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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부부는 한국에서 첫 유발상좌다
굉아(해탈화, 원주)
우리 부부는 전국의 사찰을 다니면서 기도를 하였기 때문에 아주 많은 절과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 강원도 강릉 백운사가 있다. 만월산의 정기를 받은 고찰 백운사는 기도하기 좋기 때문에 여러 번 찾아가면서 자연스럽게 법안 스님과 가까워졌다.
“극락을 다녀오셨다는 관정 큰스님이 출가하신 중국 복건성 개평사를 다녀왔습니다.”
어느 날 법안 스님이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관정 큰스님이 극락 다녀오신 이야기를 쓴 「극락세계 유람기」라는 책을 주셨다. 우리 부부는 그 책을 보고 우리도 언젠가 꼭 관정 큰스님을 친견하고 싶다는 바람을 법안 스님에게 말씀 드렸다.
1998년인가 1999년경에 관정 큰스님이 강릉 백운사에 오셔서 법회를 가진다는 소식이 왔다. 당시 나는 충청도에 있는 몇 개의 절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너무 바쁜 일정이지만, 관정 큰스님을 만나는 기회를 놓칠 수가 없어서 몇 군데 일을 보고 법회 당일에야 겨우 강릉 백운사에 다다를 수 있었다. 관정 큰스님은 다른 스님과는 다르게 참석한 신도들에게 모두 마정수기를 해 주셨다. 모두 극락에 가라는 축원의 뜻이 있다고 하셨다.
모든 사람에게 마정수기를 해주시고, 우리 부부는 특별히 따로 부르시더니 다른 사람들에 비해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의식을 진행해 주셨다. 그리고 나에게는 굉아, 우리 집 거사에게는 굉규라는 법명을 내려주시고 귀의 증을 쓰셔서 낙관까지 찍어주셨다. 그리고 대중들이 모인 자리에서 선포하셨다.
“이 부부는 한국에서 처음 받아들이는 유발상좌다.”
이렇게 관정 큰스님과의 첫 만남부터 아주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고, 그 다음부터는 한국에 오실 때마다 직접 전화를 해주시면 우리 부부는 만사를 제쳐놓고 큰스님을 찾아뵙고 가능한 한 큰스님의 일정을 따라다니며 시봉하였다. 이때는 군위 압곡사의 자해 스님이 큰스님의 일정을 진행하셨기 때문에 그 인연으로 군위 압곡사도 두 번이나 찾아간 기억이 난다.
2000년 6월 16일은 상주 석문사에서 법회를 하고 17일에는 합동 천도재를 지냈다. 석문사와는 그 이전부터 인연을 맺고 자주 찾아간 곳이기 때문에 원주에 있는 불자들과 함께 찾아가 마정수기도 받고 천도재에도 참여하였다.
2000년 가을에 다시 한국에 오신 큰스님은 주로 강릉 백운사와 상주 석문사에 계시면서 주변의 절들에 가서 법회를 하셨는데 내가 평소 다니며 기도를 많이 했던 절이라 열심히 모셨고, 강원 정선에 있는 만덕 스님 절에도 가보고 여러 절을 탐방할 수 있었다.
이때는 아주 특별한 일이 있었다. 큰스님이 석문사 회주 굉룡(관정 큰스님이 주신 법명) 보살의 머리를 깎아주고 출가시키겠다고 하신 것이다. 석문사 회주는 여러 번 사양하셨지만 큰스님은 이미 가사까지 장만하여 가지고 오셨기 때문에 끝까지 사양하실 수도 없었다. 나는 이 소식을 듣고 부처님 제자로 거듭 나시는 굉룡 회주를 위해 꽃다발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새벽 삭발식에 참여하여 꽃다발을 올리고 진심으로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이런 나의 순수한 마음과는 달리 큰스님을 수행한 한 스님으로부터 상상을 초월한 꾸중을 들었다.
