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붓다>는 이번 주부터 고따마 붓다의 80년 일대기를, 불교 언론인이자 시인인 이학종 작가의 집필로 1년에 걸쳐 연재합니다. <미디어붓다>가 마련한 <이학종의 붓다 일대기- 인간붓다>는 붓다의 일생을 탄생에서 열반에 이르기까지 편년체로 기록하는 대장정입니다. 신보다 더 완전하고 위대한 인간붓다의 일대기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 곁에서 펄펄 살아 숨 쉬는 붓다의 참모습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분, 고마운 분, 더 없이 완전하고 거룩한 분, 붓다!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을 만나는 생생한 감동! 붓다를 지척에서 만나는 드문 여정에 함께해주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잠부디빠, 변혁기에 접어들다
수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웅장한 산과 계곡이 겹쳐 이루어진 히말라야(Himalaya)! 그 남쪽으로 가로놓인 유라시아 대륙의 거대한 반도, 잠부디빠(jambudipa, 인도의 옛 이름)가 있었다. 잠부디빠는 그 면적이 450만㎡에 이르는 방대한 나라였다. 광활한 국토이기에 기후도 다양했다. 아열대부터 몬순기후, 사막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기후가 이 대륙에는 혼재하고 있었다.
마침 잠부디빠는 사회적으로 큰 변혁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인더스 문명의 주도자였던 드라비다인과 호주-아시아계 이후, 잠부디빠의 새로운 주인공은 인도-아리아인이었다. 이들은 원래 잠부디빠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유럽과 잠부디빠의 어느 중간지점에서 더 좋은 삶터를 찾아 각기 다른 방향으로 분산, 이동했다. 이들 중 일부가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인도의 서북부를 통해 인더스 강과 야무나 강 사이의 빤잡 지방에 진입했다. 그들은 원주민들을 제압하고 잠부디빠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 기원전 1600년~1300년 경이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아리야(Ariya), 즉 고상하고 품위 있는 혈통의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원주민들과는 엄격하게 구별했다. 인더스 강 유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수백 년 동안 조금씩 동쪽으로 나아가면서 강가(갠지스) 강 유역에 이른 이들은 다시 남인도까지 거침없이 영역을 넓혔다.
잠부디빠의 새 지배자, 아리야인들은 <베다>라는 오래된 성전을 가지고 있었다. 이 <베다>에 의지해 세습적인 바라문은 야나(공양)와 같은 종교의식을 집행하며 사람들의 안전과 행복을 기원했다. <베다>는 절대적으로 신성시되었다. 이런 까닭에 바라문은 태어나면서부터 최고로 여겨졌다.
아리야인은 본래 목축에 종사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농경 기술은 그리 발전하지 못했다. 그러나 빤잡 평원에서 점차 동진하면서 그들은 조금씩 농경생활에 익숙해졌고, 그들의 종교도 농경사회에 적합한 형식과 문화로 조금씩 적응해 갔다. 이들의 종교는 차츰 농경과 관계 깊은 신들을 모시는 제의종교(祭儀宗敎) 성격을 띠게 되었다. 잠부디빠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종교를 <베다>, 또는 ‘브라흐마니즘’으로 불렀다.
사제(司祭) 계급이었던 바라문들은 점차 하나의 사회계급으로 형성되어 갔다. 바라문들은 마침내 종교권력을 확고하게 장악했다. 바라문 지상주의, 제식 만능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바라문 문화는 잠부디빠 대륙에서 만개했다.
아리야인들은 점점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부족 간의 대립이나 통합이 어지럽게 이루어졌다. 군소 부족이 통합하여 독재권을 가진 라잔(왕)을 지도자로 받드는 왕국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이때 생겨난 대표적인 16개 국가는 앙가, 마가다, 까시, 코살라, 왓지, 말라, 쩨띠, 방사, 꾸루, 빤짤라, 맛차, 수라세나, 앗사까, 아완띠, 간다라, 깜보자 등이었다.
