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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 태고종 아메리카-유럽 종무원장 겸
Loyola Marymount 대학 종교학교 교수 종매스님
켈리포니아 로욜라 매리마운트 대학(Loyola Marymount University)의 유니버시티 홀. 인문학부 교수들의 연구실과 강의실이 자리한 건물이다. 자연채광으로 햇살이 반사된 실내에는 형광등 불빛으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기분 좋은 에너지가 넘친다.
오늘은 화요일. 이 건물 2001호실에서 9시부터 종매스님의 불교학 개론 강의가 있는 날이다. 진 반바지에 캐주얼한 디자인의 스웨터를 입고 머리는 뒤로 질끈 묶었다. 이쯤 되면 가까이 얼굴의 주름을 살펴보기 전에는, 수업에 잘 나오지 않던 학생쯤으로 생각하겠지.
스님을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의 강의를 직접 들어봐야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그의 강의실을 찾은 이유는. 가톨릭 예수회에서 세운 대학의 신학과 교과목 가운데 하나인 불교학 개론(A Brief for Buddhism)은 불교를 전혀 접해보지 못한 외국인 학생들에게도 흥미진진한 주제임이 확실했다. 강의실을 가득 채운 30여 명의 학생들은 똘망똘망 눈동자를 반짝이며 잿빛 승복을 입은 스님 교수님에게 온전히 집중하고 있었다.
오늘 강의의 핵심어는 아이담프라티야야타(Idam Pratiyayata). 우주만물이 서로 연결되어있다는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핵심사상 가운데 하나다. 스님은 바로 전날 있었던, 태양의 흑점 폭발을 예로 들며 이야기를 풀어갔다.
“태양의 흑점 폭발로 인해 엄청난 통신장애가 예상되고 있죠? 이처럼 저멀리 나와 상관 없어 보이는 것들로 인해 우리들의 삶이 영향을 받습니다. 이처럼 우주는 하나의 커다란 유기체로서,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있음으로 해서 네가 있고 네가 있음으로 해서 내가 있다는, 한 사람의 영혼이 춤을 출 때 인류 전체도 행복의 노래를 부르게 된다는, 적잖이 경에나 써있는, 아니 그밖의 많은 책에도 써있지만 가끔은 속 편한 사람들의 공염불 같은 가르침이 새삼 가슴에 팍팍 와닿는다. 내가 지금 이 순간 마음 한 자리 고쳐먹는 것이 진정 우주의 평화에 기여함을 깨달음과 동시에 존재의 책임을 다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드는 강의. 옆에 앉아 교재에 줄을 치며 열심히 필기를 하고 있는 남학생도 이런 감동의 깊이를 느끼고 있는 걸까.
우리는 누구나 마음 먹은 대로 될 수 있으니 대한민국 땅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기를 보낸 그가 미국 땅에서, 그것도 영어로 불교를 강의하는 교수가 되었다고 해서 전혀 불가능한 기적을 이뤄낸, 휴먼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에게나 어울리는, 경이에 가득찬 시선을 보낼 일은 없을 터. 그래도 그가 이뤄낸 성취는 우리들의 주목을 끌 만한 수준을 한참 넘어선다. 정작 본인은 그저 인연 따라 치열할 정도로 열심히 생존하다 보니 오늘날, 이 자리에 있게 됐다고 겸손히 웃을 뿐이지만.
대대로 불교 집안에서 태어난 스님은 어려서부터 스님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고 한다. “대 여섯 살 때니 뭘 알겠어요? 그런데도 어쩌다 길에서 스님이 지나가시는 것만 봐도 너무 좋아서 가슴이 콩딱콩딱 뛰더라고요.”
그렇게 스님 되는 것을 사모한 그는 열여섯 살이 되는 해부터 절에 기거하며 학교를 다니면서 스님이 되는 준비기간을 가졌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18세 때, 그는 드디어 서울 북한산 해인사의 도광스님 밑에서 출가를 한다. 출가 후에는 불교전문대학인 화엄동방 전통 강원을 졸업했다 (1976년). 그 후 군에 입대한 스님은 용인의 삼군사령부 군법당에서 군승으로 제대를 했다.
