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14세(Louis 14)와 프랑스의 절대왕정(絶對王政)(3) 이길상 다. 루이 14세(Louis 14)가 남긴 유산들
(1) 베르사유궁전(Versailles, Palais de -宮殿) 건축
"짐(朕)은 곧 국가다"....이 말을 루이14세의 대명사처럼 쓰고 있으나, 언제, 어디서, 무엇 때문에 이런 말을 남겼는지에대해서는 그의 회상록을 비롯한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다고 한다.
다만 전설처럼 전해진 그에 대한 많은 일화(逸話)가운데 한 가지, 1655년 4월 어느날, 파리고등법원에서는 안 도트리슈의 섭정 정부에서 제출한 법안에 항의하기 위해서 회의 중에 있었는데, 이 자리에 열 일곱 살의 국왕 루이 14세가 승마복 차림에 채찍을 들고 사냥 길에서 돌아 온 듯한 모습으로 불쑥 나타나 법관들에게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러분들은 짐이 내놓은 법안을 과연 국가의이익을 위해 검토하고 있는가? 여러분들은 너무 오해하고 있다. 짐을 떠나서는 국가가 없다. 국가 그것은 곧 짐이다(L'Etat c'est moi)"..........
이런 이야기도 있다. 수염까지 허옇게 쉬어버린 어떤 궁정 문지기가, 그 앞을 지나가는 국왕에게 경의를 표하자 젊은 국왕은 그에게 "경의 나이가 얼마인고?..... 폐하께서 생각하시는 나이가 소신(小臣)의 나이 입니다".....자기의 나이조차도 국왕의 뜻에 따라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것이 비록 늙은 문지기의 생각만은 아니었고, 대개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것이 프랑스 절대왕정의 모습이다......
파리의 남서쪽 11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베르사유(베사유: Versailles)는 이 궁전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숲이 우거진 여니 한촌(寒村)과 다름없었다. 1624년 루이 13세가 사냥 중의 쉼 터로 조그마한 집 한 채를 지었는데, 그뒤를 이은 소년 왕 루이 14세는 정치를 모후와 마자랭에게 맡기고, 가끔 그의 애인 라 발리에르(La Valliere, Louise Francoise de la Baume le blanc, 1644 ~ 1710)와 함께 이곳에 와서 머물다 가곤 했었다.
여기에 궁전을 세우기 시작한 것은 1661년 9월, 앞서 이야기한 루이 14세가 저 문제의 푸케의 보의 성관을 다녀온 뒤, 푸케를 공금횡령 죄로구속하고, "국왕의 궁전이 조신(朝臣)의 저택보다 초라 해서야 되겠는가? 즉시 베르사유에 새로운 궁전을 세우라"라고 착공을 명령했다. 사소한 명성(名聲)까지도독점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로서는 화려한 푸케의 성관을 보고 시기와 질투와 더불어오기가 발동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친정(親政)을 시작한지 채 6개월도되지 않았을 때 일이고 보면,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 루이 14세는 파리를 몹시 싫어했다. 프롱드의 난 등으로 숱한 고난을 겪었고, 지저분하고 시끄러운 파리보다는 아늑하고 조용한 베르사유를 몹시 좋아해서 이곳에 궁전을 세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평소에도 애첩(愛妾)과 자주 드나들던 이곳에는 루이13세 때 지은 작은 집이 이미 있었기 때문에 엄격히 말하면 신축(新築)이 아니고 개축(改築)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어쨋던 저 화려한 베르사유궁전은 이렇게 해서 세상에 태어났다. 새로운 궁전 착공의 명령이 내리자, 푸케의 성관을 드나들던 예술가들은 모두 이 새로운 궁전공사에 동원되었다.
건축 담당은 L. 르보(Le Vau, Louis / 1621~ 1670), 정원 담당은 르노트르(Le Notre, Andre / 1613 ~1700), 전체의 장식 담당은 르브룅(Le Brun, Charles / Lebrun, Charles / 1619 ~ 1690), 진행은 콜베르, 총지휘는 국왕 자신, 사람과 돈의 힘(人工, 黃金)으로 자신의 취향에 맞게 자연을 개량하고 정복하는 것이 루이 14세에게는 몹시 즐거운 일이었다. 따라서 돌 하나 옮기고 나무하나심는 것도 일일이 국왕 자신이 결정했다.