나라들은 공화정과 군주정 등 두 가지 형태의 통치체계를 채택했다. 군주가 지배하는 전제국가들은 주로 야무나 강과 강가 강 유역에 인접해 자리를 잡았다. 군주국가의 팽창에 맞서 상대적으로 약세였던 공화국들은 존립을 위한 지난한 전쟁을 치러야 했다. 이따금씩 군주국들끼리도 큰 전쟁을 벌였다. 이런 가운데 공화국들의 세력은 점차 쇠퇴해갔다.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가진 군주국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군주국들은 무섭게 영토와 국력을 불려나갔다.
잠부디빠의 공화제는 종족사회를 기초로 했다. 전제군주제는 공화제 국가 및 그 주변에 잔존하고 있던 종족들을 정복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종족으로는 붓다의 종족인 사끼야(석가)를 비롯하여 말라, 릿차위, 위데하, 박가, 불리, 꼴리야, 모리야, 브라흐마나, 깔라마, 띠와라, 빤다라, 까깐다 등이 있었다. 종족국가는 경제적으로 자립을 추구했다. 정치적으로도 부족국가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잠부디빠에서 종족사회들은 원시공동체를 닮은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화제 국가의 기초를 이루는 과정에서 원시공동체적 종족의 형태는 해체의 길로 빠르게 빨려 들어갔다. 전제군주제 국가든 공화제 국가든 모든 국가는 종족 사회가 붕괴한 폐허 위에서 건설되었다. 강력한 힘을 가진 전제군주제 국가는 약소국가를 정치적, 경제적으로 하나, 둘씩 종속시켜 나갔다. 전제군주제 국가에 의한 공화제 국가의 멸망, 전제군주제 국가끼리의 패권 전쟁 등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아울러 상업발달과 도시화라는 흐름 가운데 경제적 사회가 확립되는 특기할만한 변화가 잠부디빠 전역에서 진행됐다. 촌락사회가 도시국가로 변동했고, 직업은 분화되었으며, 생산기술은 향상되고, 대상인이 출현했다. 동서교통로가 개통되면서 종래 바라문들에 지배되던 농촌사회에도 전에 없던 변화가 밀려왔다.
부유한 농민이 생겨났다. 수공업이 발전하면서 상인계층이 출현했다. 이들은 교역로의 안전 확보 등을 위해 무력을 지닌 왕족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이들의 비중과 역할이 커질수록 왕권도 비대해졌다. 새로이 구성된 상류계급들은 바라문들이 주장해온 계급의 굴레에 사실상 구속되지 않았다. 이전의 농촌과는 다른 새로운 기운과 새로운 가치관이 나타났다. 새 가치체계에 기반을 둔 새로운 문화가 발생했다. 자연스럽게 바라문의 종교적 권위는 눈에 띠게 그 빛을 잃어갔다. 잠부디빠에서 반(反)바라문, 비(非)바라문적 분위기가 확산됐다. 이런 변화와 변혁은 사마나(사문)라는 출가 유행자 그룹이 주도했다.
그곳에 사끼야 왕국이 있었다
만년설이 아스라이 펼쳐진 히말라야 남쪽 기슭, 온화하고 평화로운 대지에 한 작은 왕국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끼야 족이 세운 사끼야 왕국이었다. 이곳에도 만물이 소생하고, 사람들이 논밭에 씨를 뿌리는 봄이 왔다. 사끼야 왕국의 수도 까삘라왓투는 왕과 백성들 모두 파종기(播種期)를 맞아 여는 농경제(農耕祭) 준비로 분주했다. 농경제는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자연의 도움을 비는 의식이었다. 이날은 통치자와 백성들이 함께 참여해 어우러지는 드문 기회이기도 했다.
사끼야 왕국은 약소국이었다. 인접한 강대국들의 틈새에 끼여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처지였다. 영토의 크기나 군사력 등 모든 분야에서 사끼야 왕국은 열악한 수준을 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평화를 사랑했다. 경건한 성품을 가졌으며, 특히 한 혈통으로 이루어진 부족국가라는 자부심과 자주의식도 대단했다. 사끼야 왕국의 통치자 숫도다나 왕은 정직하고 공정한 지도자였다. 그는 백성들로부터 폭넓은 존경과 지지를 받았다.
