다.
③죄와 죄책의 문제
이 문제 역시 인간이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할 실제적 문제이다.
참 복음, 참 신앙은 ‘죄와 죄책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룬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 위험과 부정적 영향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고,
또한 연약해서 그 길로 빠진 사람들을 돌이키는데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소위 ‘성공주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 모든 죄를 사했다.’로 한 번 선언하는 것으로
끝내버린다.
그리고 실제적 관심과 설교의 주제는 항상 ‘성공, 물질’ 이런 것들을 다룬다.
④명예심, 안정감의 문제
오늘날 명예퇴직, 조기퇴직, 청년실업이 늘어가면서
직장을 잃은 사람들의 ‘명예심, 자존감’ 문제가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대두된다.
우리의 참된 명예심과 안정감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온다. 그 분의 아들, 그 분의 자녀로서 가지는
자기만족self-confidence과 안정감이다.
높은 지위, 많은 은행 잔고도 명예심과 안정감을 주기도 하지만, 일시적이다.
그것은 참된 복음이 아니다.
⑤정신적 고독과 방황
독신은 물론이고, 결혼을 해도... 인간은 근본적으로 고독하고 소외감을 느낀다.
또한 인간은 끊임없이 방황한다.
삶의 경제적 여유가 생긴 사람들이 최고로 원하는 것은 - 여행이다.
다른 말로 하면 ‘방황’이다.
뭔가 여기를 떠나 저기로 가면 행복과 참 만족이 있을 것 같아서 떠나보지만,
거기에 가도 허전하긴 마찬가지다.
그래도 틈만 나면 다시 또 (그 허무한 여행을) 어디론가 떠난다.
인간의 고독과 방황 - 이 실존적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돈과 성공’이 결코 아니다.
참된 복음이며, 예수님과의 참된 관계 맺음이 그런 문제를 해결해 준다.
7. 나가는 말
①교회를 다니는 교인이라도, 위의 5가지 대표적으로 예로 든 삶의 문제들로 인해
실제로 자유함을 얻지 못하고, 그 문제들에 오래도록 붙잡혀 신음하고 있다.
교회가 강조점을 '복음'에 두지 않고, '복과 성공'에 둘 때 그렇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가르침, 설교를 보면
그 결론으로 언제나 '복받아 부자되고 성공해라'고 내리신 적이 -없다-.
②‘물질과 성공’이 인간의 절실한 필요인 것은 사실이다.
‘물질과 성공’으로 신자가 자기 앞가림하는 것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신자가 자기 앞가림도 못하면, 하나님께 영광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이 인간에게 필요한 요소이긴 하나,
‘복음’처럼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결코 아니다.
무엇보다 ‘물질과 성공’에 위험적 요소가 많다는 것이다.
짧게 말하자면 득실이 2:8이라고 본다.
득이 20%면, 실이 80%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토록
너희가 두 주인을 함께 섬기지 못하며,
부자가 천국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 귀 들어감보다 어려우며,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며,
그것이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찌른다고 수차례 경고하셨다. 딤전6:10
‘물질과 성공’의 달콤함과 아름다움을 전하는 사람은
그것 때문에 형제간에 서로 원수되고,
그것 때문에 자녀가 타락하고,
그것 때문에 온갖 방탕한 죄를 짓게 되고,
그것 때문에 교만해지고
결국은 그것 때문에 천국마저 잃어버릴 위험성이 80% 있다는 것을
청중들에게 정직하게 전하여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다!
③인간의 참 행복은, ‘물질과 성공’의 획득에 있기 보다는,
주님과 깊은 교제 관계, 성령 충만, 은혜 충만, 진리 충만, 봉사 충만 등에서 온다.
주님의 인격을 본 받고 닮아감, 주님의 임재 속에 들어감에서 온다.
그런데 이런 복음의 중요한 주제는 흐지부지하게 전하고,
말씀을 잘 가르치더라도 그 마지막 결론으로,
그래서 ‘복 받아 부자되고 성공해라!’는 것은... 복음에 물을 타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면 나중에 천국 가서 주님께 반드시 책망 받을 것이다.
예수님이 그렇게 설교하신 적이 없다고 본다.
④물질과 성공이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고
인간을 본질적으로 행복하게 해 준다는 것은 -사탄의 미혹-이다.
