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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실 스크랩 망국의 몇 가지 풍경 9 친일 경쟁
어등산나무꾼 추천 0 조회 85 15.06.16 21:4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이완용, 통감부서 돈·귀족 대우 약속 받고 ‘매국 작업’

 

한 나라가 망할 때는 조짐이 있다. 먼저 내부에서 나라를 팔아먹는 세력이 등장한다. 안중근·이재명 등이 잇따라 등장하는 와중에서도 이완용 내각과 일진회는 합방의 공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웠다. 이완용은 비서 이인직을 통감부 외사국장에게 보내 합방 조건을 타진했다.

 

1 경복궁에 걸린 일장기,조선은 건국 518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 2 통감 관사. 조선 통감을 지낸 이토와 소네, 데라우치가 살았다. 조선을 강점하는 데 성공한 데라우치 통감은 총독으로 승격된다. 3 송병준(왼쪽)과 이용구. 일진회는 일제의 사주를 받아 합방 청원에 나섰다. 4 이인직은 이완용의 지시로 고마쓰를 몰래 만나 합방 조건을 협상했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레닌이 아카시가 제공한 일본 군부의 비밀 자금을 수령한 것처럼 중국의 손문(孫文)도 일진회처럼 흑룡회의 지원을 받았다. 손문의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는 도쿄의 흑룡회 총부(摠部)와 공동으로 조직한 것이었다. 레닌은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서, 손문은 중국의 자립과 근대화를 위해서 흑룡회와 손잡았다. 악마와 손을 잡았지만 영혼은 팔지 않았다.

 

그러나 일진회와 이완용은 영혼부터 팔았다. 흑룡회가 1930년 간행한 일한합방비사(日韓合邦秘史)는 서문에서 일진회장 이용구와 송병준을 ‘불세출의 영웅’이라고 치켜세우고 있는데, 그 앞에 ‘고국을 팔아먹는 데 큰 공을 세운’이란 형용사를 넣었다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나마 이완용은 이토 히로부미 사살에 큰 충격을 받고 잠시 몸을 사렸다. 통감부문서 메이지(明治) 42년(1909) 11월 10일자의 헌기(憲機:헌병기밀)는 ‘이완용이 서울 장동(莊洞) 김유정(金裕鼎) 소유의 300여 칸(1칸은 약 3m 정도) 가옥을 매수해 수리한 다음 이달 10일경에 이주할 예정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일본에서 활동하던 프랑스 화가 조르주 비고트가 1887년 그린 그림.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는 것을 예견한 것이었다. 
 
세종실록 30년(1448) 12월조는 “대군(大君)은 60칸(間), 제군(諸君) 및 공주는 50칸, 2품 이상은 40칸, 3품 이하는 30칸”으로 주택 규모를 법제화했는데, 이완용은 대군의 다섯 배 규모의 집을 소유하려 한 것이다. 같은 통감부문서는 “이완용은 이토 공(公)의 피해 이후에 눈에 띄게 공포심을 갖게 되어 그곳으로 이사하는 것을 중지하였다”면서 “그저께 이후 병을 핑계로 자리에 누워 방문객을 일절 거절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완용은 계속 누워 있을 수도 없었다. 일진회가 이토 사망을 호재로 삼아 합방 공작에 적극 나섰기 때문이었다. 이완용은 자칫하면 합방의 공로를 일진회에 빼앗길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진회는 1909년 12월 3일 대한협회와 정견협정위원회(政見協定委員會)를 열고 합방 성명서를 발표하자고 주장했다. 대한협회가 반대하자 일진회는 그날 밤 재경(在京) 회원 200여 명을 소집해 총회를 열고 합방 제의를 전격 가결했다. 대한협회 고문이었던 일본 언론인 오가키 다케오(大垣丈夫)의 언동에 관한 건이란 일본 경찰 비밀문서(警秘:제4417호) 등에 따르면 대한협회는 이완용 내각의 협조를 얻어 중추원(中樞院) 관제를 개혁해 중요 사건을 자문하고, 대한협회 회원들을 의관(議官)으로 임용하고, 각도에 유급 참사회(參事會)를 설치하려고 했다고 전하고 있다. 대한협회는 이완용 정권에 참여하는 것이 목표였던 반면 일진회는 나라 자체를 팔아먹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다.