그가 군을 제대했던 1978년은 박정희 군사정권의 독재정치가 극에 달했던 시기. 종교인이기 이전에, 이 우주에 존재하는 한 개인으로서 가만히 침묵하기를 당시의 한국 정치 상황은 허락하지 않았다. 독재정부와의 외로운 싸움 끝에 그는 1979년 초, 미국 땅을 밟게 된다.
미국 와서 첫 2년 동안 그는 승복을 벗었다. 계속된 고문 끝에 몸이 승려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처음으로 잿빛 승복이 아닌 옷도 입어 봤고 머리도 길러봤다. 2년간 범부의 몸으로 살며 몸을 추스리고 나니 다시 머리 깎고 중 노릇하고 싶다는 생각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스님은 미국에 오자마자 보잉사에 퀄리티 엔지니어(품질관리연구원)로 입사했다. 20년 동안 일하던 보잉사에서 은퇴한 것은 지난 2000년. 한국에서 한양공업고등학고를 나왔던 터라 기계 만지는 것이라면 자신이 있어 선택한 직장이었다. 보잉사는 학업에 뜻을 둔 직원들에게는 학비지원도 아까지 않았다. 스님은 낮에는 연구실에서 일하며 엘 카미노 컬리지 공과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잿빛 승복에 머리 박박 깎고 출근을 했으니 다른 직원들의 눈에 왜 안 띄었겠어요? 지금까지도 많은 직원들 사이에 제 얘기가 회자된다고 하더라고요. 일단 출근하고 나면 연구실에서는 하얀 가운을 위에 덧입었기 때문에 그나마 유난스러움을 면할 수 있었죠.”
그는 미국으로 건너와 단 한 번도 일을 안 해 본 적이 없다.
“제 신조가 그래요. 승려로서 가만히 앉아 신도들의 보시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몸소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모범을 보이자는 것이죠. 신도들은 사찰 부지와 절 운영비를 주지가 직접 일해 마련하는 것을 보며 비로소 심적 부담 없이 편하게 종교생활을 하시더라고요. 저 역시 평생을 일해왔기 때문에 일을 안 하고는 못 배깁니다.”
LA 폭동이 일어났던 1992년, 스님은 Healing the LA라는 단체에 6명의 종교 대표(Director of the healer) 가운데 불교계 대표로 참가하는 한편 UCLA Extension에서 불교과정을 가르치면서 종교계와 교육계에 많은 인맥을 형성해 갔다.
1999년 USC에서는 새롭게 불교관을 개설하면서 불교관장(Buddhist Director and Faculty Fellow)으로 종매스님을 지명했다. USC에서 강의와 함께 관장 업무를 시작하면서 스님은 20년간 일하던 직장인 보잉사를 그만두었다. 그로부터 2005년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떠나기까지 6년간의 세월을 스님은 USC를 위해 일했다.
USC에서 불교관장으로 일하면서 불교 박사과정을 시작해 2003년에는 LA의 College of Buddhist Studies에서 화엄의 세계와 법계 연기(A Study of Avatamsaka Sutra and Dharma Dhatu)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학위를 취득했다.
낮에는 직장에서 풀타임으로 일하고 밤에는 박사과정 공부하는 것도 힘들 판인데 스님은 1986년 부에나파크에 보광사를 세워 지역사회를 위한 종교지도자의 역할까지 담당했으니 한 존재가 이처럼 다양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현재 애나하임으로 위치를 옮겨온 보광사에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25가구가 다니고 있다.
2003년은 종매스님에게 순탄하지 않은 해였다. 노무현 정권의 미주 공보자문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 미국 정부의 눈에 곱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한참 햇빛정책을 펴고 있었지만 미국 측에서 볼 때 북한은 단지 ‘악의 축’일 뿐이었다. 조국 대한민국을 위한 순수한 열정으로 인해 그는 잠시 미국 땅을 떠나야 할 만큼 엄청난 시련을 겪어야 했다. 이때 그가 선택한 곳은 중립국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였다. 비엔나에서 그는 아인슈타인도 강단에 선 바 있는 비엔나 대학의 종교학과 외래교수로 2학기 동안 화엄학을 가르쳤다.
