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자나국제선원 주지 자우 스님
교실서 “우리 절로 와∼” 외쳤던 고교생 도심 포교 새 지평 열었다.
지장보살 원력에 ‘눈물’ 영운 스님 은사로 출가
스리랑카 불심 목도하고 어린이‧청소년 포교 원력
영어 진행 담마스쿨‧캠프, 어린이‧청소년에 ‘인기’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 키워가도록 돕고 싶어”
고요함 속에 불심 심은 외국인 참선도 ‘큰 호응’
“진심으로 다가온 그들에 불법, 올곧이 전해야 해”
여관‧찜질방 떠돈 후배 한탄에 수행관 3개 열어
“선배님, 그동안 뭐 했나? 돌아보니 내가 그 선배”
“서로 보듬고 정진하는 수행공동체 조성 희망”
비로자나국제선원 주지 자우 스님은
“땅은 낮은 곳에 있지만 모든 생명체의 의지처가 되어 준다”며
“낮은 자리에서 자비로울 수 있고,
그 자비를 통해 행복할 수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고 전했다.
서울 홍제동 안산 자락 아래에 자리한 비로자나국제선원.
부처님의 가르침을 세계에 알리는 허브 역할을 자청한
이 선원을 세운 건 자우(慈禹) 스님이다.
강원과 선원, 스리랑카 유학 등으로 이어진 경학과 수행을 거친 후
인도네시아 해인사포교원 주지를 맡아 현지 포교에 매진했다.
스리랑카와 인도네시아에 머무르며
‘한국불교의 세계화’와 ‘불교 인재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2006년 10월 서울 무악재에 비로자나국제선원을 열었다.
어린이 영어 담마스쿨, 영어 담마캠프, 외국인 참선 등의
프로그램을 개발‧운영해 서울 도심 포교의 지평을 넓힌
공로를 인정받아 2010년 ‘어린이청소년 중심도량’으로 선정됐다.
아울러 자우 스님은 2013년 ‘포교대상 원력상’을 수상했다.
2017년 7월 서울 홍제천변으로 이전했다.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의 비로자나국제선원은 법당과 함께
심신수련도장 ‘선무도’와 갤러리카페 ‘까루나’도 열어
서울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도 다가섰다.
또한 비구니 스님들의 불편한 수행환경을 돕고자 ‘나란다 수행관’ 세 개를 잇달아 개원했고,
동남아 불교국가인 캄보디아에 초등학교를 설립해
기본교육을 받기도 어려웠던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했다.
최근에는 자신의 전법 노정을 담은 ‘너의 손을 놓지 않을게’를 선보였다.
담백하면서도 톡톡 튀는 글솜씨도 일품이지만
행간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미소가 아름답다.
‘출가의 기쁨’이 빚은 환한 미소이기에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
강원도 영월에서 유년을 보낸 후 원주의 한 고등학교에 합격해 자취를 시작했다.
홀로 있는 시간이 많아지며 사춘기 특유의 상념이 일기 시작했다.
‘인생이 뭘까?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지?
사람은 왜 태어나고, 어디로 가는 걸까?’
시내를 걷던 중 법웅사 고등부 법회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어려서부터 능엄주, 신묘장구대다라니 수행을 깊이 하셨던 어머니의 손을 잡고
절에 가곤 했기에 처음 본 도량에 들어서는 게 낯설지는 않았더랬다.
‘반야심경’을 강의하던 남화여 법사가 학생들에게 물었다.
“여기에 기왓장이 있고 도자기가 있어, 이 둘은 같을까? 다를까?”
학생들 대부분이 ‘다르다’고 손을 들었는데 남화여 법사는
“둘 다 흙으로 만들어졌기에 같다”고 했다.
하나의 섬광이 뇌리에서 번쩍였다. 본질과 평등을 처음으로 인식했다.
그 후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각 반의 교단에 올라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건지를 알고 싶다면 우리 절로 오라”며
불교학생회 활동에 열성을 다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제 막 직장생활을 하던 때다.
서울 가회동의 연등국제불교회관에서
영어와 불교를 동시에 가르쳐준다는 소식을 듣고 걸음 했는데
마침 창립기념 법회가 봉행되고 있었다.
무진(영국인 비구니) 스님이 건네준 차와 떡을 공양하고
빈 접시를 갖다 놓으려 부엌에 들어갔다.
싱크대에 가득 쌓인 그릇을 비구니 스님 혼자 씻고 있었다.
‘설거지 하는 사람이 진짜 복을 지을 줄 아는 사람’이라는
어머니 말씀이 떠올라 말없이 운력에 동참했다.
이를 지켜본 무진 스님은 곧바로 주지 원명(1950∼2003) 스님에게 소개했다.
어느 날 무진 스님이 뜬금없이 제안했다.
“출가하는 게 어때?”
“싫어요. 저는 일도 재미있고 결혼도 할 겁니다.”
“결혼은 바보나 하는 거야!”
