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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입법의회와 국민공회(2)
2. 9월 학살과 상퀴로트
왕권이 정지되었으니 집행권자가 필요했다. 여섯 명의 대신들로 임시정부가 짜여졌다. 내무에 롤랑(Jean-Marie Roland de la Platiere), 외무에 르브룅(Albert Lebrun), 재무에 클라비에르(Etienne Claviere), 법무에 당통, 육군에 세르방(Joseph Servan), 해군에 몽주(Gaspard Monge)였다. 이들은 이제 대신이라고 칭하기보다 장관이라고 칭해야 했다. 왜냐하면 왕정은 없어지고 이들을 임명한 것은 왕이 아니라 의회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합법적인 의회 앞에 크게 맞서 나타난 혁명적인 파리 코뮌은 왕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의회에 대해서도 불신하고 협박하고 비난하였다. 의회와 코뮌의 대립은 합법적인 힘과 혁명적인 힘의 대립이며 부르주아와 민중의 대립이었다. 이 대립은 앞으로 국민공회가 소집되어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선포하기까지 6주일간 계속된다.
파리 코뮌이란 무엇일까? 그 뜻은 파리 시의회(City Council)라는 뜻이었다. 파리는 본래 행정구역이 60구(district)로 나뉘어 있었는데, 1790년 5월에 48개의 섹시옹(section)으로 개편되었다. 섹시옹마다 1800명 정도의 능동 시민이 있었는데, 그들의 대표자들이 시 코뮌을 구성하여 반혁명 세력에 대항하고 있었다. 그런데 8월 10일 사건을 계기로 각 섹시옹이, 특히 노동자들의 섹시옹이 그들의 코뮌 대표자들을 수동 시민으로 교체하여 코뮌의 능동 시민을 압도하게 되었다 수동 시민은 선거권도 피선거권도 없었으므로 이런 처사는 합법이 아니었다. 그러나 입법의회가 파리 코뮌의 압력에 의하여 능동 시민과 수동 시민의 차별을 없애고 보통선거에 의하여 새 국회인 국민공회의 소집을 가결하였으므로 코뮌의 불법성은 현실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합법성의 기준은 이미 개정하기로 선포한 낡은 헌법의 원리에 의하여 측정될 것이 아니라 새 헌법의 원리에 의하여 측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새 헌법의 원리는 보통선거의 원리였다. 그런데 이 보통선거의 원리를 입법의회로 하여금 승인케 한 것은 파리 코뮌이었으니, 입법의회는 파리 코뮌의 실력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파리 코뮌의 지도자는 코뮌을 대표하여 임시정부에 입각한 법무장관 당통이었다. 당시 당통은 자코뱅 클럽의 좌파로서 로베스피에르와 단짝이었다. 그리고 코뮌에 신설된 감시 위원회(comite de surveillance)의 실려자 마라도 한패였다.
8월 10일 사건은 프랑스에 외교적 고립과 군사적 위기를 불러왔다. 당시의 유럽 국가들은 군주국가였다. 따라서 민중 봉기에 의한 루이의 실권이 그들에게 준 충격과 분노는 상상을 넘는 것이었다. 8월 10일부터 외국 사신들이 프랑스를 떠났다. 8월 23일 프랑스의 외부 장관 르브룅은 프랑스는 덴마크와 스웨덴 이외에는 만족스런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가 없다고 보고하고 있다. 프랑스는 혁명이 격화함으로써 유럽의 국제 관계에서 추방되고 있었다.
동시에 8월 10일 사건은 유럽 국가들을 군사적으로도 자극하였다. 당시의 전황을 간단히 살펴보면, 연합군은 브룬스비크 휘하에 프로이센군이 4만 2,000, 헤센군이 5,000이고, 오스트리아 전선에 망명 귀족 5,000을 합하여 3만 4,000, 벨기에 전선에 망명 귀족 4,000을 합하여 2만 9,000이 있었다. 이들이 프랑스의 동부와 북부에 쳐들어오고 있었다. 당시 외국의 여론은 10월 초에는 브룬스비크가 파리에 입성할 것으로 보고 있었다.
