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원장의 생부.생모
부친 : 인조순황제(仁祖淳皇帝) 주세진(朱世珍)
모친 : 순황후(淳皇后) 진씨(陳氏)
1. 주원장 모친 순황후 기일과 이성계의 모친 의혜왕후의 기일 일치. 왜 의혜왕후의 기일이 바뀌는지?
2. 권근이 1389년 창왕 입조를 청하기 위하여 금릉에 가는 중 지은 시입니다. 추존된 순황후 기일과 권근이 말하는 기일이 틀림
조선왕조실록 > 광해군일기 > 광해군 3년 신해 > 4월 21일 > 최종정보
광해군 3년 신해(1611) 4월 21일(경인)
03-04-21[03] 오늘이 중국 순황후의 기일인데 22일이라고 한 것은 어느 책에 있는지를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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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조에서 천추 배전일(千秋拜箋日)을 추택(推擇)한 일로 전교하기를,
“내가 《고사촬요(考事撮要)》를 살펴보니 오늘이 바로 중조(中朝) 순황후(淳皇后)의 기일이었다. 22일이 중조의 기일이라는 것이 어느 책에 기록되어 있는지 살펴서 아뢰라.”
하였다. 회계하기를,
“《대명회전》의 기신조에 4월 22일이 순황후의 기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였다.
【원전】 31 집 627 면
【분류】 외교-명(明)
太祖高皇帝實錄 卷九十九 洪武八年 四月 二十二日 1번째기사 1375년
○辛亥 皇妣淳皇后忌日 上躬詣皇陵致祭
황비[皇妣] 죽은 선대의 황후
조선왕조실록 > 태종실록 > 태종 16년 병신 > 4월 23일 > 최종정보
태종 16년 병신(1416) 4월 23일(을유)
16-04-23[01] 기신재의 설전하는 의식에 관한 예조의 건의를 윤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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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조에서 기신재(忌晨齋)에 설전(設奠)하는 의식을 올렸다. 계문(啓聞)은 이러하였다.
“의혜 왕후(懿惠王后)의 기신(忌晨)을 당하여 왕후전(王后前)에 설전(設奠)하고 환왕(桓王)의 신어전(神御前)에 설전을 하지 않음은 실로 미편하니, 빌건대, 함께 전상(奠床)을 놓으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명하였다.
“이제부터 태조(太祖)와 신의 왕후(神懿王后)의 두 기신(忌晨) 이외에는 그 나머지 기신은 세 철의 공상(供上)을 없애고 다만 두 때만 쓰는 것으로써 영구한 항식(恒式)을 삼으라.”
【원전】 2 집 112 면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조선왕조실록 > 세종실록 > 세종 9년 정미 > 2월 22일 > 최종정보
세종 9년 정미(1427) 2월 22일(경진)
09-02-22[06] 의혜 왕후의 기신 재일에 쓸 향과 축문을 친히 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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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히 의혜 왕후(懿惠王后)의 기신(忌辰) 재일(齋日)에 쓸 향과 축문을 전하였다.
【원전】 3 집 63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조선왕조실록 > 세종실록 > 세종 12년 경술 > 2월 22일 > 최종정보
세종 12년 경술(1430) 2월 22일(계사)12-02-22[02] 의혜 왕후의 기신제에 쓸 향과 축문을 친히 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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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혜 왕후(懿惠王后)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과 축문을 친히 전하였다.
