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절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니리”
한 번 죽는 것, 순간으로 죽는 것 곧 절명하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창3장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거기서 우리의 인간의
운명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그리고 ‘아담아 네가 흙이니 네가 흙으로 돌아가리라’하시므로
우리 몸은 우주의 티끌로 돌아갈 것으로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그런데 죽기는 죽는데
하나는 생명의 부활로 하나는 심판의 부활로 나아오게 됩니다(요5:29) 한 번은 죽습니다.
반드시 죽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죽느냐 이 말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으면
생명의 부활입니다. 그러나 내가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죽으면 심판의 부활로 둘째
사망으로 갑니다. 그래서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일입니다. 죽은 다음에는 심판에 이릅니다.
여러분 어쩌시렵니까?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죽습니다.
죽었기 때문에 또 그 죽음을 받아들여 죽습니다. 이미 죽은 존재임으로 시인하고
영으로 또 나를 죽입니다. 그로 인해 지금도 항상 살아계신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입니다.
항상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면 예수의 생명이 나의 죽을 몸에 나타나는 겁니다(고후4:10)
죽을 몸이라는 것은 보이는 우리의 육신의 몸이 아니고 우리 안에 있는 인격체입니다.
그 다음에 이제 살았으니 예수 죽음에 나를 넘겨줌은 예수의 생명이 나의 육체에
나타나게 하심이라(고후4:11)고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히11:1)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현재의 몸의 생명이 되는 걸 터득하느라 20년 세월이
필요했나 봅니다. 예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고 우리의 육체에 나타나는 사실을
2000년 초에 알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며 이것만 터득하면 사역은 끝난다고 생각했는데
그 말씀이 링거처럼 실재가 되는데 20여 년이 걸렸나 봅니다. 이 말씀은 날마다 나를
그리스도에게 넘겨주면 정신 건강도 되고 육체 건강도 된다는 말입니다. 살아 역사하는
말씀이 혼과 영에 역사하고 또 생각으로 말미암아 뇌를 거쳐 관절과 골수에도 역사하니까요.
말씀의 능력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미 체험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할 때에
배에서 뜨거운 기운이 나오고 팔 다리에 힘이 솟아나잖아요? 우리가 신앙이 어릴 때는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 사이다 먹고 싶어요’ 하면 누가 사이다를 갖다 줄 정도였습니다.
그 때는 생각만 해도 주셨습니다. 그런 재미가 있었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아무것도 염려 말고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하십니다. 주님께 내 사정을 아뢰고 주님이 구원하신
그 사랑을 생각하면 성령이 우리의 심령을 붙잡습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이 우리 마음에 물밀듯이 밀려오지 않습니까? 강력한 확신이 들어옵니다.
심령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온 몸에 힘이 납니다. 천근같은 내 몸이 날아갈듯 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틀림없이 맞습니다. 그러면 주의 영과 생명이 우리 죽을 몸에
나타날 뿐 아니라 우리 죽을 육체에도 나타남이 확실하지 않습니까? 할렐루야!
기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기운 곧 힘을 얻는 겁니다. 기도도 먹는 것이고
말씀도 먹는 겁니다. 우리 신앙의 왼발 오른발입니다.
기도로 먹고 말씀으로 먹고 무조건 먹는 겁니다.
28절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그리스도의 죽으심입니다. ‘드린바 되었고’입니다. 죄가 다 끝이 났습니다.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습니다. 드리신바 되었으니 그렇다면 그 안에서 죽고 다시
산 우리도 드린바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죽은 소는 못 먹어도
죽인 소는 먹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제발 죽어가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빨리 자기 목숨을 포기하고 죽으시길 바랍니다. 말씀이 풍성하여 일상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이 원리를 체득하고 난 뒤부터 얼마나 편한지 모릅니다. 이 비밀을 모를 때는
설교 한 번 준비하려면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갔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서
‘성령님이여 저 혼자 승리하려는 긴장에서 해방시켜 주옵소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면 들어주실 때도 있지만 안 들어주실 때도 많았습니다. 방법은 ‘제가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하시는 것이니까 나는 죽었습니다. 당신이 나를 다스려주시옵소서’
이 길 뿐입니다. 결국 설교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대언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나를 장악해 주셔야 내게 자유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서서히 나이 먹어 죽을
때까지 버티지 말고 자진해서 시온의 반석이신 그리스도에게 진리로 부딪치십시오.