연합군은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고, 프랑스군은 후퇴를 거듭하였다. 프랑스군은 켈레르만(Francois Christophe Kellermann) 장군의 중부군 2만 8,000, 디옹(Theobald Dillon) 장군의 라인군 2만 5,000, 뒤무리에(Charles Francois du Perier Dumoulriez) 장군의 북부군 6만 명이 일선에 배치되어 있었다. 프랑스군의 패전은 군사저긍로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프랑스군이 곧 항복하고 후퇴한다는 소식은 국내의 반혁명파에게 반란의 용기를 북돋아주었던 것이다. 프랑스군이 후퇴를 거듭할수록 국내에서는 반혁명 반란의 위험이 높아져 갔다. 의회는 12인 위원회에 일선 군대에 대한 독재권을 부여하여 일선에 파견하는 한편, 특별 재판소를 설치하여 8월 10일 사건 때의 반혁명 분자를 처단하기로 했다. 이렇게 숨가쁘게 돌아가던 8월 19일 프로이센군이 또 국경을 넘었다. 이는 광범한 반혁명 반란의 신호탄이었다. 3,000명의 반혁명 용의자가 투옥되고 6만 명의 신병이 모집되고 3만 자루의 창이 제조되고 파리 주변에는 참호가 파였다.
이러한 때에 옥중에 갇혀 있는 반혁명 혐의자들이 반란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거기에다 8월 10일 사건 특별 재판이 지지부진한 데 대한 상퀼로드의 불만과 분노가 치솟고 있었다. 마라가 일선으로 출전할 연맹병들에게 “감옥에 갇혀 있는 민중의 적을 제재하지 않고는 일선으로 출전하지 말라”는 격문을 남겼다 이에 파리의 가장 과격한 구들이 연맹병이 출전하기 전에 옥중의 혐의자들을 모두 처형할 것을 결의하였다.
공교롭게도 9월 2일 베르됭 요새가 적군에게 포위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베르됭이 함락되면 오래지 않아 적군이 파리로 쇄도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반혁명의 반란이 전국을 휩쓸 것이다. 드디어 파리 코뮌의 포고문이 나붙었다.
“무기를 들라, 시민 제군, 무기를 들라. 적군이 우리 성문 바깥에 육박했다. 당장, 제군의 깃발을 높이 들고 진격하라. 마르스 연병장으로 모여라, 16만의 군대가 당장 편성되어야 한다.”
의회가 파리 코뮌의 결의를 뒤따랐다. 9월 2일 밤부터 연맹병은 감옥들을 차례로 찾아 선서 거부 성직자를 비롯한 수감자들을 약식 재판에 의하여 처형하였다. 처형 대상자는 마라의 감시 위원회가 이미 골라놓고 있었다. 피살자의 정확한 숫자는 알 길이 없으나 1,100내지 1,400으로 추계되고 있다. 국민 방위대와 파리 코뮌, 의회와 임시정부는 학살을 방관하거나 방조하였다. 사람들은 이 끔찍한 학살을 태연히 만족스럽게 지켜보고 있었다. 한편 학살이 진행되는 동안 여자들은 성당에 모여서 군복과 붕대를 만들었고, 군수공장에서는 무기를 제조하고, 일선 군인에게 보낼 선물이 줄을 이었다. 애국심의 정열이 폭발한 것이다. 마티에에 의하면 숭고한 정신과 악마의 잔인함에 나란히 나타났던 것이다.
9월 3일에는 코뮌 감시 위원회가 당통이 부서한 회장(回狀)을 각 도에 보냈다.
“감옥에 갇혀 있는 흉악한 음모꾼들의 일부가 인민에게 처형되었다. 이 처형은 인민이 적을 향해 진격하려는 이때 감옥의 벽 안에 숨어 있는 많은 반역자드를 공포로 누르는 데 필요한 정당한 행위였다.....이제는 국민전체가 공안(公安)을 지키기 위하여 그러한 필요 수단을 기꺼이 취할 때이다.”
이 회장은 파리의 학살 행위를 정당화하고 지방도 파리를 본받으라고 재촉하고 있는데 실은 지방에서도 이미 혐의자들의 처형이 시작되고 있었다. 마티에에 의하면 새 신(神)인 애국심은 옛 신들처럼 사람들의 목숨을 요구하였다.