1662년경부터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된 베르사유 궁전은 대정원을 시작으로, 1668년에는 중앙부가 증축되고, 1680년대에는 남북으로 뻗는익부(翼部) 가 추가되었다. 이런 외형에서부터, 왕의 거실을 비롯하여 궁정예배당,거울의 방, 전쟁의 방 등이 갖추어지기 까지 20 수년간의 공사 기간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성급한 루이 14세는 착공 3년 뒤인 1664년봄, 정원의 일부가 완성되자 이곳에서 그의 애첩(愛妾) 라 발리에르를 위하여 "마법(魔法)의 섬의 환락"이라는 이름의 대축제를 1 주일간 열었는데, 이곳에 가기 위해 루이14세가 길을 나서자, 파리에서 베르사유까지의 연도에는 국왕의 행렬을 보기 위한 인파로 가득차고, 미완성의 정원에는 조신(朝臣)들을 비롯한 귀족, 군인, 의장대등이 입추(立錐)의 여지조차 남기지 않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축제는 기마경기를 비롯해서, 음악, 연극, 무용 등 매우 다양했다. 음악과 무용은 이탈리아 피렌체 태생의 륄리(Lully, Jean - Baptiste/ 1632 ~ 1687)가, 연극은 극작가 몰리에르(Moliere(1622 ~ 1673)가 각각 맡았는데,특히 몰리에르는 그의 유명한 운문희극(韻文戱劇) "타르튀프(Le Tartuffe)"를 여기에서 첫 번째로 공연할 행운을 얻었다.
뿐만 아니라 루이 14세는 이 연극을 관람하기 위해참석한 귀부인들에게는 평균 300 리브르(livres) 상당의 고급 보석이나, 금·은 세공품의 선물도 빠짐없이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5막짜리 운문희극(韻文戱劇) 타르튀프가 당시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의 부패·타락을 고발하고, 위선(僞善)을 풍자(諷刺)한 대담한 희극이었기 때문에, 성직자들은 물론, 일반 신자들까지 외면, 시중에서의 공연은 중지당하였고, 세 차례의 개작을 거친 후 허용되었다고 한다.
몰리에르가 그의 연극이 공연 중지 당하여 어려움에처해 있을 때, 루이 14세는 그를 국왕전속극단으로 임명하고 1만 5000리브르의 연금을주어 보상하였다고 하는데, 한 예술가의 입장에서 보면 그만한 다행이 없겠으나,이런 한 번의 행사에 들어가는 이런 저런 엄청난 비용은 왕실의 재정에도 타격을주었지만, 보다 더 큰 타격은 국민들에게 돌아 갔다는 것은 너무도 뻔한 사실이었다.
애첩(愛妾)을 위한 "마법의 섬의 환락"이라는 이름의 축제를 시작으로 루이 14세의 화려한 궁정생활은 계속된다. 왕의 궁전에는귀족들이 줄을 이어 드나들고, 이미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정신적, 물질적으로도 과거의 기반을 다 잃어버린 귀족들에게는 국왕 한 사람의 은혜에 매달리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힘을 잃고 있었다.
귀족들이 지방으로 내려가면 몸과 마음은 자유롭지만 먹을 것이 없고, 궁정에 출입하면 먹을 걱정은 없으나 종(奴僕)의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그리고 국왕의 총애에서 멀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늘 긴장하고 자리를 지켜 국왕에게 경의를 표해야 했고, 그렇지 못할 경우 반역의 혐의를 뒤집어 써야 했다.
누구도 믿지 못했던 루이 14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 방 저 방을 돌아다니면서, 있어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으면 당장 의혹을 품었다. 궁정 사람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국왕에게 눈 도장이 찍혀야 했다. 하루 이틀이 아니고 장기적일 때 사람들은 피로감을 느낄 것이다. 왕이 몸 져 눕기라도 기대해 보지만, 왕성한 체력을 가진 국왕은 지칠 줄도 몰랐다.
궁정의 하찮은 시중꾼의 직책도 3만에서 10만 리브르를 내고 사야 했고 살 수 있는 것만으도 당시로서는 특권이었다.
눈 도장?지금도 윗 사람에게 그 눈 도장 하나를 찍기 위해서 스스로 찾아가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치장하고 줄을 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그래도 출세하는 것을 보면 이것 또한 사회생활에서는필요악(必要惡)일까? 그래도 루이 14세는 자신이 아랫사람들을 찾아 다녔다니 아랫사람들로서는어렵게 찾아 가야할 수고는 면해 준 셈이다.