숫도다나 왕은 사끼야 왕국의 직접적인 지배 국가인 코살라 국이나 신흥강대국인 마가다 국과 같은 강력한 제국의 영토 확장 의욕에 맞서기 위한 나름의 준비를 갖추어 나갔다. 백성들을 결집시키고 군사력을 늘리기 위한 정책을 착착 진행했다. 이런 응집력은 숫도다나 왕을 향한 사끼야 왕국 백성들의 높은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사끼야 왕국은 농업 중심국가로 주식인 쌀과 밀을 자급자족했다. 농민계급에 속한 대부분의 가정들은 먹고 살만한 토지를 관리하고 있었다. 이들은 품앗이를 하면서 각자의 논밭을 경작했다. 사유재산이 인정되지 않았지만 공공사회의 원칙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자율적인 경작이 허용됐다.
유구한 세월 동안 내려온 전통과 권위는 존중됐다. 관습이나 공공의 가치도 엄중하게 지켜졌다. 이따금씩 종족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도 왕의 절대적 신임을 받는 촌장들에 의해 대부분 원만하게 해결됐다. 주산업은 농업이었으나 목축, 목수, 양돈, 석조술, 직조업 등 다양한 직종들이 전문성을 가진 주민들에 의해 잘 계승‧발전되어 제법 풍족한 국가경제를 구가했다.
농촌에 사는 주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유한 상인들은 주로 시가지에 거주하면서 여유 있는 생활을 누렸다. 예능에 종사하는 악사나 가수, 무희들의 공연을 즐기는 여가를 갖기도 했다. 예능인들은 정기적으로 열리는 종교축제나 전통적인 의식에 동원됐다.
통치계급인 크샤트리야는 사회적으로 좀 더 우월한 지위를 차지했다. 이들의 혈통에 대한 자부심과 자긍심은 대단했다. 그러나 주민들의 종교생활을 지배하는 것은 여전히 의식을 집전하는 바라문들이었다. 시가지 주변의 숲속에 거주하는 바라문들은 숲에서 구할 수 없는 생필품을 마련하기 위해 가끔씩 마을로 내려왔다. 그러나 숫자가 많지는 않았다. 바라문들의 이 같은 생활양식을 자존심 강한 사끼야 족들은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크샤트리야 계급은 부상했지만 바라문들의 영향력은 점점 줄어들었다.
싯다르타 탄생하다
룸비니 동산(사진 = 법보신문)
독립된 자치공동체였지만 사끼야 왕국은 정치적으로 코살라 국에 예속되어 있었다. 사끼야 왕국의 왕은 숫도다나, 왕비는 마야데비였다. 마야 왕비는 사끼야 족의 한 별계(別系)인 꼴리야 족의 공주 출신이었다.
마흔이 넘도록 숫도다나 왕과 마야 왕비 슬하엔 자식이 없었다. 왕비의 뒤늦은 임신은 숫도다나 가문에 큰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왕비의 임신 소식을 들은 숫도다나 왕은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는 동서남북의 성문을 활짝 열어 백성들에게 음식과 의복을 베풀며 아기 잉태의 기쁨을 나눴다. 그 덕에 굶주림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배불리 먹을 수 있었고, 스산한 날씨에 움츠렸던 이들은 따뜻한 옷을 입을 수 있었다. 백성들은 후덕한 국왕 내외를 칭송하며 한 마음으로 장차 태어날 아기의 건강과 안전을 기원했다.
마야 왕비는 아기를 잉태하기 전에 상서로운 꿈을 꾸었다. 보름날, 여름축제가 열릴 때였다. 마야 왕비도 축제 7일 전부터 화환과 향과 장식을 갖추어 놓고 축제를 즐겼다. 보름날이 되었을 때 왕비는 아침 일찍 향을 뿌려놓은 물로 목욕한 후, 엄청난 양의 금을 베푸는 보시행을 실천했다. 부왕의 나이 마흔이 넘도록 아기가 없었기 때문에 그동안 그녀는 하늘과 땅의 모든 신들에게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기도의 공덕이 백성들에게 고루 돌아가기를 발원했다. 그날도 왕비는 모든 장신구로 몸을 치장한 채 진귀한 음식을 먹고, 그동안 알게 모르게 지은 죄에 대한 참회의식을 행했다. 또한 앞으로도 선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덕목들을 지키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기도를 마친 왕비는 온갖 장식으로 장엄된 왕의 침실로 들어가 침상에 누웠다. 이내 잠든 왕비는 신이(神異)한 꿈을 꾸었다.
