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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학 선 2017년 가을호, <문학의 현장> 연재7회
소년배들의 비시(非詩)가 판치는 시단에서 둘러보는
천상병과 박용래의 순수서정
이경철
독자들과 멀어져 비평의 종속물이 돼가는 작금의 우리 시
“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문학의 죽음이나 독자의 감소에 있다기보다는 독자에게 당혹감을 주는 지나치게 어려운 시, 새로운 문화 현상 등을 담은 시에로의 지나친 쏠림 현상입니다. 시가 특정 대학이나 문단 권력을 형성하고 있는 일부 시인 또는 평론가들에 의해 평가되는 상황에서 세상과 온몸으로 만나며 순도 깊은 언어를 생산하는 시인의 자리와 그것을 배려해주고 알아주는 독자의 자리는 갈수록 약화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좋은 시란 항상 소수의 관심사로, 어떤 다른 분야에서도 들을 수 없는 우리 자신에 관한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는 데 성공한 작품이겠죠. 하지만 그 소수의 관심사라는 것을 역이용하여 잠재적인 다수의 독자를 시로부터 멀어지게 할 때 시는 향후 대학의 상아탑에서나 연구되는 비평의 종속물이 될 것이라고 봅니다.”
시인수첩 2017년 여름호 권두정담으로 실린 「시와 시인의 길」에서 박형준 시인이 밝힌 말이다. 경향이나 파벌을 넘어 두루 인정받고 있는 시단의 중견 박 시인이 작금의 우리 시단의 문제를 후련하게 짚은 말이다. 난해하고 전위적인 시에로의 쏠림현상이 독자들을 시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쏠림현상을 방치한, 아니 조장한 문학 권력과 평론가에게도 책임을 묻고 있는 말이다.
같은 정담에서 박 시인은 “시인은 북극성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에, 관념과 도덕과 진실로 위장된 세계의 흐름을 벗겨내고 그 길이 나타나게 해야한다”고 했다. 그런 것이 시라 여겼는데 2000년대 시단에 들어와서는 갑자기 룰이 달라진 게임판에 내팽개쳐진 느낌이 들었다고 실토했다.
“2000년대 들어와 그 시라는 미학적 룰 자체에 대한 의구심이 제기되면서 내적인 측면인 시의 룰이 급격하게 무너졌고 비평이 은연중에 가하는 서정시에 대한 논점이 폭력적으로 느껴졌다”는 것이다.
그럼 2000년대 들어와 누가 시의 룰을 무너뜨렸는가. 소위 ‘미래파’라는 일군의 시인과 평론가들이었다. 그들이 박 시인이 말한 시의 룰을 바꾸고 서정시에 대한 논점을 폭력적으로 실감케 한 것이다.
그렇다. 우리 시단은 너무 신기성에 쏠리고 감각의 착종과 혼란에 시달려오고 있다. 미래파라는 시가 21세기 들어 지난 10여년을 횡행했었다. 문학평론가 이숭원 씨 요약에 따르면 미래파의 환상적 실험시에는 괴기성, 잔혹성, 비속성, 장황한 서술성이 두드러진다. 또 독서체험이나 감상체험 등 대중문화장르의 혼종적 상상력이 주를 이루고 또 거친 단면조차도 철저하게 계산된 시이다.
그래서 이씨는 “‘지금, 여기’서 벌어지는 삶의 운동에 이익을 창출하지 못하는 환상에는 우리의 노력을 쏟을 필요가 없다”며 미래파시와 그에 대한 논의의 무의미성을 일찌감치 지적했었다. “이 시대 대중문화의 주류 트랜드를 여과 없이 이식해오고 있는”, “엽기적인 환상을 장황하게 서술해야할 내적 필연성”도 없는 시들은 서정시도 아니요 기존의 시론을 빌어, 논지까지 바꿔가며 그런 시를 옹호하는 비평 행태를 비판할 가치조차 없다는 것이다.
위의 권두정담에서 이수명 시인은 미래파가 “어렵다거나 불순하다거나 불편하다고 할 수 있는 화법들이 이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거리낌 없이 활보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며 “미래파의 과격성은 시의 가능성을 비시로까지 확장시킨 시도라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봤다. 그러나 이 시인이 지적한 비시(非詩), 시 아닌 시들이 실험적 차원, 아방가르드 위치가 아니라 주류로 흐르며 작금의 우리 시단을 말아먹고 있는 게 문제인 것이다.
그러니 시의 정통, 본류를 가르치기가 힘들다. 시인을 꿈꾸는 이들에게 순수서정에 대해 가르치기가 겁난다. 10행 남짓의 짧은 시를 쓰라 가르치기가 무섭다. 그런 시들이 도무지 먹히지 않은 우리 시 현실을 들이대면 딱히 할 말 없어 암담한 적이 한두 번 아니다.
