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의 죽음의 절망속에서 슬픔의사연 ♧
알고 지내던 사람입니다.
이글을 보시는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저는 고양시에 살고 있는
오화선 입니다..
저는 스물한살에 아내와 결혼을 했습니다.
남들보다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기 때문에
힘든 일이 많았고 서툰 결혼생활에 기쁨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과 외손자와 손녀가 있었습니다.
저는 세상을 다 얻은 것보다도 더 기뻤습니다.
저의 딸과 외손자 그리고 손녀가 있습니다......
제 목숨과도 바꿀 수있는 사랑스런 딸과
외손자와 손녀가 이었습니다.
저는 교통사고로 장애1급이고 저의처는 장애급2급인데 저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가면
외손자와 외손녀가 저를 기다렸다가 그 고사리 같던
손으로 안마를 해준다며
제 어깨를 토닥거리다가 제 볼에
뽀뽀하며 잠드는 손녀 손자를 보면서 열심히
살아야 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지금으로 부터 11년 전에
우리 딸은 일산에서 식당을 하다가 실패하고
할 수 없이 미국이민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지금으로 부터 11전 저와 저의 딸과 외손자
손녀가 마지막으로 본 날이었습니다.
떠난 후에 외손자와 손녀와 더 많은 것을
해주지 못해준 것과 더 맛있는 것을
못 먹여서 너무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이국만리
떠나는 딸과 손녀손자는 타국땅에가서 와롭지
않게 잘 수 있을까. 하면서 많은 눈물 흘렸습니다.
사랑하는 내 딸!과 손자 손녀가 보고 싶어서
자주 꿈에 애들이 보였다.
늘 저의 가슴속에 있던 딸과 외 손자 손녀가
너무나 사무치게 보고 싶었습니다.
저의 마음 자신을 다스리며 참았던 고통이
때로는 한꺼번에 밀려와 통곡을
하면서 펑펑 울었던 날도
수십번인것 같습니다.
저의 가슴을 칼로 도려 내는 것만 같다.
내 나이 황혼길에서 세상 모든 것을
자폭자기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딸은 미국에 간지가 11년에 되니 외손자 손녀는
손녀는 한국나이로는 21세 미국
애트란타시 주립 대학교에 의대 정신과 다니고
외손자는 16세된 손자는 고등학교 1학년 되었습니다.
저의 사랑하는 딸이 미국에서 10년동안 많은
고생 끝에 지금은 성공하여 외손자와 딸이 2012년 5월23일 오후
5시20분에 한국에 도착하여 한달동안 한국에 있다가
갑니다.
저는 그동안에 많은 고해에서 삶을 살아가 가는데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에 무수히 많은
일들을 겪었습니다. 수많은 일들에 의해
상처를 받기도 하고 기쁨과 슬픔과
고통의 순간들이 너무 너무
많은 일들을 겪었다. 수많은 일들에 의해
상처를 받기도 하고 기쁨과 만족스러운
일들을 찾아 헤매는 한없는 ‘기러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한 세상을 사라가는
것은 녹록 하지 않다. 내게도‘2000년
저와 집사람과 같이 야외에 놀러가는 중에
보험도 들지 않은 차에 정면충돌 하여
저와 집사람이 교통사고를 당하여
일산 백병원 중환자실에서
의식불명은 삶조차
밀어낼 정도의 힘겨움으로
다가왔다. 중한자실에서 싸늘한
내움에 지쳐가며 한두 달을
넘겨가고 있음 쯤 의사는 듣고
보고 못한 진단을 내렸다.
치료를 해도 너무 많은
상처를 당했기에 그저
증상의 악화와 완 하가
반복되다가 온몸이 굳어서
죽음에 죽음 까지 생각을 하며
투명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통사고로 인한 척추 손상
때문에 변 오줌을
받아내야 하는 시간은 1년
정도의 세월이 되고 그동안에
3 이나 수술을 받아도 별 효과가 없고
담당 추치의 말씀이 의해서
다시 허리 수술을 하자고 하여
수술 결과는 좋아 지지 않아서
일산병원 신경외과 모 교수님께서 수술을
잘 못하여 수술 3번에 후의 증으로
심부정맥혈전증이란
바이러스의 병을 얻게 되어서
너무나도 힘든 세상을 살게 되었습니다.
3번이나 죽음을 택하기도 했지만은
누워 있는 신세다 보니
목숨을 버리는 일조차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병은 날이 갈수록 깊어가고
경제적인 어려움도
말할 수 없이 힘들어 지고 있을 때
미국에 있는 우리 딸이
미국에 있는 친구들에 알려서
친구와 딸의 도움으로 저에게
큰돈을 마련해주었다. 그 고마움은 말로
어떻게 표현을 할 수 가 있을까!