 

12월 3일 오후 3시 데라우치(寺內) 육군대신(陸軍大臣)이 조선 통감 소네(曾<79B0>)에게 보낸 일진회원의 한일합방 청원에 관한 건이란 비밀 전보는 ‘다음날 합방청원을 결행할 것’이란 사실을 전하고 있어서 일진회가 일본 군부의 하수인임을 말해주고 있다. 12월 4일 일진회장 이용구(李容九)는 “100만 회원의 연명”이라면서 한일합방 성명서를 중외에 선포했다. 일진회는 각도 유생 30여 명과 대한상무조합(大韓商務組合) 같은 보부상 단체들을 동원해 분위기를 띄웠다. 그리고 한일합방 상주문(上奏文)과 청원서를 황제 순종과 통감 소네, 총리 이완용에게 전했다. 일본 낭인 조직 흑룡회가 간행한 일한합방비사에 따르면 순종과 이완용에게는 오전 9시에 우편으로 송부하고 소네 통감에게는 이용구가 직접 출두해 사타케(佐竹) 비서관을 통해 전달했다고 한다.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년 12월 7일자는 일진회의 합방청원 성명에 대해 일반 인민들은 ‘일진회는 이미 일본인이지 한국인이 아니므로 어떤 악한 행동을 하더라도 한국민의 행위가 아닌 것으로 인정한다’는 여론을 전하고 있다. 같은 날 이완용 내각은 일진회의 합방 청원을 각하시켰다. 일진회는 다음 날 다시 합방청원 상주문을 우편으로 보냈고 이완용 내각은 다시 각하시켰다. 그리고 대한협회·한성부민회 등을 동원해 일진회의 합방 청원에 반대하는 국민대연설회를 개최시켰다. 일진회의 노력으로 합방이 달성되면 최대 공로자는 일진회가 되기 때문이었다. 합방론 때문에 정국이 어수선해지자 경시청은 12월 9일 일진회장 이용구와 국민대연설회 회장 민영소(閔泳韶), 국민대회 회장 김가진(金嘉鎭)을 불러 ‘모든 집회 연설 및 선언서 반포를 금지한다’고 명령했다.

 

일진회와 이완용 내각이 합방의 공을 가지고 싸우는 와중에 이완용 처단 미수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에서 돌아온 만 19세의 기독교도 이재명(李在明)은 김정익(金貞益)·이동수(李東秀) 등과 매국친일파를 제거해 망국을 막으려고 계획했다. 이완용은 이재명이, 이용구는 김정익이, 송병준은 이동수가 처단하기로 뜻을 모았다. 12월 22일 오전 11시30분쯤 이재명은 종현(鍾峴) 천주교회에서 열린 벨기에 황제 레오폴드 2세 추도회에 참석했던 이완용을 칼로 세 차례나 찔렀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이재명은 합방론이 일자 ‘이용구를 불가불 죽여야 한다’고 했다가 뒤에 ‘이런 화를 일으킨 장본인은 이완용이다’라면서 마음을 바꾸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용구보다 이완용이 더 큰 원흉이라고 깨달았다는 뜻이다. 이재명은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다가 현장에서 체포되었는데, 매천야록은 “이때 서울 사람들은 크게 놀랐고 조중응(趙重應)·박제순(朴齊純) 등은 더욱 삼엄한 경계를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일본인 검사 이토(伊藤)는 이재명에게 교수형, 김정익·이동수(궐석 재판) 등에게 15년 형을 내렸다. 유학자 송상도(宋相燾)는 기려수필(騎驢隨筆)에서 이재명은 사형이 선고되자 “내가 죽으면 마땅히 수십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해서 장차 일본에 큰 화가 될 것이다”라고 외쳤다고 전하고 있다. 조선총독부관보(朝鮮總督府官報) 1910년 10월 4일자에선 이재명이 1910년 9월 30일 오전 11시에 사형당했다고 전한다.

 

일진회에 공을 빼앗길까 우려하던 이완용이 고안해낸 묘수는 비서 이인직(李人稙)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혈의 루의 작가였던 이인직은 일본어에 능통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京城日報)는 1934년 11월 25일부터 3회에 걸쳐 ‘일한병합(日韓倂合) 교섭과 데라우치(寺內) 백작의 외교 수완’이라는 기사를 싣고 있다.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小松錄)가 필자다. 육군대신 데라우치는 1910년 5월 30일 소네의 뒤를 이어 통감으로 임명되었지만 7월 2일에야 부임했다. ‘즉각 합병론자’인 육군대장을 통감으로 삼은 것은 대한제국 강점이 시간문제로 접어들었다는 뜻이다.