뒤틀린 추상과 관념, 소통불능 시에 주눅 든 시단과 평단
“가끔 내 시를 들여다본다. 묵은 냄새가 난다. 수백 년간 궤에 담겨 있던 도자기 같은. 이 골동품의 가치는 아는 분만 알 터. 남들이 낡았다고 외면하는 시에 낙점해 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린다.
나는 늘 서정빛을 띄는 나의 시심에 한숨짓는다. 이른바 미래파적인 시, 현란하고 실험적인 산문시를 보면 주눅이 들 때가 많다. 내 시는 고풍스러운 것인가, 촌스러운 것인가? 자주 반문해 본다.
당선 소식은 움츠러든 나를, 내 시의 제목처럼 어루만져 준다. 나는 시류(時流)를 따르지 않고 나만의 시를, 아래 같은 시를 쓰겠다고 다짐한다.
한글 맞춤법이 정확한 시, 인문학적 소양이 배어나는 시, 미학과 철학이 겸비 된 시, 당대의 문제를 직시하는 시, 사회적 성찰이 깃든 시, 그래서 사유가 깊은 시. 누군가의 삶이 내재된 시, 타인을 배려한 시, 독자와 소통하는 시, 언어를 추구하지 않는 시, 화려함과 속됨에 기대지 않는 시, 무목적적인 시, 그래서 살아 있는 시.”
2016년 한 신문에 실린 신춘문예 당선소감 한 대목이다. 나이도 적지 않은, 창작도 많이 하고 응모도 많이 해보도 낙선 또한 많이 했을 당선자가 쓴 이 소감에 작금의 우리 시단에 대한 흐름과 그에 대한 불만이 잘 농축돼 있다. 내가 우리 시단에 대해 늘 해온 말이고 시인들 대부분이 감히 뱉지는 못했지만 하고 싶은 말일 것이다.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린줄 모를 비시들이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버젓이 뽑히고 있다. 그런 작품들이 또 유수의 문학상을 수상하고 있다. 그래 심사위원들에게 왜 그런 작품을 뽑았느냐고 물어보면 나는 모르겠고 누가 누가 뽑자고 주장해서 그냥 따랐다는 식으로 얼버무리고들 말 정도로 우리 시단은 비시에 주눅 들어 있다. 이런 작금의 시단과 평단 작태에 반항이라도 하듯 2016년도 한 신춘문예 심사평은 이렇게 썼다.
“최종심까지 올라온 50여 편의 시를 읽고 느낀 점은 시를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두루뭉수리여서 쓴 사람 혼자만 읽고 서랍 속에 넣어두어야 할 시가 많았다. (중략)
현란한 기교가 난무하고 몰이해를 바탕으로 한 산문성이 두드러진다. 다양성을 긍정한다 해도 지나칠 정도로 관념적이다. 이는 서정과 구체에 뿌리를 내린 비관념적 소통의 시는 이미 낡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시는 낡았든 새롭든 소통의 통로를 통해 써야 한다. 그동안 한국 시단은 뒤틀린 추상과 관념의 언어로 구축된 불통의 시를 새로움이란 이름으로 지나치게 관용하거나 방치해왔다. 행과 연 구분을 하지 않는 산문 형태의 시와 관념적 불통의 시가 현대시의 미래라고 여기는 잘못된 현상이다.”
작금의 신춘문예 응모작과 당선작들에 얼마나 분통이 터졌으면 신인 등용을 축하해줘야 할 지면에 이런 불만을 노골적으로 토로했겠는가. 이건 작품들에 쏟아진 비난이 아니라 기실 작금의 신춘문예 경향, 심사위원들에 대한 불만이며 시단에 대한 자성(自省)촉구이다. “그동안 한국 시단은 뒤틀린 추상과 관념의 언어로 구축된 불통의 시를 새로움이란 이름으로 지나치게 관용하거나 방치해왔다”는.
2014년 여름 나는 백담사 만해마을에서 열린 만해축전에서 원로 문인들과 그해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들 6명이 함께한 방담회를 진행시킨 적이 있다. ‘요즘 신인들의 시는 통 알아들을 수 없다’, ‘이러다가 시에서도 세대 간의 소통단절이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게 아니냐’는 기성시인들의 불만과 우려에 대해 갓 등단한 시인들의 솔직한 답변을 듣기 위해 기획한 자리였다.
그 자리에서 원로들은 “우리들은 전쟁과 가난을 겪은 세대로 무언가 절실함이 있었다. 그 절심함으로 우리는 서로서로 소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 젊은 시인들은 그런 절실함의 체험이 없어 그들끼리도 소통이 안 되는 것이 아니냐”고 요즘 젊은 시를 진단했다.
이에 대해 젊음 시인들은 “궁핍을 모르고 자라다 세상에 나와 보니 나갈 곳이 없다. 그래 청춘백수시대라고들 하지 않나. 나오자마자 낭떠러지인 그 절망감에 자꾸자꾸 개인화, 내면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 소통의 단절을 부른 게 아닌가한다”고 항변했다.