그 후 “하느님” 정말 감사합니다.
저의 몸이 허락한다면 남은여생을 허신
봉사의 삶을 살겠습니다, “라고 매일
같은 기도를 하자. 기적
같은 기적이 잃어 났습니다.
척추 수술 후의 증으로 심부정맥이란
병 때문에 하지가 퉁퉁 부어 있는 것이
일산 백병원 심혈관내과 전문의 도준형
교수님으로 부터 치료를 받게 됨으로서
조 금식 부기도 빠지고
거름마식으로 걸어 다니게 되었다.
조금씩 움직이고 휠체어를 탈 수 있게
됐고 내 가족들의 도움과
주의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3년 만에
퇴원해 집으로 돌아 올수 있었다.
일산 백병원 주치의
도준형 “교수님께서” 내게
보여준 “희망의” 메세지로 인해.
지금은 본인처럼 신체적인 장애로
인해 사회와의 고립되어 있는
환자들에게 희망 전도사가 되고자
열심히 이곳. 저곳.
병원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환자들을 찾아서 하느님께 기도를
하여주며 봉사 활동도 했습니다.
봉사활동을 하며 좋은 친구도
만나기도 했고 금년서부터는
나이가 먹고 또한 장애자로서…….
봉사 활동이 줄어들고 지금도
봉사 활동을 가끔
조금하고 나면은 마음이
뿌듯해지고. 행복합니다..하느님의
주신 좋은 “바이러스”
봉사활동이야 말로 내 마음을
따듯하게 해주고 만족과 기쁨을
안겨주는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봉사로 내 자신에 대한 병앓이를
하며 살아가다보니 걷지도 못한
가 걸음마를 하게 되었고
기능을 못하든 장기들은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 같은 마음입니다.
내게는 앞으로 봉사활동을 하고
싶으나 나이가 많아졌기
때문에 활 수 없이
지금은 집에서 열심히 성경책을
보면서 불행한 환자들을 위해
하느님에게 기도하며 남은 여 생을 밝은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긍정의 바이러스를 서로 전달할 수 있는
봉사 활동이 활성화되는 것은 사회복지에 대해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또한 관심이 많이 필요한 소외계층 대한이해를
자극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도 봉사이다.
얼마 안 되는 봉사활동을 한 것이
백병원 도준형 교수님과
일산 장애인 복지관에서
생활도우미를 사랑으로 보내 주며
도움을 받았기에 조금이나마
걸어 다닐 수 있는 나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받았다는 것은
저는 하루도 잊지 않고 나도
혼신을 다하여 진정 뜨거운
사랑을 받은 것이 하루를
살아도 그 삶은 보석처럼 빛
나리고 있다고 저는 생각 합니다
실패하고 사회의 바닥으로
내 팽겨 쳐 진다,
할지라도 좌절하지 마세요.
여러분의 가치는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랍니다. 세상에
우리의 삶이 아무리 고달프고
힘든 여정 일지라도
우리는 꿈이 있습니다.
어려운 이웃 모든 분들…….
꿈과 희망 따라 긍정과
사랑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의 어려운 이웃 모든 분들...
용기 잃지 마시고 희망을 가지고 도전
하시어 꼭 행복을 만드시기를 소망 합니다^^-
6월 사랑스러운 우리딸과 외손자가
미국으로 돌아갑니다. 그래도 지금은
슿픔을 느끼지 않고 행복합니다.
투병수기 필자 .오화선 씀
저
5월23일 딸과 외손자를 인천공항에서 저의 차에 태우고 집으로 오는중
출처: 황금사자 3518 원문보기 글쓴이: 황금
첫댓글 카패 회원님들 투병수기 쓴 글과 합작하여 지난날의 고백수기 입니다. 저의 손자와 딸은 facebook와twtter을 많이 하면서 저 보고facebook와twtter을 하라고 하여서 지금은 facebook와twtter을 많이합니다. 자주 카패에 못들어와도 양지 바랍니다.
황금사자님 그런 아픈 사연이 있서군요 감사합니다 앞으로 먾은 도움 부탁드림니다 감사합니다
일산 뽀빠이님 답글 감사합니다.
첫댓글 카패 회원님들 투병수기 쓴 글과 합작하여 지난날의 고백수기 입니다. 저의 손자와 딸은 facebook와twtter을 많이 하면서 저 보고facebook와twtter을 하라고 하여서 지금은 facebook와twtter을 많이합니다. 자주 카패에 못들어와도 양지 바랍니다.
황금사자님 그런 아픈 사연이 있서군요 감사합니다 앞으로 먾은 도움 부탁드림니다 감사합니다
일산 뽀빠이님 답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