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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김헌중님의 글입니다.
= 아래 =
무척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 댓글을 달아봅니다.
저에게는 무척 역부족이었습니다.
꼭 달기로 하였으니까 달아보는데 기도하는 마음으로 담대한 마음으로 글을 씁니다.
'나눔과 섬김'이란 단어가 언제부터인지 우리 사회에 너나 가릴 것 없이 모두에게 회자(膾炙)되고 있다.
특히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윤 추구만을 좇아 세간의 지탄을 피하지 못했던 대기업의 이미지 변신용으로도 훌륭하게 사용되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선진사회로 진행하는 과정의 필연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선진국의 나눔과 섬김의 정신은 바로 성경에 기초한 기독교 정신이며 그 정신이 실현된 생활문화임을 알 수 있다.
나눔과 섬김은 복음의 핵심이다.
주님의 성육신 사건의 실체가 바로 나눔과 섬김이다.
나눔과 섬김을 도덕과 윤리의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은 적어도 우리에게는 잘못된 태도이다.
이미 주님도 나눔과 섬김을 구속의 비밀로 말씀하셨다.
구원이란 예수께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은혜 안에서 나눠주시며 그 나눔을 위해 낮은 자리에서 죄인들을 섬기시는 것이다.
현 한국기독교는 실제론 대부분의 사회복지 기관이 기독교 계통임에도 불구하고 나눔과 섬김에 있어서는 불신자들에게 정반대의 이기적인 집단으로 매도당하고 있다.
기독교 복지기관의 사역에도 불구하고 지역교회는 나눔과 섬김에 매우 인색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눔과 섬김의 실천은 꼭 사회의 여론 때문은 아니다.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며 성육신의 생활화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이제 지역교회는 나눔과 섬김의 정신과 사역을 적극적으로 실천할 때가 되었다.
이글은, 오갑식 목사님께서 소개해주신,
박정식 목사님의 칼럼 '나눔과 섬김의 사역' 도입부입니다
오목사님께서 작년 11월 경에 광주 은혜와평강교회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소개해주신 박목사님의 칼럼인데,당시 상당한 열의를 가지고 댓글을 달아보았는데 홈페이지에 대한 이해 부족,실수로 애써 작성했던 글을 모두 날려버렸습니다
머릿속에 기억은 하고 있으니까
다시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신학적인 지식이 없는 제가 온 힘을 다해 기력(?)을 소진시켜버림으로해서
당장 다시 쓴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도저히 힘든 상황이었고
다 기억하고 있을 줄 알았던 것이 시간이 흐르다보니 떠오르지를 않습니다
암튼 당시에 '나눔과 섬김'에 대한 답글을 쓰는 일은 여의치가 않았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글을 쓸려고 하면 사탄의 도전이 극렬합니다
제가 게으르고 이런저런 세상사에 시달리고 ....
항상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지 못함을 회개합니다
주님께서그냥 버려두시지 않으시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독려하시고 위로하심을 감사합니다
박정식 목사님의 칼럼 '나눔과 섬김의 사역'을 거듭 읽어봅니다
도입부에서 나눔과 섬김의 본질에 관한 말씀을 하시고나서
섬기시는 교회에서 어떻게 가르치시고 주님의 일을 사역하는 교회가 그 일을 실천하여 왔는가를 피력하셨다고 저는 그렇게 읽었습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글을 쓰고자 합니다
주님, 교만을 쫒아내시고 오직 주님의 교회를 바로 세우는 일에 전력할 수 있도록 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나눔과 섬김은 복음의 핵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성육신 사건의 실체는 나눔과 섬김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저는 박정식 목사님의 글 '나눔과 섬김'을 읽기 이전에는 섬김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았고, 나눔이 우리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실감하지를 못 했습니다.
목사님의 글을 거듭거듭 읽으면서 너무 게으르고 주님의 은혜를 모른 척 외면하지 않았는가 신앙을 새롭게하는 각오를 다지고 그랬습니다.
물론 목사님의 글을 읽기 전에도 섬기는 일과 나누는 일은 항상 뇌리 속에 맴돌고 있었지요
그래서 섬김과 나눔에 있어서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천주교 분과의 교제에 힘쓰고 그래보았습니다.