당연하게 받아들었던 ‘삶의 방식’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진지하게 출가를 고민하고 있을 때
원명 스님과 무진 스님은 5박 6일의 해인사 수련회를 권했다.
도량에서 처음 마주한 원택 스님 특유의 여유와 고요함이 깃든 ‘합장’에
‘나도 누구에게나 성스러운 합장이 절로 나오는 삶을 살아보고 싶다’며
출가 원력을 더 단단히 다졌다.
그러나 어머니, 언니, 동생 등 속세의 인연이 눈에 밟혔다.
원명 스님이 웃으며 말했다.
“내 생각에 너는 출가 못하겠다.
출가는 땅을 덮고 하늘을 덮고도 남는 복이 있어야 할 수 있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청주 안심사로 가서는 ‘지장경’을 독송했다.
평소 108배도 않았던 무릎에 매일 2000배가 얹어지니
걷기조차 힘들 정도로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3일째 되던 날 ‘지장경’의 한 대목에 꽂혔다.
‘중생들의 고통을 제가 대신 받을 테니 저들의 고통을 잠시라도 쉬게 해주십시오.’
가슴이 뭉클해지더니 눈물이 쏟아졌다.
“나 또한 그들의 고통을 쉬게 하는 길을 가고 싶다!”
은해사 백흥암 산문을 열고 출가했다. 은사는 영운(靈雲) 스님과 맺어졌다.
은사 영운 스님과 함께.
출가 길에 오를 때 자와 칼을 챙겼을 정도로 정확한 걸 좋아하고
맺고 끊음이 분명한 자우 스님이다. 백흥암을 택한 연유가 궁금하다.
“출가 전에 무진 스님하고 성지순례를 하던 중 백흥암을 참배한 적이 있어요.
무진 스님하고 담소를 나누던 은사 영운 스님(당시 입승)이
방 한편에서 재봉틀에 열중하고 있던 스님에게 잠시 ‘멈춰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 스님은 ‘예’하고는 곧바로 방을 나섰는데, 나가는 그 모습이 참 당당했습니다.
수행자의 기품이 느껴졌어요. 백흥암이 명실상부한 수행도량임을 그때 직감했습니다.”
백흥암으로 향하기 전 원명 스님의 권유로 석남사 산문을 열었는데 3일 만에 귀가했다.
“신심 돈독한 어머니였지만 저의 출가는 반대하셨어요.
이유는 ‘내 딸은 안 돼!’ 식탁에 석남사로 출가한다는 편지 한 장 남기고 떠났는데
큰 언니가 찾아왔어요. 식음을 전폐하신 어머니는 산도 쳐다보지 않는다고 해요.
마음 아프신 어머니가 자꾸 떠오르면 수행에도 큰 영향이 있을 것 같아 일단 귀가했습니다.”
어머니가 음식을 해주면 맛있게 먹고 옷을 사 주거나 용돈을 주면 감사하게 받았다.
화색이 돈 어머니 얼굴을 확인하고는 다시 길을 나섰다.
남겨놓은 편지엔 ‘수계 후 찾아오겠다’는 인사말만 남겼을 뿐 ‘백흥암’은 적지 않았다.
어머니는 “집 나간 딸을 데려왔는데 또 절로 가니 팔자”라며
수행자로서의 길을 올곧이 가기를 서원했다.
무악재에 처음 문을 연 비로자나국제선원은
허름한 건물 3층에 있었는데 60만 원 월세살이였다.
전기‧수도세 내기도 벅찼을 터인데
어린이들에게 영어와 불교를 함께 가르치는 ‘담마스쿨’을 열었다.
“스리랑카 유학 중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어요.
네 살, 다섯 살 아이도 절에 가더군요.
왜 가는지 유심히 보니 사찰에서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기 때문이었어요.
어린아이는 스리랑카어를 배우고 좀 큰 아이는 영어와 수학을 배우고 있었어요.
그렇게 커간 아이들이 등교 전에 자신의 집 정원에 피어있는 꽃을 따서 불전에 올립니다.”
영어 담마캠프는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어린이들과 함께 하는 어린이 영어 담마스쿨에 정성을 다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화 한 토막을 청했다.
“6개월 정도 담마스쿨에 나오던 아이가 제 귓가에 ‘저는 돈이 아주 많아요’라고 속삭여요.
‘좋겠네. 그럼 스님도 좀 주라’며 웃었는데 아이는 100만원 되는 날 반을 주겠다고 해요.
어느 날 그 아이가 큰 소리로 ‘자우 스님’ 하며 달려왔어요.
그동안 돈을 모아왔는데 초등학교 입학한다고
할머니와 외할머니가 큰돈을 주어 100만 원이 되었다는 거예요.
약속대로 50만 원을 주겠다고 하는데 ‘안돼!’라고 잘라 말할 수 없어
부모님께 여쭤보라며 돌려보냈지요. 그러고는 잊었어요.
그런데 얼마 후 아이와 부모가 찾아온 겁니다. 저는 출타 중이었어요.
메모를 남겨 두었더군요. ‘병주가 불전함에 보시금 넣었어요.
