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누추한 평화]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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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추한 평화]
지 순 시집 / 문학의전당 시인선 128 / 문학의전당(2012.03.26) / 값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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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추한 평화
지 순
숟가락은 칼보다 서슬 푸른
혀가 있네, 혀보다 부드러운
평화의 입이 있네
칼보다 서슬 푸른
혀보다 부드러운 미각으로
푸른 머스크멜론 과즙처럼 입 안 가득
넘치는 평화를 맛보게 하네
상처를 쓰다듬는
보름달마냥 탱탱하게 익은
달콤한 평화를 맛보게 하네
말없이 한 술 한 술 평화를 떠먹는
식사 노동
참맛을 아는
젖가슴보다 부드럽고 섬세한 미각의 날
상처를 핥아주는 혀처럼 한없이 보드랍고도
서툰 감칠 맛
서로 침 묻히며 떠먹는
그 묘미 누추하다고
종종 그를 놓아두고 나이프 포크를 꺼내 들고
자르고 찍고 삼켰네
전투를 벌이는 용병처럼
그리워라, 머스크멜론처럼
연한 속살 서로 다독이며
한 숟갈씩 파내 옷에 흘리며 떠먹는
내 사춘기처럼 서툴고 수줍은
묘미,
그가 퍼주는 누추한 평화의 맛
춤
지 순
바싹 마를 것
완전히
쪼개질 것
도끼날처럼 시퍼런 시간이 내리칠 때
어둠 속에서
아궁이처럼 오래 엎드려
침묵할 것
침묵의 힘으로 한껏 구부린
인고의 등을 확 그을 것
성냥불처럼 일어나 춤을 출 것
뜨거운 체온은 싸늘한 체온에 기대
싸늘한 가슴은 뜨거운 가슴을 안고
빈손은 가득 찬 손을 잡고
가득 찬 마음은 빈 마음의 눈빛을 향해
퀵 퀵
슬로 슬로
자작나무
지 순
허공 속으로 허리를 곧추 세운다
머리에 흰 눈을 이고 잇는
설산처럼 삼엄한 자세로
그곳에 있다, 그곳을 걷고 있다
그 자리에서
세계가 흔들릴 때는 허리를 구부리고
공손한 자세를 취한다
겨울 대지를 뒤덮는 눈처럼
그곳에서 그는 얼굴빛이 해사하다,
살색이 희다 하여 잠자는 숲 속의 미녀라 하겠느냐
가느다란 빛에도 부를 몸을 떠는
그곳에서 직립한 희디 흰 등에 고운 잎새를 틔웠다
하여 연약한 공주의 자세를 취했다 하겠느냐
그곳에서 키가 크다, 태가 훤칠하다 하여
잠자는 공주를 깨우기 위해
백마를 타고 달려오는 왕자라 하겠느냐
그곳에서 이야기 꽃 피듯 산만하게 우거진 풀
고즈넉하게 잠재운 침묵의 숲길을 간다 하면
흰 토끼리 느닷없이 느럭느럭 걸어간다 하겠느냐
첨단에 시달리다
지 순
첨단을 걸어야 한다
고슴도치 가시 같은 첨단의 촉각 곧두세우고
최첨단을 걸어야 한다
여기저기 아우성이다
첨단을 걸으려면
첨단 기사로 가득 찬 매일 배달되는 열 장이 넘는
신문, 각종 첨단 잡지를 읽어야 하나
시간 시간 방송되는
최첨단 뉴스를 놓쳐서는 안 되나
가시밭 길, 첨단을 걸으려면
매일 배달되는 최첨단 기사와 뉴스 다 읽으려면
하루해가 부족하네, 징검다리를 건너듯
뉴스를 듣고 정치 경제 사회… 모든 지면의 기사
잡지 큰 제목만 대충 훑어 봐도 하루해는 짧기만 하네
매일 첨단에 시달리네
아침에 첨단이란 큰 활잘 만나면
어이하나, 좌불안석 종일 가슴이 찔리네
등 쿡 쿡 찌르네,잠자리까지 따라와서
머리 콕 콕
옛날 짜장
지 순
어렸을 적 고모 오시던 날
영성루에 가서 처음 짜장면을 먹어 보았다
그때 먹어 본 맛있는 짜장면
그것이 옛날 짜장이었을까
여기 저기 붙어 있는 옛날 짜장
저 맛있는 광고
옛날이 붙으면
모든 음식이 맛있게 보인다
옛날 국수 옛날 수제비 옛날 두부…