【원전】 3 집 222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사급(賜給
조선왕조실록 > 세종실록 > 세종 14년 임자 > 1월 28일 > 최종정보
세종 14년 임자(1432) 1월 28일(무자)
14-01-28[02] 신상이 추위를 이유로 강무를 3월에 하자했으나 허락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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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조 판서 신상이 아뢰기를,
“매년 강무는 2월 24일 의혜왕후(懿惠王后)의 기신에 이르러 회가(回駕)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하기 때문에 2월 초에 아뢰어 시행하여 왔습니다. 금년도 또한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절후(節候)가 조금 일러서 날씨가 아직 춥습니다. 전하께서 바람과 추위를 무릅쓰고 초야(草野)에 발섭(跋涉)할 수 없으며, 또 수종(隨從)하는 사람들도 어찌 추운데 어[凍]는 자가 없겠습니까. 비록 기신재를 만나더라도 장전에 계신다면 비록 2월 보름 이후에 거둥하시더라도 또한 무방하겠습니다. 태종께서는 매년 3월 초순에 거행하셨는데, 전하께서는 3월은 농사가 한창 바쁠 때라고 하여 반드시 2월에 거행하십니다. 그러나 3월 보름 이전은 농사가 아직 한창은 아니니 3월에 거행하여도 또한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강무하는 날에는 나는 반드시 갖옷을 입으니 추위를 막는 데에 무엇을 근심하겠는가. 수종하는 사람들도 봄날의 나머지 추위를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하였다.
【원전】 3 집 370 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왕실-의식(儀式)
효자고황후 마씨(孝慈高皇后 馬氏, 원 지순 3년 7월 18일(1332년 6월 25일) ~ 명 홍무 15년 8월 10일(1382년 9월 17일))는 명나라 초대 황제인 홍무제의 본처이자 명나라의 초대 황후이다. 마공(馬公)과 정온(鄭媼)의 딸이며, 홍건군 수장 곽자흥(郭子興)의 애제자(愛弟子)이자 양녀이며, 영락제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권근
1388년(창왕 즉위)에는 성균관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이은(李垠) 등을 뽑았다. 과거에 합격한 뒤 항상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1389년 윤승순(尹承順)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명의 황제가 '다른 성을 가진 사람으로 국왕을 삼음'[以異姓爲國王]을 문책한 자문(咨文)을 도당(都堂)에 올리기 전에 미리 뜯어 보아 대간의 탄핵을 받고 우봉(牛峯)에 유배되었다.
양촌선생문집 제6권 / 시(詩) 봉사록(奉使錄)
연대역(燕臺驛)에 당도하여 연부(燕府)에 진현하려고 먼저 전의소(典儀所)에 나아가니 소관(所管)이 들어와 아뢰기를 “이날은 선태후(先太后) 기일(忌日)이라 예를 받지 않는다.” 하며 봉사(奉嗣) 섭홍(葉鴻)에게 명하여 반접(伴接)하여 관에 당도하게 했으니 칠월 십오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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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의 대라 종손 지손 번성하니 / 聖代宗支盛
현왕의 작토가 이처럼 높네 / 賢王爵土尊
도성은 기세가 웅장도 한데 / 都城形勝壯
저자엔 물건들이 많기도 하네 / 市巷物華繁
흰 옥인양 궁전이 열리어 있고 / 白玉開宮殿
붉은 구름 섬돌을 감돌았구려 / 紅雲繞陛軒
재라서 예 받기를 정지했으니 / 齊居停受禮
도타우신 효심을 공경합니다 / 翼翼孝思敦
고전번역서 > 양촌집 > 양촌선생문집 제6권 > 시 > 최종정보
양촌선생문집 제6권 / 시(詩) 봉사록(奉使錄)
십팔일 나아가 하직할 때에 왕은 불사(佛寺)에 가 향을 사르니 선태후(先太后)의 기일이라 병위(兵衛)가 매우 많다. 돌아와서 초(鈔)를 주고 또 봉사에게 명하여 먹을 것을 가져다 주게 하다. 이윽고 또 세 왕자가 말을 타고 나란히 나가니 역시 불사에 가서 향을 사르기 위해서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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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옷 입은 날랜 군사 길거리를 옹위하고 / 侁侁甲冑擁街頭