결과는 더 노력하고 성경을 묵상해보아야하겠다입니다.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를 못했고,아직도 그 나눔은 미래에 있습니다.
그냥 주저앉아 헛되고 헛된 일에만 매달리고 있을 수는 없지요
성경을 묵상하면서 박정식 목사님의 글을 거듭 읽었습니다
지금 저의 깨달음은 이렇습니다
주님의 성육신은 자기 백성을 섬기기 위한 낮아지심이구나
낮아지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천하만민에게 나누어주셨구나 생각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주님께서 그때의 상황에서는 비천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발을 씻으시려고 하실 때,절대로 그렇게 하실 수 없다고 하셨는데
주님께서 내가 너를 씻겨주지 않으면 너와 내가 상관이 없다
너희도 내가 본을 보인 것처럼 서로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섬기러 왔노라 이 말씀과 연결지어 볼 때 나눔과 섬김은 결국 같은 말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낮아지지 않으면 섬길 수 없고 나눌 수도 없습니다
낮아지지 않은 나눔과 섬김은 시혜이며 강자의 아량일 뿐입니다
우리의 나눔과 섬김은 구원을 주시는 주님의 능력으로 실천하는 우리의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주 어렸을 때,초등학교 정도일 때,집 가까이에 신망원이라는 아동수용시설이 있었기 때문에 미국인 선교사들을 자주 보고 그랬는데 당시의 미국인들의 모습은 항상 웃는 모습이고,어떤 경우라도 웃는 그들이 바보처럼 보였습니다.
이후로 강퍅한 세상을 살아오면서 강자의 오만에 찬 비웃음이나 강자의 교만에 찬 아량이 아니었는가 오해도 하였습니다.
지금 제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바라볼 때는 그런 그들의 모습은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로서의 사랑의 마음이라고 이해합니다.
미국이 한국의 동맹국으로서 우리를 지원하였지만,그 동맹국의 일원으로서
한국에 와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그들의 모습을 다시 한번 떠올려봅니다.
박정식 목사님과 섬기는 교회의 성도님들은 나눔과 섬김의 실천을 주님 예수의 사랑으로 실천하였다고 전제합니다.
목사님께서 한국교회의 이기적인 모습을 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들을 개탄하셨습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저는 한국교회가 그리스도를 거절한 구약백성의 믿음의 양식을 따라 교회를 섬기는 데에서 그런 모습을 찾고자 합니다.
모든 은혜들을 결과론적으로 물질의 복으로 설명하는 가르침들
말은 영적 성장을 부르짓으면서도 그 이면을 보면 영적 성장이 선행되어야 물질의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사람을 설득하기 위한 논리가 분명 아니지만.가르침들은 논리 정연하게 물질의 축복으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모든 매체를 통한 목회자들의 설교가 그렇고, 간증들이 물질의 복으로 귀결되는 일색이고,그 증거로는 한국교회에서 기독교는 십일조라는 등식이 제도화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끝까지 들어보아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찬양하고 경배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한국교회는 심각한 이원론에 빠져 있습니다.
한국교인들의 의식 속에는 이방 철학처럼
정신세계는 고상하고 물질에 속하는 육체에 관한 것들은 저급하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습니다.
영적인 것 즉,믿음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고
세상적인 것,물질은 세상의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사역자님들의 설명은,이방철학에서 정신은 높은 가치이고
물질은 저급한 것으로 취급한다고 말합니다
형이상학적인 것과 형이하학적인 것 - 학교에서 책에서 배운 것이지만 믿음으로 새롭게 조명해보면 주님의 은혜를 더욱 깊이 깨닫습니다.
베드로 사도께서는 하나님이 깨끗케 하신 것을 내가 더럽다고 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신드롭처럼 바울 사도 베드로 사도를 높이면서도 그 사도들의 가르침은 받지를 않습니다.
또한 우리는 영혼과 육체가 하나되어,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존귀한 사람인데 말입니다.
제가 주님을 모르던 어린 시절에 흠모의 대상이었던 소크라테스가 장렬하게 독배를 마시고 죽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라고 합니다.