말장난이니, 난해하니, 소통단절이니 힐난은 받지만 자신들도 시대와 자신들에 솔직 하려고 애쓴다는 말이다. 원로들은 그런 시대나 세대의 단순한 반영을 넘어 뭔가 ‘전망’을 요구했다. 리얼리즘이나 현실주의적 전망을 아우르는 인간의 위의와 깊이를 지켜내기 위한 범 휴머니즘적 전망이 시를 영원히 시답게 하는 것 아니겠느냐며.
서정적 자아를 비웃고 포기한 악동, 소년배들이 이끄는 시단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때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태산 같은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윗돌이나,/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나의 큰 힘, 아느냐, 모르느냐, 호통까지 하면서,/때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콱.”
1908년 11월 육당 최남선 자신이 19세에 창간한 잡지 소년에 발표한 「해에게서 소년에게」한 부분이다. 이 시를 기점으로 우리 시는 고전시와 현대시로 갈린다. 이 시를 시작으로 우리 현대시사를 꿰며 문학평론가 김윤식 씨가 2010년에 발표한 글 「1억4천만년 동안의 울림과 빛깔」이 역시 대가급 문학사가 다운 넓은 안목을 지니고 있어 내겐 귀하게 읽혔었다.
“육당의 꾐에 빠진 담 크고 순정한 소년배들의 청년배화 과정이 지난 세기 백 년 동안의 이 나라 시문학사의 궤적이라 할 때 그 앞에 놓인 대전제란 무엇이었을까. 청년배가 아닐 수 없소. 청년배란 새삼 무엇일까. 그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것의 은유가 아닐 수 없소.(중략)
당초 담 크고 순정한 소년배가 있었소. 아무도 그에게 수심을 가르쳐 주지 않았기에 겁도 없이 바다를 건넜다가 날개 젖어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올 수밖에요. ‘허망한 정열’ 속에 들려온 것은 뻐꾸기 울음, 그 샤머니즘이었소.
이 블랙홀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지혜가 요망되었던 것. 총명해야 했으니까. 1억4천만년에로 거슬러 올라가기, 거기서 소리의 정체를 파악하기가 그 한 가지 방도. 다른 하나는, 인공물의 생태화 탄생이었던 것. 그렇다면 다음의 소년배는 어째야할까.”
19세 소년 육당에게서 시작된 우리 현대시 100여년은 소년배의 청년배화 과정이었다는 김씨의 예의 문답식(問答式) 논지가 흥미로웠다. 때리고 부수고 무너버리는 바닷가 담 큰 소년의 외침에서 시작된 우리 현대시는 김기림의 시 「바다와 나비」에서처럼 수심(水心)을 몰랐기에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그러다 순정한 소년 미당 서정주 시인이 어찌 해볼 수 없는 뻐꾸기 소리의 샤머니즘에 빠졌다. 그러다 총명한 소년 최동호 시인의 정신주의로 빠져나왔다는 게 김씨 논지의 대강으로 읽혔다.
“아가야, 네 스승 미당을 믿어도 좋지만 다만 조심하거라, 그건 샤머니즘이란다. 예술이란, 시란 그러니까 정신의 산물인 것. 자연의 우위에 놓이는 것이란다, 라고. 총명한지라 이 소년배는 직감했을 터. ‘인공물’이어야 한다는 것. 역사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 신라 황남대총 말안장 앞 뒷가리개의 저 인공물. 놀랍게도 이 샤머니즘은 인공물과의 결합물이 아니겠는가. 비단벌레의 인공물화의 발견이 그것.”
총명한 이 소년배가 정신주의와 극서정시를 주창한 최동호 시인이고 그가 정신주의의 구극의 소실점에서 날려 올렸다는 시가 「불꽃 비단벌레」라고 김씨는 쓰고 있었다. 우리 문학사를 ‘소년’들이 줄잡았다는 소리는 이미 미당에게서 나온 바도 있다.
“서양 문물의 갑작스런 해일로 단절되고 갈피 못 차린 소년들의 미숙한 사관(史觀)이 저지른 일이 저 1920년대와 1930년대 전반기를 먼지 북새판과 같이 어수선하게 만든 그 사회주의적 사회참여였던 것이다.”
미당이 1963년 세대지 10월호에 발표한「사회참여와 순수개념」이란 글에서 밝힌 말이다. 그러면서 “1925년 ‘프롤레타리아(무산계급)예술동맹’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1934년 그 해산까지에 써낸 모든 문학작품이나 비평이라는 것들을 쓰레기 소각품의 가치 이상으로 생각할 이 나라의 문학사가는 아마 하나도 없을 줄 안다”고 주장했다.
미당은 이처럼 카프문학을 문학에서 탈선한 ‘모자라는 시골뜨기 설바람난 것’이라며 그 탈선 원인을 소년들의 구미(歐美) 사조에 대한 소화 부족과 동양적 재래 전통 정신을 무시하고 단절시킨 데서 찾았었다. 그렇다면 김윤식 씨는 다음의 소년배, 21세기의 소년배를 어떻게 보고 있는 것일까.
