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중도 유적지에서 출토된 도끼, 비파형동검과 고인돌, 마을 유적으로 본 단군조선 후기 역사
강원도 춘천시 중도 내의 '레고랜드’ 테마파크 조성에 앞서 시행한 1차 문화재 발굴 사업으로 5개 발굴단이 작년 10월부터 지난 7월까지 발굴한 성과는 청동기시대의 집자리 917기와 고인돌무덤 101기 등이라 한다,
중도라는 섬은 춘천에서는 물론 대한민국 전체를 놓고 볼 때도 몇 안되는 최고의 명당이 자리한 박사마을 바로 앞 호수 중간에 위치한 섬이다. 박사마을에서는 지금까지 약 200여명의 박사가 배출되었다고 하며, 방동리 안쪽에는 고려 태조 왕건의 왼팔이던 신숭겸 장군 묘가 명당을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장절공 신숭겸은 태조 왕건을 절명의 위기에서 대신하여 목숨을 바친 공로로 태조 왕건이 살아생전에 도선대사가 점지해 주었던 자신의 묘자리를 기꺼이 내어주었다고 전해 온다. 묘자리에는 세 개의 분묘가 있는데 전장에서 머리를 잃어 찾지 못하여 태조 왕건이 신숭겸의 머리를 금으로 도굴을 우려하여 세 개의 분묘를 만들어 묻게 했는데 그 중 어디에 묻혀있는지는 불명이라 한다.
1. 춘천 중도 유적지 유물 도끼와 비파형동검
도끼와 비파형동검이 단군조선 시대 유물이라면 일반적인 마을 유적지가 아니라, 제후국의 도읍지에 해당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도끼와 비파형동검은 지배권력과 직결되는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특히 역사적으로 비파형동검은 단군조선 후기에 출현하는 세형동검 이전에 출현하는데, 지배권이나 군사권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청동검은 청동경(청동거울), 청동령(청동방울과 함께 천지인 천부삼인의 상징물의 하나에 해당하는데, 청동경이 입법권을, 청동방울이 행정권을 각 상징한다면 청동검은 사법권을 상징한다. 청동방울은 소리를 내는 수단인 북으로 변형되어 나타나기도 하고, 청동검은 삼지창 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천부삼인의 상징물은 배달나라 이전의 한국(桓國)시대에 이미 출현한 것으로 된다. 한국은 서기전7197년부터 서기전3897년까지 존속한 나라이다. 배달나라 개천시에 북이 등장하는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삼한관경본기 참조>.
중국사서에도 도끼는 부월(斧鉞)이라는 용어로 권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특히 도끼는 전쟁도구로도 사용되었는데, 상징적으로 처단하는 도구로서 사법권을 상징하기도 하는 것이 된다. 소위 금문(金文)에는 王을 나타내는 글자의 아랫 부분이 도끼모양으로 나타나 있기도 하다. 하지만 원래 王이라는 글자를 "왕"이라고 읽는 이유는 王의 옛 글자 형태가 ㅜ ㅡ ㅇ 모양으로 합자된 형태로서 아랫 부분이 ㅇ에 가까운 모양이므로 "왕"이라고 읽고 있는 것이 된다. 즉 단군조선 시대의 순수한 가림토식 발음으로 왕이라고 하는 것이다.
2) 비파형동검은 천자격의 지방 왕이 하사받는 것
청동경, 청동방울, 청동검이 함께 출토되는 경우는 천제를 지낼 자격이 있는 천군(天君) 이상의 임금이 다스리던 나라의 중심지가 되고, 청동검만 출토되는 지역은 천군 아래 직책인 천자격의 제후가 다스리던 지역의 중심지가 된다.
왜냐하면 청동거울과 청동방울은 신을 부르는 신물(神物)의 중심을 구성하고 청동검은 당연히 천군 이상의 임금에게 하사되는 권력상징물이나, 제천권이 없는 천자 등의 일반제후는 지배권만을 상징하는 청동검을 하사 받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약 이 중도 유적지에서 청동거울, 청동방울이 출토되지 아니한다면 단군조선의 일반제후가 되는 천자격의 제후국 중심지로 추정되는 것이다.
3) 도끼(斧鉞)는 단군조선 후기에 등장
비파형동검은 일반적으로 세형동검 이전에 출현한 것이 되고 역사적 유물로도 이를 증명하고 있는데, 도끼는 비파형동검 이후에 출현한 세형동검과 동시에 출현하는 것인지 그 후에 출현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금문에서 나타나는 도끼모양이나 춘추전국시대에 이미 도끼가 출현한 것으로 보아 서기전1000년 이전으로 소급이 가능한 것으로 생각된다.
