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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영성=삶의 원리 ①
기도 하다 보면 하느님의 영 느낄 수 있어
찬미 예수님.
지난주에 우리는 바오로 사도께서 사용하신 ‘영(프네우마)’이라는 단어의 쓰임을 찾아보면서 ‘영성’이라는 말이 왜 기본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에 바탕을 둔 용어인지 살펴보았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는 ‘영적 인간’의 삶의 방식을 놓고 보면, ‘영성(영-썽)’이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영적인 것’을 가리키는 것이고, 이 ‘영적인 것’은 자연스레 ‘하느님의 성령’을 의미한다는 것, 따라서 ‘영성 생활’이라는 것은 주님의 영과 늘 함께하는 생활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죠.
그런데 ‘영성’이라는 말을 이렇게 알아듣더라도 여전히 뭔가 아쉬움이 남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이야 당연히 영성을 하느님과 연결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다른 종교나 일반 사회에서 쓰는 ‘영성’ 용어는 하느님과 관련이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영성’이라는 것을 우리는 또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저는 영성을 우리 ‘삶의 원리’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하느님의 성령을 따르는 영적 인간의 삶의 방식이 근본 원리인 것은 당연하지요. 하지만, 다른 종교나 사회에서 쓰는 ‘영성’이라는 말은 반드시 하느님과 연관되지는 않더라도 그들 나름의 삶의 원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후에 다시 말씀드리기로 하고, 그럼 어떻게 영성이 삶의 원리가 되는지에 대해서 한 번 살펴볼까요?
이를 위해 다시 한번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들어봅니다. 사도께서는 테살로니카 전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평화의 하느님께서 친히 여러분을 완전히 거룩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여러분의 영과 혼과 몸을 온전하고 흠 없이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1테살 5,23)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죠. 그런데 사도께서는 왜 ‘여러분’을 지켜 주시기를 빈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굳이 ‘여러분의 영과 혼과 몸’이라고 구별해서 말씀하셨을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영’과 ‘혼’, ‘몸’의 구별을 이야기하는 ‘삼분법적 인간학’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몸의 차원’입니다. 우리 모두는 육신을 지니고 있죠. 눈으로 볼 수 있고 또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차원입니다. 다음으로는 ‘정신의 차원’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일부를 이루고 있으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차원인데, 우리는 이러한 차원을 ‘정신’ ‘마음’ 또는 ‘영혼’이라고 부릅니다. 몸의 차원이 됐든 정신이나 마음, 영혼의 차원이 됐든 이러한 부분들은 모두 우리 존재의 ‘인간적인 부분’들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영의 차원’은 인간적인 부분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이 인간 안에 머무르는 차원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영으로 인간을 창조하시고(창세 2,7 참조) 또 예수님을 통해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심으로써(요한 16,7-14 참조) 우리 안에 하느님의 영이 머무시는 자리가 바로 ‘영의 차원’입니다.
이 세 가지 차원을 세 개의 동그란 원으로 생각해보면 이해하기가 더 쉽습니다. 가장 밖에 있는 커다란 동그라미가 몸의 차원이라고 한다면, 이 안에 조금 더 작은 동그라미, 곧 정신의 차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번째 동그라미 안에 다시금 가장 작은 동그라미, 곧 영의 차원이 있는 것이죠.
이 각각의 차원들은 다 저마다의 원리가 있습니다. 몸의 차원의 원리는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죠. 예를 들어, 오늘 바쁜 일이 있어서 아침 점심을 굶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되죠? 배가 고프겠죠. 그리고 배가 고프면 우리는 당연히 뭔가를 먹어야 합니다. 만약 어젯밤에 잠을 설쳤다면 오늘 우리는 피곤함을 느낄 테고, 그러면 우리 몸은 쉴 시간을 찾게 됩니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몸의 차원에서 움직여지는 원리입니다.
정신의 차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는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고 또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들이 채워지지 않을 때 우리 마음은 상처를 입게 되고, 때로는 화나 시기, 질투 등을 경험하게 되죠. 정신의 차원에서 움직여지는 원리입니다.
그렇다면 영의 차원의 원리는 무엇일까요?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인도에 따르는’ 모습이 바로 영의 차원에서 움직여지는 모습입니다. 몸의 차원이나 정신 차원의 원리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의 영께서 이끌어주시는 모습인 것이죠.
몸의 차원이나 정신 차원의 원리들은 쉽게 이해가 되지만, 영의 차원의 원리가 무언지는 감이 잘 안 잡히시죠? 당연합니다. 영의 차원의 원리를 보다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좁은 의미의 ‘기도’ 안에서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생활을 깊이 하고 계시는 어느 자매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가만히 기도를 하고 있다 보면, 당신 안에서 하느님의 영께서 움직이시는 모습을 보게 된다”는 거죠. 그럼 기도라는 것이 내 스스로 해나가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이 내 안에서 움직이시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시간이 된다는 겁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6)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아주 잘 이어지는 말씀이죠.