3년 반 동안 비엔나에 살면서 그는 또 많은 것을 이루어냈다. 한국어로도 책 한 권 쓴다는 것이 쉽잖을 판에 독일어로 “Die Lehren des Gautama Buddha”라는 저서를 남긴 것이다.
내친 김에 불교학교도 건립했다. 2004년, 비엔나에 통신대학 형식으로 운영하는 2년제 불교대학(Institute for Buddhist)을 세웠고 미국에도 지부를 열어 지금까지 운영해오고 있다. 스님은 학교 건립을 위해 힘든 노동도 마다하지 않으며 비용을 마련했다. 정식인가된 불교대학은 2년제로 전세계 6개국에서 32명의 학생들이 사이버 공간에서 강의를 듣고 있다. 이 대학을 졸업하면 태고종의 승려가 되거나 전법사가 되는 자격이 주어진다. 이곳을 졸업한 뒤 활동 중인 외국인 스님도 18명에 이른다.
그는 또한 한국불교의 포교를 위해 비엔나에 한국 전통 사찰, ‘묵림원’을 세우고 독일 솔링헨 지역에도 그 지부를 열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오가며 제자들을 길러낸 덕에 묵림원은 지금까지도 순탄하게 운영되고 있다. 또한 묵림원의 제자들과 종매스님은 스승과 제자로서의 아름다운 인연을 북미와 유럽 대륙을 오가며 키워가고 있다.
유럽에 살면서도 스님의 마음은 늘 인생의 많은 시간, 연을 맺고 살아왔던 미국을 향하고 있었다. 그의 간절한 바램을 이해한 우주는 오직 그만이 어울리는 자리를 조용히 준비하고 있었다. 로욜라 대학 인문대학 신학부에서 불교학 교수를 구한다는 광고가 난 것이다. 스님 외에도 30여명의 지원자들이 인터뷰에 응했지만 그 자리는 스님의 몫이었다. 그렇게 다시 미국 땅을 밟은 것이 2007년. 그해 봄학기부터 현재까지 그는 로욜라 매리마운트 대학 신학부에서 불교를 강의하고 있다.
현재 강의는 정규 학부과정 80분짜리 강의가 2코스, 익스텐션 강의가 1코스로 일주일에 4차례 학교에 나가고 있다. 강의 내용은 불교학개론(Introduction to budhism)과 화엄경(Abatamsaka) 두 가지이다.
“로욜라 매리마운트 대학에서 제 불교 강의를 듣고 졸업하는 사람이 한 해에 줄잡아 150명 정도 됩니다. 강의를 듣고 불교로 개종한 학생들도 제법 있어요. 제 강의로 인해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이 바뀌겠는가를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스님의 강의를 참관하고 느낀 것은 그가 선택하는 단어들이 애매모호할 수도 있는 개념을 지나칠 정도로 명확하게 설명한다는 것이다.
“학자마다 사용하는 단어가 다르지요. 미국 학생들이 이해하는 강의를 하려면 그들의 사고방식으로 사고하고 무엇보다 그들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연계되어 있다는 개념을 설명할 때 그가 썼던 몇 가지 표현을 들어볼까. ‘Chain reaction’, ‘Corresponding effect’ 가슴 한구석에 파묻혀 행동의 변화까지를 이끌어내는 정확하고 적확한 표현들이다.
우리 사는 세계가 인드라 망 같다는 것을 설명하며 그는 학생들의 삶과 가장 밀접한 것 가운데 하나인 페이스북 얘기를 꺼냈다. 소셜네트워크인 페이스북은 전 세계 인류를 하나로 묶어주는 인드라 망과 여러 면에서 참 많이 닮아 있다. 이 역시 학생들의 세계와 언어를 완벽하게 이해하기에 할 수 있는 표현이다.
