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성사[富城祠]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 산성리에 있는 최치원(崔致遠)을 기리는 사당.
개설
부성사(富城祠)는 고운(孤雲) 최치원[857~?]을 제향하는 사우이다. 최치원은 통일 신라 육두품 출신의 지식인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868년(경문왕 8)부터 당나라에서 유학하여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다. 특히 879년(헌강왕 5)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종사관이 되어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이라는 명문장을 지어 후세에 문명을 널리 알렸다. 서산 지역과 고운 최치원과의 인연은 최치원이 893년(진성여왕 7) 37세의 나이로 부성태수에 부임하면서부터이다. 최치원이 부성태수에 임명된 이유는, 서산 일대가 서해와 인접하여 당나라와 직접 교류하는 문물 교류의 중요한 거점으로서, 당시 국제적인 인재로 활동한 최치원의 역할을 필요로 하였기 때문이라 여겨지기도 한다. 한편 같은 해에 최치원은 당에 보내는 하정사(賀正使)에 임명되었으나 당시 사회 경제적 문제로 급격히 창궐한 도적들로 인해 길이 막혀 가지 못하였다.
위치
서산시 지곡면 소재지의 산성초등학교에서 북동쪽으로 난 도로를 따라 500m 정도 가면 서쪽으로 소로가 있고, 소로를 따라 다시 100m 정도 가면 부성산 아래에 부성사가 위치한다.
변천
조선 선조 재위 시[재위 1567~1608]에 최치원의 덕망을 추모하던 유림들이 사우를 건립하고 ‘도충사(道忠祠)’라 이름 지었다. 그 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07년(순조 1) 경주 최씨(慶州崔氏) 본손에 의하여 고려 후기 충신 최청(崔淸)[1344~1414]의 영정을 봉안하면서 재건되었다. 이후 1913년 인근 유림들이 뜻을 모아 서원을 향사우로 일신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이때 사우의 명칭도 바뀌었는데, 서산의 옛 이름이자 최치원이 서산에서 태수를 지낸 유서를 따라 ‘부성사’라 하였다. 원래 있었던 최청의 위패는 경주 최씨 후손들에 의하여 별도로 마련된 사당으로 옮겨 갔다. 부성사는 1974년과 1981년, 1984년 등 여러 차례의 보수를 실시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형태
사우와 내삼문(內三門), 외삼문(外三門), 동재(東齋), 서재(西齋)로 구성되어 있다. 사우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1칸은 전퇴(前退)를 두었고, 내부에는 우물마루를 깔았다. 주심포 양식의 팔작지붕 건물이며, 삼문은 솟을대문 형식이다.
현황
2011년 현재 부성사의 소유자 및 관리자는 경주 최씨 종중이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99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사우 내부에는 최치원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내부 측면에는 ‘과선각(過仙閣)’이라 쓰인 편액이 걸려 있다. 이 현판은 통일 신라 말 최치원이 부성태수로 있을 때의 친필로 전해지나, 정확한 사실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동재에는 6개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부성사 현판기(富城祠懸板記)」[1947년], 「부성사 중수기(富城祠重修記)」[1964년], 「동서 재실기(東西齋室記)」[1966년], 「이은택 찬양기(李殷澤讚揚記)」[1977년], 「이래학 공적기(李來鶴功績記)」[1978년], 「이흥의 공적기(李興儀功績記)」[1991년] 등이 그것이다. 사우의 외곽 우측에는 사우의 중건과 발전에 공적이 있는 전(前) 군수 이승규의 기념비[1972년]와 화은 권병철 기념비[1972년], 전 군수 이관현의 기념비[1980년], 운포 유병춘 송덕기념비[1987년]가 건립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도충사로 시작된 부성사의 최초 건립 시기는 우리나라 서원 역사의 초창기이다. 따라서 부성사는 당시 서산 일대 사족들이 비교적 이른 시기에 지역과 유서가 있는 선현을 제향하고 교육 기관으로서 사우를 건립한 사례로 주목할 만하다.
참고문헌
『문화유적분포지도』-서산시(충청남도·충남발전연구원, 1998)
『서산시지』(서산시지편찬위원회, 1998)
『충남의 서원·사우』(충청남도, 1999)
『서산의 문화유적』(서산문화원, 2010)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고파도리당제[古波島里堂祭]
충청남도 서산시 팔봉면 고파도리에서 풍어와 무사고를 기원하며 지내던 마을 제사.
개설
고파도리 당제는 음력 정월 초사흗날 밤 12시에 마을의 당산에서 해상에서의 무사고, 질병 예방 등 마을의 안녕을 위하여 마을 공동으로 지내는 제사이다. 고파도리에서는 마을 회의를 통해 2명의 제관을 뽑는다. 제관은 당제를 지내기 사흘 전에 당집에 가서 깨끗하게 청소를 하고 제물도 만든다. 제가 끝날 때까지 절대 마을로 내려올 수 없다. 마을 사람도 이 기간에 당집에 올라가지 않는다. 제비(祭費)는 집집마다 추렴하는데, 배가 있는 집은 조금 더 낸다. 제물(祭物)은 각시 서낭에 걸맞게 분, 비누, 가위, 비단 조각 등의 여자 소지품을 구입한다. 이밖에도 백설기, 소고기를 넣고 끓인 육탕(肉湯) 한 그릇, 산적, 과일, 조라술 등을 준비한다.
연원 및 변천
고파도리에서 언제부터 당제를 지냈는지 알 수 없지만, 1970년대까지 매년 음력 정월 초사흗날 밤 12시에 지냈었다. 2011년 현재 당제는 거행되지 않는다. 당제가 중단된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주민의 기억조차 희미한 실정이다. 당제는 1970년대 이전에 중단되었다가 마을 주민의 노력으로 다시 부활되었다. 그리고 1970년대에 최종적으로 단절되었다.
신당/신체의 형태
당제를 모시는 당집이 마을 중앙에 있는 당산에 위치한다. 당집은 한 칸 규모이며, 지붕은 기와를 얹었고, 천장은 반자를 설치하였다. 신격(神格)은 각시 서낭이며. 화상은 없고 신위(神位)를 모셔 놓았다.
절차
제관들은 찬물로 목욕을 하고 밤 12시쯤에 당제를 지낸다. 제의 순서는 제물을 진설하고 재배를 한다. 다음에 소지를 올린다. 소지는 당서낭 소지, 대동 소지, 기타 동네 이장, 반장 등의 순서로 각각 한 장씩 올린다. 이때 소지가 잘 오르면 그해 신수가 좋고, 그렇지 않으면 신수가 좋지 않다고 여긴다. 제사를 마친 후 제관들은 마을로 내려와 마을 회관에서 제사 비용을 결산한다.
참고문헌
『서산민속지』(서산문화원, 1991)
『문화유적분포지도』-서산시(충청남도·충남발전연구원, 1998)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6-26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