“가능하다. 물끄러미 서 있는 너희 두 사람이 내 아버지다. 가능하다. 죽은 사람과 말하는 돌에 대해서 쓸 생각이었다. 가능하다. 내 말은 뼈를 부러뜨리고 나온다. 오전 11시에서 1시 사이. 가능하다. 떨어지다가 정지한 사람을 본다. 누가 내 이름을 바꿔 부를 때도 되었다. 가능하다”
위 글에서 김씨가 인용한 김언 시인의 시 「가능하다」한 부분이다. 이 소년배에 대해 김씨는 “총명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이 소년배를 제3의 소년배라 하지 않는다면 어떤 명칭이 적절할까. 잠깐, 기껏해야 ‘미래파’라 불리는 소년배인 것. 서정적 자아를 조소하고 포기한 악동. 이 얼마나 소년배인가. 담 크기 여부와는 관계없이 얼마나 순정한가. 그도 그럴 것이 상징계(아비, 사회, 언어)가 송두리째 그 힘을 잃는, 그러니까 샤머니즘이 깡그리 사라진 세계 속에 미래파 소년배 홀로 서 있지 않겠소. 갈 곳은 두 가지. 상상계(우주)로 향하기가 그 하나. 다른 하나는, 저 윤리 부재의 현실계. 말이 공중에 뜬 이 겁 없고 순정한 소년배를 보시라. 얼마나 딱하고 재롱스러운가. 육당께서 다시 이렇게 꾀고 있음직하오. ‘오나라 소년배, 입맞추어주마’라고” 적고 있다.
지난 20세기의 우리 시가 소년에서 시작됐고 또 21세기 시도 소년에게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김씨의 주장이다. 어째서? 「신시 백주기, 이 나라 시에 영광 있어라」라는 글에서 김씨가 밝혔듯 “소년이기에 담이 클 수밖에. 소년이기에 순정할 수밖에. 그만이 서정시의 담당자이니까.”
매양 역사의 종언을 외쳤지만 그 역사 없이도 인류사는 그 모양 이 꼴로 지속되고 있다는 원로문학사가 글의 귀결이 크게 울리며 아프게 했었다. 아! 그러나 언제까지 우리 시, 서정시의 담당을 담 크고 영악한 소년배들에게만 맡겨야할 것인가. 그것도 ‘서정적 자아를 조소하고 포기한 악동’, ‘얼마나 딱하고 재롱스런’ 소년배들에게.
길거리에서 죽더라도 순수와 시를 지키려 가난을 택한 천상병 시인
“거의 모두가 이제 금전망자(金錢亡者) 아니면 벼슬지상으로 갔다. 그러나 나는 끝까지 ‘문학’을 지킨다. 굶어 노두(路頭)를 헤매더라도 쓰러져 있더라도 선배들의 뒤를 따른다. 이것이 나의 ‘다시 순수로’인 것이다.”
“무수한 상처 속에서 내 나름대로의 미(美)를 지키기 위해 시를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시란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과의 끝없는 싸움입니다.”
전자는 천상병 시인이 월간문학 1970년 12월호에 발표한 글 「읍참마속(泣斬馬謖)」, 후자는 박용래 시인이 한국문학 1974년 7월호에 발표한 글 「상처 속의 미(美)」 한 대목들이다. 각기 1952년, 1956년에 등단한 천상병, 박용래 시인은 1950, 1960년대 시단을 풍미한 전통적 서정, 모더니즘, 그리고 이후의 리얼리즘 조류에 파당적으로 휩쓸리지 않고 전통적 서정에 모더니즘 기법을 수용, 현대 순수서정시의 전범을 보여주고 간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시적 순수를 지키기 위해 무리 짓지 않고,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과 타협 없이 싸우다 홀로 노두에서 쓰러져간 ‘자멸파(自滅派)’시인으로 삶이나 시에 있어서 순수의 전설이 됐다. 두 시인 모두 당대에 출세 길이 훤한 상대와 상고를 나왔으나 시를 택해 스스로 가난과 무욕, 그리고 음주와 기행 등으로 시의 순수성을 지켜나갔다. ‘소년’들이 파당적으로 우리 시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작금의 시단에서 이들의 순수한 삶과 감동적인, 시다운 시가 그립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노을빛 함께 단둘이서/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귀천(歸天)-주일(主日)」전문)
1992년 10월 10일 서울 인사동 한 주점에서 색다른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1971년 출간된 천상병 시인의 처녀시집이자 유고 시집새를 20여년 만에 복간, 당시 죽은 줄 알았던 시인을 축하해주는 자리였다. 지극한 간호로 시인을 살려내 1972년 결혼까지 한 부인 부축을 받으며 나온 시인은 자신의 대표시라며 위 시를 낭송했다.