9월 학살 후부터 지롱드당이 보수화하여 자코뱅당 좌파에 정면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의회는 6월 20일 이후 두 번에 걸쳐, 왕당 지지 청원서에 서명한 6,000명과 2만 명의 명단을 발표하여 그들의 피선거권을 박탈하기로 결정한 바 있었는데, 이제 지롱드당은 의회에서 2만 6,000명의 명단의 원본을 파기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파리 코뮌으로 하여금 시민의 사유재산을 지키겠다는 서약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의들은 의회의 코뮌에 대한 승리인 동시에 브리소파의 당통파에 대한 승리였다. 자코뱅당은 브리소의 지롱드파와 당통, 마라, 로베스피에르의 산악파(Montagnards)로 분열하기 시작하였다 이 분열은 왕권의 소멸과 함께 우익의 퇴양이 실각함으로써 집권파 내부에서 일어난 권력 싸움이라는 정치적 분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의 이념과 목표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사회적, 계급적 분열이었다. 지롱드파의 혁명 이념이 부르주아의 경제적 자유와 사유권의 절대를 비롯한 시민적 자유에 있었다면, 산악파의 혁명 이념은, 그런 사유권을 자유로이 행사하려고 하여도 소유한 것이 없는 민중에게도 그런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소유를 보장하려는 것이었다. 산악파의 이념은 자유와 함께 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물질적, 정치적 평등의 실현에 두었다. 두 파의 혁명 이념의 차이는 앞으로 혁명과 전쟁의 진행에 따라 한결 더 명백히 드러나게 되고, 특히 국내외 반혁명을 분쇄하는 현실적 방법론에서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나게 되거니와 1792년 9월 국민공회의 선거 과정에서 이미 그 기본적 차이가 드러나게 된다.
당시 그들이 벌인 공방전의 중심 문제는 농지법과 징발법이었다. 농지법은 농지를 농민에게 균등히 분배하자는 토지개혁안이었다. 모든 시민은 각자 자기와 자기 가족을 부양할 만한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으면 시민으로서의 구실을 다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시민 국가의 농민은 생산수단으로서의 토지를 소유해야 했는데, 토지는 한정되어 있고 농민의 수는 많으므로 농민 저마다가 소유할 토지는 필연적으로 소규모일 수밖에 없었다. 산악파의 혁명 이념은 모든 시민이 소토지 생산자인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자기와 자기 가족이 먹고살 만한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는 자에게는 자유란 공허한 관념이었다. 산악파는 현실적으로 자유의 가치를 몸으로 이해하는 자만이 자유를 소유할 자격이 있고 자유를 지킬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런 시민들로 구성된 국가가 민주주의 국가라고 설파햇다. 따라서 민주주의국가의 시민들로 구성된 각 개인과 그들 가족이 먹고 살만한 생산수단의 소유가 보장되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들은 이런 의미의 경제적 평등이 보장되어 있지 않은 나라에서는 시민의 권리나 자유는 한낱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들의 논리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제도를 전제로 하고 있었다. 그것은 원리상 사유권의 절대성을 침식하거나 부정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공산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럼에도 지롱드파는 산악파의 농지법을 공산주의에 가까운 논리라고 비난하였다. 가히 매카시즘의 원조라고나 할 만했다.
지롱트파가 산악파를 공산주의적이라고 비난한 또 하나의 쟁점은 징발법이었다. 식량 위기와 물가앙등을 완화시키고 전쟁 물자의 공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는 식량과 차량 키타 여러 가지 물자의 강제 징발이 불가피하였다. 이는 전시에 군대의 강제징집이 불가피한 것과 마찬가지 이유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롱드파는 징발법을 공산주의적 수법이라고 비난하였다. 사실 소유한 것이 없는 일반 민중은 징발당할 것이 없었으니 징발법의 희생자는 징방당할 것을 소유한 유산 계층이었다. 그러므로 지롱드파가 물자의 강제 징발을 반대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지 않으나, 징발법을 소유권의 침해라고 하여 공산주의적 수법이라고 비난한 것은 잘못이었다. 마라는 소유권이나 자유권 이전에 우선 국민이 살아야 한다고 외치면서 부자에 대항하는 생활권의 정의를 내세웠고, 에베르는 상퀼로트와 연맹병 및 의용군이 없었더라면 부자들도 벌써 프로이센군의 공격 앞에 항복했을 것이 아니냐고 하면서 부자들의 탐욕을 비난하였다. 마라의 주장도 에베르의 비난도 공산주의적 발상은 결코 아니었다.