‘하늘의 사대왕(四大王)이 왕비를 침상과 함께 들고 히말라야 산으로 데려가, 60요자나(1요자나=황소가 멍에를 메고 하룻길을 가는 거리) 넓이의 마노실라 평원에 있는 7요자나 높이의 큰 살라나무 아래에 내려놓은 후 한쪽에 섰다. 그때 사대왕의 아내들이 다가와 왕비를 아노닷타 연못으로 인도한 후 목욕을 시켜 인간의 때를 제거했다. 목욕을 마친 후 하늘 옷을 입히고 향을 발라주고 하늘 꽃을 뿌려주었다. 그 근처에 은산이 있었고 그 속에는 금으로 된 궁전이 있었다. 그 궁전에 머리가 동쪽으로 향하도록 하늘의 침상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왕비를 그곳에 눕게 했다. 그 때 여섯 개의 이빨을 황금으로 치장하고 일곱 부위가 땅에 닿는 거대한 흰코끼리가 근처의 금산에서 내려와 은산으로 올라간 뒤 북쪽으로부터 왕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은색 줄무늬가 있는 코로 하얀 연꽃을 집어 들고서는 힘찬 울음을 울었다. 그런 뒤 금의 궁전으로 들어가 마야 왕비의 침상을 세 차례 오른쪽으로 도는 예를 올리고는 오른쪽 옆구리를 두드리고 뱃속으로 들어갔다.’
이른 아침, 잠에서 깨어난 마야 왕비는 간밤에 꾼 꿈을 숫도다나 왕에게 이야기했다. 길몽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숫도다나 왕은 곧바로 정확한 예언으로 이름난 여덟 명의 바라문들을 궁으로 초대했다. 융숭한 대접이 끝난 후 숫도다나 왕은 바라문들에게 왕비가 꾼 꿈 이야기를 긴장된 목소리로 전했다.
“이 꿈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숫도다나 왕이 궁금하면서도 조금은 불안한 표정을 지은 채 물었다. 그들 가운데 국사 역할을 맡고 있었던 바라문 마하나마가 앞으로 나와 설명했다.
“대왕이시여, 달리 생각하지 마십시오. 왕비의 자궁에 태아가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그 태아는 남성이지 여성이 아닙니다. 아들이 태어날 것입니다. 만일 그 아들이 집에 머문다면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될 것이며, 집을 떠난다면 세상의 괴로움과 더러움을 벗겨내 주는 성자가 될 것입니다. 여섯 개의 이빨을 가지고, 일곱 부위가 땅에 닿는 흰 코끼리는 잠부디빠를 통일할 전륜성왕만이 가질 수 있는 보배이기 때문입니다. 왕비께서는 전륜성왕이 되실 왕자를 잉태한 것이 분명합니다.”
룸비니 동산. 무우수 나무 아래 연못이 있다. 마야부인은 무우수 나뭇가지를 잡고 싯다르타를 낳았고, 이 못의 물로 목욕을 했다.
마하나마의 해몽을 들은 숫도다나 왕의 표정이 환하게 피어났다. 도저히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마야 왕비는 뱃속에서 아기가 자라는 동안 태교에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선행을 다했다. 살생과 도둑질, 애욕에서 빚어지는 잘못된 행위, 거짓말을 철저하게 멀리했다. 곡주, 과일주, 꿀 등에 취해 게을러지거나 흐트러지는 일에서 아예 벗어나 건전하고 조신한 일상을 유지했다.
점점 몸이 무거워지는데도 왕비는 걷고, 서고, 앉고, 눕는 데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도리어 나날이 밝아지고 온화해지는 빛나는 얼굴은 오래 앓던 사람도 보기만 하면 병이 나을 정도로 신비한 힘을 뿜어냈다. 나라 안팎으로는 평화의 기운이 맴돌았고 비바람마저 순조로웠다. 백성들 사이에서 더 없이 큰 경사가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가 넘쳐흘렀다. 왕비는 마치 그릇에 담긴 기름에 주의를 기울이듯 열 달 동안을 한결같이 조심스럽게 보냈다.