「귀천」은 시인 자신의 대표시일 뿐 아니라 우리 국민이 즐겨 암송하는 대중적인 시이다. 밝고 맑은 시어들과 어울리는 순진무구한 시상 전개가 동시처럼 예쁘게 읽히게 한다. 3행씩 3연의 단정한 형식과 매연의 반복 등 정석적인 시 구조와 운율, 어려울 것 하나 없는 평이한 시어들이 이 시를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에게 쉽고 친숙하게 읽히며 감동을 주고 있다.
반복구조와 마지막 말줄임표로 독자들 가슴에 운율과 함께 잔잔한 여운을 남기며 첫 행으로 돌아가 다시 한 번 읽게끔 하는 시이다. 평생 가난과 병마로 일관했던 삶의 비참의 절정에서 이 시가 씌어졌다는 전기적 사실에 연관하여 다시 읽노라면 그런 삶을 “소풍”으로 보고, “아름다웠다”고 하는 그 대긍정 자세에 절로 숙연해진다.
천 시인은 그날 초등학생같이 또박또박 위 시를 읽고 나더니 “이상입니다”라며 절도 있게 낭송을 맺었다. 그 며칠 후 천상병 시인을 집으로 찾아갔다. 출판기념회 때 시인의 건강이 내 눈엔 오늘 내일 할 정도로 매우 안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 좋아하던 막걸리와 함께 건강을 위해 두부와 계란 한 판을 사들고 찾아간 의정부와 서울 경계에 위치한 시인의 집은 누추하기 짝이 없었다. 서울 변두리 아파트 단지에도 편입되지 못한 난민, 유민촌이랄 수 있는 그 동네 집들은 키 작은 사람들도 일어서면 머리가 천장에 닿을 정도로 정말 토굴 같은 것이었다.
그런 동네, 게딱지같은 집을 시인은 20여 년간 천상의 낙원으로 여기며 술술 시를 써가고 있었다. 다 떨어진 집, 다 떨어져 검게 삭아가는 몰골에도 무엇이 그렇게 행복한지 시인은 가을 햇살보다도 환하게 웃으며 예의 “좋다, 좋다, 좋다”를 3박자로 연발하며 다 떨어진 이빨로 까치웃음을 웃어댔다.
-좋은 대학, 직장 다 집어치우고 왜 그렇게 떠돌이 기행으로만 삶을 흘렸습니까?
“시가 그렇게 좋았어요. 오로지 시를 위해서였지요. 시인이면 다 되는 것 아니예요?”
-그래, 이 세상 소풍 나오셨나요. 귀천하시면 하느님께 이래도 이 세상 좋았다고 보고하시겠어요?
“좋아요, 좋아요, 다 좋아요. 나쁜 사람들은 텔레비전 속에나 있고 내가 만난 사람들은 다 좋은 사람들이야.”
두어 시간 동안 천상병 시인과의 이야기를 마치고 나오자니 이 시대 마지막 순수한 사람과의 만남도 마지막이란 예감이 들어 늦가을 찬바람보다도 마음이 시렸다. 그렇게 막걸리 두 사발 혹은 맥주 두 병으로 끼니를 이으며 누워서도 시만 생각하고 써가던 천 시인은 이듬해 봄 4월 밥을 먹다 타계했다. 의정부 장암동 그 쓰러져가는 오두막에서 함께 늙어가던 장모와 모처럼 뒤늦은 아침식사를 하다 두어 술 뜨던 수저를 놓고 쓰러졌다.
“인세를 모아 장모님 장례비까지 마련해 놓았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다”던 시인. 그 천생 어린애 같은 시인이 장모의 부축으로 병원으로 옮기던 중 숨마저 놓아버렸다. 그렇게 저승에 갈 밥도 제대로 못 비우고 떠났다.
가난하고 외로운 마음들이 순하게 겹쳐지는 서정 본연의 감동
1952년 문예지에 「갈매기」가 추천 완료돼 시단에 나온 천상병 시인은 이듬해 같은 문예지에 평론으로도 데뷔해 평론활동도 펼쳤다. 시인으로 등단하자 졸업을 앞둔 서울대 상대도 집어치워 버린다. 당시 최고의 직장인 한국은행에 들어가는 것도 보장돼 있었는데.
“그대로의 그리움이/갈매기로 하여금/구름이 되게 하였다./기꺼운 듯./푸른 바다의 이름으로/흰 날개를 하늘에 묻어 보내어/이제 파도도/빛나는 가슴도/구름을 따라 먼 나라로 흘렀다./그리하여 몇 번이고/몇 번이고/날아오르는 자랑이었다./아름다운 마음이었다.”
데뷔작 「갈매기」 전문이다. 시인은 시에 대한, 순수에 대한 그리움만 갖고 세상을 구름처럼 떠돌았다. 그것을 자랑으로, 아름다운 마음으로 생각했고 피난시절이나 전후 곤궁한 시절에도 세상은 그런 시인을 받아들이는 인심과 예의가 있었다. 동료 문인들에게 끊임없이 내미는 막걸리 구걸 손, 주위를 성가실 정도로 괴롭히는 술버릇도 다들 잘 감싸주었다.