잊을 수 없는 허기 옛날이란 글자에 붙어 있어
옛날이란 글자를 보면
입 안 가득 끈끈한 침이 고인다
입맛이 돈다. 침을 흘리며
옛날, 그 옛날ㄹ이란 말 음식에 붙으면
그 옛날 둥근 상에 둘러앉아 함께
밥을 먹던 그리운 식욕도 모이고
먹고 돌아서면 배고프던
치열한 숟가락 허기도 돌아온다
복족류(腹足類)
지 순
접시 위에 누군가 삶아 놓은
소라가 놓여 있다
그의 인생이 놓여 있다
나선형 껍질 속에서 일생을 마친
그는 거대한 피라미드를 쌓듯 껍질을 쌓은 것
스스로 무덤을 판 것
손발이 없다
고통의 뼈, 공포와 슬픔의 잔가지
하나도 남지 않았다
미라처럼 검푸른 속살
무덤을 쌓으며
무덤 속에서 즐거운 시계가 되었다
나를 돌리며
얼마나 많은 시간들이 지나갔는가
세월이 비튼 나선형의 유적
고고학자들이 유적을 발굴하듯
식탁 위에 놓여 있는
저 무덤을 샅샅이 파헤치면
비틀린 그의 인생 전모를 해독할 수 있으려나
벌건 식욕의 맨입 하나로
색안경을 쓰면
지 순
색안경을 쓰면 안 된다
어려서부터 선생님 부모님
나 잘 되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들
나를 가르쳤네
색안경은 위험하다
색안경을 쓰면 세상은 뒤틀리고
네 인생 또한 뒤틀린다
철석 같은 그 가르침 진리라 믿고 살았네
언제부턴가 그런 색안경에 대한 편견을 벗었네
특권층인 양 색안경을 쓰고
나는 세상을 보지만 세상은 나를 잘 알아 볼 수없는
즐거운 멋을 부리게 되었네
멋진 색안경을 쓰면 오감의 눈은 편해지고
세상은 색스럽게 보이네
색다르게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모든 빛과 색은 그윽하게 미소를 짓고
색스러운 세상 색색으로 펼쳐 보이네
알 수 없네
색안경에 대한 나의 사랑
회색빛 일색의 도시 적나라한 눈빛 때문일까
세상 빛이 너무 강하기 때문일까
기중기처럼
지 순
목적지가 아니면
당신의 손은 손에 든 물건은 내려놓지 않는다
그곳이 어디이든 밖이라면 내려놓지 못한다
당신의 손은 그러므로 늘 숨이 가쁘다
기중기처럼 당신의 팔은 늘 아프다
집을 나갈 때는 한 살림 챙긴다
수첩과 펜 열쇠와 전화기 지갑과 카드… 우산까지
돌아올 때 거기에 짐은 더 보태지고
손이 모자라 짐을 든 손은 팔꿈치로 승강이 버튼을 누르고
짐을 나르느라 두 두 팔은 안간힘을 쓴다
당신은 악수다운 악수를 해 본 적이 있나
포옹다운 포옹을 해 본 기억이 있나
수선화 같은 꽃다운 것을 안아보기 위해
맨몸의 두 팔과 두 손을 선뜻 내놓은 적 있었던가
팔은 늘 아프다
손은 늘 허전하다
옷을 위하여
지 순
새 옷이든 헌 옷이든
무례하게 대하지 마라
옷 둘둘 말아 아무 데나 던지지 마라
새 옷이든 헌 옷이든 그는 당신을 위해
일생을 바친다, 당신의 몸을 입고
당신의 이름으로 일생을 보낸다
그는 당신의 전속모델
휴지조각처럼 당신이 함부로 그를 구기면
멋쟁이를 꿈꾸는 당신의 스타일
골라 골라 외치는 시장 바닥 막 패션으로
그는 당신의 스타일을 구겨 놓는다
시시때때로 입고 벗은 다음
잠시 고요한 장 속에서 쉴 때는 어깨와 가삼 잘 펴서 걸어주고
평상의 서랍에 들어가 잠들 때는
팔다리 곱게 접고 단아한 허리선 구기지 않게 뉘워주면
그대 부르면 언제든 상큼한 모습으로 걸어 나와
맵시 뽐낼 터
그러나 마음이 바쁜 시간에 몰리면
정성어린 손길로 장 속에 걸어 줄 것인가
곱게 개어 서랍에 넣어줄 것인가
두루마리 휴지처럼 둘둘 말아 아무 데나 처박을 것인가
누구든 시험에 든다
옷이여, 나는 그대를 위해
어떤 자리를 마련했던가
새 옷이든 헌 옷이든 합당한 대우를 했던가
철철이 의전을 갖추어
부드러운 중심
지 순
누가 조금만 건드려도
나는 금세 움츠러들고
누가 조금만 헐뜯어도 쑥 들어간다
달팽이처럼 게처럼 밤새 뒤척인다
잠 못 이룬다
기척 없이 다가오는
발그림자만 봐도 깜짝깜짝 놀란다
나를 헐뜯는 소리를 들으면
어디론가 정신이 날아간다
갑각류처럼 씨앗처럼
