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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69 편
펠라에서 주신 마지막 가르침
. 중도자 위원회
. 서기 30년 3월 6일
. 장 소 : 펠라
169:0.1 3월 6일 월요일 저녁 늦게, 예수와 열 사도는 펠라 캠프에 다다랐다. 예수가 머무르는 마지막 주간이었고, 주는 매일 오후에 군중설교와 밤마다 사도들과 어떤 상급 제자들을 위한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5천 명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후로 큰 이적은 없었다. 나사로의 부활 소식은 집회 전체를 흥분에 들뜨게 했다. 예수는 이 한 주 동안 펠라에서 가르치고 다음에 페레아 남부의 여행을 계획했으며, 이것은 마지막 비극까지 바로 이끌었다.
바리새인과 주사제들은 여러 죄목을 작성하고 구체화하였으며, 그것은 다음과 같았다:
1. 그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이다. 불경한 자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먹기까지 한다.
2. 그는 신성을 모독하는 자요, 하나님이 그의 아버지라고 말하고 자신이 하나님과 대등하다고 생각한다.
3. 그는 율법을 어기는 자이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고 다른 여러 방법으로 이스라엘의 신성한 율법을 어기고 있다.
4. 그는 악마와 동맹을 맺고 있다. 악마의 왕자인 비엘세붑의 힘으로 놀라운 일과 기적처럼 보이는 일을 행한다.
1.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
169:1.1 목요일 오후에 “구원의 은혜”에 대하여 설교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양과 잃어버린 동전 이야기를 다시 했다. 그리고 방탕한 아들의 비유를 덧붙였다.
“사무엘에서 요한에 이르는 선지자들은 ‘진리의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고 권고했다. 그러나 하나님도 너희를 찾고 있음을 보이려고 내가 왔다. 우리에 양 아흔 아홉 마리를 두고, 잃어버린 양 하나를 찾으러 떠난 목자 이야기를 기억할 것이다. 다시 말하노니, 하늘에서는 뉘우침이 필요 없는 올바른 사람 아흔 아홉보다 뉘우치는 죄인 하나를 더 크게 기뻐한다. 나는 내 아버지의 명령을 행하고자 이 세상으로 왔으니, 사람의 아들이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사람들이 언급한 것이 참말이다.
“회개한 후 희생물을 바치면 신이 너희를 받아주신다고 가르침을 받았으나, 아버지는 미처 뉘우치기도 전에 받아주시며, 아들이 되고 영적으로 진보하는 하늘나라로, 너희를 데려오라고 아들과 그 동료를 보내고 있다.
“한 여인이 은화 열 닢을 목걸이로 만들고서 한 잎을 잃어버렸다가, 등불을 켜고 잃어버린 은화를 찾을 때까지 계속 찾았던 이야기를 기억할 것이다. 은전을 되찾고서 그 여자는 친구와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하자. 내가 잃어버린 은전 조각을 찾았다.’라며 기뻐했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은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나가는 것을 강조하기 이 이야기를 한다.
“어느 부자 농부의 아들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그 아들은 깊이 생각한 끝에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낯선 땅으로 가버렸고, 거기서 많은 시련을 겪었다. 그 이야기는 이러하다.
169:1.6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었더니, 나이 어린 아들은 명랑하지만 책임을 피하였고, 그 형은 열심히 일하며 의무를 다했다. 어린 소년은 게을렀고, 나이 든 형은 자기중심적이고 자만심이 있었다. 둘 사이가 좋지 않아 동생은 아버지께 말했다. : '아버지, 아버지 재산 중3분의 1의 내 몫을 주시면 세상에 나가 성공하겠습니다.' 아버지는 재산 중에 그의 몫을 주었다.
“그 젊은이는 돈을 모두 모아 멀리 여행을 떠났고, 이익 되는 일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 유산을 방탕한 생활에 낭비하였다. 재산을 다 써 버렸고, 그 나라에 기근이 생겼다. 그는 돼지 먹이는 일자리를 얻었고 들로 내몰렸다. 너무 배가 고파 돼지 먹는 겨를 먹고 싶어 하는데도 그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
“어느 날 너무 배가 고파서 말하기를, '내 아버지에게는 많은 품꾼이 고용되어 빵을 충분히 먹는데, 나는 낯선 나라에서, 돼지를 먹이며 배가 고파서 죽는구나! 내가 아버지께로 가서 말하리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지만, 나를 품꾼으로 써주소서.' 이 결심이 서자, 젊은이는 아버지의 집을 향하여 떠났다.
