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유미 시인을 추억하는 지면을 꾸민다. 송유미 시인은 뛰어난 文才에도 불구하고 문단의 이기주의에 다소 희생된 느낌이다. ‘희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시인을 모르면서 그녀의 삶과 문학을 왜곡하는 분들이 많아서이다. 특히 우리문단에서 k와 s는 그 얼굴을 들고 다니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이 지면에서 시시콜콜 그런 것을 다 담을 수는 없다. 다만, 우리 시단은 뛰어난 시인을 잃었다는 점이다. 그녀가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이후 펴낸 5권의 시집은 압권이다. 하여 시인은 이전의 시집들을 모두 버리려고 무진 애를 썼다. 하지만 부족해도 시인의 흔적이기에 모든 저서를 넣었음을 밝혀둔다. 부족하지만 이 지면을 통해 송유미 시인의 영전에 위로를 드리는 바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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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유미 시인
1954년 서울출생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정 수료
1989년 《심상》 신인상
1993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199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200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시와사상’ 편집장, ‘가마문화’, ‘게릴라’ 편집위원 역임
2011년 제16회 부산국제영화제 피프 평론가
부산여성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김장생문학상
제16회 전태일문학상
수주문학상
2013년 김만중문학상 은상
2016년 김민부문학상
2020년 제3회 시와창작문학상
2023년 이주홍문학상
『그대 마을에 사는 불빛은』 (1989, 심상)
『허난설헌은 길을 잃었다』(1992, 전망)
『파가니니와의 대화』(1994, 빛남)
『립스틱으로 쓴 쪽지』(1996, 빛남)
『백파를 찾아라』(2000, 동남기획)
『당나귀와 베토벤』(2011, 지혜)
『살찐 슬픔으로 돌아다니다』(2011, 푸른사상)
『검은 옥수수밭의 동화』(2014, 애지)
『당신, 아프지마』(2022, 지혜)
『점자편지』(2023, 실천)
2021년 코로나 백신 부작용으로 길랭-바레 증후군 잔단
2023년 루게릭증후군 진단
2023년 9월 5일 사망
남편 김차순, 아들 김선준, 딸 김다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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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유미 유고특집 | 유고시
말의 淵 외 7편
-K에게
그가 말했었지
“앞으로 날 함부로 대하지 말아요…자리가 자리인데…
특히 다른 사람이 있을 때는 특히 예의를 지켜 대해주시오…”
삼 년 만에 만나 그가 내게 한 말의 배경으로
목마른 발자국을 찍는 되새 떼들 날고 있었지
그와 나는 한때 세상의 바탕화면이길 꿈꾸었는데
뜬금없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선 지 십 년이 됐을까
그의 노란 부고 문자가 내 핸드폰에 떴다
그날도 나는 캠퍼스 돌층계 앉아 그의 저서를 읽고 있었지
문득 명복明福이란 이런 자세라고 자위하면서
1987년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최루탄 가스에 취해 비틀비틀, 지구의 빈 구멍 속으로 스며들었지
노랗고 딱딱한 태양아래
너와나 격의 없이 막걸리잔 나눈 그때 이후
나는 그가 쓰는 책들을 밀서처럼 읽곤 했지
지금 내 방의 벽을 가득 채우는
그의 저서를 한장 한장 염소처럼 뜯어 삼키며
그가 내 곁에 없다는 슬픔보다 웅덩이처럼 고여 드는
말의 못물에 벌컥벌컥 입을 대고 마신다
낯선 풀잎의 자손 뿌리가 깊어가는 밤이면
*기형도 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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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 꽃피우기 위해 애를 쓴다*
두 손을 묶은 채 꼼짝 못하는 돌덩이를 노스님은 암자라고 부르셨다
빈 밥그릇 핥는 누런 개를 부처라고 소개하셨다
딸랑 방 한 칸뿐인데 천명의 납자들이 공부하던 곳이라고 쓸고 닦고 하셨다
낮에 나와 놀던 달빛들 탑속으로 들어가서 잠을 청하는 시각이면 찢어진 속옷을 꿰매셨다
사람 사는 일 먹고 마시는 업인데 일주일씩 금식하시는 바람에 노스님 모시겠다는 행자승이 없었다 초 한 자루 향도 없는 국 맛 아는 숟가락들 가지런히 키를 맞추고 사시 공양 매를 맞을수록 멀리멀리 종소리 흩어진다
*정목스님 책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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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화 계절
산다화가 피었다고 편지를 씁니다
찔레꽃이 피었다고 편지를 씁니다
벚꽃이 피었다고 엽서를 씁니다
또다시 산다화가 찔레꽃이 벚꽃이 피었다고