출산일이 가까워지면서 숫도다나 왕은 왕비의 친정 꼴리야 국으로 가는 도로 정비에 나섰다. 온갖 향기로운 꽃으로 길가를 아름답게 단장했다. 장차 전륜성왕이 될 왕자를 위해 그가 못할 일은 없었다.
해산이 임박하자 마야 왕비는 친정에서 출산하는 당시의 풍습에 따라 꼴리아 국의 수도 데와다하(천비성)로 향했다. 행렬을 이끄는 대신들의 걸음은 더뎠다. 시중드는 시종들은 작은 기침소리에도 고삐를 늦췄다. 길에 콩알만한 돌멩이만 보여도 마차를 세웠다. 일행 모두가 극도로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마흔이 다 되어서야 출산을 하는 왕비와 태어날 자식의 안전에 만전을 기하라는 숫도다나 왕의 엄중한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행렬은 나지막한 언덕에 펼쳐진 사끼야 족 마을을 벗어났다. 이윽고 히말라야의 눈 덮인 다울라기리 산(네팔 중북부의 히말라야산맥 칼리간다크 계곡 서쪽에 있는 산, 흰산)이 멀리 바라다 보이는 룸비니 동산에 다다랐다. 룸비니 동산은 까삘라왓투와 데와다하 두 도시 사이에 위치한 아름답고 평화로운 동산이었다.
룸비니에는 살라나무(무우수)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빼곡한 살라나무들은 뿌리에서 꼭대기 가지에 이르기까지 나무 전체가 한 송이 꽃처럼 아름다웠다. 가지 사이와 꽃송이들 사이로 꿀벌과 새들이 꽃과 꿀을 찾아 자유롭게 날아다녔다. 하늘나라의 정원이 이렇게 아름다울까! 평온하고 아름다운 나무숲을 바라보는 왕비에게 잠시 휴식을 취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다.
살라나무 이파리를 스치며 날아온 상큼한 봄바람 속에서 하룻밤을 보낸 마야 왕비는 다음 날 아침 산책을 위해 막사를 나섰다. 만삭의 왕비는 시종들의 부축을 받으며 살라나무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유달리 아름다운 살라나무를 발견한 왕비는 그곳으로 다가갔다. 때마침 불어온 실바람을 타고 일렁이던 나뭇가지 하나가 아래로 낮게 가지를 드리우자, 왕비는 손을 뻗어 그 나뭇가지를 잡았다. 그 순간 나뭇가지가 다시 위로 솟구치면서 왕비의 몸이 살짝 들렸다. 눈 깜박할 사이에 벌어진 약간의 충격에 왕비는 산기(産氣)를 느꼈다. 왕비는 꽃이 만발한 살라나무 가지를 잡고 선 자세로, 고통을 느낄 틈도 없이 아기를 낳았다. 화려한 왕궁이 아닌 길 위에서의 갑작스러운 출산이었다. 온갖 꽃들은 향기로, 새들은 노래로, 맹수와 연약한 동물들은 함께 춤을 추는 것으로 아기의 탄생을 축복했다.
마야 왕비가 왕자를 낳았다는 소식은 곧 까삘라왓투로 전해졌다. 숫도다나 왕은 서둘러 위엄을 갖추고 한 걸음에 룸비니 동산으로 달려갔다. 왕자의 탄생은 사끼야 왕국과 꼴리야 국 모두의 경사였다. 많은 왕족들과 대신들의 축복이 이어졌다. 수많은 축하 인파 속에서 숫도다나 왕은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채 아기를 안아 들었다. 아기의 피부는 솟아오른 태양처럼 황금빛으로 빛났다. 아기의 두 다리에서는 금방이라도 일어설 듯 힘이 느껴졌다.
숫도다나 왕의 얼굴에는 시종 웃음기가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해산으로 충격을 느낀 마야 왕비의 표정은 파리했다. 왕자를 출산한 기쁨과 출산으로 인한 고통이 기묘하게 교차했다. 가까스로 몸을 추스른 왕비는 숫도다나의 각별한 보살핌 속에서 서둘러 까삘라왓투 성으로 되돌아 왔다.
늦둥이 왕자가 태어났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까삘라왓투의 왕궁에는 이웃나라 축하사절들의 방문이 줄을 이었다. 이웃나라의 왕들도, 저명한 바라문들도 다투어 축하의 인사를 전해왔다.