그렇게 세상을 뜬구름처럼 살아가던 시인에게 1967년 분단된 우리 현실과 독재정권은 어처구니없는 폭력을 가한다. 동백림 사건에 연루, 간첩혐의로 체포돼 6개월간 고초를 겪은 것이다. “그때 내 인생은 사실상 끝났다”고 스스로 밝혔듯 그 고문으로 인해 시인의 떠돌이 구걸 삶마저도 자포자기에 빠진다.
세상에 대한 독한 배신감과 고문으로 상한 다리를 이끌고 문단 친구들을 찾아다니던 시인은 1971년 정신황폐증에다 영양실조로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용된다.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고향에서 좀 쉬고 올라오라며 동료문인들이 부산으로 차를 태워 보냈으나 친구들과 술이 하도 그리워 다시 서울로 올라와 헤매던 시인을 행려병자로 알고 경찰이 정신병원으로 보내버린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모르고 5, 6개월 시인의 행방이 묘연하자 문단에서는 객사한 줄 알고 시집 새를 펴내 초유의 산사람 유고시집이 된 것이다.
우리 현대시사에서 순수 서정의 극치를 삶과 시로 일치시키며 보여주고 간 시인인데도 그 좋은 시보다는 기행의 풍문만이 전설처럼 흐르고 있어 민망하다. 시인의 전설적인 가난과 술이 곧바로 자양분이 돼 그의 좋은 시로 나타나고 있는데도 말이다.
사회 제도에 편입되지 않은 무욕과 무애, 천진무구는 스스로 선택한 가난의 정신에서 비롯되었으며 이것은 시인의 시세계를 지탱하는 축이 됐다. 천 시인의 삶과 시에서 가난은 인간을 깊이 있고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근원적 힘이며 시적 진실의 요체이다. 무엇 보다 스스로 선택한 가난은 허장성세에서 벗어나 시를 소박, 간결, 평이한 시적 수사로 난해하지 않고 쉽게 읽힐 수 있도록 쓰게 했다.
“산등선 외따른 데,/애기 들국화.//바람도 없는데/괜히 몸을 뒤뉘인다.//가을은/다시 올 테지.//다시 올까?/너와 내 외로운 마음이,/지금처럼/순하게 겹친 이 순간이—” (「들국화」전문)
있던 모든 것들이 다 비어가고 투명할 정도로 환한 햇살 아래 가난하고 외로운 마음만 남는 가을 서정이 순하게 와 닿는 시이다. 특히 마지막 연 “다시 올까?/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지금처럼/순하게 겹친 이 순간이-”에서의 감동은 직접적이고 평이하면서도 큰 울림을 준다.
난해하고 구구한 서정 시학의 요체인 동일성의 시학과 순간성의 시학, 서정의 감동 그 자체를 군더더기 하나 없이 시로써 단도직입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서정시의 원형질 같은 시이다. 가을날 우주에 미만한 가난하고 외로운 마음들이 한순간 순하게 겹쳐지고 있지 않은가.
빈 손 빈 가슴으로 울며 시의 진경을 보여준 박용래 시인
“아내와 아이들 다 직장에 나가는/밝은 낮은 홀로 남아 시 쓰며 빈집 지키고/해 어스럼 겨우 풀려 친구 만나러 나온다는/박용래더러 ‘장 속의 새로다’하니,/그렇기사 하기는 하지만서두 지혜 있는 새라고 한다./요렇사리 어렵사리 만나러도 나왔으니,/지혜 있는 새지 뭣이냐 한다./왜 아니리요,/대한민국에서/그중 지혜 있는 장 속의 시의 새는/아무래도 우리 박용래인가 하노라.”
미당이 박용래 시인에게 써 준 시 「박용래」 전문이다. 박용래 시인의 시와 삶과 술에서 뻐꾹새 울음을 들은 탓일까. 미당은 박 시인을 ‘시의 새’라 부르고 있다. 박 시인이 서울 사당동 미당의 집을 찾아와 집 앞에서 같이 찍은 귀한 사진 한 장이 있는 데, 그렇게 어렵사리 만나러와 ‘지혜 있는 새’라 했겠는가.
“시에는 한이 멋들어지게 들어있어야 해. 그리고 현대시로서 스타일도 잘 갖춰져 있어야 허구. 그러니 박용래 시 한번 아주 열심히 읽어보더라구.”
대학생 때 이런 미당 권유로 그때 막 출간된 박용래 시선집 강아지풀을 밑줄을 좍좍 쳐가며, 메모를 해가며 참 열심히 읽었다. 내 혼자 보기에 너무 아까워 동료, 후배 시학도에게 열심히 시공부하라며 사서 건넨 것만도 족히 열권은 될 것 같다.
“허망한 세월 속의 과객이었다. 은행원 노릇도 하고 미군부대의 문전에도 서고 교편도 잡았으나 어디든 마음 붙일 곳이란 한군데도 없는 허망한 세월 속의 과객이었다.” 박 시인의 유일한 산문집인 우리 물빛 사랑이 풀꽃으로 피어나면에서 밝힌 자신의 삶이다.
