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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4.01 03:02
서울 노고산동 연남서식당은 1953년 문을 열었다. 의자 없이 서서 먹는 고깃집 원조다. 이 집엔 의자 말고도 없는 게 많다. 밥과 찌개 같은 부대 메뉴가 없다. 메뉴는 소갈비뿐이다. 여기에 고추, 마늘, 고추장, 고기 찍어 먹는 소스만 내 놓는다. 그런데도 개점 시간인 낮 12시 전부터 식당 앞에 길게 줄이 선다. 다른 고깃집들이 첫 손님 받을 시간인 오후 6~7시쯤 고기가 동난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중국·싱가포르·홍콩·대만 등 아시아 관광객들 명소다. 2년 전 영국 BBC에서 한국 대표 식당으로 소개했고 작년 12월에는 미국 LA의 한 방송사에서도 촬영해 갔다. 부친에 이어 2대째 이 집을 운영 중인 이대현(76)씨는 1953년 식당이 문 열었을 때 열두 살이었다. 그때부터 일해 온 식당이 60년 넘게 성업 중이다.
자식과 함께 온 부모만 앉을 수 있어
지난 27일 오후 3시 월요일 낮인데도 식당은 손님으로 꽉 찼다. 한국어와 영어·중국어·일본어가 떠들썩했다. 식당 창문 모두 열고 대형 환풍기가 있는데도 달착지근한 고기 굽는 냄새와 자욱한 연기가 식당 가득했다.
―다리 아프고 옷에 냄새 밴다고 불평하는 손님도 있겠군요.
"글쎄요. 그런 사람 별로 없어요."
―서서 먹는 걸 고집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고집이라기보다…. 6·25 때부터 드럼통에 연탄불 피워 놓고 그렇게 장사했는데, 이제는 신식 아이디어가 됐지요. 드럼통에 의자 놓는다고 제대로 못 앉아요. 다리가 뜨거운 드럼통에 닿으니까. 몸을 옆으로 틀어서 먹어야 해. 그러다 바지 탈 수도 있고."
―이 식당에서 목발 짚고 먹는 사람 사진도 인터넷에 떠돌던데요. 간이의자라도 마련해 놓으면 좋지 않을까요.
"의자 하나만 갖다 놔 봐. 나도 달라고 모두 우르르 아우성일 거야. 누구는 주고 누구는 안 준다고 욕하고. 대신 의자 가지고 와서 먹는 사람은 안 말려요."
―이 식당에선 모두 평등하군요.
"앉아서 먹게 도와주는 손님이 있긴 있죠. 나이 들어서 거동이 힘든데도 효자·효녀 대동하고 온 손님. 이분들한테는 소주 박스 옆으로 세우고 위에 신문지 깔아 드려요. 어르신들이 자녀한테 고기 받아먹는 모습이 제비 둥지에서 새끼가 어미한테 먹이 받아먹는 것 같아. 그렇게 맛있게 잡수세요. 용돈 5만원, 10만원보다 이런 데 와서 고기 한 점 주는 자식들이 더 예쁜 거야."
―이 집에서 고기 먹어 본 사람들이 다른 고깃집보다 살코기가 많다고 하던데요.
"다른 집이 어떻게 하는지는 모르겠고. 우리는 30근(18㎏)짜리 고기 사오면 기름하고 잡뼈 11근(7㎏) 버려요. 나는 고기 가지고 장난 안 쳐요. 1970년대부터 고기 연하게 하는 약을 썼다는데, 촌놈이라서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어. 다른 데는 소갈비에 본드로 고기 붙이는데 우리는 그런 거 안 써요. 칼로 갈비에 붙어 있는 살에 구멍을 내서 토시살을 끼워넣지. 그러니까 준비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려요. 하루에 손질할 수 있는 고기 양이 갈비 600에서 800대 정도예요."
―당일 오전에 양념한 고기만 판다고요.
