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취향 소설은 아니지만>
한강 작가님의 노벨상 수상 소식에 그날 우리 소설 모임 단톡방은 들썩들썩했다. 일단 우리나라에도
노벨문학수상자가 나왔다는 놀라움, 자랑스러움이 컸다. 더구나 소설의 인기가 떨어져 가는 시대에 모처럼 문학이 주목받으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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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취향,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분야이다. 내가 아무리 대단하다, 훌륭하다 여겨도 모든 사람이 그런 건 아니다. 언젠가 박완서 님의 책에 달린 리뷰를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속으로 '어떻게 박완서 작가님을 싫어할 수가 있지?' 하며 갸우뚱했다. (나의 롤모델이신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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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나 역시 사람들이 인생책이라고 소개하는 책들에 별 감흥이 없을 때가 있다. 유명인들의 베스트 5에 거의 들어가는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가 그렇다. 그 소설이 딱히 싫은 건 아니지만 내게는 그다지 큰 감명을 주지는 못해다. 실은 '한강'님의 작품 또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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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도서관에서 <채식주의자>를 빌려와서 읽고 있었는데 마침 맨부커상 수상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더욱 기대하는 마음으로 책을 펼쳤는데.. 세상에!! 아, 이건 정말 내 취향이 아니었다.
그러고는 자연스레 한강 작품은 내 관심에서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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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지 한강 작가님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에 정말 자랑스럽고 기뻤지만 조금은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섣불리 선을 그었구나 싶기도 하고.. 그런데 마침 이번 소설 읽기 3기의 첫 소설이 한강의 '소년이 온다'이다. 노벨 라벨이 붙은 후라 더 열린 마음으로 후한 평가를 내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으니 기대반 궁금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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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기본적으로 허구다. '너, 지금 소설 쓰냐?'라는 말도 있듯이 사실, 팩트에 입각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 소설은 역사책도 아니고 윤리학이나 철학책도 아니다. 그럼에도 소설은 진실을 말하고 있다.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이야기를 통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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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독자에게 해석의 여지를 많이 남긴다. 저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독자는 독자대로 읽기도 한다. 그게 소설의 매력이자 놀라운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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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성장소설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아온 책이기도 하지만 킬러들의 교과서라고도 불린다. 존레논, 케네디 대통령, 레이건 대통령 등등 그들에게 총을 겨누었던 암살범들이 마지막까지 들고 있던 소설로도 알려져 있다. 그들은 소설의 주인공에게 지나치게 심취한 나머지 자신들이 생각하는 순수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총을 들었다. 스스로 '파수꾼'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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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책을 읽고 어떤 이는 깊은 감동을 받고 의미를 찾지만 누군가는 거기서 누군가를 죽일 이유를 찾는다. 그렇다고 책에게 화살을 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분명한 건 소설이 다른 책 보다 훨씬 독자의 몫이 크다는 점이다. 그래서 위험하고 또 그러기에 매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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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는 어떤 책이 주는 영향에 대해 과도한 우려와 공포로 그 책을 못 읽도록 숨겨두고 그것도 모자라 거기다 독을 발라놓은 수도원 이야기가 나온다. 늘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은폐하고 보호할 것인가, 노출하며 위험을 감수할 것인가. 두 세력 간의 전쟁은 어느 분야나 계속되는 것 같다. 이는 상황에 따라 무엇이 더 요구되느냐의 문제이지 딱 잘라 한쪽을 제거해 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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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님의 <선 이야기>라는 그림책이 이 모든 복잡한 내용을 단순하게 정리했다고 생각한다. 너무 많은 선긋기도 문제지만 자칫 지우지 말아야 할 선까지 지워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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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가 존재하는 것과 내가 진리를 과연 아는가는 다른 문제이다.
종교는 연역적으로 진리를 말하지만 인간은 귀납적으로 신을 알아가고 인생을 배운다. 그래서 성경과 문학, 예배와 삶 사이에서 오고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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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말씀을 사랑하고 암송하고 좋아하지만 정작 그 말씀을 체험하고 부딪히는 곳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 속이라는 남편의 고백을 떠올리며, 나는야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나의 삶은 애들 밥 해주는 거.
곧 밥차릴 시간이다.
*2016년에 채식주의자를 읽고 이런 포스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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