부드러운 중심은 단단한 껍질로 무장을 한다
지렁이처럼 연약한
중심은 밟으면 터지니까
뇌관을 건드리면 누구나 폭발하니까
가스통에 불을 붙인 것처럼
나도 너도 함께 날아가니까
누구나 깊이 간직한
연약한 중심이 있다는 것
밟으면 터지는 뇌관이 있다는 것 알아야지
모두 모두 조심해야지
아로마 테라피
지 순
울타리 타고
싸리꽃이 피고 있다
꽃잎이 타고 있다
소신공양
불타는
저 울터리 경계에서
우주를 향해 퍼지는
향기
꽃 핀 경계를 넘어
흩뿌려지는
고운 재
누구인가
그를 위해 오늘 저 꽃은 피는가
저 향기 날리는가
싸리꽃이 지고 있다
각수승연회
지 순
수많은 여백이 있어
숯은 숫구멍 허공이 있어
세상 모든 습기 독기를 빨아들려
향기로 간직한다
옛날 각수승 연희는 숯처럼 엎드려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경판을 새겼다
무량한 글자를 가슴에 새겼다
글자의 가슴에 구멍을 뚫었다
경판에서
가슴의 여백에서 한 자 한 자 파내
허공에 띄운 글자들
숯구멍처럼 이 세상 습기 독기 다 빨아들여
향기롭게 하려 했던가
수십 년 수행
고립된 믿음의 숯구멍에서
그가 새긴 검은 경판을 처음 TV화면에서 보았을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숯검정 같은
수도승의 경건하고도 처절한 고통을
가슴에 느겼는데
계속되는 TV 화면 속
그 얘기 예삿일처럼 옛날얘기처럼
담담하게 이어지는
내레이션 화면에서는 말할 수 없이 달콤한
흰 찔레꽃 향내가 났다
최후의 전략
지 순
중생대 쥐라기에 번성했던 남양삼나무라고 알려진 호주 월러 미 소나무는 약 2억 년 전 그 모습 그대로 발견되었다 불과 1500평밖에 안 되는 좁은 지역 암벽등반이 아니면 접근하기 어려운 협곡에서 건조한 기후 들불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2억년 생존 비밀은 고립과 휴식이었다 신문지상에 바퀴벌레처럼 오글오글 글자들이 입을 모아 전하고 있다
인류도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생존할 수 있는 최후의 전략은 이런 혹독한 고립과 휴식의 암벽 쌓는 일이 아닐까 이미 원조 인류는 사라지고 변종의 인류 몇 종 살아남았지만 그때 번성했던 인류 모습 그대로 살아남은 사람은 몇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다 절벽 속 속은 외딴 섬에서 그들은 수억 년 동안 살았다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고립의 좁은 협곡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런 뉴스 어떤 종의 신문 지면을 장식하는 건 아닐까 머릿 속으로 번개가 지나간다 내 최후의 전략도 위리안치 비슷한 이런 고립과 휴식의 가시벽 또는 접근 불허하는 암벽 쌓는 일…아닐까 그곳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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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누가 말했던가, 아름다운 것은 평화가 깃들어 있다고
그리고 우리의 욕심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선한 것 앞에서 모든 욕망은 차분히 가라앉는 법이라고………
그곳으로 가는 길은 어디에 잇는가
그곳으로 이끄는 힘은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길을 잃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진흙처럼
아직도 나는 길 안에서, 길 밖에서 헤매고 있다.