"고기를 하루나 이틀 양념에 재면 화학반응을 일으켜서 고기가 검게 절어요. 이러면 갈비를 먹는 게 아니라 양념을 먹는 거지. 가공식품이 되는 거야. 우리는 양념을 했어도 간장색이 아니라 붉은 빛깔이 나지요. 고기 맛을 최대한 살리려고 그래요." 계산대 옆에는 '소갈비 1대 150g ₩15,000. 국내산 육우뼈 갈비에 미국산 토시살을 섞음'이라고 쓴 종이가 붙어 있었다.
―자세하게 써 놨네요.
"사실 그대로죠. 저는 양념도 다 공개했어요. 파, 으깬 마늘, 볶은 통깨, 참기름, 후춧가루, 설탕, 진간장 딱 7가지에 끓이지 않은 생수를 써요. 저는 응큼한 거 싫어요."
―미국산 쓴다고 손님들이 뭐라 안 하나요.
"한우는 좁은 외양간에서 사료 먹고 자랐고, 미국산은 넓은 목장에서 풀 먹고 자랐는데 어떤 소가 더 건강하겠어요?"
―자신 있으시군요.
"이런데도 잘 되느냐 이거지?(웃음) 나는 대한민국 전 국민에게 고기 팔겠다는 욕심 없어요. 100만명 바라보고 장사하지. 나는 손님한테든 종업원한테든 구걸 안 해. 6·25 때 배고파서 구걸한 이후 내 인생 사전에서 더 이상 구걸은 없다. 왜? 내가 떳떳하고 내가 파는 고기가 자신 있으니까. 떳떳하면, 자신 있으면 구걸할 필요 없어요."
6·25 땐 잔술에 고기 팔아
이씨는 이날 오전 6시 30분 식당에 출근했다. "오전 5시에 일어나서 고양이 세수하고 출근하는 길"이라고 했다. 그는 제일 먼저 연탄불부터 갈았다.
―왜 숯불이 아니라 연탄불을 씁니까.
"고기 구울 때는 불이 세야 해. 그래야 살 속에 국물, 그러니까 육즙이 끓어요. 불이 시시하면 육즙이 끓지 않고 말라요. 고기가 질겨지지. 숯은 처음 30분만 좋아요. 그 뒤에는 재가 생겨서 2㎜ 정도 두께로 숯을 덮고 화력이 약해져. 옛날 양반들이 안심이나 등심을 화롯불에 두세 번 구워 먹을 때나 숯불이 좋지. 연탄은 480에서 500도 불이 22개 구멍을 통해 일정하게 올라오니까 고기 구울 때 아주 좋지요."
―밤새 장사는 안 해도 연탄불은 계속 피우는군요.
"꺼뜨리면 다음 날 장사 못하니까. 식당 이사할 때도 연탄불 계속 살려왔지. 우리 식당은 60년 넘게 장사하고 이사도 아홉 번 다녔지만 연탄불 꺼뜨린 적 거의 없어요.
이씨 할아버지는 김포에서 이름난 지주였다고 한다. 일제 시대 김포 땅을 팔고 신촌으로 이사 왔다. “원래 여기가 산골이었는데, 할아버지가 기와집 짓고 마포에서 조랑말 스무 필로 운송 사업을 했다”고 했다. 그러다 이씨 큰아버지가 사업하다 망했고, 가세가 완전히 기울었다고 했다.
초등학교도 못 나온 이씨 부친은 밭에서 채소를 키워 시장에 팔러 다녔다고 한다. 이씨가 아홉 살 때 6·25가 터졌다. 어머니와 두 여동생이 죽고 아버지와 이씨, 남동생만 살아남았다. “피란 가서 산에 나무하러 갔는데, 다섯 살 여동생이 죽어 있더라고. 배고파서였는지, 병에 걸렸는지 몰라. 남의 밭에다 묻고 오는데 그새 세 살 먹은 여동생이 또 죽어 있더라고. 또 묻었지. 얼마 후 어머니도 폭격으로 떠나셨어. 사람 목숨이 정말 벌레 목숨 같았어.”
이씨 아버지는 이씨를 데리고 대폿집을 시작했다. 논밭에 굴러다니는 미군 드럼통 3개를 구해다 집 마당에 놓고 그 위에 야전 천막을 쳤다. 김포약주와 소주, 막걸리를 잔술로 팔고, 안주로 돼지고기와 소갈비를 팔았다고 한다.
