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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해달별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으뜸빛
일월산 산행수필 : 이종균 시인
낙동정맥의 중간 부분 해발 300미터 위아래의 산간협곡지대에 자리한
영양군 인구 2만이 채 못 되는 작은 고장이다.
여기 우뚝 솟은 일월산(日月山) 남쪽 기슭 주실마을에는 명문가
한양 조씨(漢陽趙氏)가 300여 년 전 터를 잡아 살아오며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는데 옛날 부녀자들의 필사본으로 전해 내려온다는 이른바
내간체(內簡體)의 가사 집 「일월산가(日月山歌)」를 우연한 기회에
읽으며 조지훈(趙芝薰)선생이 시문의 큰 별로 추앙받는 것은 이 할머님들의
유전인자를 받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선생의 시 ‘석문’에 원한도 사무칠 양이면 지극한 정성에 열리지 않는다던
돌문과 그에 얽힌 황 씨 부인의 전설에 마음이 끌려 먼 길을 찾아 나섰다.
<천화사 오름길>
산악회버스가 청량산기슭을 스쳐 영양 땅 청기면 당리 석문마을을 지날 때 나는 전설의
별천지로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이곳 지명유래에 의하면 옛날 이 석문마을에 돌문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허물어지고 돌의
흔적만 남아있다 했으며, 황씨 부인당 전설에서는 황씨 부인이 당리의 우씨와 결혼하여
산 것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포장도로로 이어지는 찰당리 들목 새로 막은 저수지 앞에서 내려 천화사(天華寺)
길로 들어섰다.
다옥한 신록에 덮여 하늘이 뵈지 않는 터널,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에 능히 십리는
됨직한 콘크리트 포장길이 지루하지 않았다.
<석벌집>
불가에서 천상의 꽃이란 뜻이라는 이 절은 세 칸 대웅전을 갖추었을 뿐 그 외는 판넬
가건물들이었는데 그 처마 밑에 농구공보다 더 큰 석벌집이 매달려 있어 인간과 자연의
공생지대임을 느끼게 한다.
산에 다니며 어쩌다 높은 바위틈에 매달린 걸 본 일이 있으나 그 속에 담긴 석청(石淸)은
산삼에 버금가는 신약이라는데 이 절이 아니고서야 어찌 저렇게 매달려있을 수 있을까.
<천화사 대웅전>
오르내리는 사람의 발길에 밟힌 길을 빼고는 온 산이 약초인지 산나물인지 알 수없는
풀잎으로 가득 덮여있다.
일월산가에 이 산에만 나는 금죽(金竹)나물은 진상품으로 상감께서 잡숴보고 무릎을
치며 선미(仙味)라 하셨다는데 이를 싫어하신 임금은 모두 요사(夭死)하고 영조대왕은
이를 많이 잡숴 팔십 형수를 하셨다고 읊었다.
문장력도 문장력이려니와 조선조 역대임금 추존 왕 장조까지를 합한 스물여덟 분의
평균수명이 마흔 다섯을 넘기지 못했으되 영조만은 여든두 살까지 사셨으니 그런 통계를
그때 부녀자들이 어찌 아셨을까 놀랍기만 하다.
어쨌든 영양은 지금도 산나물의 주산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녹음에 가렸던 하늘이 툭 트이며 난데없는 포장도로가 눈앞을 가로 막는데
“일월산 황씨 부인당” 이란 현판이 서있어 나는 줄달음쳐 올라갔다
<황씨부인 영정>
오름길 똑바로 일월산 산신을 모신 산영각(山靈閣)이 작아도 위엄 있게 서있고 그 왼편에
흡사 가정집 같은 건물 안방에 황씨 부인의 영정이 걸려있는데 단연 빼어난 미인이다.
한국의 전설(연세대 박연준 교수 편)에 의하면 옛날 이 산 근처 자리목마을 황씨 집 에
처녀가 있었는데 이웃마을 정씨 집으로 출가를 했다. 첫날밤, 신랑이 뒷간에 다녀오다
신방에 비친 댓잎그림자를 칼 그림자로 잘못보고 연적의 소행으로 여겨 그 길로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원삼족두리도 벗지 않은 체 며칠을 기다리던 신부는 슬그머니 일어나 일월산으로 들어가
지금 이 부인당 자리에 꿇어앉았다.