나에게 항상 갸륵했던 시간들에게
나에게 늘 친절했던 사람들에게
소홀하게 댑접해도 쭈뼛 쭈뼛 따라와 함께해준
시에게 고맙고 고마울 뿐이다
2012. 새봄
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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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순 詩集 [누추한 평화]
[ 해설 ] -
그곳을 향한 낙원 회복과 반문명 정신
공광규(시인)
1.
지순의 시편들을 읽어가면서 사람은 태어나서 방황하다가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존재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왜 방황하는가. 그곳을 찾아가기 위해서다. 그런데 결국 그곳에 도달하지 못하고 죽는 게 인생이다. 그래서 인생은 한갓 허무한 꿈과 같다는 부생약몽浮生若夢이나, 하루살이 일생처럼 사람의 생애가 짧고 덧없음을 이르는 부유일생浮游一生, 풀잎 끝에 맺힌 이슬처럼 매우 허망하고 세상이 덧없다는 초로인생草露人生이라고 하는지 모른다. 이렇게 비유되는 인생의 짧은 구간에서 지순은 “그곳으로 가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그곳으로 이끄는 힘은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길을 잃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진흙처럼/ 아직도 나는 길 안에서, 길 밖에서 헤매고 있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
지순이 찾아나서는 ‘그곳’은 ‘보물’로 암시되는 무엇이 있는 곳이다. 시「보물」에서 화자는 “생은 평생 주름 잡는 것/ 깊은 생각 없이/ 깊은 생각의 전환도 없이 하늘과 땅 사이/ 보물을 찾아 늘 여기저기 헤매는 것”이라고 목표를 명확히 밝히고 있다. 그는 다시 “생은 밤을 새움 글자를 타고 바다 건너/ 보물을 찾아서 여행을 다니는 것/ 공부를 하고 시를 쓰고, 책갈피 모래언덕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이라는 인생론을 펼치고 있다.
지순이 말하는 ‘그곳’은 우리 인간이 평생 방황하다가 도달하지 못하는 곳일지 모른다. 인간은 원래 방황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방황을 멈추는 순간 인간은 죽는다. 죽은 인간만이 방황을 멈춘다는 말도 가능하다. 그러니 이러한 인생의 짧음과 방황을 탄식할 필요는 없다. 인생은 원래 그런 것이므로, 우리가 초대하지 않았어도 인생은 저 세상으로부터 찾아왔고, 허락하지 않아도 이 세상으로부터 떠나가는 것이므로, 지순은 이러한 인생의 이치를 어느 화사한 봄날 산벚나무 길을 걸으면서 체감한다.
서종면 산벚나무 꽃이 피고
꽃이 지고 있습니다
길 위에 꽃잎 흩날리듯
길 아래 꽃잎 떨어지듯 걷고 있습니다
연분홍 꽃그늘 아래
한 발 한 발 내 늙은 발자국이 찍힐 때
마음은 한 발작씩 고요해지고
몸은 화사해지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본 산과 들, 걷던 길
만난 사람,
손 흔들어 보낸 오랜 봄들을 추억하며
흘러간 영화처럼 흩날리고 있습니다
화사하게 늙은
고요한 봄빛 흐드러진 지상에서 영원으로 떨어지는,
화살처럼 흐르는 분홍빛 시간을 삼키느라
얼얼한 입을 꼭 다문 채
꽃잎들은 말이 없습니다
서종면 산벚나무 꽃이 피고
연분홍 치맛자락 휘날리며 산벚나무 꽃이 지고 있습니다
만사로 흩날리고 싶은
아직 서둘지 않은 꽃잎은 둘레둘레 아쉬운
연분홍빛 허공을 흔들고 있습니다
-「서종면 산벚나무」전문
화사하게 꽃이 만개한 산벚나무 길을 걷고 있는 화자의 모습이 선명하다. 꽃이 핀지 오래된 꽃잎이 흩날리고 있다. 이 흩날리는 꽃잎에 화자는 자신의 생물학적 나이를 비유한다. 화자의 발걸음은 “꽃잎 떨어지듯 걷”는데, 화려했던 화자의 인생이 저물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1연의 암시는 2연에서 “내 늙은 발자국”으로 쉽게 드러난다. 생물학적 쇠락과 다르게 화자의 마음은 “한 발작씩 고요해지고/ 몸은 화사해지고 있”다. 생명감정이 활발한 젊은 시절에 인간은 허기와 갈증, 성흥분 따위의 욕구와 관련된 감정에 휩싸여 산다. 몸이 쇠락하면서 이러한 감정의 진폭은 줄어드는데, 마치 고요한 수면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고요해지면 몸은 화사한 꽃잎으로 부활하는지도 모른다. 흩날리는 벚나무꽃잎처럼.
