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요지경
김 계 순
작년 이맘때 막내딸의 음력 생일, 하필이면 그날 제 아버지와 영영 이별하게 되었다. 그 막내딸의 양력 생일이 공교롭게도 오늘이다. 잠시 이런저런 생각이 스친다.
문학관에 일이 있어 함께 들르기로 약속한 한 분이 갑자기 일이 생기는 바람에 모처럼 시간이 빈다. 얼씨구나 하며 짬이 나는 시간을 이용해 차에 올랐다. 남편이 쉬고 있는 근처 공원을 찾을 생각이다.
바람 한 점 없는 겨울 한낮은 새색시처럼 얌전하다. 날씨에 취했는지 무심코 들어선 로터리 길에서 멈춤도 없이 그냥 차를 쌩하니 지난다.
“아차 내가 양보해야 하는데” 미안한 마음에 비상깜빡이 세 번으로 잘못을 전하고, 도심을 벗어난 시골길을 달린다. 복숭아밭이 눈 앞에 펼쳐진다. 겨울을 고단하게 지냈을 잔가지엔 벌써 발그레 물이 오른다.
모롱이를 돌아 저만큼 표지판이 보인다. 갈림길 한편으로 향한 화살표를 따라 도착한 자연장지인 천재공원엔 저마다의 얼굴인 양 조화들이 향기라도 뿜을 듯 고개를 내민다. 날씨도 온온하다.
남편의 묘지임을 알려주는 다-59란 번호가 나를 맞이한다. 간단한 예를 갖추느라 고개를 숙인 내 앞엔 생, 졸의 연월일 숫자와 망자의 이름, 나와 아이들의 이름이 새겨진 표지석만 휑하니 나를 올려다본다.
조용히 앉아 표지석의 먼지들을 닦아낸다. 차갑다. 그 옆의 공간, 거기엔 기약은 없지만, 훗날 내가 가야 할 자리다. 남편의 바로 뒷번호 다-60이란 번호가 훗날 자리할 나의 천 년 집 번지다.
각양각색의 조화들이 빽빽이 꽂힌 걸 보니 아이들이 들락거린 흔적인가보다. 표지석 옆에는 막내가 준비해 놓아둔 미니어처들로 한 상 가득 차려져 있다. 갑작스럽게 저세상으로 떠난 아버지가 믿기지 않는지 미니어처로 차려진 상위엔 평소에 애들 아버지가 좋아하던 음식이 가득하다.
밥, 국, 회, 회에 필요한 부식들, 빵과 우유, 과일과 치킨, 소주와 소주잔, 담배, 재떨이 위 성냥개비, 문갑 위에는 대형 TV와 리모컨이 놓여 있고, 평소 무척 이도 즐겨보던 TV 화면엔 ‘걸어서 세계 속으로’ 방송이 켜져 있다.
받침대 위엔 만 원짜리와 오만 원짜리 지폐가 한 푼도 쓰지 않고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 옆엔 본인의 띠인 호랑이가 눈이 감길 만큼 웃으면서 돈 통을 지키고 있다. 문갑 아래 공간에는 방습제가 내부의 환경을 지켜주고 있다.
생전의 남편 모습을 보는듯하여 피식 웃음이 나온다. 그러다가 미니어처를 만드는 사람들의 기교에 감탄한다. 어쩌면 저리도 정교하게 실물보다 더 실물같이 만들 수 있을까. 그걸 사서 제 위치에 가지런히 정리해 놓은 막내 역시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세상은 참 요지경이구나” 한마디 중얼댄다. 과묵하게 듣고만 있는 남편의 묘비 앞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한참이나 종알대다가 제풀에 지친다.
이제 겨우 일 년 남짓인데 남편의 뒤로 엄청이나 많은 이웃이 늘어나 있다.
“당신 참 자리 잘 잡으셨소”
바람 한 점 없는 따뜻한 날씨에 마음도 평온하다. 이런 자리에서 마음이 평온하다는 건 나도 나이가 들었기 때문일까.
“생전에도 말 없고 갈 때도 말 없고, 지금도 말 없는 곰 같은 당신 잘 있으소. 난 집에 갈라요”
찡한 작별인사를 남편에게 툭 던지고는 툴툴 털고 일어난다. 아무런 대답도 못 들었지만, 남편의 기억을 뒤로하고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차에 오른다.
갑자기 머릿속에 휘리릭 깜짝 생각이 스친다. 가상현실, 앞으로 이런 놀라운 모습들을 메타버스를 통해 비춰 주는 날이 올 것이고, 그리하여 안방에서도 공원의 모든 모습을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과 함께 역시 세상의 변화가 무섭도록 대단하다는 감탄을 하면서 “참 세상은 요지경이구나” 또 한 번 중얼거리면서 시동을 건다.
막내의 양력 생일 오붓한 만찬을 위해 마음이 바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