해 비치자 붉은 구름 땅에 가득 피어오르네 / 日照紅雲滿地浮
위의 갖춘 임금 행차 단문을 벗어나니 / 駕出端門儀衛備
황금기 비취선은 으리 비쳐 흐를 듯이 / 金旗翠扇望如流
화한 낯빛 다스운 말로 외국 신하 접견하며 / 和色溫言接外臣
삼조를 연달아 맛진 음식 하사하네 / 三朝運賜內廚珍
돈마저 나눠주어 은혜가 치우치니 / 又頒楮幣恩偏重
일시동인 우리 황제 본받기 위해설레 / 爲體吾皇一視仁
천문이 넓고넓어 해 높이 솟았는데 / 蕩蕩天門白日高
붉은 사포 팔짱 끼고 대궐 안에 앉았구려 / 殿中端拱絳紗袍
먼 데 사람 뵙게 된 것 더구나 기이한 일 / 遠人獲覩尤奇事
봉모를 잡아 타고 세 학이 훨훨 나네 / 三鶴聯翩駕鳳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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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촌선생문집 제6권 / 시(詩) 봉사록(奉使錄)
이날 용강(龍江)으로 나와 자는데 황제는 왕의 나이가 아직 어리다 하여 역시 입조(入朝)를 허락하지 아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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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나라 조회하는 간절한 뜻은 / 海國朝宗志
황제의 사랑하는 인덕에서네 / 天皇字小仁
뜬소문 공연히 시끄러운데 / 流言空擾擾
임의 훈계 고분고분 더욱 더하네 / 聖訓更諄諄
성을 나와 저자의 다리를 넘고 / 出郭踰橋市
배에 올라 물가에서 잠을 잔다오 / 登舟宿水濱
자금산 차츰차츰 멀어져가니 / 紫金山漸遠
고개 돌려 자주자주 바라보누나 / 却望首回頻
자주 : 자금산은 옛날의 종산(鍾山)인데 지금 경성의 진산(鎭山)이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궁금해서 여쭙니다.
대명과 조선이 대명조선으로 같은 조선으로 인지하고 있습니다만,
기존의 역사서에는 조선이 명을 섬겼다고 나옵니다.
여전히 많은 역사서들과 온라인 사이트에서 명과, 조선을 다른 나라로 얘기합니다.
어떻게 인지하는 것이 맞나요 ?
(참고로, 중화민국에서 신해혁명(1911년) 이후, 신문화운동(1915~1928)을 벌일때,
역사를 조작하여 중국25사를 편찬하면서 조선을 조선과, 명으로 나누었다고 들었습니다. )
> 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13년 정사 > 10월 14일 > 최종정보
명(明)나라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의 일을 특별히 진강(進講)한 것은 내 뜻이 있어서였다. 우리나라는 명나라에 대하여 군신(君臣)과 부자(父子) 사이의 의리가 있고, 또 영원히 잊지 못할 은덕이 있다.
조선왕조실록 > 태종실록 > 태종 4년 갑신 > 4월 4일 > 최종정보
왕가인(王可仁)은 본래 아조(我朝) 동북면(東北面)의 향화인(向化人)인데, 태상왕(太上王)의 잠저(潛邸) 때에 휘하(麾下)가 되어, 태상왕의 천발(薦拔)에 힘입어서 벼슬이 추밀(樞密)에 이르렀다. 고황제(高皇帝) 때에 소환(召還)되어 이름을 수(脩)로 고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미 15년이 되었다. 처자(妻子)가 모두 잘 있었다.
태종 5년 을유(1405) 4월 20일(을유)
조선이 명나라와 친교(親交)하기를 형제(兄弟)처럼 하는데, 우리들이 어찌 따로 명나라를 섬김 필요가 있겠는가?
중종 2년 정묘(1507) 1월 9일(계미)
또 우리 태종은 창업하신 성주(聖主)이지만 절을 능침(陵寢)에 세우지는 않았습니다.
대명조선의 大明은 명확히 형용사로서 찬란한이란 수식어입니다. 明이란 나라의 존재여부에 대한 논의가 있는것이 사실이지만, 1650년이후 쓰여진 마르티노 마르티니 신부의 기록을 보면(지명숙, 왈라벤 공역..보물섬은 어디에)명이란 나라는 명확히 존재했고, 또한 후금의 침공에 대해 조선과 군사적 협력으로 대응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전통적인 漢族의 강역내 존재했던 실체적 정체로서 보아야 하며, 단지 일제가 교열한 왕조실록에서 조선이 사대굴종한 비굴한 모습으로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여러가지 오류가 발견될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