사람이 늙으면 추억은 먹고 산다고 한다. 추억이 많은 사람은 늙은이들이 잘 걸리는 병인 탐욕이라는 병에 걸리지 않을 것이다. 시의 화자 역시 지금까지 자신이 만난 사람과 사물, 사건들을 추억하면서 길을 걷고 있다. 지난 과거들은 “화살처럼 흐르는 분홍빛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흘러간 영화처럼 흩날리”는 추억일 뿐이다. 이 “화사하게 늙”어서 화사한 노후를 보내고 있는 화자이지만, 심리적으로는 공허감이 남는다. 아쉬움도 남는다. 이러한 심리는 “만사로 흩날리고 싶은/ 아직 시들지 않은 꽃잎은 둘레둘레 아쉬운/ 연분홍빛 허공을 흔들고 있”다고 진술한다.
2.
지순이 말하는 ‘그곳’이라는 목표를 향해 방황하는 서정적 주인공은 시「봄나물 한 접시」에 등장하는 ‘골다공증’ 환자이다. 현실의 “달콤한 맛 달콤한 말 달콤한 사랑”을 따라다니다가 얻은 질병이다. 골다공증이라는 병원의 진단을 받은 화자는 “봄나물 찾아 바람과 함께 들판을 헤”맨다. 자신의 몸이 무너진 다음에 우리가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은 “무릎 꿇고” “기어 다녀도 좋”을 자연이고 유년이다. 유년의 기억 속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어머니와 동기간들이 있다. 이러한 인물들은 「약주 한 잔이면」「밤톨만 한 행복을 구워주는 시간」「에밀레종」「빗소리」「소나무 가족」등의 시에 출연한다.
일찍 저녁을 마친
겨울밤은 늦도록 홀로 밤을 굽는다
뒤집고 흔들고 뒤적거리며
익었나, 성급한 마음은 뜨거운 껍질을 벗겨보지만
껍질만 타고 속은 익지 않은 밤
밤이 익기를 기다리다
밤은 잠깐 졸았는데
구수한 냄새가 나서 눈을 떴다
밤이 조는 사이 불씨도 졸고
불씨가 마음을 놓고 조는 사이
언제나 느긋한 그가 밤을 구운 것
밤톨만 한 행복을 구워준다
그는 늦은 밤 홀로 졸고 있는 이를 위해
인두로 꺼져가는 불시를 다독이며
자꾸 헛기침을 화롯가에서 듣던
할아버지 옛날이야기처럼 달콤하고 구수한
추억을 구워준다
-「밤톨만 한 행복을 구워주는 시간」전문
구운밤처럼 구수한 성인동화 한 편이다. 성급한 나와 느긋한 그가 대비되고, 밤을 굽는 행위를 행복을 굽는 행위로 전이시킨다. 또 화자의 배우자로 추정되는 ‘그’를 통해 할아버지를 떠올린다. 밤을 굽다가 조는 사이에 구수한 냄새가 나서 일어나보니 “언제나 느긋한 그가 밤을 구운 것”이다. 창작자는 밤을 굽는 사건을 통해 행복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는 “밤톨만 한 행복을 구워”주는 사람이다. 시는 어쩌면 이처럼 좋은 배우자 같은 존재일지 모른다. 유년의 기억과 현재를 교합하는 문장이고, 그렇게 하여 현재를 따뜻하고 행복하게 하는 낙원 회복의 문장일지 모른다.
지순의 시를 통해 우리는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약주를 받으러 다녔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 대화어법을 창작방식으로 사용한「약주 한잔이면」에서 화자는 “죄송해요, 할아버지/ 가신 그곳, 그곳이 고향이라면/ 그곳에도 약주가 있나요”라고 한다.「에밀레종」은 돌아가신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진술한 것이다. 어머니는 화자가 “열아홉 살” 때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장대비 쏟아지던/ 여름날” 돌아가셨다. 이렇게 돌아가신 부모가 에밀레 종소리를 내며 “나를 울리”는 것이다.