그는 학자로서도 괄목할 만한 성취를 이뤄냈다. 2005년 독일어로 출판된 ‘Die Lehren des Guatama Buddha’, 2006년 영어로 출판된 ‘불교개론(A Brief for Buddhism: The Teachings of Guatama Buddha)’ 등 3권의 저서가 있고 2008년에는 920페이지짜리 ‘현대 4개국어 불교사전(Modern Chinese-Sanskrit-English-Korean Buddhist Dictionary)’을 완성했다. 불교사전은 현재 출판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 한편 그는 여러 학회에도 초대돼 한국불교의 심오한 사상을 전세계에 전파하고 있다. 작년 9월에는 대만 국립대학에서 열린 학회에서 국제 화엄학 학자들을 상대로 기조연설을 했다.
그가 4년째 몸담고 있는 로욜라 매리마운트 대학은 1911년에 개교, 올해로 100주년을 맞는 가톨릭 예수회 재단의 대학이다. 로욜라 대학으로 출발했다가 매리마운트 여자대학과 합병했다. 모두 6개의 단과대학이 있고 그가 소속돼 있는 신학부는 인문대학에서 가장 큰 규모로 교수 숫자만 35명이다. 가톨릭 대학으로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불교 승려 교수를 두고 있을 만큼 학풍은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편. 경영진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불교학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는 만큼, 스님은 열심히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다.
마리나 델레이의 언덕에 위치한 이 대학은 미 전국에서 캠퍼스가 아름답기로 항상 10위 내에 꼽히는 곳이다. 검푸른 태평양 바다가 시원스레 펼쳐진 언덕 위 캠퍼스에 20대 풋풋하고 아름다운 학생들의 건강한 웃음이 퍼진다. 잔디밭에 앉아 책을 읽는 학생들, 건강한 몸매를 드러내고 조깅하는 여학생, 이곳에서 젊은이들과 함께 생활하다 보면 나이도 잊을 것 같다.
인문대학 3층에 위치한 그의 연구실 앞에 서니 다시 한 번 가슴이 뛴다. ‘종매 캐네스 박 박사(Dr. Jongmae Kenneth Park)’라는 이름표 옆에 붙어 있는 달마도가 평이할 수 있는 현판에 개성을 부여한다. 연구실 내부에는 승복과 바랑, 염주, 다구, 그리고 수많은 책들이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
벽에 걸려 있는 몇 개의 사진들은 스님의 살아온 역사를 한 눈에 말해주고 있었다. 처음 출가해 머리 깎고 승복을 입은 젊은 시절의 흑백사진을 보고 있자니 세월의 무상함이 새삼 느껴진다. 그런가하면 검정과 보라색 사제복을 입은 추기경, 금빛 두른 흰색 가운의 교황, 그리고 노랑 승복에 빨간 장삼을 걸친 스님의 사진도 눈에 띤다. 2008년, 교황 베네닉트 6세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500만 미국 불교계의 대표로 초대돼 교황을 접견하고 있는 종매스님의 모습이다.
교황 방문시, 불교 이슬람 힌두교 유대교 개신교 등 미국 내 종교 지도자 220명이 워싱턴을 찾았고 그 가운데 교황과 접견하고 회담을 나누는 자리에 초대된 종교대표는 오직 10명 뿐이었는데 종매스님이 그 가운데 하나로 선정된 것이다. 바티칸 측에서는 종매스님을 귀빈만 모시는 이탈리아 대사관 게스트룸에 배정했다고 한다.
“유럽에 살면서 가까워진 바티칸의 추기경들이 저를 천거한 것 같아요. 가톨릭 학자, 사제들을 자주 만나다 보니 친분을 맺게 된 성직자들이 많이 있거든요.”