한편 신랑은 새장가를 들었으나 아이를 낳기만 하면 모두 죽는지라 황씨 부인의 원한
때문이란 점쟁이의 말을 듣고 일월산으로 찾아간다.
그러나 신부는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침 월자재(月字宰)에서 수도하던 유 대사의 주선
으로 말을 건네려는 순간 황씨 부인은 안개가 서리더니 한 줌 재가 되고, 신랑은 그 원혼을
달래기 위해 부인당을 세웠다는 내용이다.
<황씨 부인당>
여기저기 떠도는 대여섯 가지의 이설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믿음직한가 싶어 이곳에서는
어느 전설의 황씨 부인을 모시고 있는가 한 보살에게 물었더니 우리 황씨 부인은 어마어마한
능력을 가진 신으로 전설과는 아무 관계없다는 대답이다.
그 옆에 있는 일월천지신명당(日月天地神明堂)이란 비석을 보며 저 사당은 어디 있는가
또 물었더니 천지신명은 천지가 집인데 무슨 사당이 따로 필요하겠느냐 되묻는다.
어리석은 질문에 지혜로운 답변인가 그도 그럴법하다.
일행은 대부분 지름길인 일월재로 내려가는데 나는 정수리 일자(日字)봉을 향해 올라갔다.
공군부대 포장도로를 타고 오르면 방송중계탑을 먼저 만나게 되는데 그 앞에 일월산이란
표지석이 서있으나 정수리 일자봉(1.218m)은 동남방 약 2킬로 지점에 있다.
경북 내륙에서 동해를 바라볼 수 있는 가장 높은 봉우리, 해돋이가 장관이라 ‘해맞이 광장’
이라 부른다지만 봉우리의 반은 공군부대가 차지하고 있다.
<월자봉 들목의 돌비석>
영양군지에 는 이 산마루에 천지(天池)가 있어 그 모양이 해와 달을 닮아 일월산이라
한다고 소개되어 있으나 옛날 이산에 정말 천지가 있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발길을 되돌려 월자봉(月字峰:1205m)으로 향하는 길, 누가 쌓았는지 돌탑 5~6기가 도열
하듯 서있어 정취를 더해준다.
여기서 일월재 까지는 비교적 완만한 능선의 내리막길이다. 다만 무성한 숲에 가려 산세를
살필 수 없음이 아쉬울 뿐이다.
일월재를 넘어서니 거대한 바위가 우뚝 서있어 그 위로 올라보니 전망이 환히 트여 일자봉과
월자봉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구멍바위 위에서 바라본 일자봉(좌)과 월자봉(우)
날카롭지 않되 우람하고, 기묘함이 없되 중후한 저 봉우리, 그리도 부드럽고 너그럽고
덕스런 모습 그러나 감히 넘보지 못하는 위엄을 지녔다. 나는 말없이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육중한 바위 아랫도리에 사람 하나 구부려 드나들 수 있는 맞구멍이 뻥 뚫려 구멍바위
라 이른다.
이 바위로부터 험한 암 능이 이어지는데 동화재를 넘어서면서 절정을 이룬다.
판상절리현상으로 높이 쌓여진 널찍널찍한 돌무더기 다래바위 사이를 빠져나오니
이번에는 그보다 더 크고 높은 비조암이 앞길을 막는다. 저 바위 위의 작은 바위가
나는 새를 닮아서 붙인 이름일까.
유럽의 고성(古城)같은 암 능 지대를 빠져나오니 다시 평탄한 등성이인데 앞서간
일행들이 산나물을 캐고 있었다.
<구멍바위>
별로 사람의 발길이 없는 한적한 산길에 낙엽이 두둑이 쌓여있다.
낙엽 밟는 것이 어떤 이에게는 낭만이라지만 오름길에 쌓인 낙엽은 지친 나그네의
발길이 자꾸만 미끌려 힘겨운 고행의 길이었다.