그리이스 희랍 이제는 이름도 잘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희랍 사상의 근본은, 사람이 만지고, 볼 수 없는 정신 세계는 높은 것이고,
항상 우리 앞에 보여지는 물질의 세계는 저급하다는 이원론이 그 사상의 근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영과 육,정신과 물질
형이하학적인 육체를 벗으면 높은 경지에 속하는 형이상학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그 기쁨 때문에 자살을 하였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비친,소위 말하는 세계4대 성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결을 하였습니다.인류의 4대 성인이 누구인가 퀴즈에 잘 나옵니다.
우리가 아는 사망의 쏘는 것 때문에 세상 상식으로는 죽지 않을려고 바둥바둥 하는 형국인데 4대 성인들은 의연하게 죽음을 맞았습니다.
불신자의 눈으로 보았을 때는 장렬한 죽음일지 모르지만, 믿음의 눈으로 제가 보았을 때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자결도 아니고 자살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명언은 예수님의 '죄 없는자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과 함께 인류 역사 상 두고두고 써먹는 명언입니다
제가 믿음의 눈으로 보았을 때,소크라테스의 죽음은,죽기 위해서 태어난 이성 없는 짐승,짐승 같은 죽음,자살입니다.
그 높은 정신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 육체를 헌신짝 버리듯이 버렸으니,
우리는 영혼과 육체가 하나된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고백했을 때,우리는 존귀한 사람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 이런 명언을 인류에게 선물한 그 소크라테스가 과연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고 죽었을까 연민을 느낍니다.
그런데 이 소크라테스가 목사님들의 설교에서 추앙을 받더군요
어떤 목사님의 설교에서는 스피노자입니다.
이 철학자가 '나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해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보다 바울 사도의 부활의 확실성을 증거하시는 게 훨씬 목사님다우셨을 텐데 말입니다.
사역자님들의 설명은 이방철학으로 성경을 해석하여 들어감으로써 바른 해석을 하지 못 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는데,신학적인 지식이 없는 저로서는 나타나는 현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이방철학에 기초한 성경해석이,
구약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으로 다시 조명하지 않고 그대로 신약시대에 끌어오는 목회자들의 가르침이 가르침을 받는 자들로 하여금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지 못 하고 주님의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 순종과 일하심을 본으로 삼아 힘있게 교회를 봉사하지 못 하게 하고,능력으로 세상을 구원하지 못 하게 하고 있다는 저의 판단은 많은 목회자님들이 주장하는 바이고,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고 믿습니다.
박정식 목사님께서 지적하신 대로 한국교회 대다수가 이기적인 집단으로 매도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소금이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면 조롱거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교회들이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어 있는 가운데 도울 김용욱씨가 한국교회의 경성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가.그 자신이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났다고 주장하지만,그는 실제로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지도 않으며,기독교에만 인류의 구원이 있다고 믿는 것은 편협한 것이라고 하는 종교다원주의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하겠다는 자신의 희망 사항을 관철하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은혜와 사랑과 구원하시는 능력을 믿는다면,
주님의 교회를 바로 세우는 일에 이전보다 더욱더 힘을 쏟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부활의 능력으로 한국교회가 갱신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부족하지만 박정식 목사님의 '나눔과 섬김'을 읽고 댓글을 늦게나마 올립니다.
현 한국기독교는 실제론 대부분의 사회복지 기관이 기독교 계통임에도 불구하고 나눔과 섬김에 있어서는 불신자들에게 정반대의 이기적인 집단으로 매도당하고 있다.
기독교 복지기관의 사역에도 불구하고 지역교회는 나눔과 섬김에 매우 인색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눔과 섬김의 실천은 꼭 사회의 여론 때문은 아니다.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며 성육신의 생활화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이제 지역교회는 나눔과 섬김의 정신과 사역을 적극적으로 실천할 때가 되었다.
김헌중 님이 메일로 보내온 글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2007.6.9. 오 갑식목사
첫댓글 김헌중님...잘 계신가요? 잘 읽었습니다. 제가 기억이...가물하네요. 예전에 메일 받았는데... 어디사신다고 했떠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