아직도 감이 잘 안 잡히신다고요? 그럼, 좁은 의미의 기도가 아닌 넓은 의미의 기도, 곧 우리 삶에서도 이 원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아무리 따져 봐도 이치에 맞지 않고 상식에도 맞지 않는 행동들을 할 때가 있습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누군가를 아무런 조건 없이 용서한다거나, 내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는데도 누군가에게 내 시간이나 돈을 나누어 주는 행위 등이 그렇습니다. 이런 일을 하고 나서도 스스로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지?’ 하며 신기해하고 기특하게 생각하는 체험들이죠. 순교자나 성인들의 위대한 행적이 꼭 아니어도, 우리 삶의 작은 부분들에서 체험되는 이러한 것들이 바로 영의 차원의 원리를 따라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을 몸의 차원, 정신의 차원 그리고 영의 차원을 지닌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 바로 바오로 사도에게서 찾을 수 있는 ‘삼분법적 인간학’의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나’라는 한 사람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이 각각의 차원들은 서로 어떻게 움직이고 있으며 또 어떻게 그 삶을 이끌어갈까요?
* 민범식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서품을 받았으며 로마 그레고리오대학에서 영성신학 박사와 심리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가톨릭신문, 2017년 3월 19일, 민범식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영성=삶의 원리 ②
기도하는 신앙인, 성령을 따라 사는 삶
찬미 예수님.
지난주에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삼분법적 인간학’에 따라서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세 가지 차원 곧 ‘몸의 차원’ ‘정신의 차원’ ‘영의 차원’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은 몸의 차원이나 정신의 차원은 어쨌든지 간에 인간적 차원이라는 것, 하지만 하느님의 영께서 우리 안에 머무시면서 활동하시는 영의 차원은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는 신적인 차원이라는 것이었죠.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그럼 인간의 영혼은 어느 차원에 속하느냐?’라고 묻는 분들이 계십니다. 인간 영혼은 어디에 속할까요? 네. 우리말로 ‘영혼’과 ‘영’이라는 말들이 서로 비슷해서 혼용되기도 하지만, 인간의 영혼은 ‘정신’의 차원에 속합니다. 비물질적이고 보이지 않지만 영혼도 어디까지나 인간의 일부분인 것이죠. 이에 반해 영의 차원에서 활동하시는 성령께서는 인간의 일부분이 아닌 하느님이시죠. 그렇기 때문에 영의 차원이 인간적인 차원이 아닌 신적인 차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안에서 우리는 몸의 원리나 마음의 원리가 아닌 영의 원리, 곧 하느님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활동하게 되는 것이죠.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이 세 영역들은 저마다의 활동 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몸의 차원에서라면 우리 몸이 필요로 하는 기본적인 욕구들에 따라서, 마음 차원에서는 또 인간의 마음과 정신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서 우리의 행동을 이끌어 갑니다. 그리고 영의 차원에서는 성령께서 우리의 삶을 이끌어주시죠.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 각각의 차원들이 서로 따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한 사람의 전체적인 삶 안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든 학교에서든 오늘 할 일을 성실하게 하려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했다고 가정해봅시다. 우리 정신 차원에서 일어나는 원리죠. 그런데 요즘 환절기 탓에 감기에 걸렸다거나 알레르기가 심해졌다면 어떻게 될까요? 몸 차원의 원리는 우리로 하여금 휴식의 시간을 가지라고 요구합니다. 정신 차원의 원리를 따라 아무리 일을,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더라도 몸 차원의 원리가 영향을 주는 것이죠.
