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거주 외국 여성들의 토크 프로그램인 <미녀들의 수다>. 에바・사오리 등 외국인 스타들을 배출한 것으로도 유명한 이 방송에서, 하이옌은 똘망똘망한 눈망울과 거침없는 입담으로 인기를 끈 베트남 아가씨다. “개고기 국물이 시원하다”는 발언으로 이슈가 되기도 했던 그녀는 이 땅을 밟은 지 4년이 지난 지금 한국으로 귀화하는 한편, 어엿한 연기자로 안방극장을 찾고 있다.
“고교 졸업 후 한국에 계신 어머니를 따라 유학을 왔어요. 아는 오빠가 KBS월드 라디오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는데, <미녀들의 수다>라는 프로그램에서 외국인을 찾는다고 해서 담당 프로듀서를 만났고, 출연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죠. 한국에 온 지 3~4개월쯤 되었을까, 모든 것이 생소하고 말도 잘 못하던 때였는데 시청자는 그 모습을 귀엽게 봐 주시더라고요.”
하지만 ‘귀여운 베트남 여자’의 모습이 하이옌의 전부는 아니었나 보다. 한국에 온 이듬해인 2007년, KBS 월화 드라마 〈꽃 찾으러 왔단다〉로 연기에 데뷔한 그녀는 이후 KBS 드라마시티 〈바람이 분다〉편에서 첫 주연을 맡고, SBS 주말극장 〈사랑은 아무나 하나〉의 필리핀 처녀 ‘얀티’ 역할에 이어 현재는 KBS 1TV 전원 드라마 〈산 너머 남촌에는〉의 베트남 종갓집 며느리 ‘하이옌’과 다문화가정의 이야기를 다룬 EBS 월화드라마 〈마주보며 웃어〉의 ‘후엔’으로 의욕적인 연기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출연 중인 드라마는 모두 농어촌이 배경이에요. 주중에는 항상 야외촬영이 있어 충남 예산・태안 등 지방에 가야 해서 정신없이 바빠요.”
〈사랑은 아무나 하나〉에 출연할 때는 필리핀 처녀로 변신하기 위해 1시간 동안 전신분장을 하고 인조 머리를 붙이는 등 고생을 했고, 〈산 너머 남촌에는〉과 〈마주보며 웃어〉에 동시 출연하며 강행군하느라 지난여름에는 독감을 달고 살았지만 그는 어려서부터 꿈이었던 연기자가 된 것이 마냥 행복하고 감사하다고 한다.
“베트남에 살 때부터 연기에 관심이 많아 드라마에 나오는 연기자들을 흉내 내곤 했어요. 상상도 못했는데 한국에서 연기자가 되다니 정말 신기해요. 운이 좋았어요. 외국인 노동자나 다문화가정이 늘고 있어 드라마에서 그런 역할을 실감나게 연기하려면 아무래도 베트남 출신인 제가 유리한 부분이 있으니까요.”
그녀가 드라마에서 처음 맡은 배역은 분량도 적었고 베트남어로 연기했다. 그러나 연기자 경험이 쌓이면서 배역의 비중이 커지고, 지금은 완전히 한국어로만 연기한다. 한국어 실력이 느는 만큼 연기자로서도 성장해 이제는 감정 표현에도 집중할 수 있다고 한다.
“사실 한국 드라마에서 외국인이 맡을 수 있는 역할은 다양하지 않아요. 저도 대부분 베트남에서 온 이주여성을 연기해왔어요. 그렇기 때문에 캐릭터에 대한 연구가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비슷한 역할이라도 대사의 톤이나 연기하는 방법에 따라 이미지가 달라질 테니까요.”
그는 동료 연기자와 스태프의 조언이 연기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산 너머 남촌에는〉에서 하이옌의 시어머니 역할을 맡은 반효정은 그의 연기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니터링해주는 대선배. 처음에는 그의 카리스마에 눌려 무섭기도 했지만, 연기뿐 아니라 한국 생활에 대한 애정 어린 충고를 들으면서 진짜 엄마 같은 친근감을 느낀다.
“촬영 현장에서 다들 너무 잘해주세요. 다른 연기자들 얘기를 들어보면, ‘호랑이 감독님’도 많다는데 제가 출연하는 드라마 감독님들은 하나같이 성격이 좋으세요. 그래서 연기가 더 재미있어요. 몸이 힘들어도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임하려고 해요. 제가 재미없어하면 시청자들이 먼저 아실 거예요.”
옅은 화장에도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눈망울이 살아 있는 그에게 “화면보다 예쁘다”고 칭찬했더니, “‘화면발’이 잘 안 받는다”고 수줍게 답한다. 연예인에게는 흔하다는 성형수술 한 번 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모습이 실제로 봤을 때 더 돋보이기 때문인 것 같다.
“저는 예쁘게 보이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 그보다는 제 모습이 캐릭터에 맞느냐가 우선이니까요. 불법체류자로 고생하는 역할을 하면서 예뻐 보이면 안 되잖아요. 화장도 기초적인 것만 하는 편이에요.”