「빗소리」는 의성을 적극 활용한 시이다. 이 시에서 지순은 빗소리가 “어린 시절 기억의 집을 두드리네/ 유년의 정원에 내리던 빗줄기/ 장마철 마루에 앉아 바라본 양철지붕 추녀에서” “운명의 리듬으로” “새싹 같은 마음을 두드렸”을 것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집안은 아늑한 둥지”로 기억한다. 그리고 화자인 “나를 키운 건 비였을까”하고 물음을 던진다.
「소나무 가족」은 사철 푸르고 화목한 소나무의 덕성에 가족을 비유하고 있다. 나뭇가지에 차례로 나는 가지의 순서에 자식들의 순서를 비유하고 있다. 한 나무에서 자란 가지라고 해서 똑같은 건 아니다. 크기와 모양이 다르고 생장 속도도 다르다. 어린 시절에는 서로 간에 “울고불고 바람 잘 날 없”이 크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각기 자리 잡은 위치와 성격의 방향이 알맞아/ 어울린 모습이”보기에 좋을 뿐이다.
이 시집에서 지순이 찾는 ‘그곳’은 지금, 여기라는 현실에 있는지 모른다. 실제로 극락이나 천국을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데서 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극락은 모든 일이 원만 구족하여 즐거움만 있고 괴로움은 없는 자유롭고 안락한 이상향이다. 그러나 현대문명은 현실의 극락을 방해하거나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행복하고 싶지 않은 인간은 없다.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 그러나 행복을 위해 만든 문명에 인간이 갇히고 시달린다. 시「첨단에 시달리다」처럼 “고슴도치 가시 같은 첨단의 촉각 곤두세우고/ 최첨단을 걸어가”느라고 “여기저기 아우성”을 지르는 아귀지옥이다. 문명의 첨단을 걷기 위해서 신문과 잡지를 매일매일 읽어내고 뉴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치러야하는 피로를 견뎌야 한다. 문명 과잉, 정보과잉 속에서 “하루해는 짧기만 하”다. 이런 첨단 정보를 놓쳐서 남들보다 뒤쳐질까 봐 “좌불안석”이다.
3.
첨단을 구가하는 현대 자본주의는 대중들에게 과잉소비를 강요한다. 대중은 자본이 계속해서 쏟아내는 상품 구매를 위한 돈을 벌기위해 반복적인 노동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러니 바쁘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래서 요즘 흔한 인사가 “안 바빠?” 이다. 이런 시대에는 대중의 손에는 항상 어떤 물건이 들려있다. 왼손에는 가방, 오른손에는 스마트폰이 들려 있는 도시인의 모습을 쉽게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지순의 시「기중기처럼」에서처럼 사람의 손은 기중기와 같이 항상 무언가에 들려 있다. 대중들은 손에 무언가 들려 있어야 하고, 물건을 사들이는 데서 존재감을 갖는다. 외출을 할 때는 “수첩과 펜 열쇠와 전화기 지갑과 카드… 우산까지” 챙겨야 하고 돌아올 때는 시장이나 가게에서 산 물건이 들려 있다. 그러니 손 안에 물건이 많을수록 악수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포옹을 할 수 없는 것은 당연지사, 빈손과 맨몸인 것을 참을 수가 없는, 그래서 “팔은 늘 아프”고 “손은 늘 허전” 한 것이 현대인이다. 소비욕망에 사로잡힌 현대인은 고작해야 과소비를 통해 시「편의점, buy the way」에서 보여주듯 “쓰레기 봉투의 행복을 채”우다가 “쓰레기봉투 속에서 즐거운 내 길”을 읽을 뿐이다.」「
현대자본주의 문명에 갇힌 화자는 집안 청소를 하다가 “나는 일생을 집에 바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에 이른다. 그렇다. 우리 사회는 집이 인생의 목적이 된지 오래이다. 사는 곳, 사는 집, 사는 집의 평수가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사회이다. 집이 공공재가 아닌 치부의 수단인 우리나라 사람들은 “집을 사고 꾸미”는 데 평생을 바친다. 평생 집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이러한 사회를 하느님은 분명히 예쁘게 보시지만은 않을 것이다.