로베스피에르는 <나의 유권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외쳤다.
“왕정은 폐지되었다. 성직자도 귀족도 사라지고 평등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자기들만을 위한 공화국을 세워 부자와 관리의 이익을 위해 통치하려는 사이비 애국자와 평등과 국민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공화국을 건설하려고 애쓰는 진짜 애국자를 구별하라. 소란과 도둑이라는 관념을 민중과 빈곤이라는 관념에 결부시키려는 구태의연한 태도를 주시하라.”
이와 같은 말에서 우리는 자코뱅이 분열한 근본적인 원인을 짐작할 수 있다. 로베스피에르는 생활권과 재산권을 혼동하지 않았고 공익과 사익을 엄격히 구별하였다. 그는 생활권에 위협을 가하는 재산권과 공익을 침해하는 사익에 제한을 가하고 남용을 방지하여 민중의 생활권과 국가의 공익을 수호하려고 했으나, 소유권의 폐지를 말한 일은 전혀 없었고 또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는 혁명에서 이익을 얻는 자들이 가난한 민중을 경멸한다고 부르주아를 맹렬히 공격하면서 그 민중의 대변자로 나섰던 것이다. 이때의 민중은 무장봉기로 왕위를 무너뜨리고, 정치권력을 장악하여 자신의 대표자들을 제 손으로 뽑고, 스스로 무기를 들고 반혁명의 적군에 맞서 일선에서 싸우고 있는 바로 이들이었다. 이 민중이 혁명을 수행하고 혁명을 내외의 위협으로부터 지키고 있었지만, 혁명의 과실은 부르주아가 독점하고 민중은 전쟁과 빈곤에 가장 큰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는 자유와 소유권의 이름으로 민중의 생활권을 위협하고 국가의 공익을 침해하고 있었다. 거기서 로베스피에르와 그가 이끄는 산악파는,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개인의 자유와 재산에 대한 제한을 호소할 채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채비가 공산주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러나 지롱드파는 산악파를 질서를 파괴하는 공산주의자로 몰아세웠다. 브리소는 저서 <프랑스의 모든 공화주의자에게 호소한다>에서 “질서의 파괴자란 재산, 안락, 물가, 사회에 대한 각종 서비스 등 모든 것을 평등하게 하려는 자들이고, 농지에서 일하고 그 대가를 국회에 요구하는 자들이고, 재능과 지식과 덕까지도 평등하기를 바라는 자들이다. 그런데 이자들은 이 모든 것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다.”라고 말하고 있다. 브리소는 그러한 것을 갖고 있는 자들이 그것을 계속 소유할 수 있게 하는 보수적인 정책을 좇았다. 브리소와 그의 지롱드파는 계몽된 지주와 부르주아의 집단으로서 그들이 가진 재산과 지식과 교양을 보존하고 강화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재산의 보존을 위하여 소유권을 절대시하고 경제적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의 이론 체계를 수립하여 부르주아 공화국을 건설하려고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유권과 함께 정치권력도 독점해야만 하였다. 이미 푀양파와 왕권을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으니, 이제 문제는 재산도 교양도 없는 민중을 정치권력에서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돈도 교양도 없는 민중을 본능적으로 혐오하고 무력한 존재로 멸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민중이 푀양파와 왕권의 제거에 결정적인 역할을 맡아 지금 스스로를 무장하고 정치권력을 쥐고 있지 않은가! 여기서 지롱드파는 산악파를 질서를 파괴하는 공산주의자로 모든 길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브리소는 마라, 로베스피에르, 샤보(Francois Chabot)를 질서 파괴자로 낙인짝었다.
재산과 권력과 명예를 소유한 자는 언제 어디서나 질서를 내세운다. 지롱드파도 그러하였다. 그러나 민중의 눈에는 지롱드파야말로 바로 어제까지 왕정의 질서를 파괴하고 공화정의 질서를 수립하려는 자들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질서란 어느 질서를 말하는 것인가? 민중이 수호해야 할 새 질서는 아직 정착되어 있지 않았다. 새 질서는 자유와 평등이 동시에 실현되는 질서라야 했다. 그리고 이제 막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반혁명 세력은 새 질서의 탄생을 막으려고 나라 안팎에서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고, 선서 거부 성직자들은 전국 도처에서 선거에 영향을 미치려고 안간힘을 다했으며, 귀족들은 왕정을 복귀시키려고 갖은 책략을 썼고, 망명 귀족을 앞장세운 적군은 국경을 넘어 조국의 땅을 짓밟고 있었다.