“아버지는 이 아들이 언제나 올까 늘 지키고 있었는데, 그가 아직 멀리 있는데도, 아버지는 그를 알아보고 불쌍히 여겨, 달려 나가 아들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들이 아버지의 눈물 어린 얼굴을 보며 말하되, ‘아버지여, 나는 하늘에, 또 아버지 보시기에 죄를 지었습니다. 아들이라 부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종들에게, ‘내가 간직했던 그의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아들의 반지와 신발을 가져오라.’ 고 명했다.
“아버지가 종들에게 말했다 : ‘살진 송아지를 잡으라. 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그를 잃었다가 찾았다.’ 모두가 모여 함께 기뻐하였다.
169:1.11 “이 무렵에 맏아들이 일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에 노래하고 춤추는 소리가 들려 한 종에게 물었더니, 그 종이 말하되 ‘오랫동안 잃어 버렸던 당신의 아우가 돌아왔고, 당신의 아버지가 기뻐서 살진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맏아들이 아우의 환영식을 분개한다는 말을 아버지가 듣고 그를 설득하려 했지만, 맏아들이 이렇게 대답 하였다: ‘나는 여기서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기었어도 아버지는 내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새끼 염소 한 마리도 주지 않았습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창녀들과 탕진하고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기뻐서 살진 송아지를 잡고 기뻐하시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말하되 ‘아들아, 내가 가진 이 모든 것이 네 것이다. 네가 즐겁게 지내려고 친구들을 만들었다면 어느 때라도 새끼 염소를 잡을 수 있었단다. 네 아우를 잃었다가 찾았고, 그가 살아서 돌아왔으니, 함께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이것은 예수가 청중에게, 아버지가 하늘나라를 찾는 사람들을 수용함을 강조하려고 말씀한, 감동적이고 효과적인 비유 중 하나였다.
예수는 이 세 이야기를 동시에 하기를 좋아했다. 길 잃은 양의 이야기는 아버지가 길 잃은 사람을 염려하고, 아들들과 함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나간다는 것을 보여 준다. 물질적 걱정으로 혼동하거나 영적으로 눈먼 사람들을 얼마나 신이 찾고 있는가 보여 주려고 예수는 잃어버린 은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나서 잃어버린 아들의 지위가 얼마나 완전히 회복되는가 보여주려고, 돌아오는 탕자를 받아들이는 이야기를 시작하곤 했다.
169:1.16 가르치던 여러 해 동안 여러 번, 예수는 이 방탕한 아들의 이야기를 반복했다. 이 비유와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아버지의 사랑과 사람의 이웃 정신을 가르치는 데 가장 좋아한 수단이었다.
2. 재빠른 집사의 비유
169:2.1 어느 날 저녁, 열심당원 시몬이 예수의 말씀 중 하나를 논평하며 말했다: “주여, 세상 사람들이 불의의 재물을 써서 친구를 만드는 것이 하늘나라 자녀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말씀하셨는데 무슨 의미입니까?
“너희 가운데 일부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무척 영리하게 사업 동료와 거래했다. 부당하고 불공정한 경우에도 미래의 안전을 누리기 위해 신중하고 현명하게 사업을 잘 처리했다. 자기 이익을 위해 이렇듯 노력한 것과 같이, 이제 너희는 사람의 형제신분과 하나님의 청지기인즉, 하늘나라를 위하여 열심히 사람들을 설득해야 한다.
“재빠르고 불의한 집사를 둔 어떤 부자의 이야기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이 집사는 주인의 자금을 탕진하였고, 이 소문이 주인의 귀에 들어가자, 주인은 그 집사를 불러 사무를 다른 자에게 인계하라고 요구했다.