나는 그 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여러 가지로 많이 생각했다. 출가란 부처님시대부터 지금까지 시대에 따라 많은 변천이 있지만 지금 한국에는 수많은 종단이 있어 서로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2000년 한 논문에 발표한 것을 보면 당시 주소와 연락처가 확보된 불교 교단 수가 전체 168개였는데 그 가운데 103개 교단 현황이 파악되었다고 한다. 이런 종단 가운데 상위 몇 개를 빼놓은 100개가 넘는 종단은 경쟁적으로 법인회원을 모집하고 있기 때문에 출가의식도 간단하고 누구나 쉽게 그 종단의 승려증을 취득할 수 있어 겉모습만 보고는 스님들의 수행능력을 판단할 수가 없는 세상이 되었다. 또한 상위 몇 개의 종단에서 강원이나 대학을 나와 어렵게 계를 받은 승려라고 해서 수행을 더 철저하게 한다고 하기 어렵다는 것이 한국 불교가 갖는 현주소이다. 이 점은 오랫동안 신행 생활을 하고 많은 사찰을 다녀 본 불자들은 다 공감하리라고 본다. 결국 어떤 종단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계를 받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승려가 얼마나 계를 잘 지키고 얼마나 열심히 수행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결론을 갖게 된다.
그동안 나는 석문사 회주의 신행생활이나 불사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출가한 스님 못지않게 계를 잘 지키고 불사에도 사심이 없으시다는 것을 보아왔다. 1990년부터 시작한 10년 불사에 자신의 모든 경제력과 힘을 쏟아 부었고 자신의 명에나 부를 취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평생 원력이었던 아미타불을 모시는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어디다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가람불사를 완성하였고, 아미타불 염불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나는 관정 큰스님이 굉룡 회주의 머리를 깎아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극락을 다녀오신 큰스님의 기준으로 볼 때는 결국 누가 열심히 해서 극락을 가는가 하는 것이 중요했다. 극락 가면 다 불퇴전 보살이 되고 성인 반열에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그 뒤 15년의 결과를 놓고 보면, 그 당시 큰스님의 갑작스런 수계에 비판적이었던 한국의 제자도 불사를 잘하고 수행도 많이 하셨겠지만 굉룡 스님의 신행생활도 관정 큰스님의 기대에 벗어나지 않았다고 본다. 자기가 지은 가람을 가지고 자신의 이익을 챙기지 않았고, 관정 큰스님이 일러주신 정토선 염불을 한시도 마음에서 떼지 않고 자나 깨나 쉬지 않고 정근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2001년에도 두 번이나 오셔서 석문사에 머무셨다. 4월에 오셨을 때는 몸이 좋지 않으셔서 굉룡 스님이 모시고 병원을 다녔다. 다른 일정은 없고 3주 동안이나 한곳에 머무셨기 때문에 도리어 우리는 큰스님을 가까이 모시는 시간이 많았다. 나는 부지런히 내가 사는 원주 불자들을 모아서 석문사를 찾아가 큰스님을 친견하게 하였다.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사람들이 도력이 높으신 큰스님과 인연을 맺어 극락에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아이들 따라 미국에 간 제부는 수기를 받고나서 이렇게 말했다.
“스님이 내 정수리에 손가락을 대고 다라니를 외는 순간 강한 빛이 몸속으로 들어오면서 몸이 막 떨려 견디기가 힘들었다.”
또 어떤 신도는 “온 몸이 어지러우면서 무언가에 탁 부딪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하였다. 나는 이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한국의 첫 유발상좌로서 작게나마 도리를 한 것 같아 마음이 뿌듯하였다.
어느 날 큰스님이 말씀하셨다.
“굉아는 바지를 하나 사서 돈 넣을 전대를 만들어 주기 바란다.”
신도들이 용채로 드린 돈을 넣을 전대가 필요하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바지를 하나 사서 양쪽에 돈을 넣을 큰 전대를 달아드렸더니 아주 좋아하셨다. 당시 80이 가까운 연세이셨지만 정말 열심히 모든 사람을 위해 축원해주시고 한 번도 마다하시지 않았다. 평소에는 정말 아이 같이 순진하고 천진하셨으며, 마치 부모님처럼 우리 부부를 어여삐 여기셨다.
세월은 흘러 큰스님이 2007년 입적하셨고 큰 스님과 인연을 맺은 지도 15년이 훌쩍 넘어 내가 큰스님이 한국에 처음 오셨을 때 나이가 되어간다. 나도 이제 삶을 정리하고 극락 갈 준비를 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큰스님이 주신 정토선 염불이 있다. 재가 생활을 하기 때문에 굉룡 스님만큼 열심히는 못하지만 나도 열심히 극락가는 염불을 하며 늘 관정 큰스님을 잊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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