권력상징물로서의 도끼는 왕(王)에 해당하는 권력을 나타내므로 중도 유적지 마을이 단순한 마을이 아니라 상당한 권력을 가진 지배층이 다스리던 천자격의 왕이 다스리던 지역임을 알 수 있게 한다.
4) 춘천 중도 유적지는 단군조선 후기의 천자격 제후국의 중심지
비파형동검의 출현 연대는 그 하한이 대체적으로 세형동검 출현 시기로 보면 되겠으나, 기록상 언제 출현하였는지 정확한 기록이 없으므로 단지 추정할 뿐이며, 도끼는 금문과 춘추전국시대의 기록으로 보아 서기전1000년경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유물이 된다.
이 춘천 중도 유적지에서 출토된 비파형동검과 도끼가 제조된 시기나 연대가 측정된다면, 유적지의 역사적 성격을 시기적으로 정리할 수 있게 된다.
2. 고인돌과 마을 유적
춘천 중도 유적지에서 고인돌이 101기가 출토되었다고 하는 바, 만약 이 고인돌이 지배층의 무덤이라면 길게는 약3,000년에 걸친 역사를 가진 지역이 된다. 그리하여 마지막 고인돌이 후삼한 시대인 서기전1세기라고 보면 서기전3000년부터 역사를 가진 곳이 되는 것이다.
비파형동검과 도끼의 제작연대가 드러난다면 이 유적지의 역사가 언제 시작하였는지 알 수 있게 될 것인데, 고인돌의 1/3만 직계 지배층의 무덤으로 보더라도 약900년의 역사를 가지는 것이 되어 서기전1000년경부터 역사가 시작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고인돌은 물론 지배층의 무덤일 수도 있고 마을 공동무덤일 수도 있다. 그 무덤에서 출토되는 유물의 성격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을의 호수가 900여채가 넘는 것으로 볼 때, 한 집에 약 10명이 살았다면 모두 약10,000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살았던 것이 된다. 이러한 숫자의 사람이 사는 곳은 단순한 읍(邑) 차원의 마을이 아니라 군(郡)에 해당하는 제후국의 수도에 해당하는 것이 된다.
읍(邑)은 일반적으로 약 10가(家)로 구성되고, 지방의 제후국의 국(國)은 대체적으로 가로 100리, 세로 100리에 걸치는 나라로 볼 수 있는 바, 국(國)은 지금의 군(郡) 단위에 해당하는 나라가 된다. 1호(戶)에 약 10명, 1가(家)에는 4대가 함께 산다고 보면 최소한 평균 약 150명이 사는 것이 되어 약 15호에 해당하는 것이 되는데, 작은 읍에는 약1,5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사는 것으로 계산된다.
일반적으로 읍에 수천명이 사는 것으로 볼 때, 약10,000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살았다면 일반적인 읍 차원의 마을이 아니라 작은 나라의 수도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그래서, 비파형동검과 도끼가 출토된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되는 바, 일국의 수도 즉 단군조선의 한 제후국의 수도였다라고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제후국을 봉할 때, 단군조선의 중앙조정에서 봉할 때도 있었겠지만 삼한제도가 있어서 단군조선 시대 당시 압록강 이남은 마한(馬韓)이 다스리던 곳이었므로, 이 춘천 중도 유적지를 수도로 한 나라를 다스리는 제후를 마한이 봉하였을 수도 있는 것이다.
3. 단군조선 시대의 춘천 지역 역사
1) 우두산 관련 역사 - 일본 대일령의 근거지로 추정
춘천에는 우두산(牛頭山:牛首山)이 있다. 이 우두산을 역사의 흔적으로 보아 추적을 해 본다.
서기전2173년에 두지주 예읍(濊邑)의 추장 소시모리가 반란을 일으켜 여수기가 처단하였는데 나중에 그 땅이 우수국(牛首國)으로 되었다. 여기 두지주는 지금의 백두산 동쪽에 위치한 땅이며, 예라는 나라는 여수기가 봉해진 제후국의 이름이다.
여수기가 이미 예국을 다스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예읍은 이 예국 내에 있던 한 읍에 해당하는 지역이 되고, 소시모리가 반란을 일으킨 곳이 우수국이 되었는데, 후대에 이 소시모리의 후손들이 남쪽으로 이동하여 춘천까지 내려온 것이 된다. 이때가 역사적으로 보아 서기전850년경으로 추정된다. 즉 이때가 일본의 국조신인 천조대신이 출현한 시기에 해당한다.