베르사유궁전의 화려한 영화만큼이나 그 영욕의 역사도가지 가지다.1783년에는 영국 대표를 불러들여 이곳에서 영국으로 하여금 미국독립을 승인케 하였고, 1789년 프랑스 대 혁명이 일어났을 때는 분노한 파리시민들에게 타도의 표적이 되어 베르사유로 가자고 외쳤고, 이때 많은 유물들이 흩어졌다.
1871년 파리를 점령한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는 이 베르사유궁전에서 독일 황제의 즉위식을 가짐으로서 프랑스인들의 자존심에 치명타를 가했으나. 1919년에는 다시 이곳에서 독일의 대표를 불러들여 저 유명한 베르사유체제에 굴복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고궁으로 일반에게 공개된 지금은 세계의 관광객을 이곳으로 모으고 있다.
베르사유궁전을 17세기에 나타난 화려하고 장엄한 바로크(Baroque) 풍의 건축물이라고 한다. 16세기 르네상스 고전양식에 이어 등장한 화려하고 웅장한 새로운 기법의 회화와 조각을 고전미술과 구분해서 바로크라고 했고, 이 말에는 변칙(變則), 이상(異常), 기묘(奇妙) 등의 뜻을 가진 모멸적인 의미가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경향이 회화나 조각뿐만 아니라, 문학, 음악,건축 등 다른 모든 분야로 확대되었고, 그 해석도 한 시대를 대표하는 용어로 자리잡게 되었다. 17세기에서 18세기 초엽까지를 화려하고 장엄한 바로크시대...18세기는 섬세하고우아한 로코코...
지금은 세계의 이름 있는 건축물들이 관광자원화 되면서 대부분 공개되고 있다. 베이징의 자금성(紫禁城), 만리장성, 로마의 베드로 성당, 인도의 타지마할, 이집트의 피라미드,.......보는 사람들에 따라 평가는 다르겠지만, 내가 본 베르사유(벳사유)는 정원을 제외하면 듣던 것만큼 웅장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는 것이 몇 년 전 페키지 관광단에 어울려 정신없이 돌아본 후, 지금까지 나의 기억에남아 있는 여운이다.
(2) 낭트칙령의 폐지
낭트칙령(Nantes,Edit de / 1598), 이것은 부르봉왕조를 연 앙리 4세가 지루한 위그노전쟁을 끝내고,신·구 교도들 간의 화해를 목적으로 내린 결단으로서, 구교의 나라 프랑스에서 신교도들도 인정한다는 것이 그 요지라고 할 수 있다.
1685년 루이 14세는 이 낭트칙령을 폐기했다. 자기의 통치를 위해서는 종교는 하나라야 되고, 그것은 구교, 즉 카톨릭으로 단일화 시켜야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의 조부(祖父) 앙리 4세가 이 칙령을 발표한 것은 내란 수습을 위한 일시적인 것이었다는 구차한 설명도 덧 붙였다.
그 결과 카톨릭교도가 아닌 자는 모든 공직(公職)과 자유업(自由業)에서 추방당하는 종교적인 박해가 다시 일어났다.
이런 틈을 비집고 날뛰기 시작한 것이 이른바 용기병들(dragonnades / 龍騎兵),
용기병이란 16세기에 프랑스에서 생겨난 기병(騎兵)으로서, 이들은 말을 타고 전투를 하는 일반기병과는 달리, 이동시에만 말을 타고 실제 전투시에는 말에서 내려 보병전투를 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들을 용기병이라고 부른 것은, 그들이 항상 드래건(dragon:龍)이라는 이름의 소총을 장비하고 말을 탄데서 비롯된 명칭이라고 한다. 오늘날 기갑(機甲) 또는 기계화부대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 이들이 신교도를 개종시킨다는 권리를 확보했는지는 모르지만, 이들 용기병들은 개종(改宗)을 빌미로 신교도들의 집에 난입, 16세기 신대륙으로 건너간 스페인병사들이 원주민들에게 행했던 것처럼 약탈과 폭행을 서슴없이 자행하였다. 결국 장화 신은 선교사란 이름으로 그럴 듯하게 포장을 했지만, 공인된 강도단에 불과했다.
이런 핍박을 피해서 수 많은 신교도들이 프랑스를 떠나게 되었는데, 그들의 대부분이 숙련공들이었고, 이들이 찾아간 곳은 영국, 네덜란드, 프로이센 등, 그 숫자는 대충 20만명에서 30만명.....이러한 인력의 손실은 프랑스 국부의 손실이 되었고, 반대로 이를 받아들인 쪽에서는 그만큼 나라를 살찌게 만들었다.
