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의 선견지명]
중국인이 컴퓨터 자판을 치는 모습을 본다. 3만개가 넘는다는 한자를 어떻게 좁은 자판에서 칠까?
한자를 자판에 나열하는게 불가능해, 중국어 발음을 먼저 영어로 묘사 (한어병음)해서 알파벳으로 입력한 다음에 단어마다 입력 키를 눌러야 화면에서 한자로 바뀐다. 불편한 건 더 있다. 같은 병음을 가진 글자가 20개 정도는 보통이다. 그 중에서 맞는 한자를 선택해야 한다.
한국의 인터넷 문화가 중국을 앞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타이핑을 많이 하는 전문직 중국인들은 한자의 획과 부수를 나열한 또 다른 자판을 이용한다. 자판을 최대 다섯번 눌러 글자 하나가 구성되므로 오필자형(五筆字型)이라고 한다. 속도를 빠르게 개선했지만 익히기 어려워 일반인은 사용하지 못한다.
일본인은 어떨까?
컴퓨터 자판을 보니 역시 알파벳이다.
일본인들은 '世'를 영어식 발음인 'se'로 컴퓨터에 입력하는 방법을 쓴다. 각 단어가 영어 발음 표기에 맞게 입력되어야 화면에서 가나로 바뀐다. 게다가 문장마다 한자가 있어 쉼없이 한자 변환을 해주어야 하므로, 속도가 더디다. 나아가 '추'로 발음되는 한자만 해도 '中'을 비롯해 20개 이상이니 골라줘야 한다.
일본어는 102개의 가나를 자판에 올려 가나로 입력하는 방법도 있지만, 익숙해지기 어려워 이용도가 낮다.
이러니 인터넷 친화도가 한국보다 낮을 수 밖에 없다.
말레이시아처럼 언어가 여러 가지인 국가들은 컴퓨터 입력방식 개발 단계에서 부터 보통 골칫덩어리가 아니다.
24개의 자음, 모음만으로 자판 내에서 모든 문자 입력을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한글은 하늘의 축복이자 과학이다. 세종대왕의 선견지명이다...
휴대전화로 문자를 보낼 때, 한글로 5초면 되는 문장을 중국, 일본 문자는 35초가 걸리는 경우도 있다. 한글의 입력 속도가 일곱배 정도 빠르다는 얘기다. 정보통신(IT)시대에 큰 경쟁력이다. 한국인의 부지런하고 급한 성격과 승부 근성에, 한글이 '디지털문자'로서 세계 정상의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 덕에, 우리가 인터넷 강국이 됐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한글로 된 인터넷 문자 정보의 양은 이미 세계 그룹에 속한다.
10월 9일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반포한 한글날이다. 세종이 수백년 뒤를 내다 본 정보통신 대왕이 아니었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26개인 알파벳은 한글과 같은 소리 문자이고 조합도 쉽지만, 'a'라도 위치에 따라 발음이 다르고 나라별로 독음이 다른 단점이 있다. 그러나 한글은 하나의 글자가 하나의 소리만 갖는다. 어휘 조합능력도 가장 다양하다.
소리 표현만도 8800여개 여서, 중국어의 400여개, 일본어의 300여개와 비교가 안 된다. 세계적 언어학자들은 한글이 가장 배우기 쉽고 과학적이어서 세계 문자 중 으뜸이라고 말한다. '알파벳의 꿈'이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거의 0%인 세계 최저의 문맹률이 가능했고, 이것이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한글은 발음기관의 모양까지 반영한 음성공학적 문자여서 세계의 언어를 다 표현해낸다. "맥도널드"를 중국은 '마이딩로우', 일본은 '마쿠도나르도'라고 밖에 표현하지 못한다. 이것이 네팔 등 문자가 없는 민족에게 한글로 문자를 만들어주는 운동이 적극 추진되는 이유다.
외국인에게 5분만 설명하면 자신의 이름을 한글로 쓰게 할 수 있다.
한글은 기계적 친화력도 가장 뛰어나서 정보통신 시대를 위해 준비된 문자이다.
향후 세계의 표준으로 선정될 잠재력이 충분하다. 역시 세종대왕의 선견지명이 돋보이는 대목이다...(p)
ㅡㅡㅡㅡㅡㅡㅡㅡㅡ
[ 식민지의 국어 시간 ]
문 병 란
내가 아홉 살이었을 때
20리를 걸어서 다니던 소학교
나는 국어 시간에
우리말 아닌 일본말,
우리 조상이 아닌 천황을 배웠다.
신사참배를 가던 날
신작로 위엔 무슨 바람이 불었던가,
일본말을 배워야 출세한다고
일본놈에게 붙어야 잘 산다고
누가 내 귀에 속삭였던가.
ㅡ
조상도 조국도 몰랐던 우리,
말도 글도 성까지도 죄다 빼앗겼던 우리,
히노마루 앞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말 앞에서
조센징의 새끼는 항상 기타나이가 되었다.
어쩌다 조선말을 쓴 날
호되게 뺨을 맞은
나는 더러운 조센징,
뺨을 때린 하야시 센세이는
왜 나더러 일본놈이 되라고 했을까.