―학교는 안 다녔나요.
“월사금 못 내서 중 2 때 포기했어요. 하루 쌀 세 홉 벌기 위해서 술집 했으니까. 한 홉(180mL)이 어린아이 먹는 우유 한 팩 양도 안 돼. 그걸로 미음 끓여서 세 식구가 겨우 한 끼니 때웠어요. 지금은 사라진 연세대 앞 신촌양조장 가서 술 만들고 남은 재강(술지게미) 훔쳐 먹고 취하고. 석탄 저장소 있던 서강역에 갱목 들어오면 부엌칼 가지고 가서 껍질 깐 뒤에 미끈미끈한 속을 가져다가 쪄 먹기도 했지.”
―동생도 같이 일했나요.
“동생은 어리니까 나만 일했지요. 술집에서 시중드는 아이를 술강아지라고 했는데 내가 그랬지. 아버지한테 일 못한다고 맞고. 다른 애들은 학교 다니는데, 나는 양조장 가서 술 사오는 게 얼마나 서럽던지. 또 조금 먹고살 만해지니까 아버지가 계모를 들였어요. 계모한테 미움 많이 받았지요. 아버지는 또 낮 12시쯤 술에 취해서 곯아떨어져요. 그러면 장사는 거의 혼자서 해야 하는 거야.” 이씨 부친은 장가를 다섯 번 갔다고 한다.
―가출할 생각도 했겠군요.
“내가 어디 설렁탕 집이라도 가서 일하면 밥 잘 먹고 월급 받을 거라고 생각한 적도 있지요. 그런데 아버지하고 남동생이 불쌍해질 것 같아서 집 못 나갔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일했어요. 아버지가 빨리 부자가 돼야 내가 해방이 된다고 생각해서.”
―열심히 하니까 돈이 모이던가요.
“아니야. 손님 대부분이 농사꾼이었어요. 그때만 해도 신촌이 거의 다 논밭이었으니까. 봄부터 외상술 마시고 추수 끝나면 준다는데 받은 적이 거의 없어요.”
―그럼 언제부터 장사가 잘되기 시작했나요.
“6·25 복구 사업으로 논밭에 한옥이 들어서기 시작했어요. 신촌로터리에 목재소와 철물점이 들어섰고. 그때는 목수들이 왕인데, 시간 없으니까 술 한 잔 먹고 고기 한 점 먹고 갔어요. 또 신촌이 버스 정류장 종점이었는데, 운전사들도 많이 사줬지. 우리 집에서 술 한잔하고 다시 운전하러 가는 거야. 정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얘기지요.”
이씨 대폿집은 할아버지 고향을 따서 ‘김포집’, 안주는 실비(원가)에 먹고 술값만 더 내면 된다고 해서 ‘실비집’ 등으로 불렸다. 1970년대 초까지 소갈비보다 술로 돈을 벌었다고 한다. 이씨는 “1973년 유류 파동 이후 돈 버는 사람이 늘면서 술보다 갈비가 더 잘 팔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자가용이 많아지니까 운전해야 한다고 술 덜 먹고 고기만 찾아요. 그때부터 온 가족이 다 덤벼서 갈비를 만들기 시작했지요.” 이씨는 장사가 어느 정도 되자 식당을 뛰쳐나와 제지 회사에 취직했다.
―왜 나왔나요.
“지금도 그렇지만 식당 하면 우습게 봤어요. 술만 먹으면 그렇게 시비를 걸고, 나보다 나이 한참 어린데도 반말을 해요. 그게 너무 싫었어요. 제지 회사 있다가 아예 사장도 했죠. 화장지 공장, 두루마리 공장, 전기밥솥 공장, 알루미늄 주물 공장도 했고. 동대문 종합상가에서 이불 장사, 청량리 도매상가에서 장갑 장사도 했고, 나중에는 빵 장사도 했어요. 가게는 큰아들인 제 앞으로 돼 있었지만, 식당은 배다른 동생들이 했죠. 그러다 1989년 아버지 돌아가시고 다시 가게로 왔어요.”