이때의 사실을 대 귀족이면서도 그의 오만함 때문에 루이 14세로부터 버림 받았던 대귀족 생 시몽(Saint-Simon, Duc de/Rouvroy,Louis de (1675 ~1755)은 그의 회상록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고향에서 쫓겨나입을 것 먹을 것이 없어 우는 자,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그들은 제각기 뛰어난기술을 몸에 익힌 채 다른 나라로 갔다. 그만큼 프랑스는 손해를 입었고, 다른 나라를 살찌게 했다........"(공상적 사회주의자로 널리 알려진 생시몽은 아님)
이보다 조금 앞서 독일의 뉘른베르크에서는 30년 전쟁의 후유증으로 인구가 줄고, 많은 전쟁 고아와 미망인이 생겨나자, 10년을 한시적으로 정해서 일부이처제를 허용한다는 포고령을 내렸다. 1649년을 기점으로 앞으로 10년동안,모든 남자들은 두 사람의 아내를 가지는 것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국가에서 일부다처,...그것도 10년이라는 기한을 정해서,....
같은 시기 영국에서는 심사율이라는 것을 만들어(1673) 카톨릭 교도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사람들을 공직에서 추방했고, 같은 이유 때문에 제임스 2세는 명예혁명으로 왕위까지 잃고 초라한 몰골로 프랑스로 망명했다(1689). 그런데 프랑스에서는 그 반대로 카톨릭교도가 아니라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공직에서 추방되거나, 외국으로 망명하였다면, 누가 옳고 누가 그런 것인가? 이런 것들이 이시대 유럽의 정치와 종교였다. 그렇다면 이 당시 우리나라를 비롯한 중국과 일본에서는기독교가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는가?
일본에 예수회 선교사 사비에르(Xavier, Francisco: 1506 ~ 1552)가 들어온 것은 1549년이고, 같은 예수회 소속의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 들어온 것이 1582년이다. 이들에 의해서 일본과 중국에서는 카톨릭이 전파되었는데,일본에서는 기리스탕(切支丹)이라 했고, 중국에서는 야소교 혹은 서교 등으로 불렀다. 우리나라에는 선교사가 들어와 선교활동을 한 것은 이보다 훨씬 후(1794)에 일이다.
사비에르가 일본에서 쉽게 포교활동을 할 수 있었던것은 무역에서 얻는 이익이 크다는 것을 서로가 알았고, 이런 이해 관계가 서로 통했기 때문이다. 사비에르가 일본 체류 3개월 후 인도의 고아에 있었던 한 신부에게 보낸편지에서 "사가이(堺)와의 통상에 특히 필요한 물품의 표를 동봉한다....이표에 적혀있는 상품을 갖고 오면 막대한 금과 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후추(胡楸)는많이 실으면 안된다. 양이 적어야 비싸게 팔 수 있다. 특히 사가이에서 그러하다..."
사가이란 일본의 오사까(대판)의 다른 이름이다. 이런 선교사들의 무역에 관한 관심 못지 않게 일본의 지방 영주인 다이묘(大名)들 또한 서양과의 무역이 주는 이익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양자간의 접촉은 마찰 없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래서 일본에서는 규슈(九州)지방을 중심으로 카톨릭의 전파가 급속도로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17세기 초, 에도(江戶)막부가 들어서고, 영국과 네덜란드 상인들의 출입이 시작되면서 사정은 달라진다.
1600년 규슈에는 네덜란드 상선 한 척이 표착하였다. 이 배의 승무원인 영국인 윌리엄 아담스(William Adams)와 네덜란드인 얀 요스텐(JanJoosten)은 당시의 실력자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고문으로 초빙되어 에도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정책자문을 하였는데, 이들을 통해서 선교활동 없이도(기독교도가 아니라도) 서양과의 무역거래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야스는 1603년 무가정권인 에도 막부를 세워 일본의 지배자가 되면서, 1606년 반기독교령을 발표하였고, 1609년에는 이것을 재강조하였다.1612년에는 더욱 기독교를 탄압하여 가신 중의 신자에게 배교를 명령하고, 모든 교회는 폐쇄하였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기독교를 일본불교의 한 분파 정도로 생각하였고, 서양인을 남만인(南蠻人), 교회를 난빈지(南蠻寺), 선교사를 반뗀렌(伴天連)이라 불렀는데, 불교든 기독교든 일본의 신도(神道)에 흡수되어 그 구분이 지금도 매우 모호하다.