박 시인은 1943년 강경상업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조선은행에 입사했다. 강경상고는 그곳 출신들이 1970년대까지 상업, 금융계의 요직을 두루 맡을 정도로 일제시대 명문 중 하나였다. 그러나 돈 세기가 싫어 그 좋은 직장도 그만둬버리고 해방 후 박봉의 교직 생활을 했다.
1956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하자마자 오로지 시만 쓰려 교직도 그만뒀다. 대전시 오류동에서 택호를 ‘청시사(靑柿舍)’라 짓고 죽을 때가지 그곳에서 시만 썼다. 제도적 틀에 매이면 제대로 시가 써지지 않은 천생 시인의 체질 때문이다.
“아버지의 삶, 그 삶은 시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거의 포기하다시피 한 삶이었고, 여러 면에서 너무 견디기 힘든 고뇌의 날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는 셀 수 없는 많은 밤을 술과 눈물로 지새워야 하셨으리라.”
아버지의 원고를 정리해 1984년 시전집 먼 바다를 출간한 딸 박연 씨의 아버지에 대한 회고처럼 박 시인은 술로 현실적 삶에 대한 고뇌를 털어버리고 오로지 시만을 썼다. “옷을 깁고 싶다. 당사실 같은 언어로 떨어진 시인의 옷을 깁고 싶다. 한뜸 한뜸 정성스레 깁고 싶다”며 시를 썼다.
1980년 사후(死後)에 발견된 유고까지 전집에 실린 시가 160편이니 시력 30여년에, 누구보다 더한 ‘전업(專業) 시인’으로서는 보기 드문 과작이었다. “그는 조각을 하듯이 시를 썼다. 낱말 하나하나에 대한 정성은 비길 데가 없었다”는 시우 임강빈 시인 말대로 완성도 높은 시만을 발표한 결과일 것이다.
박 시인은 시인이 되어 그렇게 직장도 집어치우고 오로지 시에 순교했다. 스스로 택한 가난에 빈 손 빈 가슴으로 독주를 마셔가며, 자연의 대상과 공감하며, 세밀히 관찰하며, 연민의 정으로 같이 울어가며 시를 썼다. 가난은 그를 시에 더욱 집착하게 해 시가 더욱 염결해지고 심미적 깊이와 허정한 우주적 울림을 줄 수 있게 했다. 자로 잰 듯 치밀한 운율, 여백, 이미지, 시 형태 운용으로 누구보다 공교롭게 시를 썼다.
행장기에 남다른 재미와 함께 품격을 갖췄던 소설가 이문구는 전집 말미에 실린 「박용래 약전」에서 박용래의 눈물은 가난, 외로움, 슬픔, 삶의 부질없음 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누리의 온갖 생령(生靈)들을 사랑했으며 그 사랑이 눈물을 불렀다고 했다. 또 정신력의 응집에서 빚어진 그의 타고난 가락은 시대상황을 초월함으로써 주술적인 명맥이요 위안이라 했다.
감동 없는 시 아닌 시가 판치는 우리 시단을 어찌할 것인가
“눌더러 물어볼까 나는 슬프냐 장닭 꼬리 날리는 하얀 바람 봄길 여기사 부여(扶餘), 고향(故鄕)이란다 나는 정말 슬프냐.” (「고향(故鄕)」전문)
세 문장으로 이루어진 짧은 산문시에서 박 시인은 “나는 슬프냐”고 반복해 묻고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문장은 고향 부여의 봄길을 묘사하고 있다. 바람마저도 하얗게 보일 정도로 환한 봄 햇살에 날리는 “장닭 꼬리”. 그 색체는 울긋불긋 화사하면서도 강렬한 원색이 아닌 고사(古寺)의 단청(丹靑)같은, 가을날 느티나무 단풍 같은 세월의 손때에 버무려지고 빛바랜 우리 민족의 정겹고 편안한 색감이다.
그런 화사하고 정겨운 고향 봄길인데도 시인은 “나는 슬프냐”고 묻고 있다. 물어볼 사람도 없으면서 “나는 정말 슬프냐”며 슬픔을 반복, 확인하고 있다. 그러면서 “여기사 부여, 고향이란다”며 속으로 눈물을 삼키고 있다. ‘부-여,’라는 울음의 음상(音像)으로 울며 콤마 (,)로 흑흑 거리고 있다.