이 불충한 집사는 속으로, '내가 이 자리를 잃게 되었으니 어찌하나?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구걸하자니 부끄럽구나. 그러나 주인과 거래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일을 해야 환영받을지 아노라.' 주인에게 빚진 자를 하나씩 불러서, 첫 사람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물으니, 그가 기름 1백 되라 해서, ‘밀랍판 증서에 50이라 고치라’ 하고, 또 다른 빚진 자에게 물으니, 그가 밀 1백 되라 하여, ‘계약서에 80이라 적으라' 하고, 수많은 빚진 자들에게 이렇게 하였다. 주인이 나중에 이를 발견하고, 앞날의 역경에 대비하여 현명한 방법을 쓴 것을 인정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방법으로 이 세상의 아들들은 빛의 자녀들보다 앞날을 위하여 준비하면서 더 지혜를 보이고 있다. 불의의 재물과 사귀는 자들에게서 교훈을 얻고, 너희 인생에서 땅의 일이 모두 실패할 때 너희는 영원한 거처에서 기쁘게 환영받도록 의로운 힘과 영원한 우정을 나누기 위해 너희의 삶을 경영하라.
169:2.6 “작은 일에 충실한 자는 큰일에도 충실하며, 한편 작은 일에 불의한 자는 또한 큰일에도 불의할 것이다. 너희가 이 세상일의 통찰력과 인품을 보이지 않으면, 어떻게 하늘나라의 참된 재산의 관리를 맡은 충실하고 신중한 청지기를 희망할 수 있겠느냐?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자리에 있던 바리새인은 재산을 모으는 데 탐닉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웃기 시작했다. 적의를 가진 이 사람들은 예수를 무익한 논쟁에 말려들게 하려고 애썼지만, 그는 적들과 토론하려 하지 않았다.
3. 부자와 거지
169:3.1 모임이 너무 시끄러워지자 시몬 베드로가 말했다: “형제들이여, 이렇게 다투는 것은 옳지 않다. 주는 말씀을 마쳤고, 그의 말씀을 숙고하는 것이 좋다. 부자와 거지에 관한 나지르인의 우화를 또한 들은 적이 있지 않는가? 세례자 요한이 재물을 사랑하고 부당한 재산을 탐내는 자에게 경고하며 들려준 이야기이다:
“디베스라는 어떤 부자는 자주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화려하게 살았다. 나사로라는 어떤 거지는 헌데가 가득한 채로 이 부자 집 대문에 누워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싶어 했다. 개들까지 와서 그의 헌데를 핥았다. 그러다가 거지는 죽어 천사들에게 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고, 이 부자도 죽고, 왕처럼 매장되었다. 그 부자는 지옥에서 깨어났고,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안긴 나사로를 보았다. 디베스가 소리치며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사로를 이리로 보내 손가락 끝을 물에 담가 내 혀를 식히게 하소서, 너무 괴롭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사람아, 너는 일생동안 좋은 것을 누렸고, 나사로는 나쁜 것을 견디었다. 심해가 있어, 우리는 너한테 갈 수 없고 너도 우리에게 건너올 수 없다.' 디베스: ‘내게 다섯 형제가 있으니, 여기 오지 않도록 나사로를 내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을 것이다’ 디베스가 대답하되, '아니, 아니, 한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서 가면, 저희가 뉘우칠 것입니다.' 아브라함: '저희가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서 말해도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베드로가 이 옛 비유를 마친 후 군중이 조용해졌고, 안드레가 자러 가라고 군중을 해산하였다. 사도와 제자들이 예수에게 디베스와 나사로의 비유를 자꾸 물어도, 예수는 아무런 논평을 하지 않았다.
4. 아버지와 그의 나라
169:4.1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왕이 아님을 설명하는 데, 예수는 언제나 애를 먹었다. 주는 사람의 영적 단체가 ‘하늘나라’ 이고, 그 영적 우두머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예수는 아버지를 결코 왕이라 부르지 않았다. 언제나 자신을 사람의 아들, 그들의 형으로 언급했다. 그는 모든 추종자들을 인류의 종으로, 하늘나라 복음의 전령으로 묘사했다.
예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성격과 속성에 관하여 사도들에게 체계적 수업을 준 적이 없었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아버지를 믿으라’ 요구하지 않았고, 사람들이 아버지를 믿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아버지의 실재를 증거하는 논증을 제시하지 않았다. 아버지에 관한 그의 가르침은 “그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아들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선언했다. 야곱의 우물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나님은 영이다.”고 선포했을 때를 제쳐놓고, 아버지에 대한 다른 선언을 한 적이 없다.