10중 7만 갖겠다는 인생철학
이씨집 간판은 작년 ‘연남서서먹는 갈비집’에서 ‘연남서식당’으로 바뀌었다. “원래 김포집으로 허가가 났었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1979년 식당을 내 이름으로 등록했는데 공무원이 내가 마포구 연남동 산다고 ‘연남식당’이라고 한 거야. 그래도 사람들이 우리 집을 서서갈비라고 부르니까 연남서서먹는 갈비집이라고 간판을 달았는데, 나를 따라 한 집들이 먼저 서서 먹는 갈비를 특허 내서 나는 못 쓴대. 고발도 들어오고. 그래서 바꿨지.”
―옛날 간판하고 많이 비슷하군요.
“전에 간판 만들었던 사람 수소문해서 만들었지요.”
―원래 느낌 그대로 살리려고 했군요.
“장사하는 사람들끼리 의리지. 저는 채소 장수든 고기 장수든 한 번 거래하면 오래 해요. 나한테 장난치지 않는 이상 바꾸질 않지. 채소 시세를 알아보고 그러지도 않아요. 믿으니까.”
―손해 볼 수도 있을 텐데요.
“내 인생철학이 ‘칠삼’이에요. 내 것이 10이라고 해도 7을 가지고 3을 상대방에게 줘야 된다는 겁니다. 가끔 갈비 몇 대 덜 먹었다고 속이고, 냉장고에서 몰래 소주 꺼내 먹는 손님 있어요. 알지만 모른 척해요. 그 정도는 손해 봐도 좋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손님 기분 좋아서 다시 올 거 아녜요?”
―장사 비결이 이건가요.
“장사 잘되는 비결은 딴 거 없어요. 첫째, 정직해라. 식당 하는 사람들이 욕먹는 게 캄푸라치(거짓)를 많이 해서 그래요. 행주 대신 소매로 슥 닦고 깨끗한 척하고 그러지 말라는 거지. 둘째, 혼자 오는 손님한테 잘하라. 식당 가면 혼자 왔다고 저 구석에 앉게 해. 그러면 다신 안 오지. 그 사람한테 잘하면 얼마 있다가 여러 사람 데리고 와. 셋째, 사장이 손님 보는데 계산대에서 계산기 두드리지 말아라. 손님 정떨어져요.”
연남서식당 직원은 현재 14명이다. 직원 점심과 저녁밥을 해 주는 사람이 따로 있다. 2층에는 직원 휴게소, 샤워실을 뒀다. 월급도 다른 곳보다 더 준다고 한다.
―직원들 대우도 좋다고요.
“식당 주인은 제일 먼저 출근해서 제일 마지막에 퇴근해야 해요. 직원 감시하려는 게 아니라 직원이 제대로 장사하도록 도와주는 거죠. 하루 종일 있을 필요도 없어요. 아침에 연탄불 갈고 집에 있다가 저녁에는 같이 청소하러 나와요. 자동차 경주로 따지면 직원이 운전사고 주인은 타이어 갈아주고 연료 넣어주는 정비사죠. 주인이 게으름 피우면 자동차가 어떻게 되겠어요?” 연남서식당 1년 매출은 약 30억원으로 알려져 있다.
―오래 장사했으니 돈 많이 벌었겠군요.
“아니요. 지금은 혼자 하지만 수년 전까지만 해도 형제들하고 같이 장사해서 다 나눠 가졌어요. 또 박리다매라서 많이 못 남겨요. 지금 갈비 1대에 1만5000원인데, 2008년에 1만4000원이었다가 2015년에 1000원 더 올린 거예요. 이 가게 땅하고 사는 아파트, 또 혹시 여기 개발되면 식당 옮겨야 할지 몰라서 사 놓은 땅하고, 은행에 세금 내려고 모아 둔 예금이 전부예요. 땅 사고 건물 사서 돈 벌려고 하지 않았어요.”
―체인점을 내지 않는다고요.
“체인점은 사기성이 있어요. 퇴직금 먹으려고 노리는 곳이 많아요. 진짜 잘 되는 곳은 본점들이 가지고 있고요. 나는 그렇게는 장사 안 해요.”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3/31/201703310190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