마지막 추자봉을 넘어 내려가는 가파른 길, 썩은 나뭇가지나 잔돌 하나만 잘못 딛어도
미끌려 낙상할 수 있는 위험한 길을 탈 없이 내려왔다.
사무치는 원한도 세월이 약이런가 석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서울 이정균 수필에서>
-황씨부인당 전설 소개-
<첫번째 전설>
지금부터 약 160여 년 전 순조 때 청기면 당리에 살던 우씨(우씨)의 부인 평해(平海)
황씨(黃氏)는 남편과 혼인하여 금실 좋게 살았으나 딸만 9명을 낳아 시어머니의 학대가
극심했다. 황씨 부인은 아들을 낳지 못하는 죄책감으로 얼굴을 들고 시어머니와 남편을
대 할 수 없어 아홉째 딸이 젓 뗄 무렵 갑자기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우씨댁에서는 아무리 찾아도 찾지 못했다.
이 무렵 일월산에 산삼이 많이 났는데, 산삼 캐는 사람이 산삼을 캐려고 자기가 지어
놓은 삼막(蔘幕)에 갔더니, 황씨부인이 자기의 삼막에 소복단좌하고 있었다.
더럭 겁이 나 되돌아서려는데, 황씨부인이 말을 하기에 자세히 보니 분명 살아 있는
황씨부인이었다. 황씨부인은 자기 시어머니와 남편의 안부며 딸의 안부를 묻고는
자기가 여기에 있다는 말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산삼 캐는 사람은 그렇게 하겠다는 말을 하고 돌아섰으나, 어쩐지 마음이 섬뜩하여
그 길로 산을 내려와 우씨댁에 가서 그 이야기를 전하였다. 금실좋게 살던 우씨는
부인을 잃고 삶의 재미를 모르고 살던 중 자기 부인이 살아 있다는 말을 듣고는 곧장
삼막에 가보니, 과연 자기 부인이 앉아 있어, “여보!”하고 달려가 손을 덥석 잡으니
부인은 사라지고 백골과 재만 남았다. 남편은 탄식을 하면서 백골을 거두어 장사지냈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이 황씨부인의 한을 풀기 위해 그 자리에 당을 지어 주고 ‘황씨부인당’
이라 했다고 한다.
(이재춘 제보, 유달선 조사, 박진태 외 1인 공저, 『영남지방의 동제와 탈놀이』,태학사, 1996)
<두번째 전설>
약 150년 전 순조 때 청기면 당리에 우씨 청년이 일찍 과부가 된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오두막집과 것은 땅마지기만으로 농사를 지으며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았다.
이웃마을 평해 황씨와 결혼하여 아내를 극진히 사랑하며 살았다.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고 사는데, 아들의 지극하던 효성이 약해지자 사랑을 빼앗긴 청상과부 시어머니의
시샘과 질투는 더욱 심해져서, 며느리의 조그만 실수도 용서하지 않고 학대했다.
그리하여 황씨부인은 차라리 저승에 가서나마 남편과 행복하게 살아보려고 남매를 집에
남겨 두고 우물에 가는 척 집을 나와 일월산으로 들어갔다.
그 뒤 산삼 캐는 사람이 움막 안에서 목을 매고 죽어 있는 낮선 부인을 발견하고 놀라서
산을 내려 왔다.
그때 이 마을에 살던 영천 이씨 명존이란 사람이 황씨부인이 현몽한 대로 남편에게 알리니,
남편이 황씨부인의 유골을 거두어 장례를 치렀다.
그 후 황씨부인이 다시 이명존의 꿈에 나타나 “여보시오. 나는 어린 자식을 두고 일찍
목숨을 끊은 죄로 저승에서도 방황하는 혼령이오니, 가난한 우리 남편을 대신해서
내 외로운 혼령이 쉴 수 있도록 당사를 세워 주시면 여한이 없겠나이다.”라고 말하여
이명존이 황씨부인의 현몽대로 당사를 지어 그녀의 원혼을 위로했다고 한다.
(『경북마을지』,<하>,1992)
<세번째 전설>
옛날옛날 영양군 일월산 밑에 황씨라는 처녀가 살았다. 마을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총각이 둘 있었는데, 그중 몸은 약하지만 마음이 고운 사람을 선택해서 결혼식을 올렸다.
