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재활원에 있던 재형이가 사망했다는 연락을 받고 시체를 찾으러 다닌 재활원장 오종렬 씨의 경험담.
소년재활원에서 자란 재형이
김재형은 1975년 2월 13일 내가 운영하던 소년재활원에 입양되었던 당시 나이 13세의 어린 소년이었다. 야무지고 소년답게 생긴 재형이는 온순하고 성실하기 그지없었다. 어디에서 태어나 누가 '재형'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는지조차도 모르고 천진스런 나이에 국민학교마저도 다니지 못한 채 자라난 아이였다. 친구 꾐에 빠져 유아원에서 도망나와 지내다가 방림1동에 자리한 소년재활원(1966년 4월 설립)에서 1975년 2월 이후 줄곧 자라왔다.
재형이는 1980년 5월 20일 오후 8시경 소년재활원에서 외출을 나갔다. 21일 새벽 1시경에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누군가는 알 수 없었지만 재형이가 병원에 있으니 빨리 오라는 내용의 전화였다. 전화를 끊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고 서성대고 있었다. 이러고 있는 사이 또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이번에는 병원 원장으로부터 직접 전화가 왔다. 재형이가 아주 위독하니 지금 당장 오라고 했다. 나는 전화에 대고 수술해야 하느냐고 물어보았다. 병원장은 수술은 불가능하다고 다급하게 말했다.
21일 날이 밝자 교통이 두절된 까닭에 재형이가 있다는 계림동 근처의 박이호 산부인과 병원까지 걸어갔다. 재형이를 찾으러 왔다고 하자 병원장은 나를 보자 마자 "이 사람아! 그럴 수가 있소?" 하며 일찍 오지 않고 이제야 온 것에 대해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재형이에 대한 걱정으로 재형이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재형이는 병원에 없었다.
20일 저녁 늦게 MBC 방송국이 불타는 광경을 구경하다 계림동으로 가던 중 총에 맞고 쓰러져 있는 재형이를 젊은 청년 3, 4명이 발견하여 근처 박이호 산부인과 병원으로 데리고 들어왔다고 한다. 재형이는 쓰러져 누운 채 68-0419(소년재활원 원장 오종렬 자택)만을 중얼거렸다고 했다. "재형이는 어디로 갔습니까?" 하고 물었지만 원장은 애매한 대답만 할 뿐이었다. 원장 말에 의하면 리어카를 빌려서 재형이를 태우고 광주기독병원으로 가니까 병원이 만원이어서 전남대병원으로 인계했다고 했다. 나는 즉시 광주기독병원으로 갔다. 그러나 재형이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조선대병원을 갔다. 없었다. 전남대병원을 갔다. 그러나 그곳에도 재형이는 있지 않았다. 나는 도저히 병원장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병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솔직하게 말해 주시오. 재형이를 어디에 놔두었는지?" 그러나 원장은 똑같은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런데도 원장이 말한 병원에는 없어서 끝내 나는 원장과 싸우기까지 했다. 나는 병원장이 위급한 재형이를 보고 밖에다 그냥 방치해 둔 것이 아니냐고 화를 버럭 냈다. 그러자 원장도 이제는 못 참겠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화를 냈다. "오라고 할 때는 오지 않고 이제 없어진 애를 보고 나에게 책임을 물으면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옥신각신한 끝에 재형이는 찾지도 못하고 나와 원장과의 감정만 상했다. 나와 원장의 관계는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원만하지 못하다. 결국 나는 병원과 광주 전역을 찾아나섰다. 병원에 들어가면 먼저 카드를 떠들어보고 영안실의 시체를 모두 확인했다. 며칠 동안을 찾아 헤매던 끝에 나는 지쳐서 쓰러져버렸다.
사태가 수습된 얼마 후 서부경찰서 앞에 사진이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나와 아내는 사진을 보면서 그중에서 재형이 얼굴을 확인하게 되었다. 검은 신발을 신고 검은 바지에 티를 입고 집을 나갔던 재형이의 얼굴 상태는 거의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되어 있었다. 죽은 지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서부경찰서에서 이름(넘버)을 확인한 결과 재형이는 망월동에 묻혀 있는 것을 알아냈다. 한 달이 넘어서야 재형이를 찾을 수 있었다.
그 후, 1981년 10월부터 유족회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처음 내가 유족회에 나가게 되었을 때 다른 유족 회원들이 상당히 싫어하는 반응을 보였다. 나는 계속 유족회에 나가면서 "나는 평통자문위원이오. 전두환이 앞잡이요. 그렇지만 개의치 않고 열심히 일하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기금을 마련하겠다기에 성금을 냈다. 전계량 씨에게 유족회 회장을 하도록 권하고 모임에 자주 나갔다. 내가 유족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자 서부경찰서에서는 매일 협박을 하며 괴롭혔다.
그 후 나는 평통직에 사표를 냈다(1978년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1981년 평화통일 자문회의 위원 역임). 1984년에는 소년재활원까지도 정부의 방해공작에 의해 숫자가 줄어들었고 나 또한 숫자를 일부러 제한시켜 나갔지만 계속 유지하기가 힘들어 1986년 6월 30일 소년재활원도 문을 닫았다. 현재는 나의 안사람이 유족회에 나가면서 적극적으로 활동해 나가고 있고 나는 사회활동을 하면서 유족회의 참여에도 적극적인 관심과 협조를 보내면서 살아오고 있다. (조사정리 안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