이 시에 끝을 알리는 표지인 마침표 이외 단 하나 나와 시적 경과에 중요한 구실을 하는 문장부호 콤마는 ‘흑, 흑’거리는 울음의 숨통 구실을 한다. 이렇듯 박용래는 문장부호나 음향, 행간에 깊은 울음을 감추고 있지, 눈물의 시인이면서 그 시의 표면에 눈물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나직한/담/꽈리 부네요//귀에/가득/갈바람 이네요//흩어지는 흩어지는/기적(汽笛)/꽃씨뿐이네요.” (「추일(秋日)」전문)
총 3연에 각 행이 3행씩 맞춰져 있는 짧고 단정한 시이다. 각 연을 “-네요”라는 경어체 어미로 끝내며 리듬을 얻고 있다. 관념어는 하나도 없이 다 쉽고 예쁜 시어들만 사용했다. 해서 이 시는 ‘추일’이라는 제목과 ‘기적’이라는 한자를 우리말로 바꾸면 어린이를 위한, 어린이 감성으로 지은 동시로 읽혀도 아주 훌륭한 시이다.
이 시에서는 시인은 시적 화자를 드러내지 않고 시적 대상과 일체가 되어 가을날 한 순간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공감각을 동원해 눈에 보이는 것을 귀로 듣고 귀에 들리는 것을 눈으로 보고 있다.
첫 연에서는 담장 아래 주황색으로 익어가는 꽈리의 모습과 함께 숭숭 뚫린 돌담의 형상과 그곳에 부는 갈바람 소리를 꽈리 부는 모습과 꽈리 소리로 묘사하고 있다. 2연에서는 삽상하게 부는 갈바람을 귀로 촉각하며 그 소리를 듣고 있다. 마지막 연에서는 갈바람에 하염없이 흩어져 날리는 꽃씨들을 바람결에 흩어지는 기적 소리로 묘사하고 있는 등 시각, 청각, 촉각 등 모든 감각이 어우러져 가을날을 묘사하고 있다.
시각이나 청각, 촉각, 후각, 미각 등 오감(五感) 중 어느 둘 이상이 합쳐진 공감각이면 우리는 우주적 감응에 젖어들게 된다. 마치 우리의 몸과 마음이 우주의 살아있는 한 부분인양 우주 유기체적 일체감, 소통감을 공감각은 즉물적, 동물적으로 이미지화, 육화(肉化)시킨다.
이 시는 시인과 더불어 우주 삼라만상 스스로 오감을 동원해 꽃씨같이 흩어지고 또 흩어져 기적 소리 같이 이내 떠나고 사라져야하는 가을날의 환하도록 쓸쓸한 정취를 군더더기 없이 맑고 밝게 드러내고 있다. 생래적일 정도로 육감적인 우주적 감수성과 스타일리스트로서의 기법이 어우러진 박 시인 시의 절창이며 지금도 여전히 씌어지고 있는 순수서정시의 전범으로 남을 만한 시이다.
천상병, 박용래 시인의 좋은 시들은 우선 10행 남짓으로 길이가 짧다. 그리고 운율과 어조 등 시의 정석에 충실한 시들이다. 특히 드러나든 감춰지든 시인이 익명의 시적 화자로 자신의 정체성을 감추지 않고 직접 시에 개입하고 있다. 이야기든 이미지든 집약되고 농축돼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터져 나온 시이다. 시인의 전 체험과 감각을 다한 정황과 대상과 만나는 순간의 구체화로 감동이 그대로 전해지는 시들이다.
아, 그러나 어쩌랴. 이런 시의 기본, 기율을 충실히 지켜가는 시들은 이젠 신춘문예 예심을 통과하기도 어렵게 되었으니. 하여 위 당선소감처럼 묵은 냄새나는 골동품이 되었으니. 그와는 정반대로 긴 시, 운율이 없는 시, 자아 과잉과 난해한 은유와 상징의 시, 시인이 드러나지 않거나 익명으로 숨은 시, 시인이 정체성을 잃거나 타자화된 시, 내밀한 서정적 경과를 이끌다 한 순간 시인과 대상과의 만남의 감동이 없는 시, 시인의 전 체험으로 시적 대상과 만나지 못하고 2차적 체험이나 지식으로 조작된 시들이 판치고 있으니.
이경철 / 1955년 출생. 동국대 국문과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문학박사.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와 문화부장, 문화전문기자,문예중앙, 랜댐하우스, 솔출판사 주간으로 일하며 다수의 현장비평적인 평론을 발표했다. 2010년 시와시학으로 시인으로 등단했으며 동국대 문창과 겸임교수, 만해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천상병, 박용래 시 연구와 공저 대중문학과 대중문화, 천상병을 말하다와 편저 한국 현대시 100년 기념 명시, 명화 100선 시화집 꽃필 차례가 그대 앞에 있다, 시가 있는 아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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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글 맞춤법이 정확한 시, 인문학적 소양이 배어나는 시, 미학과 철학이 겸비 된 시, 당대의 문제를 직시하는 시, 사회적 성찰이 깃든 시, 그래서 사유가 깊은 시. 누군가의 삶이 내재된 시, 타인을 배려한 시, 독자와 소통하는 시, 언어를 추구하지 않는 시, 화려함과 속됨에 기대지 않는 시, 무목적적인 시, 그래서 살아 있는 시.”
-2016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당선소감(양진영) 중에서...(당선시-폐가를 어루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