마카오에 상륙한 마테오 리치는 중국에서 포교가 성공적으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지식층의 지지 없이는 불가하다는 것을 간파하고, 이들을 학문적으로 유도하기 위하여 기하학원본(유클리드 기하학), 지리학적 설명을 덧 붙인 곤여만국전도(세계지도), 각종천문학, 등을 중국어로 번역 출간하여 새로운 학문의 세계로 이들이 끌여 들였다.
이러한 학문들은 중국인 지식층의 관심을 끌게 되었고,서광계(徐光啓), 이지조(李之藻) 등의 유력한 관료가 개종(改宗)하여 그의 전교사업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그가 쓴 천주실의(天主實義)는 중국에서 보다 우리나라에 더 큰 영향을 주어, 한국 천주교 성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중국에서는마테오 리치 훨씬 이전에 이미 기독교를 접한 바가 있었다.
635년, 당의 태종 9년에 대진국(大秦國 / 로마) 사람 아라본(阿羅本) 일행이 당(唐)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에 도착하여 대진경교(大秦景敎)를 전했는데, 이것이 카톨릭교회에서 비록 이단으로 선고는 되었으나, 네스토리우스교(Nestorianism)로서 뿌리는 역시 기독교다. 이 네스토리우스파의 기독교를 중국에서는 경교(景敎)라 불렀고,한 때 교세가 번창하기도 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도교에 흡수 소멸되고 말았다.
마테오 리치로부터 시작된 중국 야소교도 그 후 청대에 이르러 금교령이 내려지기도 했고, 몇 차례 박해도 받았지만 그 정도가 심한 것은 아니었고, 중국인들 역시 야소교를 도교의 일부로 보았기에 처음부터 큰 거부감은 없었다.
지금의 중국은 비록 개방은 했지만, 정체는 아직도 공산주의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치고, 또다른 중국이라 할 수 있는 홍콩이나 대만을 여행하다 보면, 수 많은 사람들이 무슨 국수처럼 생긴 길다란 향에 불을 붙여, 한 묶음 정도나 되는 것을 양손으로 몰아 쥐고, 사원 앞에서 연신 고개를 숙였다 폈다 하면서, 중얼거리는 모습을 쉽게볼 수 있는데, 아마도 입으로는 각자의 소원을 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사원 안을 들여다 보면, 거기에는 부처님도, 천제님도, 마리아님도, 관운장을 비롯한 이름 모를 신장님까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신상을 모셔 놓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누구에게 소원성취를 기원하는 것일까?
조선에서 언제부터 천주교가 전래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임진왜란(1592) 때 적장 고니시(小西行長)를 따라 들어온 서양선교사가 웅천지방에서 1년간 머물었다고 하나 천주교를 전파한 흔적은 찾아 볼 수 없다고 한다. 1614년 이수광은 그가 쓴 지봉유설에서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소개하였고, 병자호란때 볼모로 간 소현세자가 베이징에서 독일인 선교사 샬 폰 벨(아담 샬 / Adam Schallvon Bell, Johann / 1591 ~1666)과 접촉했다고는 하나 1645년 그가 의문을 남긴 채죽음으로서 천주교의 입문 여부는 알 길이 없다.
1627년 제주도에 표착한 네덜란드인 벨테브레(Weltevree,Jan Janse)는 이름을 박연이라 바꾸고 이 땅에서 살다가 죽었으며,1653년 역시 제주도에 표착했던 하멜(Hamel Hendrik)등 36명 중 다수가 이 땅에서 살다가 죽었으나 이들로부터 어떤 종교적인 정황이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1784년 부친의 사행(使行) 길에 끼여 베이징에 갔던 이승훈(李承薰/1756~1801.2)이 그곳에서 예수회 선교사 루이 드 그라몽 신부로부터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교리 서적과 십자고상(十字苦像)을 가지고 귀국,1785년 명례방(明禮坊 / 명동)의 김범우(金範禹) 집을 교회로 삼고, 가성직(假聖職) 제도를 채택, 사제대행권자로서 주일(主日)미사와 영세를 행하며 전도를 시작한 것이 한국천주교의 시초로 되어있다.
곧 이어 1794년에는 청으로부터 주문모 신부가 들어오고, 교세도 확장되었으나 조선의 양반층은 성리학적 신분질서에 위배 된다 하여 이를 거부하였고 때로는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악용되어 대규모 박해가 일어나기도 했다. 신유박해(1801)로 많은 사람들이 순교로서 생을 마감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이야기들은 다음으로 미루고 루이 14세의 절대왕정으로돌아가 보자.
(3) 네 차례의 국제 전쟁
-- 다음호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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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길상의 세계사풀이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