오늘날 복음이 사람을 자유하고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물질과 성공이 사람을 본질적으로 자유하고 행복하게 해 준다는
'잘못된 신학'을 가진 분들이 없지 않는 것 같다.
물질과 성공을 어쩌다 가끔 전할 수도 있다. 그런 면도 성경에 일부 포함되어있다.
그러나 '항상' 전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순수복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물질과 성공의 혜택을 전한다면, 다른 시간에는 그 폐해도 전해야 한다.
과거 학부시절에 1950~60년대에 제작한 프랑스 영화를 본 적이 있었는데
'흥행에 관계없이' 예술성만 충분히 표현한 영화가 있어서 깜짝 놀랐었다.
'저러면 먹고 살기 힘들텐데...' 하면서 동시에
'1950~60년대에 벌써 먹고 사는 것을 기본적으로 해결했구나!'로 생각을 고쳤다.
오늘날 복음을 전하는 분들도 '흥행에 관계 없이 순수 복음'을 전하는
전파자들이 앞으로 더 많이 나올줄 믿는다.
사회에서도 '순수 예술'만 추구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지 않는가!
▲초신자에게 기복적 신앙은 필요하다는 주장에 관하여
처음부터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미하고 감사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의 신앙은 처음에는 기복적이다.
자신의 건강이나 가족들을 위해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해 달라고 청하는 단계다.
이런 단계는 누구에게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단계를 벗어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통과 아픔까지도 받아들이고
모든 일에 대하여 감사하고 찬미할 때 성숙한 신앙인이 될 것이다.
성숙한 신앙인은 자신의 일을 위해 행동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과 말씀을 전하기 위해 힘쓰게 된다.
그런데 사람의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처음부터 '기복주의, 성공주의'로 신앙을 출발한 사람은.. 결코 그 틀이 바뀌지 않는다.
그러므로 초신자에게 기복적 신앙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어쩌면 그 기복 신앙으로 인해, 참 복음에 대한 접속을.. 영구히 방해할 수 있으므로, 올바르지 않고,
무엇보다 예수님도 그런 방식을 쓰지 않으셨다.
- 끝으로 2009년 동기 모임에서 필자가 설교한 내용을 첨부하며( 좀 짧지만 실제설교에서는 좀 더 살을 붙였다.), 미국 파크사이드 교회의 '알리스테어 벡' 목사의 글 '오늘날의 설교 무엇이 문제인가' 를 한글 문서로 첨부한다. -
말씀
본문: 요 6:63 -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
들어가는 말
오늘날 우리는 말씀이 범람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수많은 말씀 테이프, 간증테이프
말씀 동영상, 말씀CD, 설교집 등등 이루 말 할 수없이 수많은 말씀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 목회자들은 한 주간에도 여러 번 설교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일년이면 수많은 설교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저뿐만 아니라 동기 목사님들 모두 한 번 이나 수차례 설교 때문에 고민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설교하는데 본문 말씀은 어디를 정할까? 어떻게 작성할까? 성도들에게 어떻게 말씀을 선포할까? 어떻게 해야 은혜를 끼칠까? 등등 여러 가지로 설교 때문에 고민해보신적들이 있을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설교에 대한 고민을 목회자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 또는 그 이상 해 보았을 것입니다.
저도 여러분 보다는 많은 설교를 해보지는 못했지만 설교를 자주 준비하고 준비하면서 고민을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리고 잘 준비했다고 생각하고 설교를 끝내고 나서 죽썼구나 생각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성도들이 크게 아멘 아멘 하면서 은혜를 받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설교를 하는 가운데 갑자기 알 수 없이 힘이 솟아나는 것을 느끼면서 힘 있게 말씀을 선포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 시간 본문 말씀인 요한복음 6장 63절에 의하면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서 살리는 것은 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영적인 것은 살리는 것이며 생명이라는 사실입니다.
또 로마서 8장 6절에도 보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생각을 하며 성령을 좇아 살아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목회자들이 성도들에게 전하는 말씀도 생명 있는 영적인 말씀을 전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이지 못하고 육적인 말씀을 전하면 그것은 죽이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오늘날 한국교회 강단에 수많은 말씀들이 선포되고 있지만 그중에는 알게 모르게 성도들을 죽이는 말씀도 있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하셨는데 생명은 영생하고 직결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이 있음으로써 영원한 영생의 길로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영생의 길입니까?
