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내리던 날
조 용 휘
신축 년 새해 첫눈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베란다에서 내려다 본 창문 밖은 온통 눈 천지였다. 어제 저녁부터 함박눈이 쉬지 않고 내리더니 밤새 쌓였나보다. 도로는 은빛이고 가로수 나뭇가지에도 하얀 눈꽃이 피었다. 오랜만에 내린 눈 탓인지 가슴이 뻥 뚫리고 머리가 맑아졌다. ‘카톡’ 소리에 스마트폰을 여는 순간, ‘어제 밤 이상호님께서 심장마비로 별세하였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란 문구가 스마트폰 액정에 떠있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메시지였다. 아니, 상호 씨가 죽다니! 이게 웬 날벼락인가? 엊그제까지도 내 사진을 멋지게 포토샵 한 연하장을 보내주었는데. 그는 지난 해 여름, 혈압과 당뇨 지수도 정상이고 매일 아침 바벨 운동을 꾸준히 했더니 팔뚝에 알통이 생겼다며 오른 쪽 팔을 굽히며 자랑했다. 칠십 평생 살아오면서 담배 한 번 피운 적 없고 맥주 반 컵이 자신의 최대 주량이라며 밀밭에만 가도 취한다는 그였다. 맥주 반 컵만 마셨는데도 금방 홍당무가 되었다.
“자∼아- 여기 보세요!”
“손가락 하트와 함께, 치즈!”
매달 세 번째 주 월요일이면 6.25 전쟁이 일어나던 해 태어난 갑장 네 명과 연상, 연하 여성 두 명까지 여섯 명이 모였다.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며 이야기꽃을 피울 때면 상호씨는 슬그머니 일어나 스마트폰을 들이 대었다. 조금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우리들에게 다양한 촬영 포즈를 요구했다. 우리들은 귀찮긴 해도 그가 원하는 대로 웃는 얼굴로 손가락 하트를 만들어 촬영 포즈를 취했다. ‘영등포 시니어 신문’과 ‘영등포시대 신문’ 기자로 활동하는 그는 언제 어디서나 사진 찍기를 정말 좋아했다.
2013년 2월 말, 나는 42년간의 교직생활 정년퇴임 기념으로 교단수상록 『행복한 사람』을 출간했다. 퇴직 후 3월에 삼식이를 면하려고 참가한 시니어 행복발전센터의 남성요리교실에서 베트남 참전 특전사 출신의 경호씨를 만났다. 그런 이후에 동갑내기 경호씨의 친구인 상호씨와 은행 지점장 출신인 동호씨도 같은 동네에 산다는 이유 하나로 네 사람이 모임을 만들었다. 모임 이름은 상호씨가 제안해 만장일치로 ‘행복한 사람’으로 정했다. 오래전부터 동네 봉사단체 활동으로 마당발인 경호씨와 상호씨가 함께 활동하는 실버넷 강 기자, 닉네임이 ‘예쁜 요정’인 어린이집 조 원장, 두 명의 여성 회원을 추천해 우리 모임에 합류하게 되었다.
사진 촬영과 PC 편집에 고도의 전문성을 지닌 상호씨는 10여 년 전부터 ‘영등포 사랑 이야기’ 카페를 개설하여 카페 지기로 활동했다. 카페에는 다양한 방을 만들어 영등포구와 마을 소식, 생활에 유익한 각종 정보를 매일 같이 올렸다. 퇴임 때 발간한 나의 교단 수상록과 모임 사진도 여러 차례 게재하였다. 그는 영등포구 관내의 동 단위 새마을협의회장, 청소년지도협의회장, 통장 직책을 맡아 구청과 동 단위에서 10여 년간 봉사활동을 꾸준히 했다. 모임 결성 전에는 경호씨와 함께 300여 영등포구 관내 어르신들의 영정 사진을 무료로 촬영해 액자를 넣어 전달하기도 했단다. 그런 공로로 상호씨는 2년 전에는 영등포구청장과 서울시장으로부터 봉사상을, 지난 해 연말에는 ‘영등포 시대’ 사장에게 황금으로 제작된 ‘감사패’를 받았다.
그는 구청과 마을의 연중 크고 작은 행사가 있을 때면 언제나 카메라를 들고 나타났다. 지난해에는 코로나 사태로 대규모 행사가 없어 소규모 방제단과 합동으로 방역 봉사와 청소년 선도, 새 마을 청소에도 빠짐없이 참가했다. 행사와 봉사활동 사진을 촬영한 후 기사를 작성해 영등포 구민 신문과 시니어 신문에 게재하였다. 늘 웃음 띤 얼굴로 묵묵히 봉사활동을 하던 상호씨였다. 언젠가 그에게 농담으로 ‘돈도 안 생기는데, 뭘 그리 열심히 봉사만 하냐?’고 물었더니, 자신은 어려운 이웃을 돕고 지역사회에 도움을 주는 것을 가장 큰 보람으로 여긴다고 했다. 봉사 단원들에게 가끔 차도 사준다며 멋쩍게 웃었다. 그래도 아들 결혼식 땐 아내의 손님보다 자신의 여자 하객이 훨씬 많았다고 자랑했다. ‘이게 다 봉사한 보람이 아니겠냐면서.’
상호씨는 부지런하고 성실하지만 부끄러움도 많은 편이었다. 여러 사람 앞에서면 얼굴이 붉어지고 말투가 어눌해진다. 얼마나 진솔하고 순수한지 때론 어른아이 같은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이웃 사람들에게 자신의 것을 나눠주기를 좋아했다. 지난 해 추석 명절에는 경산 특산물인 대추 한 봉지와 재작년 설에는 견과 깡통을 선물하면서도 약소하다며 계면쩍어 했다.
그는 외부 봉사 활동뿐만 아니라 가정 일에도 열심이었다. 살고 있는 삼층 단독 주택 마당에는 갖가지 종류의 화초를 정성껏 가꾸어 봄이면 꽃동산으로 변했다. 미장원일로 바쁜 아내를 위해 종종 손님의 머리를 직접 말아 올리기도 했다. 토요일 아침이면 KBS 1TV 시니어 토크쇼 ‘황금연못’에 내가 출연한 방영 장면을 촬영한 후 카톡으로 보냈다.
첫눈 내리던 날, 그는 바람처럼 홀연히 떠났다. 하느님은 재주 많고 착한 사람을 하늘나라로 불러 당신의 도구로 쓰려고 데려갔을까? 백세 시대에 칠십이면 신 중년 나이에 불과한데…. 상호씨는 서른 해 동안 땀 흘리며 가꾼 자신의 집 3층 옥상에서 하얀 눈꽃 세상을 찍으려고 분신과도 같은 카메라를 손에 움켜쥔 채로.
첫댓글 첫눈과 함께 맑고 깨끗하게 가신 것 같아요. 영면을 빌어야겠네요.
은퇴 후에도 활발한 사회 활동을 하시니 새로운 만남도 있고 도 헤어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참바세님의 글을 보면 늘 인간미를 느끼곤 합니다. 교류의 폭이 넓으시니 글의 소재도 많겠지요.
지인의 급작스런 부고에 삶이 허무하게 느껴지시죠. 하지만 하느님의 부름으로 천국에서 귀하게 쓰일 분으로 여기시고 받아들이시는 겸허한 마음을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