지롱드파와 산악파의 대립과 분열을 극복하지는 못하더라도 공동의 적을 눈앞에 두고 대립만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대립과 분열을 안은 채 공동의 적에 대항하는 연합 전선을 구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연합 전선을 구축하는 데 유리한 거점이 최소한 넷 있었다. 첫째는 왕정복고를 막기 위한 선거 대책이었다. 왕당 계통의 신문 발행을 금지하고, 왕을 국가 관리 명단에서 빼고, 의사당의 정면 벽에 걸려 있는 루이의 초상화를 내리고 그 자리에 인권선언문을 걸고, 재판과 법률을 국민의 이름으로 행하게 하고, 또 호명에 따라 구두로 가부를 표현하는 점호 투표제를 결의하는 다위가 첫째 선거 대책이었다. 둘째는 공화주의 운동의 전개였다. 이것은 첫 번째 대책을 뒷받침하는 적극적인 운동이었다. 의회 안에서는 의원들이 개인 자격으로 각기 공화국을 선언하고, 공적 발언에서 공화국을 찬양하고, 또 전국 각지에서 온갖 방법으로 공화주의를 선전하였다. 셋째는 선서 거부 성직자의 추방이었다. 약 2만 5,000명의 선서 거부 성직자가 8월 26일령에 따라 그날로부터 2주일 이내에 외국으로 추방되었다. 이들은 무식한 농민의 투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에 미리 추방한 것이다. 국민공회 의원 선거가 다 끝나고 입법의회가 해산하는 마지막 날 의회는 성직자와 시민의 세속화를 결의하였다. 곧 국민의 호적을 교회가 아니라 코뮌이 보관하고, 시민의 이혼이 허용되고, 결혼식과 장례식을 가톨릭 사제가 아닌 사람도 집전할 수 있게 하고, 또 성직자의 결혼의 자유와 봉급 이외의 임시 수입의 금지 등을 결의햇던 것이다. 넷째는 농민의 표를 얻기 위한 선거 대책으로서 공유지와 망명 귀족 재산을 농민에게 15년 연부로 분배해 주고 영주권의 되사기 제도를 크게 완화해 주었다. 되사기의 완전 폐지는 산악파가 국민공회를 완전히 지배하게 되는 1793년 7월 17일령에 의하여 비로소 실현된다. 농민은 자기들이 왕의 은혜로써 봉건귀족의 억압과 착취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왕권의 실추로써, 즉 공화주의에 의해서만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을 이제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농민은 이제 왕이 필요하지 않았다. 봉건제도는 왕정과 함께 몰락한다는 것을 이제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국민공회 의원 선거는 공화주의자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9월 20일 국민공회가 열렸다. 이날은 후퇴만 거듭하던 프랑스군이 발미에서 적의 전진을 막는 데 처음 성공한 날이기도 하였다. 프로이센군의 전진을 발미에서 막았을 때, 이는 왕정 이외의 질서는 무질서와 루력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낡은 관념을 불식시키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발미의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이 200명, 프랑스군이 300명 전사했는데, 이는 프랑스군이 얼마나 혈투했는가를 증명하는 숫자이다. 발미의 승리는 전술적 승리가 아니라 정신적, 정치적 승리였다. 발미의 승리 이후 프랑스군은 온 전선에서 반격하여 적군을 프랑스의 영토에서 몰아낼 뿐만 아니라 유럽의 전제국가들을 무너뜨렸다.
독일의 시인 쾨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는 프로이센 군영에서 발미의 전투를 지켜보고 “이날 이곳에서 세계사의 새 시대가 시작한다”고 기록하였다 .도그마와 권위에 안주하고 있던 낡은 질서가 자유에 바탕을 둔 새 질서 앞에 물러가고, 피동적으로 훈련받은 직업군인의 자리에 인간적인 자부심과 국민적인 독립심에 고무된 새 시민군이 출현하였다. 저쪽에는 왕과 신권이 있었고 이쪽에는 인민과 인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