집안 청소를 하다가 창밖을 내다본다
저 바깥 들판에 사는 나무와 풀, 꽃들
집 없는 그들은 깨끗하고 향기롭지 않은가
집이 없는 그들은 바람처럼
구름처럼 한가롭고 여유 있어 보이는데
사냥개에 쫓기듯 쓸고 닦고 치우지 않으면
초조한,
금세 돼지 우릿간 되는 사람의 집
-「하느님 눈으로 보면」부분
집이 없는 들판의 초목들은 집안에 사는 사람보다도 더 깨끗하고 향기롭다. 한가롭고 여유가 있다. 문명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집을 “사냥개에서 쫓기듯 쓸고 닦고 치우지 않으면 초조한” 존재이다. 그렇지 않으면 “금세 돼지우릿간”이 되는 “하느님 눈으로 보면 가장 더럽고 냄새나는 집”이 인간이 거주하는 집이다. 그래서 경전에 “하늘나라에서 더러운 곳은 사람 우릿간 같다 하리”라는 말씀까지 새겨진다. 들판에 사는 초목과 집에 사는 인간의 대비를 통해 평생을 집을 사고 꾸미는 노역에 묶인 현대 인간을 풍자한다.
또한 지순은 현대문명의 주요 요소인 속도주의를 비판한다. 속도주의 사회에서는 남을 기다리거나 배려하는 여유가 없다. 그래서 “약속장소를 찾지 못해/ 나 좀 늦더라도 기다려 주었으면 좋겠네// 꼭 올 거라고/ 한정 없이 너를 기다려 주었으면 좋겠네” 라고 한다. 그리고 “가끔 칼국수 한 그릇만큼의 여유를 시켜/ 나눠 먹고/ 커피숍에서 즐거운 비엔나커피라도/ 한잔해요, 하면 더 없이 좋겠네/ 실수 연발의 나를 한없이 이해해 주고”라며 느긋한 인간관계를 형성할 것을 제안한다.
속도주의 문명은 아파트와 아스팔트로 대변된다. “우리 아파트/ 아스팔트 지름길은 자동차 바퀴로 붐비네/ 느긋한 시간에 젖어 돌아가는/ 한가한 오솔길엔 흙이 있네”(「오솔길에는 꽃다운 벗이 있네」부분)라고 한다. 화자는 문명을 상징하는 뙤약볕이 내려 쪼이는 아스팔트의 대로가 아니라 오솔길을 지향한다. 그 길에는 이끼가 피어 있고, 풀꽃이 피어 있고, 나무가 있고, 바람이 있고 하늘이 있다. 그런 오솔길 나무그늘에서ㅕ 푸른 카펫과 벨셋 방석을 깔아 놓고 그늘이 피우는 꽃들과 놀고 싶어 한다. 결국 지순은 맑은 별들이 이사를 간 도심에서 떠나자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다.
손바닥만 한 뿌연 하늘을 이고 있는
아파트 정원, 오솔길을 걸으면
소나무 느릅나무 느티나무 자작나무 칠엽수 대나무 매화…
나무들이 햇살에게, 햇살이 바람에게
속삭이는 소리 들리네
우리도 그곳으로 가자, 이사 이사 이사-
-「속삭임」전문
정치권력의 변덕스러운 부동산 정책과 건설자본의 탐욕, 최신 아파트의 번뜩이는 창문, 밤낮없이 불을 밝히는 도심의 밤은 “커튼으로 가려도 가려도” 인간의 일상을 휜히 들여다본다. 이러한 인간의 일상까지 포섭해 버린 도심문명에서 진저리가 난 지순. 그는 「나비를 찾아서」연작을 통해 전국을 헤맨다. 그러나 그가 찾아나서는 것을 나비가 아니라 현대문명에 갇혀 잃어버리고 굳어버린 자연적 생태적 감성이다. 이러한 감성은 초원으로 확장된다. 결국 지순은 문명의 급급함 조급함에서 탈출하여 광활한 초원을 활주할 것을 제안한다. 바로 아래 시를 통하여.
싱그러운 몽골의 초원 같은
풀밭 하나 집안에 들이고
근심하지 않는 푸른 초원으로 살고 싶거든
마음씨 좋은 풀밭 주인이 되십시오
마음씨 너른 집 안에 거미줄 칠 때까지
오랫동안 집을 비우고
긴 여행길을 떠나 낯선 곳을 배회하다가 돌아와
쑥밭이 된 마당을 보면
집안이 어느새 푸른 초원이 됐군
하며 껄껄 웃는 차를 드십시오
풀 한 포기 남기지 않고
모두 뽑아 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초조함을 제압하고
초원을 달리는 말처럼
유목민처럼 들판을 달리는 무성한 풀의 조급함
용서하십시오, 백성을 사랑하는
너그러운 칸처럼
-「근심하지 않는 푸른 초원으로 살고 싶거든」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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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사의 글 ◆