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송은석(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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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열부우’를 내렸다는 진주강씨 부인과 모열각
프롤로그
필자는 달성군 시티투어인 ‘참꽃투어’ 해설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올해는 5월 말부터 9월말까지 매주 토·일요일 한시적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코스는 도동서원·비슬산자연휴양림·마비정벽화마을·남평문씨 인흥세거지·사문진 주막촌·송해공원 등으로 짜여 있다. 최근 송해공원 입구에 명물(?) 커피숍 하나가 오픈했다. 미스터트롯 출신 모 가수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커피숍으로 바로 곁에 있는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숍과 함께 송해공원을 대표하는 커피숍이다. 참꽃투어 손님들도 송해공원에 도착하면 곧잘 다녀오는 송해공원 명소다. 그런데 이 두 커피숍 사이에 조선시대를 살다간 한 여인을 기리는 작은 문화유산이 자리하고 있다. 이번에는 송해공원 입구, 두 곳의 이름난 대형 커피숍 사이에 끼어 있는 ‘모열각’에 대한 이야기다.
400년 내력 충주석씨 세거지, 기세리
송해공원 옥연지가에 자리한 오래된 마을 기세리. 이 마을은 400년 내력을 지닌 충주석씨 세거지다. 기세리(奇世里)라는 동명은 ‘마을의 풍취가 참으로 기이하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현재 기세리에는 인산당·소계정·모열각 같은 문중유산이 남아 있다. 인산당은 기세리 충주석씨 입향조인 인산당 석언우를 기리는 재실이다. 석언우는 임진왜란 때 17세 나이로 붓 대신 칼을 잡고 의병으로 활략했던 인물이다. 소계정은 기세리 출신으로 한말 영남을 대표하는 선비이자 유학자였던 소계(小溪) 석재준(石載俊·1866-1945) 선생을 기리는 정자다. 소계정 옆에는 석재준 선생과 아들, 손자 3대의 영정을 봉안한 영정각도 있다. 예전에는 마을에 석언우 선생의 아들인 송암 석운상의 정사인 송암정사도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진주강씨 모열각
‘진주강씨(晉州姜氏) 모열각(慕烈閣)’은 기세리 석씨 문중 며느리인 열부 진주강씨를 기린 정려각이다. ‘열부’는 절개가 굳은 부인을 뜻하며, ‘모열’은 열부의 절개를 잊지 않고 사모하겠다는 뜻이다. 세상에 알려진 진주강씨 부인의 열부행과 열부우(烈婦雨) 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진주강씨는 석구홍(石龜泓·1760-1776)의 부인이다. 그녀는 상서를 지낸 은열공 강민첨(姜民瞻)의 후예인 강유곤의 딸로 1758년(영조 34) 9월 13일 기세리 이웃 마을인 만수리(晩守里)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9세에 기세리에 사는 17세 청년 석구홍과 혼례를 올렸다. 그런데 혼인한지 수개월 만에 남편이 죽었다. 남편의 장례를 예법에 따라 모두 마친 어느 날. 그녀는 시댁 식구에게 “이제 저는 남편을 따라 죽을 것이니 남편 곁에 묻어 주시오”라고 말한 뒤, 식음을 전폐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776년(영조 52) 11월 8일 그녀 나이 19세 때였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녀는 자신의 유언과는 달리 남편과는 다른 산등성이에 묻히게 됐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장삿날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발인을 하는데 문 서까래가 부러지고, 부엌 가마솥이 깨지고, 우마(牛馬)가 죽더니, 나중에는 내리 3년 동안 이 일대에 극심한 가뭄이 계속된 것이다. 이 변고를 두고 사람들은 남편과 같이 묻히지 못한 진주강씨 부인의 한 때문이라 여겼다. 관청에서 이 사연을 알고 장례비용을 대주며 그녀의 유언대로 부부를 합장(合葬)하게 했다. 합장을 마친 날 저녁 이상한 일이 있었다. 합장한 부부 묘 봉분 위로 한 줄기 상서로운 기운이 길게 이어졌다가 잠시 후 큰비가 내렸다. 사람들은 이 비를 열부 강씨부인이 내려 준 ‘열부우(烈婦雨)’라 일컬었다. 이 일이 있은 뒤 기세리 석씨문중에서 진주강씨 모열각을 짓고, 매년 음력 3월 상정일에 향사를 받들고 있다.