일본 국조신인 천조대신은 원래 이름이 대일령(大日령)으로 일본말로 "오~하류"이다. 그런데 지금의 일본 이세신궁에 원시한글 축문이 소장되어 있는데 그 문장 속에 "두디도리 ... 요하유.."가 적혀 있다.
두디도리는 곧 두지주의 우두머리라는 말이다. 즉, 요하유는 두지주 예읍의 추장이던 소시모리의 후손으로서 그 직을 승계하여 두디도리라 불리고 기록되는 것이다.
2) 언파불합과 배반명의 출신지
대일령의 후손인 언파불합은 서기전723년경 인물로서 단군조선 마한의 장군이었고, 배반명은 서기전667년경 인물로서 협야후인 제후였다.
언파불합은 지금의 일본 땅인 구주(九州)의 웅습(熊襲)의 난을 평정하였고, 협야후 배반명은 서기전667년에 단군조선의 명을 받아 마한 땅에서 500척의 배를 이끌고 가서 삼도(지금의 일본 땅)의 난을 진압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협야후의 무리 중에 막내이던 반여언(神武)이 7년동정이라는 구실로 형제들이 모두 제거되자 서기전660년에 스스로 천황이라 참칭하여 단군조선을 반역하였던 것이다.
반역의 역사가 되풀이 된 셈이다. 반역자는 소시모리와 신무이다. 소시모리의 후손인 언파불합과 협야후 배반명은 장군, 제후로서 단군조선의 명을 받아 난을 평정한 인물이다. 그러나, 신무가 다시 반역한 것이 된다.
여하튼 배반명은 협야후로 기록되고 있는데, 안파불합이 그 전에 난을 평정한 공이 있어서 협야후로 봉해졌을 가능성이 농후한 바, 서기전723년경에 협야후로서 단군조선 중앙조정이나 마한으로부터 제후로 봉해졌던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비파형청동검과 도끼를 제후인 천자자격으로 하사받았던 것이 아닌가 한다. 즉 제천권이 없는 천자격의 일반 제후로서 지방을 다스리는 지배권을 부여받은 것이 된다. 만약 비파형동검과 도끼의 제작연대가 서기전723년경으로 나타난다면 단군조선 우수국(牛首國)의 존재가 실제로 입증되는 것으로 된다.
3) 결
비파형동검이나 도끼는 결국 서기전723년에 단군조선의 장군으로서 파견되어 지금의 일본 땅인 구주에 있던 웅습에서 일어났던 반란을 진압한 언파불합 장군을 협야후(狹野侯)인 제후로 봉하면서 하사한 증거물이 된다.
협야라는 땅은 일본역사상에도 나타나는데 지금의 구주 남동쪽 편에 있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언파불합이 구주에 있던 웅습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협야라는 땅에 봉해져 협야후로 불리는 것이 된다.
물론 언파불합이 난을 평정하기 전에도 지금의 일본 땅은 단군조선의 제후나 관리들이 다스리던 단군조선 영역이었던 것이며, 지역적으로는 북쪽은 진한, 남쪽은 마한의 관할에 속하였던 것이 된다. 그리하여 구주는 특히 마한 관경에 속하였던 것이 되는 것이다.
4. 여론
일본 국조신 천조대신인 대일령이 일본 땅에 출현한 것으로 기록되는 곳이 바로 아시하라(아사벌)이다. 천조대신은 거울을 지닌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는 그냥 천자격의 왕이 아니라 제천권을 가진 왕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 이 천조대신의 거울이 조작된 것인지 아니면 신무왕이 천황을 참칭하면서 임의제작하였는지 불명인데, 만약 천조대신이 선대로부터 받은 것이라면 소시모리 반란 이후에 비전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언파불합과 배반명(일본 기록에는 도반명, 벼 도로서 배와 발음이 거의 같음)은 단군조선의 명령을 받고 반란진압을 하였던 것으로 보면, 반역자 신무가 조작하거나 후대에 임의 제작하였을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 된다. 실제로 서기600~700년대에 원시한글이 새겨진 청동거울이 제작된 사실이 있기도 하다.
이상으로 춘천의 우두산으로 역사를 추적해 보면 일본의 뿌리 역사가 나타나게 된다. 후대의 기록에는 춘천지역에 맥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기도 하다.
*후차적으로 춘천 중도 유물과 유적지에 대한 연대 측정이 나오면 다시 역사적 고찰을 해 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