혼례를 올린 날 신랑은 뒷간에 갔다가 오는 길에 마치 칼을 들고 자신을 기다리는 듯한
사내의 모습이 신방에 언뜻 비치는 것을 발견하고, 그 날로 타관으로 도망쳐 버렸다.
신랑이 타관으로 도망간 사실을 모르는 신부는 녹의흉상에 족두리 화관을 쓴 채로 하루
이틀 기다리기를 오년여 계속하다가 결국 그 자리에서 눈을 감고 말았다.
낯선 마을에 정착한 신랑을 머슴살이를 하면서, 그 지방에 있는 처녀에게 새 장가를
들었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백일을 채우지 못하고 죽기를 네 번이나 했다.
무당을 찾아가 사연을 물어 본 즉, 죽은 귀신이 아직도 너를 기다리기 때문에 네 자식은
모두 죽었고, 모두가 사는 방법은 귀신을 찾아가는 수 밖에 없다고 하였다.
사내는 무당의 말대로 고행의 옛집을 찾아가서 폐가가 된 신방에 들어가 보니 신부는
초야의 모습 그대로 시체가 되어 풀 더미 속에 앉아 있었다. 사내가 툇마루에 앉아 있다가
잠이 들었는데, 신부가 나타나 나를 업어다가 일월산 산마루에 앉혀 달라고 부탁하였다.
꿈에서 깨어나 신부의 부탁대로 하자 죽은 신부는 “이제는 하직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이에 사내는 산에 있으면서 바위를 쪼아 족두리를쓴 신부 모양의 석상을 만들고,
작은 사당을 지어 조석으로 봉양하다가 돌신부 옆에서 눈을 감았다.
그러나 산사태로 사당이 무너지고, 오랜 세월이 흘러 사당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1946년 부산에 살던 한 아낙네가 병에 걸려 상태가 점점 악화되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한 여자가 나타나,
“나는 일월산 황씨부인인데, 나를 파내서 섬기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남편에게 꿈 이야기를 하고, 일월산으로 함께 가서 초막을 짓고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 날 발이 닿는 대로 가다가 웅덩이에서 족두리를 쓴 석상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당집을 짓고 석상을 섬겼다.
그 이후 그 아낙네의 병을 씻은 듯이 나았고, 아울러 황씨부인당의 영험을 받아서
용한 무당이 되었다고 한다.
(『김열규 에세이』 중 ‘일월산 산신된 새색시’ 참조)
-"황씨부인애틋한 사랑"주제로한 시詩 소개-
석문石門 : 조지훈
당신의 손끝만 스쳐도 소리 없이 열릴 돌문이 있습니다.
뭇사람이 조바심치나 굳이 닫힌 이 돌문 안에는,석벽 난간(石壁欄干) 열두 층계 위에 이제 검푸른 이끼가
앉았습니다.
당신이 오시는 날까지는,
길이 꺼지지 않을 촛불 한 자루도 간직하였습니다.
이는 당신의 그리운 얼굴이 이 희미한 불 앞에 어리울 때까지는,
천 년(千年)이 지나도 눈 감지 않을 저희 슬픈 영혼의 모습입니다.
길숨한 속눈썹에 항시 어리운 이 두어 방울 이슬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남긴 푸른 도포 자락으로 이 눈썹을 씻으랍니까?
두 볼은 옛날 그대로 복사꽃 빛이지만,
한숨에 절로 입술이 푸르러 감을 어찌합니까?
몇 만리 굽이치는 강물을 건너와
당신의 따슨 손길이 저의 목덜미를 어루만질 때,
그때야 저는 자취도 없이 한 줌 티끌로 사라지겠습니다.
어두운 밤 하늘 허공 중천(虛空中天)에 바람처럼 사라지는
저의 옷자락은, 눈물 어린 눈이 아니고는 보이지 못하오리다.
여기 돌문이 있습니다.
원한도 사무칠 양이면 지극한 정성에
열리지 않는 돌문이 있습니다.
당신이 오셔서 다시 천년(千年)토록 앉아 기다리라고,
슬픈 비바람에 낡아 가는 돌문이 있습니다.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