 

다급해진 이완용은 8월 4일 밤 11시에 비서 이인직을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에게 보내 합방조건에 대해 협상했다. 이인직은 1900년 2월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유학길에 올라 도쿄 정치학교에 입학하는데, 고마쓰가 이 학교 교수였다. 이 학교에서 이인직은 소론(少論) 출신의 친일파 조중응과도 사귀게 된다. 1903년 2월 한국 정부의 유학생 소환령을 거부한 채 미야코(都) 신문사의 견습생으로 일하던 이인직은 1904년 러일전쟁 때 일본군 통역으로 귀국했다. 1906년 2월 송병준이 창간한 일진회 기관지 ‘국민신보’의 주필이 되었다가 다시 이완용의 비서가 된다. 일진회와 이완용 사이에서 이완용을 선택한 것이다.

 

이인직은 고마쓰에게 “역사적 사실에서 보면 일한병합이라는 것은 결국 종주국이었던 중국으로부터 일전(一轉)하여 일본으로 옮기는 것”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바로 인조반정 이래 집권당이었던 노론(老論)의 합방 당론이기도 했다. 이인직은 “조선 국민은 대일본제국의 국민으로서 그 위치를 향상시키는 일이 될 뿐”이라는 궤변까지 늘어놓았다. 이완용이 이인직을 몰래 보낸 이유는 합방 후 자신들의 처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마쓰는 “병합 후 한국의 원수는 일본 왕족의 대우를 받으며 언제나 그 위치를 유지하기에 충분한 세비를 지급받으시게 된다… 또한 내각의 여러 대신은 물론 다른 대관으로서 병합 실행에 기여하거나 혹은 이에 관계하지 않은 자에게까지도 비위의 행동으로 나오지 않는 자에게는 모두 공·후·백·자·남(公侯伯子男)작의 영작을 수여받고 세습재산도 받게 된다”는 방침을 전해주었다.

 

이에 고무된 이인직은 “귀하께서 말씀하신 바가 일본 정부의 대체적 방침이라고 한다면 대단히 관대한 조건이기 때문에 이 총리가 걱정하는 정도의 어려운 조건은 아니라고 확신한다”고 말하고 돌아갔다. 이인직의 보고를 들은 이완용이 드디어 합방 추진에 나섰다.

‘500년 조선’을 파는 매국 협상, 30분 만에 상황

 

숲이 우거지면 그늘도 깊다. 조선은 일본의 군사 강점과 고종의 무능, 인조반정 이래 집권당이었던 노론의 매국이 결합해 망하고 말았다. 그렇기에 그 폐허 속에서 제국의 복벽(復?:망한 왕조를 다시 세움)이 아니라 민주공화제의 싹이 트기 시작한다. 그 절망 속에서 대한민국이 탄생을 위해 꿈틀대고 있었다.

 

한일합방에 찬성한 내각 각료들이 일본을 견학하고 있다. 아래에서 둘째 줄 왼쪽 여덟째가 대원군의 아들 이희(이준용 부친), 두 사람 건너 이재각, 한 사람 건너 순종의 장인 윤택영. [사진가 권태균 제공] 

 

총리 이완용의 비서 이인직이 한밤중에 몰래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를 찾아가 매국(賣國) 조건에 대해 협상하고 간 사나흘 후 이인직은 밤중에 다시 그를 찾아갔다. 이완용은 이인직을 통해 “‘병합 조건이 의외로 관대하다면서 이런 방침이라면 병합 실행은 그렇게까지 곤란하지 않겠다’는 생각이다. 단 너무 오래 끌면 여러 가지 장애가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가급적 빨리 실행하는 것이 좋다”는 말을 전하도록 했다. 자칫 일진회에 매국의 공을 빼앗길까 조바심이 난 것이다. 이완용이 서두르자 고마쓰는 ‘데라우치 통감은 이토와 달리 복잡하게 얽힌 교섭 등은 아주 싫어한다’면서 “요구 같은 말을 꺼내거나 하면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감정을 해쳐 장래에 불리한 영향을 끼칠지 모른다”고 말했다. 어떤 요구도 하지 말고 주는 떡이나 먹으라는 뜻이었다.