예수의 가르침에 의존하지 않고, 그의 일생이 신성함을 관찰함으로 하나님에 관하여 배울 수 있다. 주의 일생으로부터 각자 하나님 개념을 소화할수 있으며, 이 개념은 영적이고 신성한 실체, 실재하는 영원한 진리를 깨닫는 개개인 능력의 정도를 가리킨다.
예수는 오직 체험적 실체에서 하나님을 알 수 있고, 단순한 가르침만으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예수는 사도들이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사람의 아들을 알았던 것처럼 하나님을 확실히 알 수 있다고 가르쳤다.
히브리 성서를 인용할 때를 제외하고, 예수는 하나님과 아버지, 오직 이 두 이름으로 신을 언급했다. 야웨가 아닌, 삼위일체를 가리키는 히브리 단어(엘로힘)을 보통 사용했다.
169:4.6 예수는 결코 아버지를 ‘왕’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결코 파라다이스의 첫째 근원 중심과 자신의 개인적 관계를 설명하는 조건이 아닌 어떤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을 언급하지 않았다.
예수는 신 개념을 가리키려고 하나님이라는 낱말을 쓰고, 하나님을 아는 체험을 가리키려고 아버지라는 낱말을 썼다.
유대인에게 엘로힘은 신 중의 신이었고, 야웨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었다. 예수는 엘로힘 개념을 받아들였다. 종족의 신 야웨 개념 대신에 하나님이 아버지요 사람은 세상에 두루 형제라는 개념을 소개했다.
예수는 육체 안에서 엘로힘(하나님)의 현현이 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가 여러 세상에 대하여 엘로힘(하나님)의 계시자라고 결코 선언하지 않았다. 그를 본 사람이 엘로힘(하나님)을 보았다고 결코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육체에 있는 아버지의 계시로서 자신을 선포했고, 그를 본 자는 누구나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했다. 신성한 아들로서 그는 오로지 아버지를 대표한다고 주장했다.
정말로 주는 엘로힘 하나님의 아들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서, 하나님의 필사 아들들에게, 그런 계시를 필사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한, 일생의 계시를 아버지 성품의 묘사에 국한하기로 하였다.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다른 성격자들의 성품에 관하여 말하면, 우리는 그들이 전적으로 아버지와 같다는 가르침에 만족해야 할 것이고, 아버지는 육신화한 아들, 나사렛 예수의 일생에 담긴 성품에서 드러났다.
169:4.11 땅에서 일생을 살면서 하늘 아버지의 참 성품을 드러내기는 했어도, 예수는 아버지에 대하여 거의 가르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오직 두 가지만 가르쳤다: 하나님은 영이며, 지음받은 존재들과 가지는 관계에서 생기는 모든 문제에서 아버지라는 것이다. 이날 저녁에 “나는 아버지로부터 이 세상으로 왔다. 또 나는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간다” 고 선언했을 때, 예수는 자기와 하나님의 관계에 대하여 최종 선언을 했다.
그러나 주목하라! 예수는 결코 “내 말을 들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말하지 않았으며,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였다. 예수의 가르침을 듣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대등하지 않지만, 예수를 보는 것은 그 자체가 아버지를 계시하는 체험이다. 우주들의 하나님은 방대한 창조를 다스리지만, 자기의 영을 인간의 지성 속에 거하라고 보내시는 분은 하늘에 계신 그 아버지이다.
예수는 인간의 모습을 가진 영적 렌즈요, 이 렌즈는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물질 인간이 볼 수 있게 만든다. 그는 너희의 형이요, 육체를 입고서, 하늘의 무리들조차도 감히 넉넉히 이해할 수 없는 무한한 속성을 가진 한 존재를 이해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개별 신자가 직접 겪는 체험에 있음이 틀림없다. 하나님은 영이고, 오직 영적 체험으로서 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영적 영역을 다스리는 신성한 아들들은 하나님을 오직 아버지로서 물질 세계의 유한한 아들들에게 드러낼 수 있다. 너는 영원자가 아버지인 것을 알 수 있고, 그를 우주의 하나님, 모든 존재의 무한한 창조자로 경배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