몸의 차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험이나 어떤 어려운 일을 앞두고 있을 때면 긴장감 때문에 소화가 잘 안 되기도 하고, 때로는 몇날 며칠을 밤새우다시피 지내도 피곤함을 못 느끼는 경우가 있죠. 또 ‘화병 났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 마음과 관련된 일이 몸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바로 정신 차원의 원리가 몸 차원의 원리에 영향을 미치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영의 차원은 어떨까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순 시기를 보내면서 절제와 희생을 결심하신 분들 많이 계시죠? 기도와 희생을 통해 예수님의 수난에 더 깊이 참여하고자 하는 마음, 바로 영의 차원의 원리를 따르는 마음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자매님이 사순 시기 동안 매일 저녁 아홉시에 묵주기도를 바치기로 마음먹으셨다고 생각해 볼까요? 처음 며칠은 시간을 잘 지켜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부터 아주 재미있는 TV 드라마가 시작을 한 거예요. 이 드라마가 하필이면 매주 수요일 목요일 저녁 8시 50분에 시작합니다. 그럼 어떤 마음이 들까요? 그래도 하느님께 드린 약속이니까 제시간에 기도를 하고 나서 재방송을 볼까요? 아니면, 일주일 내내도 아니고 수, 목 딱 이틀이니까 이 두 날만 드라마 시작 전이나 끝난 후에 기도를 하기로 마음 정하실까요? 성령께서 이끌어주시는 영의 차원의 원리에 우리 마음 차원의 원리가 영향을 주는 모습입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의 존재와 삶을 이루는 세 가지 차원들은 서로 각각의 원리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 원리들이 제각각 따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한 사람의 구체적인 선택과 행동 안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우리의 구체적인 일상 안에서 이 세 차원의 원리들이 함께 어우러져서 움직여지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지난주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영성을 ‘삶의 원리’로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 세 가지 차원의 원리들 중에서 어느 차원의 원리가 내 삶의 근본 원리가 되는가’라는 부분과 관련이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때로는 몸의 차원의 원리를 따라야 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정신 차원의 원리를 따라야 할 때도 있죠. 우리가 순수한 영적 존재가 아닌 이상, ‘나’라는 사람의 인간적인 부분인 몸의 차원과 정신 차원의 원리들을 따라야 할 순간들이 당연히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볼 때 몸 차원의 원리를 따라 살아간다고 하면 그 삶은 어떤 모습이 될까요? 정신 차원의 원리에만 충실하게 살아가는 삶이라면 또 어떤 모습일까요?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시죠. “육의 행실은 자명합니다. 그것은 곧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갈라 5,19-21) 반드시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몸이나 정신 차원의 원리를 주로 따라 사는 삶이라면 사도께서 말씀하시는 육의 행실이 더 많이 드러나는 삶이기 쉬울 것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몸 차원의 원리를, 때로는 정신 차원의 원리를 따르더라도, 근본적으로 영의 차원의 원리를 따라 살아간다면 또 어떻게 될까요? 그것이 바로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인도에 따라’(갈라 5,16)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 안에서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갈라 5,22-23)와 같은 성령의 열매를 얻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어느 차원의 원리를 내 삶의 근본 원리로 삼고 살아가는가?’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인의 삶은 근본적으로 ‘성령의 인도’ 곧 영의 차원의 원리를 따라 살아가는 삶이기 때문에, ‘영성(영-썽)’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근본적인 ‘삶의 원리’가 되는 것이죠.
이처럼, ‘영성’이라는 말을 ‘삶의 원리’로 이해한다면 ‘불교 영성’이나 ‘생태 영성’과 같은 말의 쓰임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불교 영성’은 ‘불교 신자들이 살아가는 삶의 원리’를 뜻하겠죠. ‘생태 영성’은 ‘환경을 보존하고 생태계를 지켜나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따라야 할 삶의 원리’라고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영성’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삶의 원리’인 것이죠.
자, 이제 ‘영성’을 삶의 원리로 삼으실 준비가 되셨습니까? [가톨릭신문, 2017년 3월 26일,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영성=삶의 원리 ③
이웃과 하느님 향한 영적인 삶이 곧 기도
찬미 예수님.
지난 한 주간 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몸 차원의 원리를 따라 지내셨나요, 아니면 정신 차원의 원리를 더 많이 따르셨습니까? 아니면, 우리 모두가 바라는 대로 영의 차원의 원리를 따라 지내셨습니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일상의 사소한 순간들 안에서는 각각의 원리를 따라야 할 순간들이 제각각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의 가장 근본적인 선택이 어느 차원에 놓여있는가의 문제라는 것, 그리고 우리 신앙인은 영의 차원의 원리를 삶의 원리로 삼고 살아가는 이들이라는 것도 말씀드렸죠.
그런데, 이렇게 영 차원의 원리 곧 ‘영성’을 삶의 근본 원리로 삼고 살아가다 보면 참 신기한 현상을 경험하게 됩니다. 어떤 현상일지 궁금하시죠? 그건 바로, 영성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되면 몸 차원이나 정신 차원의 행동들도 이러한 영의 원리를 따라간다는 겁니다. 음식을 먹거나 휴식을 취하는 것은 몸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행동이지만, 이런 행동들이 단순히 몸 차원의 원리만을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의 차원의 원리를 따라서 움직이게 된다는 것!