 

고마쓰가 1934년 경성일보(京城日報)에 쓴 ‘데라우치(寺內) 백작의 외교 수완’의 핵심은 이완용 내각과 일진회를 상호 경쟁시키는 것이었다. 그간 일본은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의 이토 사살이 합방을 앞당기는 계기가 된 것처럼 설명했지만 사실과 다르다. 이토는 이미 그해 4월 총리 가쓰라, 외무 고무라와 3자 회합에서 한국 병합에 찬성했고, 일본 각의는 7월 6일 ‘한국 병합에 관한 건’을 통과시켰다. 한국을 병합하려면 먼저 격렬하게 저항하는 의병을 진압해야 했기에 8월 14일 임시한국파견대사령부(臨時韓國派遣隊司令部)는 이른바 ‘남한 대토벌 실시계획’을 세웠다. 의병이 가장 활발했던 호남을 중심으로 충청도와 영남까지 일체의 의병을 뿌리 뽑겠다는 군사계획이었다. 계획의 제12조는 ‘토벌대는 전 지구 내를 빠짐없이 수색하여 전후종횡으로 행동하고 특히 산지와 촌락은 엄밀히 수색을 실행한다’고 규정했다. 제14조는 ‘거주 남자(20세 이상~60세 미만)를 대조·조사하고 각 가옥을 임검(臨檢)한다’고 규정해 전체 주민을 작전 대상으로 삼았다. 같은 사령부에서 9월에 보고한 ‘남한 폭도 대토벌 실시 보고’는 영남과 호서(충청)에도 의병이 자주 출몰하지만 특히 호남은 “다른 도에 비하여 적세가 창궐하고 수괴가 각지에 할거해서 그 세력이 강대하다. 대병력으로 일거에 이를 탕진하는 방책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고 보고하고 있다.

1 조선총독부장. 2 3대 조선통감 겸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이후 조선총독 자리엔 군인들이 부임하는 게 원칙이 되었다.  
 
“전라남북도의 한국인은 청일·러일전쟁에 있어서 한 번도 우리 군대의 활동을 보지 못해서 그 진가를 모른다. 문록(文祿:임진왜란)의 옛날을 몽상해서 일본인을 경시하는 풍조가 있기 때문에 이 기회에 단연 대토벌을 결행, 파견대의 전력을 기울여서……남쪽 벽촌과 산간도서의 한국인들에게까지 황군(皇軍)의 엄숙하고 용감한 무위(武威)에 놀라게 해서 일본 역사상의 근본적인 명예회복을 행하지 않을 수 없다.(임시한국파견대사령부, ‘남한 폭도 대토벌 실시 보고(南韓暴徒大討伐實施報告)’)”

남한 대토벌을 임란의 연장으로 생각하는 사고가 엿보인다. 일본군의 통계는 1906년부터 1911년까지 의병 사상자가 2만1485명이라고 전하지만 민간인 사상자가 누락된 숫자다. 일제는 이른바 ‘남한 대토벌’로 전국을 군사적으로 강점한 후 매국 친일파들을 이용해 병합하는 수순을 밟은 것이다. 고마쓰로부터 보고를 받은 통감 데라우치는 이완용에게 통역관을 보내 통감 저택으로 방문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완용은 이때 다시 일진회의 허를 찔렀다. 이인직의 일본 정치학원 동창이자 일본어에 능했던 농상무대신(農商務大臣) 조중응을 대동하고 데라우치를 방문한 것이다. 소론 조중응을 끌어들여 집권 노론이 주도하는 합방 공작을 야당인 소론 일부에 떠넘기려 한 것이다. 1910년 8월 16일 이완용·조중응은 일본의 호우 피해를 위문한다는 표면적 핑계로 데라우치를 방문했다.

 

고마쓰는 “통감 저택 내의 한 방에서 데라우치 통감은 이·조 두 대신을 면회하고, 일·한 병합의 피할 수 없는 사정과 장래의 처분 안에 대해 간단하게 말씀하시고, 그 대요를 필기한 각서를 건넸다”고 전하고 있다. 합방 후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장하는 각서를 받은 두 사람이 30분 만에 통감 저택을 나왔다. 혹시 병합 담판이 아닐까 주목하던 내외 신문·통신들도 30분 만에 ‘500년 종사’를 파는 매국협상이 이뤄질 수는 없다고 보고 위로 방문으로 여겼다. 고마쓰가 전하는 유일한 이견은 이완용 등이 “한국 원수(元首:조선 황제)의 칭호를 대공(大公:국왕과 공작 사이)으로 하는 게 어떠냐는 문의가 있어 일본 측은 오히려 구래(舊來)의 칭호인 국왕으로 하는 것이 낫겠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효종 국상 때 국왕이 아니라 사대부가의 예법을 적용해 1년복설을 주장한 것처럼 조선 국왕을 임금이 아니라 자신들과 같은 사대부 계급으로 여겨왔던 인조반정 이래 노론 당론이 다시 확인되는 셈이었다. 두 대신이 데라우치를 만난 지 6일 만인 8월 22일 이른바 ‘한일합방조약’이 조인되었다. 군사 강점 상태에서 매국 친일파들과 맺은 조약이므로 굳이 황제의 재가가 없다는 사실을 거론할 필요도 없는 불법 조약이었다.

