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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石屈庵)과 옥경(玉鏡) <청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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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설명 |
석굴암(石屈庵) 과 옥경(玉鏡) |
청풍면 소재지에서 왼편으로 건너보이는 석벽(石壁) 에 동굴이 있다. 이 굴앞에는 수많은 풍상을 말해주는 옛 기와장이 지금도 여기저기에서 발굴되고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에 스님 한분이 이곳에 암자를 짓고 한적한 굴안에서 참선하였다 한다. 매일 새벽에는 예불 소리와 향냄새가 이 고을 십리밖까지 흘러퍼져 이곳은 불(佛) 보살(菩薩) 의 청정도량(淸淨道場) 이 되었다. 이 굴에는 맑은 샘이 있어 수도하는 사람들에게는 안성마춤이었다. 그 젊은 스님은 날마다 묵묵좌선(默默座禪) 으로 하루의 일과를 삼아 용맹정진(勇猛精進) 을 하며 또한 틈틈히 내공(內功) 복기번(服氣法) 으로 체력을 단련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학발도인(鶴髮道人) 이 한분 찾아와 여러 경전(經典) 을 통하여 문답한 결과 학식 깊음을 감탄하고 칭찬하며 품속에서 옥경(玉鏡) 을 꺼내 주었다. 「 위급할때는 이 거울로 비추어 재앙을 막으라.」 그리고 다시 달걀 크기만한 모양의 돌을 하나 꺼내주며 당부하였다. 「 이 돌을 물그릇속에 넣어넣고 참선으로 홍옥(紅玉) 이 되는 날을 기다려라. 」 이는 검정돌이 진홍색의 옥돌이 되면 오도(悟道) 의 경지에 이를 것이라는 뜻이었다. 스님은 그말을 굳게 믿고 더욱 분발하여 정진하였다. 조염관세음(朝念觀世音) 모염관세음(暮念觀世音) 관세음보살을 우러러 발원(發願) 하며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를 생각하고 오늘도 내일도 오직 참선에만 몰입하였다. 그런데 자고로 도고성마(道高盛魔) 란 말과 같이 갑자기 뜻하지 아니한 마화(魔禍) 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한밤중이 되면 휘파람 소리와 더불어 장대한 몸에 패랭이갓을 머리에 붙이고 두손에 방울소리를 내며 철퇴와 몽둥이를 든 거대한 도깨비들이 찾아와 두팔을 휘두르면서 호통을 치곤하였다. 스님은 깜짝 놀라 품속에 비장한 옥경을 꺼내어 두루비추었다. 그러면 도깨비떼는 모두 사리지고 동굴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스님은 다시 마음을 조용히 가다듬어 참선에 열중하였다. 그런데 도인이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 옥경을 가볍게 쓰지말라. 정진에 해롭도다.」 하고 주의를 주었다. 어느날 밤, 큰 구렁이 두마리가 어두운 동굴을 찾아 며리를 높이 치켜들고 혀를 널름거리더니 슬슬 꼬리를 치며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스님은 엄연부동(嚴然不動) 한 자세를 끝까지 지닌 채 구렁이를 응시하면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두마리의 구렁이는 스님의 무릎을 타고 허리를 휘어감아 오르면서 혀를 널름거리는데 찬 바람과 무서운 독기를 안개처럼 품어내어 동굴속은 온통 살기로 충만되었다. 그러나 스님은 끝까지 용맹정진의 담력으로 견디어 이겨내었다. 두마리의 구렁이는 스님의 허리와 가슴을 칭칭감아 다시 한번 온갖 힘을 다하여 조여 보았으나 스님의 평소 연마한 내공(內功) 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어디론지 사라져버렸다. 그뒤 다시 한밤중에 호랑이 한마리가 나타났다. 황소보다 더 큰 비호(飛虎) 가 날듯이 동굴속으로 들어오자마자 태산이 무너지는듯, 하늘에서 벽력이 떨어져 바위를 부서버리듯 천지를 진동시켰다. 스님도 처음에는 대경실색 하였으나 짐짓 용기를 내어 정신을 가다듬었다. 호랑이는 스님의 머리를 넘나들면서 발악했다. 한입에 삼켜버릴듯 으르렁거리는 모습은 과연 산중왕의 위세를 떨쳤다. 몇시간쯤 지나자 호랑이도 이젠 지칠대로 지쳐 포악의 기세가 점점 약해지기 시작하였다. 흡사 돌부처나 장승처럼 움직이지 않던 스님이 조금 움직여 옷깃을 여미는 순간, 옥경의 빛이 새어나와 잠간동안 동굴의 벽을 비추었다. 그러자 구석에 있던 호랑이는 홀연, 모습을 감추고 호랑이가 동굴속 깊은 구석에 그려놓은 듯 호랑이의 모습이 석벽(石壁) 에 새겨져 있었다. 스님은 그 어려운 경지를 넘어 실로 무서운 투지를 관철하였으나 기진맥진하여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비몽사몽간에 정신을 차려 사면을 살펴보니 그릇 속에 있던 검을 돌이 어느덧 홍옥으로 변해 찬란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 광채는 동굴안에 가득하여 심신을 더욱 맑게 해주었다. 이에 스님은 오도송(悟道頌) 을 읊으며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그뒤 이 굴을 도사굴(道士屈) 이라 하였다. 굴속의 석벽에 새겨져 있는 호랑이의 모습은 살아 있는듯 이끼와 돌무늬가 선명하여 사람들은 그 굴속에 혼자서 들어가기를 꺼려 하였다고 전한다. 한때는 산신의 상징인 호랑이가 굴속에 있다고 하여 산왕굴(山王屈) 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옛부터 건너 마을에서 이 굴이 보이면 도적의 자식을 낳고 부녀자가 음탕하다고 하여 석벽과 동굴이 보이지 않도록 사이에 나무를 빽빽히 심어 동굴의 위치조차 알아볼 수 없는 정도였다. 그러나 이조 선조때,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피해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머물렀고, 혹은 많은 부녀자들이 이곳을 찾아가 산신기도를 올려 아들 낳기와 무병장수를 빌기도 하였다. 사십여년전까지도 굴안의 이끼와 석벽의 무늬가 호랑이와 흡사하여 그맑은 샘물을 떠놓고 산왕대신을 부르며 기도를 올리는 아녀자들의 발길이 잦았다. 한때는 인근 고을의 선비들이 정사(精舍) 를 지어 시로써 세월을 영탄(○嘆) 하면서 술잔을 기울었다고 전한다. 근년에 이 굴속에 어느 스님 한분이 찾아와 다시 절을 짓고 석굴암이라 하였는데 많은 신도들이 찾아왔으나 산간지방 무허가 주택 철거령에 밀려 사라지고 지금도 빈 동굴속에는 샘물만 끊임없이 흐른다. 그리고 석벽의 호랑이 모습은 양식없는 사람들의 손길에 없어져 흔적조차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