그대에게 안부를 보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고개를 푹 태양처럼 풀밭에 떨굽니다
나의 태양은 눈멀고 귀멀어
아침도 잊고 바다에 스스르 잠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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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등 아래서
당신, 예쁜 내 뒷모습에 반해서
여기까지 따라왔다했나요
숱한 별 같은 사람 중에
화살이 꽂힌 등 하나 울고 있네요
나보다 더 나의 깊은 슬픔을 떠올려 주신
그 가난한 등불 하나
세상 어둠 밝히고 있네요
허황된 눈빛도 아닌
그윽한 눈빛으로 말씀하네요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고
알몸이 된 당신
뒤늦게 혼자 우네요
그 눈물방울이
또 하나의 등불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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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울깍 동백에게
두 눈을 잃고 보았네
하얀 안개 뜯어 먹고 사는 짐승 한 마리
길을 잃고 숲에 갇히네 두리번두리번
잎맥 속으로 사라진 발자국을 따라갔네
입에서 흘러나와 바위에게로
한 잎의 정령에서 걸어 나와
오래 맴도는
물의 투명한 눈망울 속에서
태어나는 환상, 꿈, 희망 보았네
빌레, 그대 깊은 심연에서
오래 사념으로
타오르는 꽃이여
네 발로 걸어 다니는
먼 물의 순례자여
어둠 속에서 어둠은 눈을 뜨네
바람들 살점 날리며
하얀 갈비뼈 파고 드네
낭자한 칼끝에서
떨어지는 차디찬
금속성 비명을
이름하여 동백이라 쓰네
인내라 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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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빼는 날 2
요나, 나의 방은 고래 뱃속이야 세상 밖으로 나가려면 더 깊은 바다로 들어가야 하니 더 좁은 창자 골목 속으로 사라져야하니 요나, 세상에 물들지 않으려면 여기서도 독립이 필요하겠지 독립만세 부르다가 감옥에 갇힌 외할아버지 피가 내 몸속에는 흐르지 않나봐 요나, 일찍부터 배달의 민족, 자손으로 취직한 내 친구는, 캥거루족, 내 손에다 날마다 지푸라기 쥐어주면서 주문을 걸어 열려라 방? 열려라 문! 그 어떤 날은 믿기 슬프겠지만 친구 따라 강남까지 가지 아 강남에는 뽕밭은 사라지고 층층이 야곱의 계단을 밟고 올라가면 하늘이 열리지 뚜껑 열린 하늘에는 천사물고기가 살고 요나,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월부 동화책을 옆구리에 끼고 눈을 감고 초인종을 눌러 이런 운수좋은 날은 내 뱃속에서 고래가 울어 요나, 부유하는 플랑크톤들이 출렁이는 밤하늘에는 고래싸움에 등이 터지는 불쌍한 불빛들도 살아 하늘 위에 하늘이 없다고 땅위에 땅이 없다고 바다가 열리는 옥탑 방에서 소금과 소주를 마시지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왜 바다에는 십자가를 꽂을 땅이 없지 요나, 영원한 방도 없는데 왜 캄캄한 고래 뱃속에서 아파트는 늘어나지 요나, 믿고 싶지 않지만 자네처럼 보증금도 없이 월10만원 건물 主는 없지 요나, 고마웠어 그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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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나무
어떤 생각은 굵고 어떤 생각은 짧고 또 어떤 생각은 사지에 못을 박는다
질퍽한 땅의 심장을 움켜쥐고 회화나무는 제 검은 그림자 뒹구는 장의자(長椅子)를 지키고 있다 가만히 눈을 감고 느끼고 있으면 나무의 굵은 주름살이 내 얼굴에서 주르르 흘러내린다 관 뚜껑에 못을 박아야 할 나이에 와서야 비로소 안다 한 걸음도 떼지 못한 생각 그루였음을 ….
목수 아비 지그재그로 흩어지는 나사들을 주워 비걱대는 의자에 못을 박는다
(얘야 생각마저 날려버려라 그럼 넌 바람도 되고 새가 될 수도 있다 ….)
어떤 생각은 깊고 어떤 생각은 바닥이 없다
또 어떤 생각은 가늠할 수 없는 깊이의 못!
무엇 하나 계획한 것들을 실천하지 못한
새털 돋는 백수의 나날이
비누처럼 닳고 닳아 작아진
아비의 사지에다 탕탕 못질을 해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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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라미
동그라미 동그라미 밖에 그릴 줄 모르지 바보라고 놀림을 받으면서 심장을 밟고 뛰어서 왔지 이산 저산 깊숙이 숨은 절 처마 밑으로 날아온 제비 울음소리에 가만히 흔들리는 미소, 사랑밖에 난 모른다는 동그라미 그리며 너는 왔지 이편 산과 저편 산의 숨소리를 쏟아 저 강과 이 강에 잠든 우물을 깨웠지 동그라미 동그라미 밖에 그릴 줄 모르면서 예까지 왔을까 사랑 밖에 난 모른다는 팔불출처럼 온종일 동그라미 밖에 그릴 줄 모르다가 풍덩 돌팔매질에 날이 새고 그래도 동그라미 동그라미 그리는 너는 가만히 들여다보면 맑고 투명한 하늘의 얼굴 구름의 얼굴 약삭빠른 내 눈동자가 호수 같다고 매일 매일 놀다가는 바람소리 새소리 달빛소리 닮은 너 세상에서 가장 잘 하는 일은 동그랗게 웃는 거밖에 모르는 너
빈 바람일수록 너를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