 

‘조선총독부관보’등에 따르면 두 달이 채 못 된 1910년 10월 12일 조선총독부는 매국 친일파 76명에게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의 작위를 수여하고 은사금을 지급했다. 이완용과 데라우치 사이의 각서를 토대로 만든 이른바 ‘한일병합조약문’ 제5조에 ‘일본국 황제폐하는 훈공(勳功) 있는 한국인으로서 특히 표창에 적당하다고 인정된 자에게 영작(榮爵)을 수여하고 또 은급(恩級)을 부여한다’고 명기한 데 따른 포상이었다. 76명의 수작자(授爵者)들을 분석하면 두 가지 흐름이 발견된다. 하나는 왕실 인사들이다. 가장 고위직인 후작은 이완용을 제외하면 이재완·이재각·이해창·이해승 등 모두 왕실 인사였다. 윤택영은 순종비 윤씨의 친정아버지였고 박영효는 철종의 사위였다. 또 하나는 사실상 ‘노론 당인 명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집권 노론 일색이었다. 76명 중 소속 당파를 알 수 있는 64명의 당적을 분석하면 남인은 없고, 북인이 2명, 소론이 6명, 나머지 56명은 모두 노론이다. 후작에서 자작까지 31명의 명단과 소속 당파는 다음과 같다(조선귀족열전(朝鮮貴族列傳)명치 43년(1910), 조선신사대동보(朝鮮紳士大同譜)대정 2년(1913), 조선귀족약력(朝鮮貴族略歷:1929년께)등을 참조해 작성한 것임)

 

후작 이재완(李載完:대원군 조카)
후작 이재각(李載覺:왕족)
후작 이해창(李海昌:왕족)
후작 이해승(李海昇:왕족)
후작 윤택영(尹澤榮:본관 해평, 순종 장인, 노론)
후작 박영효(朴泳孝:본관 반남 철종 사위, 노론)
후작 이완용(李完用:본관 우봉, 노론)
백작 이지용(李址鎔:본관 전주, 노론)
백작 민영린(閔泳璘:본관 여흥, 순종비 민씨 오빠, 노론)
백작 송병준(宋秉畯:본관 은진, 자칭 노론)
백작 고희경(高羲敬:본관 제주, 중인)
자작 이완용(李完鎔:본관 전주, 노론)
자작 이기용(李埼鎔:본관 전주, 노론)
자작 박제순(朴齊純:본관 반남, 노론)
자작 조중응(趙重應:본관 양주, 소론)
자작 민병석(閔丙奭:본관 기흥, 노론)
자작 이용식(李容植:본관 한산, 노론)-3·1운동 가담 작위 박탈
자작 김윤식(金允植:본관 청풍, 노론)-3·1운동 가담 작위 박탈
자작 권중현(權重顯:본관 안동, 한미한 가문 출신)
자작 이하영(李夏榮:본관 경주, 한미한 가문 출신)
자작 이근택(李根澤:본관 전주, 노론)
자작 임선준(任善準:본관 풍산, 노론)
자작 이재곤(李載崑:본관 전주, 노론)
자작 윤덕영(尹德榮:본관 해평, 노론, 순종 처숙부)
자작 조민희(趙民熙:본관 양주, 노론)
자작 이병무(李秉武:본관 전주, 무과 출신)
자작 이근명(李根命:본관 전의, 노론)
자작 민영규(閔泳奎:본관 여흥, 노론)
자작 민영소(閔泳韶:본관 여흥, 노론)
자작 민영휘(閔泳徽:본관 여흥, 노론)
자작 김성근(金聲根:본관 안동, 노론)

 

자작 이상은 소론 조중응 외엔 노론 일색이었다. 송상도(宋相燾)가 기려수필(騎驢隨筆)에서 일부는 조선총독부의 강박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수작을 거부했다고 전하고 있는 것처럼 작위를 거부한 조정구(趙鼎九)·민영달(閔泳達)·한규설(韓圭卨) 같은 노론 인사들도 있었는데 모두 남작이다. 조선은 일제의 군사 점령과 고종의 무능에 집권 노론의 매국 당론이 더해 멸망했다. 집권당이 나라를 팔아먹는 데 앞장선, 세계사적으로도 희귀한 사례였다. 그러나 역사는 음지에서도 꽃을 피운다. 음지일수록 그 꽃은 더욱 찬연하다. 이런 폐허 속에서 새로운 나라에 대한 희망의 싹이 트고 있었다. 대한민국이란 민주공화제의 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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