예를 들어, 누군가를 만나 식사를 하러 가게 되었는데 제가 먹고 싶은 것은 구수한 사골 만둣국이라고 해보죠. 그런데, 함께 있는 사람은 피자나 스파게티 같은 이탈리아 음식을 더 좋아합니다. 그럼 이때 몸의 차원 또 마음 차원에서는 제가 먹고 싶은 것을 먹으러 가자고 요구할 겁니다. 하지만, 영의 차원에서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을 위해서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먹으러 가자고 제 마음을 이끈다는 거죠. 그래서 저는 제가 먹고 싶은 만둣국이 아니라 상대방이 좋아하는 이탈리아 음식을 먹으러 기꺼이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정신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다 다른 사람들에게 주목받고 존중받고 대접받기를 원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고, 그래서 우리 행동의 많은 부분들은 이런 마음을 따라 움직이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랑, 기쁨, 인내, 호의, 온유, 절제 등의 영 차원의 원리를 근본으로 삼고 따르게 된다면, 우리 마음도 내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을 더 존중하고 드러나게 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고 그럼 우리의 행동도 겸손하고 온유한, 절제하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몸의 차원에서든 정신의 차원에서든 각각의 고유한 움직임들은 있지만 이러한 움직임들이 오로지 ‘나’ 자신만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향하고 ‘하느님’을 향하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다른 차원의 행동들이 영성이라는 보다 깊은 차원의 근본 원리를 따라서 움직여가는 모습들입니다.
하지만, 이런 일은 영성이 우리 삶의 근본 원리가 될 때만 일어나는 일입니다. 몸 차원이나 정신 차원의 원리가 삶의 근본 원리가 되더라도 영의 차원의 움직임이 다른 두 원리를 따라 이루어지지는 않지요. 그렇기 때문에도 우리 인간 삶의 근본 원리는 어쩔 수 없이 영의 차원이 될 수밖에 없지 않나 싶습니다.
이처럼 영의 차원, 곧 영성이 우리 삶의 근본 원리가 된다는 것은 우리 삶의 크고 작은 모든 부분들이 영 차원의 원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영성은 이처럼 다른 차원들의 중심이 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다른 차원들의 행동을 가늠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 개봉한 ‘사일런스’(Silence)란 영화를 보셨나요? 사실 저도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이 영화의 원작인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라는 소설은 신학생 시절에 읽은 적이 있습니다. 작가가 던져주는 물음이 오랫동안 제 안에 남아있었던, 굉장히 강렬한 인상을 남겨준 책이었죠. 17세기에 일본에서 선교하던 포르투갈 신부들 이야기를 다룬 내용인데, 이 가운데 백미는 죽어가는 신자들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의 성화를 밟고 지나가는 배교 행위를 할 것이냐, 아니면 신자들이 죽더라도 끝까지 배교를 거부할 것이냐 하는 선교사의 내적 갈등 부분입니다. 우리 독자분들께서 그런 상황에 놓이신다면,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결국 소설 속 선교사 신부는 성화를 밟고 지나감으로써 신자들을 살리는 것을 선택합니다. 그 장면을 작가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죠.
“신부는 발을 올렸다. 발에 둔중한 아픔을 느꼈다. 그것은 형식이 아니었다. 자기는 지금 자기 생애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다고 여겨온 것, 가장 성스럽다고 여겨온 것, 인간의 가장 높은 이상과 꿈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밟는 것이었다. 이 발의 아픔. 이때 밟아도 좋다고 목판 속의 그분은 신부를 향해 말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나, 너희들의 아픔을 나누어 갖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졌다. 이렇게 해서 신부가 성화에다 발을 올려놓았을 때, 아침이 왔다. 닭이 먼 곳에서 울었다.”(엔도 슈사쿠, 「침묵」, 바오로딸, 2012, 296~297쪽)
어떻게 하는 것이 더 나은 답일까요? 이 신부의 행위는 분명 예수님의 성화를 밟고 지나가는 배교의 행위였습니다. 몸의 차원에서 본다면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고 싶어 하는 원리를 따른 행동일 수 있겠지요. 정신의 차원에서 본다면 자신이 믿고 고백하는 신앙을 배반하는, 정신 차원의 원리에 위배되는 행동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의 차원에서 본다면, 우리를 구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마음을 가장 잘 알아듣고 따르는 행동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배교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행위가 어떤 원리를 따라서 나온 것인지를 우리는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먹고 마시고 움직이는 우리 삶의 모든 행동들, 겉으로는 같아 보일 수 있지만 실상 그 안에 담겨 있는 근본 원리가 무엇인지에 따라서 그 행동의 참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영성이 우리 삶의 근본 원리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영의 차원의 원리만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몸의 차원, 정신의 차원에서도 우리가 선택하고 행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영의 차원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지는 행동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일 날만 또는 성당에서만 ‘영성’을 사는 것이 아니라, 몸의 차원과 정신의 차원을 포함한
우리 일상의 모든 부분들 안에서 마찬가지로 영의 차원, 영적인 삶, 영성을 살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이 곧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1코린 10,31)
가톨릭신문, 2017년 4월 2일, 민범식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