종매스님은 약 20년 전부터 가톨릭 사제들과 ‘부디스트-가톨릭 대화’란 모임을 이어 왔다. 40여 명의 사제와 스님이 한 달 걸러 모여 사회적 이슈를 토론하는 자리다. 또한 친척 가운데 가톨릭 사제가 있었던 덕에 어려서부터 성경도 많이 읽고 열린 마음으로 종교간의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점이 교황과의 회담에도 긍정적인 결과를 이끌어냈다고 생각한다. 궁극적으로 종교가 가는 길은 하나. 내 것만이 최고라는 생각을 버려야 대화가 된다는 것이 스님의 지론이다.
2007년 4월에는 프랑스 보르도 인근에서 자두원(Plum Village)을 이끌고 있는 틱냣한 스님 초대 행사의 진행을 직접 맡아서 했다. 비엔나에 살 때부터 안면이 있던 틱냣한 스님은 오랜 지기 만난 듯 종매스님을 반가워했다.
스님이 1986년에 개원한 보광사는 현재 애나하임으로 장소를 옮겨 운영되고 있다. 정기법회는 한 달에 두 차례 열고 한 번의 참선법회가 있다. 25가구의 신도들 가운데 한국인은 40퍼센트 정도. 나머지 60퍼센트는 미국인 중국인 필리핀, 라틴계 등 다양한 배경을 지녔다. 법회는 영어로 진행되고 염불은 한영 혼합으로 한다.
2006년, 한국불교 태고종 해외특별교구 종무원장에 임명된 스님은 올해로 5년째 종무원장직에 봉사하고 있다.
스님이 처음 태고종으로 전종해 해외특별교구를 세울 때는 16명에 불과하던 해외교구 스님들의 숫자가 스님이 종무원장이 되고 나서는 35명으로, 사찰수도 9개에서 21개로 늘었으며 계속 증가 추세에 있다. 스님 손으로 직접 일군 사찰만 10여 개인데다 16명의 시봉들을 데리고 전종했으니 태고종 종단 측에서 보자면 거의 교구 하나가 더 생긴 셈. 현재 해외특별교구를 두고 있는 나라는 미국, 캐나다, 오스트리아, 독일, 홍콩, 필리핀 등 6개국으로 다른 종단에 비해 그 규모가 상당히 큰 편이다.
가장 큰 미시간 지부의 경우, 신도 수가 100명이 넘는다. 많게는 100명에서 작게는 10여 명에 이르기까지 각 지부의 크기는 각양각색이지만 모두들 숫자에 연연하지 않고 열심히 포교에 임하고 있다.
태고종은 교구 내에 잘 짜여진 교육기관을 두고 있다. 스님이 개원한 불교대학(Institute for Buddhist Studies)을 통해 미주, 유럽, 아시아 등지에서 영어와 독어로 2년간(사이버 강의) 수학을 하고 승려나 전법사가 된다. 현재 IBS USA 불교대학에는 32명이 재학 중이다. 불법을 공부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도 있지만 상당수는 졸업 후, 태고종 승려가 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종매스님은 향후 5년이면, 이 학교에서 배출한 졸업생들로 인해 태고종 해외특별교구가 사찰 수 50개, 스님 100명의 규모로 성장하리라, 기대하고 있다.
아메리카에는 태고종 승가회 혹은 어떤 조직체가 있는가?
태고종 해외특별교구는 모두 6개의 분원으로 나뉘어 있고 미서부와 캐나다 분원장을 제외하면 분원장이 모두 외국인(미국인, 유럽인)이다. 해외교구는 자체적으로 사정기관이 있어 교구승가의 감찰도 맡고 있는데, 2008~2010년까지 4명의 외국인 승려가 교구사정기관으로부터 파문 또는 자격정지를 받았다. 본국과 상관없이 해외특별교구 자체에서 처리하고 본국에서는 다만 추인만 한다.
미국 특별교구에는 동부, 서부, 북부, 중부, 남부 분원과 캐나다분원 등 모두 6개의 분원을 두고 있다. 캐나다에는 2개의 사찰이 있다. 서부 분원과 캐나다 분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미국인 승려들이 분원장을 맡고 있다.