다시 찾은 국어 시간,
그날의 억울한 눈물은 마르지 않았는데
다시 나는 영어를 배웠다
혀가 꼬부라지고 헛김이 새는 나의 발음
영어를 배워야 출세한다고
누가 내 귀에 속삭였던가.
스물다섯 살이었을 때
나는 국어 선생이 되었다.
세계에서 제일 간다는 한글,
배우기 쉽고 쓰기 쉽다는 좋은 글,
나는 배고픈 언문 선생이 되었다.
지금은 하야시 센세이도 없고
뺨 맞은 조센징 새끼의 눈물도 없는데
윤동주를 외우며 이육사를 외우며
나는 또 무엇을 슬퍼해야 하는가.
어릴적 알아들을 수 없었던 일본말,
그날의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았는데
다시 내 곁에 앉아 있는 일본어선생,
내 곁에 뽐내고 앉아 있는 영어선생,
어찌하여 나는 좀 부끄러워야 하는가.
누군가 영어를 배워야 출세한다고
내 귀에 가만히 속삭이는데
까아만 칠판에 써놓은 윤동주의 서시,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는
글자마다 눈물을 흘리고 있다,
오 슬픈 국어시간이여.
* 히노마루 ; 일본의 國旗, 일장기.
* 기타나이 ; 더럽다. 불결하다.
* 센세이 ; 선생.
'주: 문병란/ 1935-2025, 전 조선대교수, 광주일고교사
------------------
[ 한글날 떠올리는 헐버트 선생과 주시경 선생 ]
올해는
한글(훈민정음) 반포 578돌이 되는 해다.
전 세계에서 문자를 기념하는 날은
‘한글날’밖에 없다.
몇 년 전부터는
한글날 전후 일주일간 한글 주간 행사를 열고
전국에서 한글과 한국어 관련 문화행사를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한글이 이렇게 존중받는 것을 보니
어문학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감사하고 감개무량할 뿐이다.
올해 한글날 행사 주제는
‘괜찮아 한글’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글 600년의 역사를 돌아보면
“괜찮아”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미안해”라고 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했지만
이 글자는 조선조 500년 동안
한자와 한문에 눌려 비주류 문자로서 소수에 의해 명맥이 유지됐다.
한글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본 사람 중 한 명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에
1886년 영어 교사로 온
호머 헐버트(1863~1949) 선생이다.
헐버트 선생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한국어를 적는 글자가 있음을 알게 됐고
그 언문을 나흘 만에 깨쳤다고 한다.
그로부터 사흘 뒤
한국 사람들이 어려운 한문만 숭상하고
자신들의 효율적인 글자인 언문을 무시한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놀랐다.
3년 뒤인 1889년 그는
‘뉴욕트리뷴’(지금의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한글은 완벽한 문자가 갖춰야 할 모든 조건을 충분히 지니고 있다”며
세계에 한글의 우수성을 널리 알렸다.
1891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 지리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출판해
한글로만 쓸 수 있음을 직접 보였다.
책의 제목을
내용과는 관계없이 ‘사민필지’로 한 것도
한글로 쓰면 누구나 읽고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의도였다.
헐버트 선생은
한글의 가치를 거의 잊혀 가던 시기에 일깨워준 큰 공적이 있다.
국가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한글과 한국어가
우리 민족의 얼과 같은 존재로 인식하게 하고
일상에서 쓰일 수 있게 방향을 제시해 준 사람은 주시경(1876~1914) 선생이었다.
주 선생은
16세 때 한문을 배우면서
한자만 읽어서는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한국어로 풀이하자 비로소 내용을 이해하게 됐다.
이 경험을 통해
문자는 말을 적으면 되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고
그때부터 한글 연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주 선생은
1894년에 잠깐,
그리고 1896년 3월부터
배재학당에 다니기 시작해
그해 4월 독립신문사의 회계 겸 교보원(교정원) 일을 맡았다.
이 시기를 전후해
헐버트 선생과의 만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두 사람의 구체적인 만남에 대한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주 선생이 편집해 세상에 나온
‘독립신문’(1896년)은
한글만으로 쓰이고 띄어쓰기까지 갖춰
100년 뒤 한국의 신문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후
애국계몽운동, 국어국문 연구, 국어국문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으며
이러한 활동은
‘어문 민족주의’라고 부르는 이념으로 발전했다. 특히 교육을 통해
같은 이념을 지닌 제자들을 대거 양성했는데
이 제자들은
선생의 가르침대로
“비록 나라를 잃었지만
말과 글이 살아 있으면
나라를 다시 세울 수 있다”라는 신념으로
일제강점기에도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면서
자주독립을 준비했다.
대한민국이 오늘날
문화 강국이 되고
경제 발전 및 정치가 민주화된 데에는
한글의 역할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우리가 한때 천대하던
한글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되살려낸 선구자들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헐버트 선생은
‘한글 선각자’라고 부를 수 있으며
주시경 선생은
최현배 선생의 표현대로
‘한글 중흥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김 주 원 / 한글학회 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