왕자가 태어난 지 닷새째 되던 날, 숫도다나 왕은 마야 왕비의 태몽을 풀이했던 여덟 명의 바라문 성자들을 다시 궁으로 초청했다. 아기의 이름을 짓는 명명식을 열기 위해서였다. 바라문들은 숙의를 거듭한 끝에 아기에게 싯다르타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목적을 달성한 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었다. 숫도다나 왕은 바라문들에게 ‘왕자의 앞날을 점쳐 달라’고 부탁했다. 여덟 명의 바라문들은 왕자의 몸을 샅샅이 살폈다. 그리고는 ‘서른두 가지 대장부의 상호가 빠짐없이 갖춰져 있어 전륜성왕 또는 모든 중생의 스승인 붓다(깨달은 이)가 될 것’이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한편 숫도다나 왕의 종교분야 고문이자 오랜 친구인 아시따 칼라데왈라도 왕자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어린 조카 날라까를 데리고 까삘라왓투의 왕궁을 방문했다. 그는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에게 정중히 당부했다.
“이보시게, 국왕께 한 늙은 선인이 알현하고자 성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전해주시겠나?”
문지기의 보고를 전해들은 숫도다나 왕은 아시따 깔라데왈라가 찾아왔음을 알고, 서둘러 아시따 칼라데왈라를 위한 자리를 준비시키고, 정중하게 모셔올 것을 지시했다. 왕의 따뜻한 영접을 받은 아시따 칼라데왈라가 인사하며 물었다.
“왕이시여, 당신과 마야 왕비에게서 왕자가 태어났다고 들었습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예, 그렇습니다.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그것도 아주 보기 드문 미남입니다.”
숫도다나 왕이 기쁨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아시따 칼라데왈라 성자가 물었다.
“위대한 크샤트리야의 정신적 보호자인 바라문의 관례에 따라 왕자님을 입문시키는 것이 옳습니다. 제게 아기를 보여주시겠습니까?”
“예, 물론이지요. 고명하신 선인께서 그리 말씀해주시니 큰 영광입니다.”
숫도다나 왕은 왕비 마야의 방으로 들어가 비단으로 감싼 아기를 안고 나와 자신의 정신적 스승이자 친구인 아시따 칼라데왈라에게 보여주었다.
한동안 아기의 신체적 특징을 세밀히 관찰하던 아시따 칼라데왈라는 이 아기가 위대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가 말했다.
“대왕이시여, 이런 인물이 지상에 태어나다니 정말로 경이로운 일입니다. 이 아기는 장차 비범한 지적 능력을 계발하게 될 것입니다. 그는 관행이나 권위주의를 존중하지 않고 매우 혁신적인 자세를 취하게 될 것입니다.”
아시따 칼라데왈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모아 합장한 다음 아기의 발 아래로 자신의 몸을 던져 절했다. 그리고는 예배 의식에 따라서 오른쪽으로 한 바퀴를 돈 후에 두 손으로 아기를 받아들고 명상에 잠겼다.
아시따 칼라데왈라의 예언을 들은 숫도다나 왕은 불안과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성자여, 매우 혁신적인 자세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과격한 성정의 소유자가 된다는 뜻입니까? 그렇다면 걱정입니다. 성자여, 내가 어떻게 하면 이 아기가 과격한 혁명가가 되지 않게 할 수 있겠습니까?”
“대왕이시여, 저로서는 그것을 막을 방법을 알 수 없습니다.”
아시따 칼라데왈라가 대답했다. 그런데 그의 표정은 어두웠다. 장래 사끼야 왕국의 왕이 될 이 아기가 바라문교에 관대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그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만일 싯다르타가 전통과 권위주의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지금의 숫도다나 왕 치하에서 누리는 바라문 사제로서의 특권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바라문교의 권위를 지킬 수 없다는 한계와 친구이기도 한 숫도다나 왕에게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며 아시따 칼라데왈라 성자는 바라문의 관례대로 아기를 입문시키려던 계획을 거둬들였다. 그러나 아시따 칼라데왈라의 마음을 무겁게 한 것은 정작 바라문에 대한 대우가 달라질 수 있다는 우려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장차 위대한 스승이 될 이 아기의 가르침을, 나이가 많은 자신은 받을 수 없다는 것이 그를 절망하게 했던 것이다.