대학에서는 경영학 공부
한국에서 지낸 시간의 대부분을 연기에 투자했기에 그 외의 시간은 휴식을 취하는 데 쓴다고.
가요를 즐겨 듣는데, 채연은 ‘귀엽고 섹시해서’, 왁스의 노래는 ‘가사가 와 닿아서’ 좋아한다.
시끄러운 곳을 싫어해 집에 혼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는 그의 또 다른 에너지원은 친구들. 베트남에 있는 고향 친구들과는 간간이 메신저로 채팅을 하며 안부를 묻고, 어학당 동기인 외국인 친구들과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가거나 노래방에 가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도 한다. 대학(한양여대)에서 만난 한국인 친구들은 친절하고 다정해 하이옌의 한국 생활에 늘 보탬이 되어주는 고마운 사람들. 학교 친구들이 전부 여자인 것 빼고는 아쉬운 점이 없단다.
“전공을 연기가 아닌 경영 쪽으로 택한 이유는 제가 언제까지 연기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어서예요. 비록 열심히 하고는 있지만 어떤 이유로든 중간에 도태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경영을 공부하면 훗날 취직을 하거나 사업을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잖아요? 저에게 연기는 오른손이고, 전공은 왼손이에요.”
자신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이 의젓한 그는 연기 욕심만 많은 게 아니다. 노래하는 것을 좋아해 지난해에는 가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MBC에서 기획한 〈슈퍼스타 공작소〉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미소’라는 다국적(일본・미국・한국・베트남) 그룹의 멤버로 데뷔한 것. 비록 1집 앨범을 내고 활동을 중단했지만 소위 몸치라는 그가 강도 높은 춤 연습도 하고, 다른 멤버들과 화합하면서 흘린 땀은 연기생활에도 좋은 경험이 되었다.
하이옌은 활동 영역이 넓어짐에 따라 한국뿐 아니라 베트남 현지에서도 유명해졌다. 베트남 영화제에서 MC를 맡아 박찬욱 감독, 배우 김아중과 함께 한국영화를 소개하기도 한 그녀는 최근 〈마주보며 웃어〉의 촬영차 베트남을 방문, 현지 언론과 인터뷰하는 등 뜨거운 반응을 체감했다. 앞으로 기회가 닿는다면 베트남에서도 연기자로 활동할 생각이다. 하이옌에게는 남성 팬이 많다. 그녀의 미니홈피에 방문하는 팬들은 ‘애인처럼’ 살가운 응원을 아끼지 않는다. 그의 이상형은 ‘똑똑한 사람’. 잘생긴 남자는 “바람기가 많을 것 같아” 싫단다.
베트남 하노이 출신인 하이옌이 한국에 오기 전, TV 드라마에서 본 한국은 깨끗하고 아름다운 나라였다. 그런데 막상 한국에 와서는 드라마 속 예쁜 배경만 있는 건 아니어서 실망하기도 했다고. 그러나 깨끗한 거리와 편리한 교통, 좋은 사람들이 있는 한국은 이제 그에게 고국과 다름없이 익숙하고 편한 곳이다. 연기하면서 한국어 실력도 많이 늘어 그녀가 외국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정말 한국 사람이 다 되었어요. 예전에는 다른 사람들이 제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 불안했는데, 이젠 전혀 걱정이 안 돼요. 한국어 공부하는데 연기가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아요. 대본 연습을 하다 보면 모르는 단어를 찾고, 익혀야 하니까요. 드라마 속 베트남어 대사는 한국어로 된 것을 제가 직접 번역해서 연기하는 수준이라니까요(웃음).”
힘들고 외로울 때마다 여전히 고향이 그립지만, 그는 함께 귀화한 엄마가 있어 든든하다. 13년째 한국에서 살고 있는 엄마로부터 전수받은 요리솜씨는 수준급. 오징어볶음, 닭볶음탕 같은 매콤한 음식을 좋아해 직접 만들어 먹기도 하고, 베트남에 계신 할머니께 김치를 담가드리기도 했단다. 연기활동 초기에는 언어장벽과 일부 안티 팬들의 악성 댓글에 마음고생을 하기도 했다. 베트남 여성을 상품 취급하는 대중의 편견에는 아직도 불만이 많다.
“베트남 여성이 한국 농촌으로 시집오는 건 어려운 집안형편 때문이잖아요. 그래서인지 베트남 여성은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여기고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많아요. 개인적으로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이해하기 어렵지만, 다문화가정이 많아지는 만큼 그들을 따뜻하게 대해주면 좋겠어요.”
하이옌의 국내 활동으로 베트남에 관심과 애정을 갖는 팬도 늘고 있지만 그는 베트남 출신 1호 배우로 만족하지 않는다. 단순히 ‘외국인 연기자’가 아닌 내공 있는 ‘진짜 연기자’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저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노력하는 수 밖에 없다고 믿어요. 일단 더 훌륭한 연기를 보여드리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전공 공부에도 충실하려해요. 그래서 먼 훗날에는 체계 없이 활동하는 베트남 연예인을 관리하는 기획사를 차려 방송연예 관련 사업을 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