요한복음 17장 3절에 보면 영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영생의 길을 가려면, 영원한 생명을 누리려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길은 성경 말씀과 기도밖에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호세아 6장 3절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진정으로 힘써 하나님을 알아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지식적으로 아는 것도 있지만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말씀과 기도생활 속에 하나님을 체험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8절에 보면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했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영으로 우리 육안으로는 볼 수가 없지만 영적인 눈으로는
볼 수가 있습니다. 믿음의 눈, 신앙의 눈으로는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영적으로 체험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영적으로 체험하려면 마음이 청결해야 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거룩하고 정결해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중고등부 학생회 활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한지 10여 년 동안 구원의 확신도 없었으며 영적인 체험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27-8세 때에 영적인 체험을 하게 되었고 30이 넘어서 구원의 확신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89년 10월 밤마다 찬송하고 말씀 보고 기도할 때에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신학공부를 하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순종하고 그 다음해에 신학공부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 당시 구원의 확신이 있는 가운데 날마다 말씀 읽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생활을 하니까
저는 날마다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죄에 대하여 민감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악한 세력이 공격을 해도 금방 대처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모든 성도들에게 거룩함을 요구하십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3절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또 레위기 11장 45절에도 보면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의 거룩함과 정결함을 요구하시며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거룩함과 정결함은 성도들의 책임과 의무인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선교 110년의 역사 속에 교회가 양적으로는 부흥 성장했지만
질적으로는 저하된 가운데 수많은 성도들이 거룩함을 상실한 가운데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도들의 신앙을 수직적으로 보면 위로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 같은데 수평적으로 보면 세상 가운데서 거룩한 성도의 삶을 살지 못하고 주변 사람들에게나 사회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오히려 수많은 성도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고 지탄을 받고 있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모든 성도들이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가운데
좋은 영향을 끼치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우리는 거룩함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늘 기억하며 살아가야 될 것입니다.
성도의 거룩함은 성도를 생명의 길로, 영생의 길로 인도하는 지름길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을 생명의 길, 영생의 길로 인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님이십니다.
이 시간 본문 말씀을 보면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곳에는 언제나 생명이 있습니다. 평안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성도들에게 영에 속한 말씀, 살리는 말씀을 전해야 될 것입니다. 성도를 영적으로 죽이는 말씀을 전하면 절대로 안 될 것입니다.
성경을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24장 13-32절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지만 대부분의 제자들은 그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까이 갔지만 그들의 눈이 어두워져서 자신들의 스승인 예수님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을 책망하시며 모든 성경(구약성경)에 기록된 자신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길을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강해설교를 하셨던 것입니다.
어떤 강해설교인가하면 구약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에 대한 것을 설명한 것입니다.
저녁이 되어 예수님은 제자들과 식탁을 마주대하시고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저희에게 주시고는 제자들 앞에서 사라지셨습니다. 순간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으며 그들은 말했습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는 다는 아니지만 수많은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들이 성도를 죽이는 말씀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도를 죽이는 말씀은 영적인 말씀이 아니라 아마 육적인 말씀일 것입니다. 그중에는 기복신앙을 부채질하는 말씀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30여년을 신앙생활을 했는데 그동안 들은 많은 말씀들이 대부분 어쩌면 그렇게도 천편일률적으로 명령형 또는 지시형 말씀들로서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말씀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 말씀들이 대부분 이렇게 하십시오. 저렇게 하십시오. 이래야 됩니다. 저래야 됩니다. 하는 식이었습니다.
이 시간 결론적으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제 강단에서 명령형 메시지도 아닌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메시지도 아닌 거룩하신 하나님을 더욱 더 알게 하는 즉 체험하도록 하는 영적인 메시지를 선포해야 될 것입니다.
저나 여러분 그리고 각 교회 성도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가운데 하나님을 더욱 더 알아가는 거룩한 삶인 것입니다.
다시 반복하겠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날마다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가운데 하나님을 더욱 더 알아가는 삶을 살아야 될 것입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 호세아 6장 3절의 힘써 여호와를 알자는 말씀을 잘 아실 것입니다.
날마다 날마다 힘써 여호와 하나님을 알아가는, 체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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