숫도다나 왕은 아시따 칼라데왈라가 눈물을 흘리며 한숨을 쉬는 것을 발견했다. 이런 행동을 지켜보던 숫도다나 왕이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물었다.
“성자여, 무슨 이유로 눈물을 흘리고 한숨까지 지으십니까? 아기의 장래에 불안한 일이라도 예정돼 있는 것입니까? 나는 이 아기에게 불행이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만….”
“왕이시여, 저는 아기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닙니다. 이 아기에게는 어떤 불행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제 자신이 불쌍해서 우는 것입니다.”
“성자여, 나로서는 그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잘 이해가 되기 않습니다.”
“왕이시여, 저는 이제 다 늙은 몸입니다. 그런데 이 아기는 틀림없이 깨달음을 얻은 위대한 성자가 되어 이전에 누구도 행해본 적이 없는 대 진리를 설파하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행복과 안락을 위해 널리 가르침을 펼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미 늙어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저는 그런 분을 보지 못할 것이고, 그런 분의 가르침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안타까워 이렇게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아시따 칼라데왈라는 잠시 숨을 고른 후 동행한 어린 조카 날라까를 바라보며 말했다. 날라까는 아시따 칼라데왈라의 누이동생의 아들이었다.
“날라까야, 훗날 이 왕자께서 대성인이 되시면, 그러니까 사람들로부터 ‘세존’이라는 말과 ‘올바로 깨달음을 얻어 진리의 길을 가시는 분이 출현하셨다’라고 말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거든, 너는 지체 없이 세존을 찾아가 큰 가르침을 받고 청정한 삶을 닦거라. 그리하여 궁극적인 구원을 얻도록 해라. 그렇게 하는 것이 너의 안녕과 행복을 위한 최고의 길이다. 알겠느냐?”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린 날라까가 굳은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룸비니 동산 무우수 나무 아래에 있는 연못. 싯다르타를 낳은 마야 왕비는 이 못의 물로 목욕을 했다.
아기의 이름을 정하는 명명식이 한참 진행되는 동안 마야 왕비의 병세가 갑작스럽게 악화됐다. 왕비는 돌연 심각한 고통을 느끼며 자리에 누웠다. 증세는 예상 밖으로 심각했다. 아기를 낳은 후 7일째 되는 날, 마야 왕비는 자신의 임종이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왕비는 남편 숫도다나 왕과 친동생 고따미를 급히 자신이 누워있는 침상 곁으로 불렀다.
“대왕이시여, 저는 제 아들에 대해 아시따 칼라데왈라 선인께서 말했던 예언이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고 믿어요. 다만 제가 그 예언이 실현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 아기는 이제 곧 어미 없는 아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죽은 후에도 아기가 잘 보살핌을 받고 아기의 장래에 걸맞게 양육될 것이라고 믿으므로 조금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제 동생 고따미에게 이 아기를 맡기겠어요. 동생이 이 아기를 잘 키워줄 것으로 믿어요. 대왕이시여, 부디 제가 죽는다고 섭섭해 하지는 마세요. 이미 하늘의 부름이 있었고, 천상의 사자들이 저를 데려가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야 왕비는 붓다를 낳은 지 이레 만에, 출산의 후유증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예기치 않은 출산과 아기를 낳은 직후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곧바로 왕궁으로 되돌아오는 과정에서 무리를 했기 때문이었다.
“야속한 사람, 마야데비여. 이 어린 것이 누구의 젖을 먹으라고 이렇게 속절없이 떠나십니까. 가엾은 이 아이를 어찌 보살피라고.”
비탄에 잠긴 숫도다나 왕에게 사끼야 족의 장로들이 다가와 위로했다.
“왕이시여, 슬픔을 거두십시오. 왕자를 키울 분으로 고따미는 매우 훌륭하십니다. 이모의 사랑도 친모의 사랑에 못지않을 것입니다. 자애로운 성정을 지닌 고따미라면 왕자를 친자식보다 더 깊은 사랑으로 보살필 것입니다.”
마야 왕비의 당부대로 이모인 고따미는 싯다르타의 양모가 되어 양육을 도맡았다. 이것은 당시의 관례이기도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