스님은 태고종 미국 교구가 미국인들에 의해 운영되는 날을 꿈꾼다. 한국불교도 인도에서부터 전해졌지만 결국은 한국인들의 손에 의해 토착화되었다. 마찬가지로 미국불교도 미국인들에 의해 전해져야 비로소 미국 땅에 뿌리내리고 현지화된다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는 종무원장도 미국인을 임명할 예정이다. 약 5년 내에 미국교구가 미국인에 의해 운영될 수 있도록 장기계획을 세우고 차례대로 진행을 하고 있다.
종매스님은 자신이 세운 불교 대학을 통해 학식과 덕망 높은 스님들이 다수 배출됐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갖고 있다. 태고종은 스님들의 결혼을 인정해주기 때문에 철학박사, 정신과 의사 등 고학력의 인재들이 많이 들어온다. 영어 한 마디 못하고 미국을 전혀 모르는 한국스님들보다는 현지에서 태어나고 자라나 현지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미국인들이 한국불교의 현지화에는 더 적격이다. 한국 승복을 입은 미국인 스님이 한국 불교의 뿌리를 이어가는 모습, 상상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장면 아닌가.
“불교가 이 땅에 뿌리 내기기 위해서는 도전이 필요합니다. 그동안 저는 사람들을 많이 키워 왔어요.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20여 명의 젊은 제자들이 한국불교를 서양세계에 뿌리 내리는 날이 곧 올 것이라 믿습니다. 전 스님들도 직업을 갖고 사회의 일원이 되어 직접 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제자들은 대부분 의사, 변호사, 대학 교수 등 여러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직업을 갖고 있습니다. 이처럼 덕망 있는 이들이 포교도 더 잘 하더라고요.”
스님은 기회 닿을 때마다 한인 커뮤니티를 위해서 불교강의를 해왔고 앞으로도 계속할 계획이다. 현재는 한 달에 두 차례(매달 첫째, 셋째 화요일) 오후 6시 30분, LA의 동국대학교 강의실에서 아함경 강의를 하고 있다. 관심 있는 이들은 재불연 월봉거사,
그에게는 늘 곁에 있어온 반쪽, 미국 육군 대위인 아들(30)과 딸(29), 모두 3명의 가족이 있다. 그의 가족과 그는 가까우면서도 멀고 멀면서도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함께 있지 않아도 조화를 이루며 살아간다.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왔지만 그렇다고 마냥 충실했다고만은 할 수 없는 가족사다. 가족들도 그의 일에 간섭하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따뜻하게 애정을 표현한다.
“하루 하루를 열심히 살면 그것이 모여 인생 전체가 되는 것이죠. 전 치열하게 생존하다 보니까 미국에서 대학도 다니고 대학교수도 되었어요. 그저 인연 따라 열심히 사는 것, 그것이 가장 큰 가르침이지요.”
삶의 큰 가르침은 늘 이렇듯 평범한 것이다. 매 순간 깨어 있으며 정진 또 정진하는 것, 그의 연구실을 나서는 발걸음이 조금쯤 가볍게 느껴졌던 건 그의 존재가 전해준 행복의 비법 때문일까. <2011/3>
태고종 해외특별교구 웹사이트
▶ www.taegozen.net. www.wbu-austria.com
태고종 해외사찰 현황
▶ 미국, 캐나다, 독일, 오스트리아, 홍콩, 필리핀) 총 19개 사찰이 있고 그중 북미에 16개 사찰이 있다.
한국계 태고종사찰은 켈리포니아주에 보광사, 봉원사, 법륜사, 약사사가 있다.
동부에는 뉴욕의 전등사, 매릴랜드의 보현사가 있다. 캐나다에는 능인선원 (성철스님)이다.
그외의 태고종사찰은 미국인이나 캐나다인이 설립한곳이다. 특히 뉴저지의 소심사와 미시간의 머디워터선원이 가장 활발하게 하고 2011-2012쯤 미시간주와 일리노이주에 한곳이 더 건립될 예정이다.
▶ 태고종 소속 스님 중 일미스님은 듀크대학에서 종매스님은 로욜라 대학에서 불교를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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