부딪치지 않고 빙빙 돌다가 날아오는 돌에 맞으면 바벨론 같은 큰 나라도 그 돌에
박살나고 맙니다. 그러나 호세아서나 다니엘서나 에스겔서를 보세요. 하나님이 다른
이방민족에게는 강풍노도같이 죽일 듯이 하시다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너 왔니?’
하고 금방 자비의 얼굴을 보이십니다. 그리고는 이스라엘을 학대한 이방나라를 향해
‘너희들이 내 백성을 감히 이렇게 만들었어?’ 하시면서 노한 얼굴로 돌변하여 으르렁
하시다가도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 하면 금방 얼굴을 푸시고 ‘응 그래 내 새끼야
왜 그러냐?’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성경을 통해 보면 재미납니다.
하나님은 이방신을 섬기는 이방인들에게는 죽일 듯이 화를 내지만 자기를 찾는
택한 백성들에게는 언제나 ‘내 새끼 왔니’ 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신음소리에 참으로 약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뻣뻣하게 나오는 데는 사정없습니다.
싹도 남기지 않고 다 날려버립니다. 그러나 다윗처럼 굽히고 그 품으로 파고드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한 없이 자애로우신 분입니다. 우리가 택한 백성이 되고
그리스도를 담는 귀한 그릇이 되었으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게 되었으므로
이제는 주님의 긍휼을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은 ‘나는 안 된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가 죄에 대한 고백을 할 때에도 ‘주님 오늘도 거짓말 했고
잘못 했고 실수가 많았습니다. 주님 나를 좀 바르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이렇게 되면 자신의 본질문제를 등한시 해 버립니다. 하나님은 율법의 행위로
자신을 의롭게 만들어 보려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등한시 해 버렸습니다.
율법을 들여다보고 ‘아 나는 완전히 망했다 깜깜하다 이건 내가 할 게 아니다
주님 어찌하오리까? 저는 힘도 못 쓰겠습니다. 주여 저를 긍휼히 여겨주시옵소서’
그럴 때는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등한시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아이가 나를 필요로 하는 구나’ 하고 긍휼히 여기시는 겁니다.
그래서 갈2장 19절-20절을 보면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대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gave himself)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래서 회개는 ‘이런 저런 문제만 고쳐주십시오’가 아니고 ‘주님 제게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볼 때에 제게 문제가 있습니다. 내 존재 자체가 문제입니다.
항상 제 존재를 주님의 영광스러운 존재로 바꿀 수 있도록 허락하소서’하는 겁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으로 말미암아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리를 향해 항상 계십니다. 버리신 것만이 아니라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와 긍휼을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했는데 자기를 바란다는 말은 학수고대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시려면 우리의 학수고대가 조건입니다.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같아 질 줄을 알고 그를 간절히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몸의 속량을 기다리는 겁니다(롬8:23)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 까지
우리가 구원에 이르도록 학수고대하며 기다리고 있어야 되는데 문제는 죄와 상관이
없는 자라야 됩니다. 죄라는 sin하고 범죄의 sins하고는 다릅니다.
죄(sin)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므로 죄에서는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우리 행위의 범죄(sins)들은 매일 있습니다. 이런 죄들은 우리의 자백으로
끝이 납니다(요1:9) 다시 말하면 육체를 따르는 어둠에 있다가 빛이신 주님께로
우리의 마음의 방향을 되돌리면 그 죄는 자동으로 끝이 납니다. 그런데 죄와 상관없다는
말은 우리는 항상 죄의 종이 아니라 은혜와 의의 종이라는 사실을 날마다 시인해야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조건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와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성령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와 주십니다. 그러나 내가 죄와 상관이 있다고 하면
성령이 임하실 수 없습니다. 부끄러움과 두려움에 쌓인 죄인에게는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항상 우리는 로마서 5장과 6장을 통해서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해서는 산자로 여겨야 됩니다. 이 확신이 매우 중요합니다. 비록 내가
더러워도 죄에 대해서는 끝난 자요 하나님께는 산자로 인정할 때 하나님께서 미구에
영광스럽게 나타나실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성령님께서 수시로 그리스도의 영과
생명을 나타내주실 겁니다. 이 복이 우리 모두에게 항상 있기를 축원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모든 영광은 주님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