열어보세요.’ 50만 원과 한 장의 편지가 들어 있었어요,
‘스님, 사랑해요. 오래오래 사세요. 병주가.’
그 아이가 벌써 사이버 보안과에서 공부하는 멋진 대학생이 되었어요.”
유아를 대상으로 한 담마스쿨은 청소년‧청년들에게까지 확대됐다.
천년 고찰 등에서 진행하는 수련회 영어 담마캠프도 큰 호응을 얻고 왔다.
이 과정에서만 수계를 받은 어린이‧청소년만 해도 1000명이 넘는다.
“어린 시절에 아름다운 소리를 듣고 풍광을 보며 아름다운 생각을 하는 건 참으로 중요합니다.
한 번 잘못 새겨진 마음은 평생 자신을 괴롭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마음보다
서로를 이해하고 노력하는 마음을 기를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땅은 낮은 곳에 있지만 모든 생명체의 의지처가 되어 주지요.
낮은 자리에서 자비로울 수 있고, 그 자비를 통해 행복할 수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습니다.
그 아이들이 이끄는 세상에는 분명 사랑과 자비가 흘러넘칠 겁니다.”
미국 연수 때 만난 무진 스님과 로버트 버스웰 UCLA 교수.
영어로 진행하는 외국인 참선법회에는
미국을 비롯해 영국, 독일, 인도, 스위스, 프랑스, 네덜란드 등
세계 각국에서 온 외국인들이 참여한다.
코로나19 전까지만 해도 2000여 명이 참석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대부분 사업가나 원어민 강사이기에 두어 달 만에 떠나는 경우도 많다.
“아쉬움은 있으나 불심 종자가 심어진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언젠가 크게 피어날 수도 있어요. 그 인연으로 발심 출가한 사람도 3명이나 됩니다.
가부좌 틀기도 어려워했는데 귀국해서도 정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보람을 느낍니다.
우리와 함께 정진했던 스위스인 심리학 박사 베로닉의 말을 늘 기억합니다.
‘지금이야말로 한국불교가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 고요해지도록 도와야 할 때입니다.’
해외를 나가지 않아도 한국에 온 외국인들에게 올곧게 법을 전해야 합니다.
그들은 이미 마음이 열린 상태로 오기에 진심으로 불교를 받아들입니다.”
한 후배의 토로에 공감해 ‘나란다 수행관’을 열었다.
“매주 동국대에서 3일에 걸쳐 석사 과정 수업을 듣는데 머물 곳이 없어
여관, 고시촌, 찜질방을 전전한다는 거예요.
‘이렇게까지 하면서 공부를 해야 하나?’하는 자괴감도 든다고 하더군요.
저도 한탄했습니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어찌 변한 게 하나도 없나!
선배 스님들은 이제까지 뭐 하고 있나!
며칠 후 새벽 예불을 마치고 경전을 독송하던 중에 소스라치게 놀랐어요.
‘세상에. 내가 그 선배잖아?’ 제 명의의 전세 대출로 첫 번째 수행관을 마련했습니다.”
두 번째 수행관은 상좌의 이름으로 대출을 받아 열었다. 그래도 공간은 부족했다.
자우 스님의 호소를 귀담아들은 신심 돈독한
조원희 불자가 방 2개짜리 옥탑방을 내주어 세 번째 수행관을 확보했다.
인연이 닿으면 꼭 하고 싶은 불사가 있을 법하다.
출가로 빚은 환한 미소가 행간 속에서 빛난다.
“생을 마칠 때까지 서로를 보듬어 주며
수행정진하는 불심 가득한 수행공동체를 설립하고 싶습니다.
내심 동국대 일산병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조성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자우 스님의 책 ‘너의 손을 놓지 않을게’ 속 한 대목이 귓전을 울린다.
힘겨울 때 다짐했던 한 마디다.
‘대단한 것은 못하더라도 사람들이 힘들어할 때 조금은 위로가 되는 스님,
인생의 갈림길에서 괴로워할 때 작은 빛이라도 비추어 줄 수 있는
그런 스님이면 족하지 않겠는가.’
자우 스님의 길이자 우리의 길이기도 하다.
비로자나국제선원 건물에 걸린 글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고통에서 벗어나 고요와 지혜에 이르는 당신은 빛입니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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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우 스님은
은해사 백흥암에서 영운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동학사승가대학을 졸업하고 석남사, 대원사, 약수암 등의 제방선원에서 정진했다.
조계종 국제포교사를 품수했고, 스리랑카 캘라니아대학에서 불교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인도네시아 해인사 포교원 주지 소임을 본 후
2006년 조계종 비로자나국제선원을 개원했다.
현재 조계사청년회와 성신여대 불교학생회, LMB싱어즈 지도법사이자
조계종 국제전법단 부단장이다.
저서로는 ‘Conversations with Mumyeong Sunim’(무진 스님과 공저)과
‘너의 손을 놓지 않을게’가 있다.
2023년 10월 25일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