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로 입구 비자림로부터 인상적이다. 길 양쪽으로 도열하듯 쭉쭉 뻗은 삼나무에 여기저기에서 감탄사가 터져나온다. 그런 이유로 이 멋진 풍경은 영화나 CF, 드라마의 한 장면으로 자주 등장한다.
출발 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숲길 중간중간에 쉼터와 화장실이 있지만 매점은 없다. 도시락과 물은 필히 지참해야 하고 자연보호를 위해 스틱사용은 금지다.
비자림로의 탐방 안내소 주차장에서부터 길을 시작한다. 이 길은 한동안 완만한 내리막을 가다가 물찻오름 입구까지는 완만한 오르막이 이어지고, 나머지 월든, 삼나무 숲으로 이어지는 산책길은 다시 완만한 내리막으로 끝나는 온유한 숲길이다. 평탄하면서도 제주의 어떤 숲길보다도 넓어 어린아이들과 함께 걸어도 좋다. 걷다보면 유모차를 끌고 산책을 즐기는 젊은 부부들도 종종 눈에 들어온다.
숲길에는 때죽나무와 서어나무, 졸참나무, 삼나무들이 무성하게 서 있다. 숲은 안으로 들수록 더 짙어진다. 표고 차이가 거의 없이 평탄하게 이어진 사려니 숲길을 천천히 산책하노라면 마음도 덩달아 편안해지는 느낌이다.
숲길로 들어서자 화산송이길이 반긴다. 송이는 화산의 분화로 분출되는 고체물질 중 하나다. 제주도 송이는 1990년대 말 보존자원으로 분류돼 도외 반출이 엄격하게 금지되고 있다. 신기하다고 가져가지 말라는 이야기다. 제주 송이로 덮인 부드럽고 폭신폭신한 길을 걷노라니 발걸음이 절로 가벼워진다.
평소에는 말라있다가 폭우가 내리면 엄청난 급류를 만들기도 하는 천미천을 지나 1시간 30분쯤 천천히 걸어 물찻오름 입구에 이르면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띄게 줄어들면서 숲에는 서서히 적막감이 감돌기 시작한다. 사려니숲을 찾은 많은 사람들은 이곳에서 발길을 돌린다. 입구에 차를 대고 출발했다면 길을 더 가게될 경우 돌아나오는 길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물찻오름은 훼손방지를 위해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 해발 717미터인 물찻오름 정상의 화구호에는 붕어, 개구리, 물뱀 등이 서식하고 있다. 2010년 12월까지였던 휴식년제가 해마다 연장되어 아직까지도 들어갈 수가 없다. 입구의 표지석만으로 아쉬움을 대신할 수밖에.
사계절 모두 환상, 그 자체만으로 벗이 되고 위안이 되다
사려니숲은 어느 계절이 가장 아름다울까? 언제 가볼까 고민이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곳의 문화해설사는 “참꽃에 동백꽃까지 피어 5월이면 환상적”, “가을이면 서어나무, 단풍나무 등이 장관”, “겨울이면 삼나무 숲에 내리는 눈이 절정”이라며 어느 계절에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자랑을 늘어놓는다. 당장 눈 앞의 풍경만으로도 족하니 그 말이 틀리지는 않은 것 같다.
울창한 숲길을 따라 입구에서부터 2시간 정도 걸으면 ‘치유와 명상의 숲’ 입구에 이르게 된다. 삼나무와 편백나무가 빽빽하게 높이 치솟은 치유와 명상의 숲에는 나무 데크가 깔려 있어 따라 들어가면 숲 안쪽에 벤치가 있다. 여기에 앉아 위를 쳐다보면 숲은 어둡고 차분하다. 아무 방해도 받지 않는 숲의 고요에 가슴이 벅차다. 하늘을 보니 높게 솟은 나무 가지 사이사이에서 햇살 줄기가 찬란하게 빛을 내고 있다. 아, 자연이란 그 자체만으로 벗이 되고 위안이 된다. 사려니 숲길 곳곳에 삼나무 숲이 우거져 있지만 이곳과 사려니 숲길이 끝나는 붉은오름 주변의 삼나무 숲이 가장 넓고 빽빽하다.
삼나무 숲에서 나오자마자 어디선가 정적을 깨는 ‘부스럭’ 소리에 잠시 긴장이 느껴졌다.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반가운 녀석이 눈에 잡혔다. 먹이를 찾아 내려온 노루다. 낯선 이방인의 시선에도 아무 상관없이 부지런하게 풀을 뜯는 녀석의 모습에서 혼자서 긴장했던 속내가 쑥스러워 머쓱한 웃음을 지을 뿐이다. 길섶에서 문득 붉은 열매가 인상적인 천남성 한송이가 눈에 들어왔다. 옛날 사약의 재료로 쓰였다는 천남성은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깊은 숲속에서만 자라는 독초로 알려져 있다. 제주의 거문오름에서 본 적이 있는 천남성과는 두번째 만남이다. 두려운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원시성이 풍부한 사려니숲의 건강한 생태를 눈으로 확인했다는 사실에 반가움이 앞섰다.
10km 남짓 3시간 넘게 걸어온 사려니숲길은 울창한 삼나무, 편백나무 군락이 인상적인 붉은오름 입구에서 안녕을 고한다. 이쯤에서는 두고 갈 숲의 풍경이 눈에 밟혀 못내 아쉽지만, 언제 찾아도 아름답다는 문화해설사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다시 찾을 것을 기약한다. 그 아쉬움은 도종환 시인이 쓴 시 ‘사려니숲길’의 한 구절을 떠올리는 것으로 대신했다.
“어제도 사막 모래 언덕을 넘었구나 싶은 날, 내 말을 가만히 웃으며 들어주는 이와 오래 걷고 싶은 길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한라산 중산간 신역으로 뻗어있는 사려니숲길 같은.”
글 사진_유인근 스포츠서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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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용차로 가려면 제주시 광양4거리에서 성판악-서귀포 방면 5·16(1131번)도로를 달리다가 교래입구 삼거리에서 좌회전, 비자림로(1112번 도로)로 1.1km쯤 가면 사려니 숲길 입구에 닿는다. 하지만 주차장에 차를 대고 다시 돌아오기가 불편하다.
•대중교통이 편하다. 제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찾아갈 때는 제주 번영로 노선 중에서 꼭 ‘교래 경유’ 버스를 타야 한다. 물찻오름 입구에서 내리면 된다. 코스가 끝나고 붉은오름 입구로 나와서 제주로 돌아가려면 길 건너편에서 제주행 버스를 타면 된다. 버스가 자주 다니지 않기 때문에 미리 버스시간표를 확인하고 출발하는 게 좋다. 20분 간격으로 버스가 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