흙돌담에 둘러싸인 모열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 겹처마 건물로 전면은 홍살벽, 나머지 3면은 흙벽이다. 모열각 내부 중앙에 ‘열부진양강씨실행비’가 있고, 사방 벽면에 ‘석열부진양강씨창문·열부강씨실기서·모열각기·열부진양강씨비명병서·강씨열행기·모열각상량문’ 등 현판이 걸려 있다. 모열각은 그녀가 죽은 지 146년 후인 1922년 오륜행실중간소의 공인을 받아 세워졌으며 지금의 모열각은 1979년 중수한 것이다.
정려각과 일반 비각의 차이
대구에는 현재 약 30개 정도의 효자·충신·열녀 정려각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답사를 다니다보면 정려각과 비슷해 보이지만 정려각과는 격이 좀 다른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다. ‘○○효자각’ 혹은 ‘○○열부각’ 등 이름도 비슷해 일반인들은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사실 정려각과 일반 비각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정려각은 엄격한 절차를 거쳐 최종적으로 ‘임금’의 허락을 받는 것이라면, 일반 비각은 고을이나 문중에서 공인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으로 보자면 정려각은 대통령 표창이요, 일반 비각은 지자체나 문중 표창 쯤 되는 셈이다. 이 둘을 구별하는 방법은 정려각이나 비각 내부에 이른바 ‘정려편액’ 혹은 ‘정려비’가 있느냐, 없느냐에 달렸다. 정려편액이나 정려비는 대부분 첫머리에 ‘충신·효자·열녀’라는 단어가 먼저 나오고 뒷부분에는 반드시 ‘~~지려(之閭)’, ‘명정(命旌)’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지려는 ‘누구의 정려’, 명정은 ‘임금이 정려를 명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종종 기세리 진주강씨 모열각처럼 정체가 애매한 경우가 있다. 이는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정려를 시행하는 주체가 달라져서 생긴 문제다. 조선시대에는 조정에서 정려를 시행했지만, 일제강점기 때는 없어진 조정을 대신해 유림단체인 ‘유림향약본소’나 ‘오륜행실중간소’에서 시행했다. 따라서 임금의 명을 의미하는 ‘정려’·‘명정’·‘지려’ 같은 표현은 쓸 수 없었다. 하지만 ‘유림향약본소’나 ‘오륜행실중간소’의 공인을 받은 충·효·열 비각은 정려각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에 비견될 수 있을 정도는 된다. 이 경우는 ‘정려편액’ 대신 유림향약본소·오륜행실중간소 명의의 ‘포창완의문’·‘포장’ 등이 비각 내에 걸려 있다. 모열각에도 오륜행실중간소 명의의 ‘포장’이 걸려 있다.[긍재 이병운 선생이 지은 모열각기문에는 본래 열부로 정려를 받았으나 그 문적이 모두 사라져 증명할 길이 없다는 내용이 있다]
에필로그
모열각 곁에는 또 다른 한 여인을 기리는 비가 있다. 1974년에 세워진 ‘효부고령신씨지비(孝婦高靈申氏之碑)’로 기세리 석종균의 부인인 고령신씨의 효부행을 기린 비석이다. 며칠 전 참꽃야경투어 때 손님들을 모시고 잠시 모열각에 들린 적이 있다. 주변은 변했으되 모열각은 옛 모습 그대로였다. 참고로 진주강씨·진양강씨는 같은 말이다. 본래는 진주였는데 진주가 조선 태조의 두 번째 아내이자 조선 최초 왕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친정 고향인 까닭에 진주를 ‘진양’대도호부로 승격시킨 것에 유래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